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48화 (48/116)

48화. 듣기 거북한 말

“또 보네요, 형.”

하도현의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이었다.

“백야마을에 이사 왔어요. 지금부턴 저를 하도현이 아닌 김도현으로 알고 계시면 돼요. 직업은 작가고요.”

도현은 상황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으나 무경의 머리는 이미 상황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앞니로 담배를 꽉 물어 까딱거리던 무경은 곧 흥미가 떨어졌다는 얼굴로 다시 하늘 위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안 놀라셨어요?”

“놀랐어.”

“근데 반응이 그게 다예요?”

“그럼 뭐 어떻게 해줄까. 뒤로 나자빠져 줄까? 게거품이라도 물어줘?”

“음. 그건 또 형답지 않네요.”

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탕, 위로 튕긴 도현이 대청마루 위 무경에게로 다가가 그가 물고 있는 담배에 손수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 좀 끊으세요, 형. 회장님을 보시고도 느끼는 게 없으세요?”

“그런 말을 지껄일 거면 불을 붙여주는 게 아니라 담배를 부러트렸어야지?”

“제가 어찌 감히요.”

누운 자세 그대로를 유지한 채, 햇빛을 가린 도현을 서늘하게 쳐다봤던 무경이 스읍, 매캐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회장님께서 아무래도 날 못 믿으시는 모양이다.”

“오해하지 마세요, 형. 곁에서 형을 챙기라는 지시일 뿐인데요. 형이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신다고 회장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걱정은 씨발. 그렇게 걱정이 되면 얌전히 회사만 내주면 되지. 뭔 수장 테스트니 어쩌니.

한쪽 팔을 머리 뒤에 받친 무경이 후우, 한숨과도 같은 짙은 연기를 길게 뱉었다.

“아직 아침 식사 전이시죠? 맞다. 형은 아침 식사 잘 안 하시니까. 제가 미숫가루라도 좀 타올까요?”

도현이 대청마루 위에 앉는 대신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아 무경의 곁을 지켰다.

혈육 앞에서도 저 자신을 낮추는 데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도현의 모습에 무경은 담배 연기와 함께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너 나한테 지금 삥 뜯기냐.”

“네?”

“손 풀라고, 이 새끼야.”

상체를 벌떡, 짜증스레 일으켜 세운 무경이 제가 언제 웃었냐는 듯 금세 인상을 섬뜩하게 굳혔고, 도현은 시선을 발끝으로 자연스레 내렸다.

“그렇게 형의 개가 되고 싶니, 도현아?”

얼마 태우지도 않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진 무경이 대청마루 위에서 일어나 아직 살아있는 불씨를 발로 콱, 짓이겼다.

“그럼 형 앞에서 개처럼 엎드려 한번 짖어볼래?”

검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그가 살벌한 표정으로 도현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저는 이미 형의 개인데 굳이 확인이 필요하신 거예요?”

“개새끼가 말이 많네. 주인이 하라면 해야지.”

무경이 생글 웃으며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어요. 형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도현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경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려던 때.

“윽!”

도현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콱, 잡아챈 무경이 도현이 더는 몸을 낮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 이 새끼가 아침부터 사람 존나 빡돌게 하네.”

도현의 머리채를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저의 깊게 팬 미간을 문지르던 무경이, 도현의 고개를 뒤로 더 젖히게 하며 그의 얼굴을 직선으로 내려다봤다.

“김도현 작가님. 회장님 이제 길어야 1년이에요. 동녘의 개 노릇은 슬슬 집어치우시고 작가님도 그만 자유를 찾아 떠나시지 그래요.”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옆으로 세게 놓으니, 도현의 몸이 그대로 옆으로 쿠당 나가떨어졌다.

“두 시간 줄게. 작가니 뭐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백야마을에서 꺼져.”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면서 대청마루로 다시 향하는 무경의 뒤통수 너머로 도현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가시면 저도 이제 개 노릇은 그만해야죠.”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 먼지를 툭툭 털어낸 도현이 더는 웃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제 인생 목표만 이루고요.”

대청마루 위에 몸을 앉힌 무경이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며 킥, 짧게 웃었다.

“그래. 김도현 작가님의 그 대단한 인생 목표는 뭔데요?”

도현은 무경을 똑바로 정시하며 대답했다.

“형, 회장 만드는 거요.”

비장함을 넘어서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얼굴은 진심이었다.

“…….”

한동안 말이 없던 무경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하하 웃었다.

“나 회장 만드는 게 네 인생 목표라고.”

작게 읊조리던 무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조소했으나 그 얼굴엔 금세 그림자가 드리웠다.

꿈 많던 아이다. 그 꿈을 모두 다 이루고도 남을 만큼 비상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그랬던 하도현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회장님, 우리 도현이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

대청마루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무경이 한쪽 허리춤에 비스듬하게 손을 얹은 채 상념에 잠겨있다가, 생각을 끝마쳤는지 엄지로 제 아랫입술을 슥 문지르며 고개를 한번 주억거렸다.

“그래. 어렸을 적부터 넌 항상 그랬어.”

도현을 보며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무경이 도현에게로 한 발 두 발 성큼성큼, 다가선다.

“너는 말이야.”

미소와는 달리 다가서는 기세는 실로 엄청났고.

“처맞아야 정신을 차려.”

도현의 앞에 멈춰 서기도 전에,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큼직한 손을 빼내 허공 위에 무기처럼 번쩍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야이 씨부럴 놈아!”

쾅! 무경의 시골집 대문이 부서질 듯 열린 건 순간이었고.

“니가 과수원 일도 안 하고 고라코롬 날라부러야?”

그 대문을 뚫고 들어와 무경의 머리통을 인정사정없이 퍽퍽 후려치는 갑순의 손이,

“니가 시방 참말로 내 손에 죽고 잡은 것이여? 내 손에 함 끝장나불래?”

도현을 후려치려던 무경의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

조금 전, 갑순에게 뒷덜미가 붙잡힌 무경은 그대로 백야 마을회관으로 끌려왔다.

백야마을에 거주하며 처음 오는 곳이었는데, 초면인 백야마을 내 어르신들은 무경을 탐탁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갑순은 무경에게 앉으라 했고, 무경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마자 어디선가 두루마리 휴지 하나가 날아왔다.

“어이쿠.”

운동 신경이 좋은 무경이었기에 그 휴지를 보란 듯 잡아챘지, 아니었으면 벌써 면상에 제대로 맞았을 테다.

“물팍 꿇어, 이 시꺄!”

예전에 소똥을 푸기 위해 한 번 만난 적 있던 부임이 무경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갑순과 부임을 포함한 여섯 명의 어르신이 무릎을 꿇지 못하고 주저하는 무경의 주변을, 원을 그리듯이 빙 둘러앉았다.

아니, 이건 무슨 깡패 집단이야 뭐야?

무경의 얼굴에 잠시 당혹스러운 빛이 서렸다.

“니 물팍 꿇을지 모르냐잉.”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한쪽 팔을 걸친 갑순이 무경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당연히 무릎 꿇을 줄 안다. 그런데 동시에 모르기도 한다. 꿇어본 적이 있어야지.

“꿇겠습니다, 어르신.”

잠시 주저하던 무경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민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지.

각 잡힌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은 훤칠한 무경을 바라보면서 갑순이 말했다.

“아까 욕한 건 나가 미안하다잉.”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런 상스러운 욕은 난생처음 들어보거든요.”

“말대꾸 하덜 말어, 이 시꺄!”

부임이 또 한 번 옷 소매를 걷어붙이니 갑순이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부임이는 좀 빠지드라고.”

“야, 성님. 지송하요잉.”

부임이 걷어붙였던 옷 소매를 다시 얌전히 내렸다.

“아야.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니가 과수원을 안 나가갖고가 아니라, 니 지금 행동이 솔찬히 잘못되았다는 것을 알려줄라고 부른 것이여.”

“제가 뭘 잘못했을까요, 어르신.”

“과수원 일만 해도 그렇다잉. 니 나랑 우리 아들놈이랑 지난 목요일부터 일하거따고 약속했었제?”

“정확히는 어르신이 절 강제로 끌고 가신 거죠. 전 과수원에서 일할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경의 끝없는 말대꾸에 이를 지켜보던 마을회관 어르신들이 으잉, 쯧쯧쯧쯧, 하는 소리를 적나라하게 흘리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갑순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나가 니를 끌고 갔든 아니든. 니 입으로 오거따 약속했는디 그라고 말도 안 하고 째불고 서울로 튀어야? 고거슨 도리가 아니제. 니가 우덜을 얼매나 우습게 봤으믄 고랬것냐잉.”

“오해십니다, 어르신. 급한 용무가 있었을 뿐. 제가 어찌 채 순경네 어르신들을 우습게 봅니까.”

“고러냐잉.”

“그렇습니다.”

“좋다! 고거슨 오해라 치자!”

갑순이 선심 쓰듯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 한번 내리쳤다.

“그라믄 다음 야그를 잔 해보자잉? 니 백야마을로 이사 온 지 한 달 가찹게 됐어야. 맞제?”

“3주 정도 된 것 같긴 합니다만. 네. 그렇습니다.”

무경은 이 대목에서 새삼 놀랐다. 겨우 3주인데 여자에게 이렇게 맛이 가버린 저 자신이.

“니가 서울서는 어짜고 살았는지 몰라도, 여그 백야마을선 그라코롬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백야마을은 몇 가구 없어야. 서로 가족처럼 지내는 곳인디, 니 말이여. 여그 있는 동상들 야그를 좀 들어봉게 아주 느자구가 없다 이 말이여.”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그냥 니 자체가 문제여! 니 자체가!”

흥분한 부임이 또 삿대질하며 불쑥 껴들어 소리친다. 갑순이 찌릿 노려보자 부임이 시선을 다시 먼 산으로 돌렸다.

“니 여그 있는 동상들이 길에서 말 걸어도 대답도 안코 가버린담서?”

“그랬던가요, 제가?”

“인사도 안코 쌩 지나친다 안 하냐.”

“글쎄요. 저는 기억이 잘.”

능청맞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무경이 곧 어르신들과 시선을 맞추며 상냥한 빛으로 웃었다.

“사과드립니다, 어르신들. 아마 바쁜 일이 있었을 겁니다.”

“백수가 먼 바쁜 일이 있을까잉.”

“아니면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키가 워낙 크니 어르신들이 안 보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옴마? 저 육시랄 것이 늙은 우덜을 농락해버리네요잉.”

“아야.”

갑순이 다시 무경을 조용히 불렀다.

존나 다리 저리네, 씨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던 무경이 불시에 치고 올라오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러 내리면서 꾸며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어르신.”

“니가 백야마을서 우덜하고 있는 동안에는, 니는 우덜의 소중한 가족이고 아들이자 손자여.”

듣기 꽤 거북한 말이 무경의 귓전을 스친다.

“너한티 무슨 일이 생기믄 여그 있는 우덜이 질 먼저 나설 것이여.”

갑순이 무경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르신들을 가리킨다. 무경의 눈엔 쇠약해 보이기만 하는 어르신들이 세상 위풍당당한 얼굴로 어깨를 쫙 폈다.

“그랑께 백수 총각.”

온갖 험한 세월을 버텨온 갑순의 주름진 손이 무경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한다.

“니도 그 닫힌 마음 고만 잔 열어야.”

듣기 정말 거북한 말이 무경의 귓속에 가시처럼 박혀 든다. 짜증 나게.

“…….”

꾸며진 미소를 한껏 짓고 있던 무경의 얼굴은, 어느 시점부턴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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