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뜨거운 열병
[ ※ 추천곡 : 자우림 – STAY WITH ME ]
방 기사가 룸미러를 통하여 무경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무경은 차에 탄 그 순간부터 이마를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방 기사는 계속해서 무경을 살폈다.
그렇게 10분, 20분, 30분 정도가 지나고.
“동녘 수장은 내가 되어야 해요.”
남자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와 방 기사가 시선을 급하게 룸미러로 치켜들었다.
“아니. 내가 될 겁니다.”
방 기사는 눈 감은 무경의 잘생긴 얼굴에 집중했다.
“그 자리 하나만 보고 여태껏 죽어라 달려왔는데 놓치긴 아깝잖아요. 둘도 없는 좋은 기회인데.”
“예, 상무님. 차기 수장은 꼭 상무님께서 되실 겁니다.”
“난 무조건 올라가야 합니다. 저 기생충 새끼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지 않으면 나는 그땐 진짜 나락이니.”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상무님.”
“그런데 말이에요, 방 기사님.”
“예, 상무님.”
“만약, 방 기사님이 나와 잤다고 쳐요.”
“예?!”
너무 놀라 삑사리가 다 났다.
“방 기사님이 여자라 가정하고.”
어금니를 꽉 한번 깨물었던 무경이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금 입술을 떼었다.
“나랑 잤다고 치라고요.”
“아, 예.”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방 기사님의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으러 온 사람이라고 칩시다.”
“아, 예.”
“기분이 어떻겠어요?”
“예?”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방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경은 방 기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 기사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던 때에 무경의 이어지는 목소리가 침음처럼 낮게 들려왔다.
“아주 좆 같겠죠?”
“……예?”
“내가 그럼 어떻게 해주면 될까요. 사죄의 의미로 20억. 40억. 아니. 70억. 100억. 아니야.”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 무경의 모습을 방 기사는 룸미러를 통하여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엔 볼 수 없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전 재산을 다 줘버리면요.”
어느덧 제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워낸 무경이 눈꺼풀을 서서히 밀어 올려 눈을 떴다.
짜증이라 하기엔 더 복잡한 감정이 남자의 얼굴 위에 덕지덕지 묻어나고 있었다.
“지금 같은 마음으론 달라고 하면 진짜 다 갖다 바칠 수도 있겠는데.”
창밖으로 고개를 튼 무경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저깟 마을 하나 지키는 것보다 더 남는 장사 아니에요?”
방 기사는 이제 아예 입을 다물고서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의 이 모든 것들이 질문이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왜 하필 백야에서 만나서는. 다른 데서 만났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럼 모두가 해피하잖아요?”
무경이 창문 위에 18, 18, 18 이란 숫자를 검지로 크게 쓰며 말을 이었다.
“이것 참 문제네요.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으니.”
평소와는 다른 남자의 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더 지난 뒤였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방 기사가 다시 룸미러를 통해 무경의 모습을 확인했다.
“난 둘 다 포기가 안 되는데.”
창밖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뜨는 무경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위로 치솟았고.
“둘 다 내가 가져야겠는데.”
그런 남자의 잔혹한 미소 위에 아름다운 햇살이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한번 안고 나니 식는 게 아니더라.
한번 안고 나니 더, 뜨거워졌을 뿐.
***
벌써 화요일이었지만 무경은 백야마을에 내려갈 수 없었다.
오전에 잡힌 중요한 일정 때문이었다.
동녘 그룹 신입사원 오티가 있는 날이었는데, 재작년부터 환영 인사를 무경이 맡게 됐다.
세단 뒷좌석에 앉아 태호가 준비해준 인사말을 읽어가던 무경이 잠시 태블릿 PC의 화면을 끄고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룸미러를 통해 그를 힐끗 살핀 태호가 틀어두었던 클래식 음악의 볼륨을 더욱 작게 낮췄다.
암전인 무경의 머릿속에 인사말이 두둥실 떠다니다가 곧 그것들이 한 여자의 모습으로 형태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녀가 내 아래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떻게 바라봤는지.
생긴 건 정말 못 하게 생겼는데, 경험이 많은 것인지, 배움이 빠른 것인지, 아니면 그냥 타고났는지.
키스도 잘하고, 그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이런가? 싶으면 저렇고. 저런가? 싶으면 그렇고. 그런가? 싶으면 또 이렇고.
이러니 내가 안 빠지고 배겨?
하늘도 존나게 무심하시지.
왜 하필 채 순경을 백야에서 만나게 했을까. 왜 채 순경은 백야의 주민인 걸까. 왜 채 순경은 백야의 지킴이 순경인 걸까.
우리가 동녘 그룹에서 만났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채 순경을 정말 많이 예뻐해 줬을 텐데.
채 순경에게도 나는 찌질한 백수 놈이 아닌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동녘이 아니라면 뭐, 서울 어딘가에서라도, 음주 단속을 하다가 그렇게 우연히 만났더라면 조금 더 괜찮지 않았을까?
우리가 어떻게 만났든, 채 순경의 직업이 무엇이든, 백야만 아니었으면 난 다 좋았을 것 같아.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무경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서로를 마음껏 탐했던 그 날 이후로, 그 누구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다.
무경의 잇새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후.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다시 이마를 괸 무경이 태블릿 PC로 시선을 떨어트리면서 인사말을 읽었다.
무경이 탄 고급 세단이 교육 센터 옆 대강당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사원들 모두 다 모여있습니다. 인사말만 전하시고 내려오시면 됩니다.”
태호가 무경을 바라보며 상황을 전달했다.
무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이면서 풀어헤쳤던 슈트 재킷의 단추를 정갈하게 잠갔다.
“일정 끝나시자마자 바로 백야마을로 모시겠습니다. 짐은 다 챙겨두었습니다.”
“서울역까지만 데려다줘요.”
“예?”
태호와 방 기사가 동시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닙니다. 저희가 당연히 모셔야죠. 어찌 상무님 혼자 기차를 타고 내려가시게 합니까.”
“됐습니다. 그 먼 길을 뭐 하러. 기차가 편해요. 빠르기도 하고.”
“하지만,”
“아. 그만.”
두 번 말하기를 질색하는 무경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뒷좌석의 문을 덜컥 열었다.
태호 역시 안전벨트를 빠르게 풀며 그를 따라 함께 세단에서 내렸다.
세련된 슈트 차림의 무경이 대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웅성웅성하던 수다 소리가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불시에 사그라들었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장내가 술렁였던 것도 같다.
무경을 처음 보는 사원들의 이러한 시끄러운 반응은 너무도 당연했다.
누군가는 상무가 온다고 하니 키도 작고 배도 조금 나온 평범한 중년 남성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고.
다른 누군가는 동녘 그룹의 막내아들이 온다고 하니 철부지 앳된 모습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검은 재규어’라는 별명만 얼핏 접하고는 깡패 같은 생김새를 떠올렸을 수도 있으니.
그리고 하무경이란 남자는, 그 모든 상상을 단박에 와장창, 깨버리는 남자였으니 말이다.
“…….”
사원 애송이들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얼빠진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서는 무경의 동선을 벙찐 시선으로 따랐다.
단상 앞에 우뚝 선 무경은 저를 올려다보는 사원들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저를 위해 마련된 물잔으로 손을 뻗었다.
무경의 눈엔 그들이,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귀여운 아가들로 보여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반대로, 그 아가들에게 무경은 숙련미가 넘치는 섹시한 어른으로 비쳤다.
잔을 기울여 두 모금의 물을 삼키고 컵을 다시 내려두는 태연한 손짓, 마이크의 전원을 켜고 손가락으로 탕, 한 번 튕겨보는 여유로운 손짓, 잠시 두 눈을 내리깔았다가 그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려 사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지독히도 검은 눈빛 등.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남자의 분위기가 이 대강당의 모든 사원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신입사원 오티가 끝나는 대로, 사내엔 하무경 상무 팬클럽이 연례행사처럼 또 생겨날 것이다.
“반갑습니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대강당을 빈틈없이 채웠다.
“동녘 그룹 사업 총괄 본부장, 하무경입니다.”
단상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무경이 각 잡힌 자세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 와아아!!!”
여기저기서 힘찬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히, 여사원들에게서다.
다시 단상 앞으로 한발 가까이 다가선 무경이 그들을 보며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를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원들을 쳐다보며, 무경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도 같다.
만약에, 채 순경과 내가 이런 식으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만약에, 채 순경이 신입사원 딱지를 달고 지금 내 앞에 있었더라면.
그러면 나는, 지금에라도 당장 이 단상에서 훌쩍 뛰어 내려가 너에게로…….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무경은 요원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졌다.
하무경 상무의 환영 인사말로 잡아둔 시간, 넉넉하게 45분.
환영 인사말이라고 해야 뭐 별거 있나.
우리 동녘의 비전을 이야기하면서 니들이 얼마나 좋은 회사에 들어왔는지 존나 입만 터는 거지. 사이비 교주처럼.
사실, 그깟 45분 좀 더 늦게 본다고 해서 당장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무경은 그깟 45분을 더 빨리 보고 싶은 충동을 차마 억누르지 못하고 단상 위의 프린트 된 종이를 손에서 조금 구겼다.
무경이 종이 위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다시 천천히 올려 신입사원들과 눈을 맞추고 매혹적으로 웃었다.
“인사말 분량만 두 장 정도가 나왔는데.”
무경이 쥐고 있는 종이를 허공에서 딸랑, 한번 흔들었다.
“사실 뭐, 한 마디면 되지 않겠습니까?”
단상 아래에서 무경에게 전달한 인사말을 확인하고 있던 태호가, 뜻밖의 발언에 눈을 치떠 무경을 올려다봤다.
“우리 동녘은.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인사말의 종료를 알리듯, 마이크의 전원을 딸깍, 끈 무경이 다시 사원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초고속으로 끝난 상무의 인사말에 태호가 다른 신입사원들처럼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호의 황망한 눈동자가 무경을 뒤따른다.
재킷 단추를 하나둘 탁탁 풀며 단상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그에게로.
“사, 상무님!”
곤혹스러운 태호가 무경의 뒤에 바짝 따라붙기 무섭게 무경이 태호를 향해 숨 가쁘게 말했다.
“역으로 갑시다.”
나는 지금 당장 너에게로 가야겠다.
너를 보러 가야겠다.
뜨거운 열병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