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백야마을 가져와라
서재 데크에 마련된 나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무경과 하 회장이 심 여사가 내려둔 찻잔을 동시에 그러쥐었다.
“*솔찬히 피곤해 뵌다, 무갱아.”
향이 좋은 생강차를 한 모금 삼킨 하 회장이 정원의 황금 소나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간지 을마나 돼았다고 벌써 *뻐처서 그라냐잉. 보약 한 재 지으라고 해야 쓰거따.”
무경이 제 뺨을 대강 문질렀다가 하 회장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회장님. 단지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 것뿐입니다.”
“뭐 한다고잉.”
여자랑 밤새 좀 뒹굴었습니다, 란 말을 겨우겨우 삼키면서 무경은 형식적인 답변을 했다.
“그간 밀린 업무 좀 처리했습니다.”
“이잉. 왔다갔다 힘들제? *가차운 거리도 아니고. 나가 모르는 거 아니다.”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회장님.”
“차 실장한티 야근 들었다. 최근에 소똥을 퍼땀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전은 잔 있냐잉? 민심은 잔 얻었어?”
생강 향이 짙게 올라오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하 회장은 무경을 빤히 쳐다봤다.
“…….”
무경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제 슈트 베스트를 괜히 한번 매만졌다가 넥타이를 좌우로 비틀어 중심을 맞추는 분주한 손길에서 하 회장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무경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둘 중 하나다.
진전이 없거나, 이 대화에 집중을 못 하거나.
여태 너그럽기만 하던 하 회장의 눈빛에 전에 없던 싸늘한 기운이 스민 건 찰나였다.
“이잉. 아직이구마잉.”
생강차를 한 모금 삼킨 하 회장이 그 찻잔을 나무 테이블 위에 달칵, 내려두며 사람 좋은 얼굴로 다시 웃었다.
“그래야.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니고, 사람 맴 얻는 것이 그라고 쉬운 게 아니제. 내가 시간이 없응께 맴이 급해 니를 괜히 재촉한 것잉께 신경 쓰지 말어라. 괜히 또 스트레스 받아가꼬 위경련 앓지 말고잉.”
무경은 아까부터 하 회장과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데,
“니는 누굴 *탁해갖고 위가 그라고 약하게 태어났는지 모르거따. 내가 할 수만 있으믄 내 위를 떼주고 가고 싶당께. 그래도 내 위가 너보단 나슬 것 아니냐?”
하 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웃지 않는 눈동자는 제 아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제 보니, 무경의 발톱을 숨기고 있는 냉혹한 까만 눈동자는 하 회장에게 물려받은 모양이다.
“무갱아.”
“네, 회장님.”
“니는 니가 니 감정을 잘 숨긴다고 생각하냐잉?”
무경이 한 박자 쉬고 네, 라 대답했다.
“맞다잉. 얼굴로는 겁나게 잘 숨긴다.”
다시 찻잔을 그러쥔 하 회장이 정원 쪽으로 시선을 틀며 말했다.
“하는 것이 티 나제.”
제 넥타이를 가만 놔두질 못하고 다시 좌우로 비틀어 중심을 맞추던 무경의 손짓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니 내한테 할 말이 뭐냐잉.”
넥타이를 붙잡고 있던 손을 서서히 밑으로 내린 무경이 그 손을 허벅지 위에 점잖게 포개면서 하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꼭 백야마을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 애비 고향이라고 하지 않았냐잉. 내 아름다운 고향에 날 새겨불고 가고 싶다 한디 대체 머시 이해가 안 간다고 고라고 다시 물어보는 것이여?”
“백야마을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그 가치가 보이질 않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거짓이다. 첫날 백야마을을 둘러보며 무경은 잭팟을 외쳤으니.
“고러냐잉.”
하 회장은 무경의 뜻밖의 말에도 놀란 기색이 하나 없었다.
“고것 참 이상하구마잉.”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한 사람인 양 푸르른 정원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중얼거릴 뿐.
“백야마을 밀어불고 거그다가 아웃렛 깔고, 옆에다가 리조트 세우믄 내외국인 상대로 이익이 솔찬할 텐데잉. 근처에 바다도 있고, 폭포도 있고, 쇼핑도 하고, 체험할 것이 을매나 많냐잉. 내 덕분에 그 촌구석도 발전하는 거시고잉. 고향에다가 큰 도움 주고 가는 거 아니것냐잉.”
진짜 이 노친네가 노망인가?
일순 날카롭게 일그러졌던 눈매를 풀면서 무경은 하 회장의 생각을 정정했다.
“저희는 유통 전문입니다, 회장님. 어찌 그런 쪽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 큰 애기 집안이 호텔사업을 크게 하자네. 사돈께서 지난번에 리조트에다가 우리 마트 크게 들여놔 주셨는디 이렇게라도 보답을 하는 거제. 패밀리 비지니스가 머 별거대?”
“그런 이유라면 백야마을보다 아름다운 곳은 대한민국에 널렸습니다. 제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백야마을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알아봐 바로 협의에 들어가겠으니 백야마을은 저대로 보존하시죠. 그래도 아버지 고향 아닙니까. 동녘 이미지상 그게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됩니다.”
“니 시방 지금까정 머 들었냐잉. 내 고향 보존이 아니고 나로 인햐 발전을 시키고 잡당께? 내 것으로 싹 다 깔아불고 잡다고야. 이 쉬운 거슬 어째 그라고 못 알아먹는대?”
씨알도 먹히지 않는 하 회장의 강경한 태도에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 무경이 제 몸을 테이블 쪽으로 조금 더 당겨 앉았다.
“그러면 차라리 이런 쪽은 어떻겠습니까. 회장님께서 고향에 꼭 회장님을 새기고 가셔야겠다면, 그 부분은 제가 백야마을 사람들과 협의를 잘 보아 백야마을 안에 회장님의 기념관을 따로 만들겠습니다. 홍보팀 끼고 그곳에 회장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전시,”
“무갱아.”
하 회장이 손을 들어 올리며 무경의 말을 무 자르듯 댕강, 잘랐다.
“고새 그짝 사람들하고 정이라도 들어분 것이여?”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눈빛이자 목소리였다.
“막상 쫓아낼라 항께 맴이 안 좋은 것이여? 그래서 나 설득할라고 이라는 것이냐?”
그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무경은 시선을 깔아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회장님.”
“무갱아. 한 기업을 이끄는 오나는. 수장은 말이다잉?”
제 허벅지를 덮고 있는 담요 위 먼지를 툭툭, 털면서 하 회장이 말을 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지 간에 인정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큰 결단을 내려불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시선을 내리고 있던 하 회장이 그 눈동자를 서서히 들어 올려 무경을 바라봤다.
“우리 같은 사람은 말이다잉. 그깟 잔정에 절대로 흔들려선 안 되는 것이여. 회사의 이익만 보고 움직여야제.”
제삼자가 보기엔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하 회장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때로는 회사가 힘들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회사가 휘청일 때도 있을 것이고, 어짠 이유든 정이 든 사람들을 내쳐부러야 하는 모진 순간도 종종 찾아온다잉. 고런 것을 결단 내리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고, 책임을 지는 자리도 이 자리고, 그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 것 또한 이 자리란 말이다.”
하 회장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심 여사가 고요한 발걸음으로 들어와 나무 테이블 위에 갈색 봉투 하나를 조심히 내려두고 다시 데크 밖을 나갔다.
“내가 국민학교도 졸업 못 하고 밑바닥서부터 뼈 빠져라 일군 내 회사여. 내가 동녘을 이만큼 키울라고 무슨 일까지 해야 혔는지, 겪어야 혔는지, 니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무경을 시선으로 조이기 시작한 하 회장이 테이블 위 봉투를 턱, 집었다.
“그런 회사를 내가 아무한테나 줄 수 있것냐? 니가 아무리 내 자슥 중 질로 출중하고 나를 가장 많이 탁했어도 내 눈엔 니도 동녘 수장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해야?”
봉투 안에서 수십 장의 사진을 잡아챈 하 회장이 그것들을 나무 테이블 위에 흩뿌리듯 던졌다.
“회사를 위해 그깟 시골 사람들 몇 명 쫓아내도 못 하는 니가 앞으로 무슨 회사를 맡것냐? 동녘 그룹에 딸린 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어찌케 다 이끌고 가거써.”
무경이 제 앞에 떨어진 사진 몇 장을 집어 올렸다.
“머시 너를 그라고 흔드냐잉.”
사진을 확인한 무경의 눈썹이 불시에 위로 비딱하게 올라섰다.
“그 마을에 아무리 순경 한나가 있다 해도.”
다시 정원 내의 황금소나무로 시선을 돌린 하 회장이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검찰총장도 주무르는 우리 동녘이 그깟 시골 순경 한나를 어찌케 못 하것냐.”
하 회장의 입에서 나온 ‘순경’이란 단어에 제 아버지를 직시하는 무경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한 건 순간이었다.
하 회장은 그 살벌한 시선을 똑같은 기세로 바라보았는데,
“니 이거 정말 못 하것냐잉?”
아직 하 회장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강요는 안 할 텡께 못 하거씀 지금이라도 말해라잉. 니가 못 한다 하믄 그 프로젝트는 하태경이한테 갈 텐께. 태경이 아직 밖에 있제?”
무경은 불쾌함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손짓을 숨기지 않으며 테이블 위 남은 사진을 하나둘, 모두 다 수거하듯 거두었다.
“하태경 부사장은 안 됩니다, 회장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음성도 굳이 숨기진 않았다.
“아시잖습니까. 일을 얼마나 추잡스럽게 처리하는지. 시끄러워질 겁니다. 회사 이미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테고요.”
“그래서 니한테 맡긴 거 아니냐잉. 인간적으로 좋게좋게 가고 잡은께. 하태경이도 하가경이도 못 하는 것을 니는 할 수 있응께. 너만이 할 수 있응께.”
찻잔을 조금 시끄럽게 내려둔 하 회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이 아버지 고향 아니냐잉. 좋게좋게 가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잉.”
느리지만 곧은 걸음 끝에 무경의 뒤에 우뚝, 멈춰 선 하 회장이 무경의 단단한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이 자리에 앉기 위해선 누구보담도 강해져야 한다, 무갱아. 냉철해져야 한다, 무갱아.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갱아.”
아직은 살 만한지 힘 있게 무경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하 회장은 확언했다.
“맞다, 무갱아. 나는 니를 지금 동녘의 수장으로서 테스트하는 것이여.”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무경이 제 손에 쥐어진 몇 장의 사진들을 가만 바라봤다.
한 사람과의 다양한 장면들을 담고 있는, 아주 흐릿하고도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을.
첫째 날, 요원과 대청마루 위에서 식사하던 사진. 대청마루 위에서 야릇하게 엉겨 붙어있는 사진. 요원이 김치통을 건네며 미소 짓고 있는 사진 등.
대청마루 어딘가에 CCTV가 달려있다는 방증이거나, 누군가가 작정하고 찍었거나.
가만 보니, 하태경의 추잡스러운 일 처리는 회장님을 빼다 박은 거였구나.
나이가 드시면서 점차 유해져 가시기에 잠시 잊고 있었지.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래. 당신의 피가 섞인 도현조차 버러지 취급하며 집안의 개로 이용하는 분이 아닌가.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지.
하태경, 하가경, 하무경이 대체 누굴 닮았는지.
제 손에 쥐어져 있는 사진을 바라보던 무경의 잇새에서 피식, 조소가 흘렀다.
“백야마을 가져와라.”
깊은 상념에 잠긴 무경의 머리 위로.
“그라믄 내 자리는 바로 니 것이여.”
하 회장의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가 차갑게 뚝, 떨어져 내렸다.
*솔찬히 – 상당히
*가차운 - 가까운
*뻐처서 - 피곤해서
*탁해갖고 – 닮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