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9화 (39/116)
  • 39화. 풀고 싶어?

    [ ※ 39-40 추천곡 : 페노메코 - Shy (eh o) ]

    안내해주겠다는 지배인을 만류하고, 무경은 비틀거리는 요원을 부축하여 고속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쿵.

    엘리베이터 벽에 비틀거리며 등을 완전히 기대는 요원 때문에, 무경도 그녀를 지탱해주려다가 되레 요원을 제 팔 사이에 가둔 꼴이 되었다.

    “하아…….”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뒤로 꺾는 요원의 말간 얼굴이 바로 아래에서 정면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허리를 조금만 더 숙이면,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마음껏 빨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가까운 거리라 생각했다.

    “하무경 씨.”

    “응.”

    감고 있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린 여자가 어느 때보다도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저를 지그시 응시하며 묻는다.

    “아까 그 남자, 누구예요?”

    “어떤 남자.”

    “프런트에서요. 대화하는 것 같던데.”

    “안 잤어요?”

    “잠깐 눈 떴을 때, 슬쩍 봤어요.”

    “길을 물어서요.”

    “직원 놔두고 굳이 하무경 씨에게요?”

    “그러게. 내가 착해 보이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은근히 사람 상처 잘 준다니까.”

    요원이 실없이 웃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나저나 여기, 너무 비싸 보이는데. 이따가 방값 좀 알려줄래요? 바로 보내드릴게요.”

    무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왜 이렇게 나만 보면 돈 얘기를 하지? 그거 되게 궁상맞은 거 알아요?”

    “전 그냥, 하무경 씨가 걱정되니까요.”

    그 말 후, 요원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편두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요원은 눈을 스르륵 감으면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완전히 끊겼다.

    새벽의 공기를 닮은 침묵이 두 사람을 금세 에워쌌다.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기분을 느끼면서 무경은, 요원을 계속해서 제 시야에 꼭꼭 새겨넣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행동을 멈춘 요원이 무경과 다시 시선을 맞췄다.

    오늘따라 이 여자의 눈동자는 왜 저리도 아련할까.

    자꾸 색안경을 써서 미안하나, 강인한 순경이란 직업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플로리스트나 청순한 이미지의 광고 모델이라고 했으면 더 납득이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렇게 보세요?”

    “술이 좀 깨셨나 하고.”

    “얼굴은 터질 듯 뜨겁고 시야는 빙글빙글 돌고 속은 계속해서 울렁거리고. 이런 게 술이 깬 거라면, 네. 완전히 깼네요.”

    무경을 올려다보면서 눈을 휘어 미소 짓던 요원은, 다시 몰려오는 편두통에 윽 소리를 내며 무경의 가슴 위에 갑자기 이마를 쿵, 기댔다.

    여자의 계산되지 않은 행동에도 무경의 가슴속 무언가가 저 발아래 낭떠러지로 쿵, 곤두박질쳤다.

    씨발, 이란 욕설이 하마터면 육성으로 튀어나올 뻔한 순간이었다.

    이 여자가 언젠가 나를 죽여도 정말 죽이겠구나.

    어딘가가 팽팽해지는 것을 감지한 무경이 시선을 슬쩍 내리깔아 제 아래를 확인했다.

    여자의 그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반응하는 제 아래가 아주 우스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늘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이러다 터지는 거 아니야?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여자가 넣게만 해준다면 네 발로 이 호텔을 개처럼 기어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평소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린 무경이 요원을 제게서 간신히 밀어내며 그녀를 완벽하게 등졌다.

    이번엔 피식, 작게 실소한 무경이 카드 키를 찍고 100층 버튼을 뒤늦게 눌렀다.

    위이잉.

    그제야,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고요한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위를 치고 올라갔다.

    무경은 숫자가 바뀌는 계기판을 올곧게 바라봤는데, 잇새에선 자꾸만 이유 모를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존나 망가질 것 같은데.

    ***

    요원은 호텔을 많이 다녀본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가본 호텔 중엔 이곳이 최고라 말할 수 있었다.

    출입문에서 거실까지 가는 복도에 길게 깔린 대리석, 사방이 통창인지라 서울 야경을 360도로 볼 수 있는 파노라마 뷰, 말도 안 되는 사이즈의 공간을 채우는 최고급 가구와 최고급 조명과 최고급 마감재까지.

    마음 잡고 제대로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싶었으나 요원은 그럴 수 없었다.

    S극이 N극에 이끌리듯, 그녀의 취한 몸이 침대를 찾아 쓰러지듯 풀썩 드러누워 버렸으니.

    푹신하고 넓은 이 침대는 네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것 같단 생각을 하면서 피로감이 몰려오는 두 눈을 감았다.

    “채 순경. 자요?”

    냉장고 문을 열어 탄산수 캔 하나를 꺼내온 무경이 캡을 칙 따면서 침실 안의 요원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

    그새 또 잠들기라도 한 것인지, 눈감은 요원에게선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보던 무경이 침대 맡에 몸을 앉히자 매트리스가 잠시 출렁거렸다.

    탄산수 캔을 비스듬히 기울여 목 넘김 다섯 번 만에 한 캔을 모두 다 비운 무경이 그 캔을 손에서 와락, 구겼다.

    요원은 잠시 실눈을 뜨고서 그의 옆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남자다운 목울대는 언제 봐도 예술적이었고, 축축한 제 입술 라인을 혀로 한번 훑고 지나가는 저 별것 아닌 행동조차 어딘지 모르게 있어 보인다 생각했다.

    나이가 서른이다.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남자의 소소한 행동 하나와 말 한마디에 반응하는 제 몸과 마음이 다 우스울 지경이었다.

    “…….”

    제 손안에서 찌그러진 탄산수 캔을 고요하게 바라보던 무경이 그 시선을 서서히 요원에게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요원은 제 두 눈을 빠르게 꽉 감아 다시 자는 척했다.

    요원이 이불도 덮지 않고 누운지라, 치마가 위로 젖혀져 새하얀 허벅지가 훤히 다 보이는 상태였다.

    일부러 저러나?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무경이 눈매를 가늘게 찡그렸다.

    마음 같았으면 벌써, 저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어도 넣었을 거다. 아니지. 과연 내가 손만 넣었을까?

    이런 상황을 두고, 그림의 떡이라 하는 건가.

    꼭 한번 먹어보고 싶던 음식이 눈앞에 떡하니 존재하는데, 손도 대지 못하는 그런 뭣 같은 상황.

    존나 죽겠네.

    후, 고개를 뒤로 젖혀 목덜미를 짜증스레 문지르던 무경이 마음을 다잡고 침대 맡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채 순경. 그럼 쉬어요.”

    구겨진 빈 캔을 근처 휴지통에 가볍게 던졌는데 이번엔 엇나갔다.

    오늘은 모든 게 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생각하며 막 한 발짝 떼려던 순간이었다.

    “하무경 씨?”

    길게 쭉 뻗어진 요원의 손이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은 건 순간이었다.

    무경이 고개만 틀어 요원을 돌아보았다. 요원은 어느덧 상체를 일으켜 세운 채였다.

    무경은 그녀의 돌발 행동에 정말 놀랐으나 상대가 보기엔 평온한 얼굴이었을 테다. 오랜 숙련의 결과로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으니.

    “이대로…… 가시려고요?”

    요원은 그 말을 던지고 나서 후회했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한 사람과도 같은 발언이라서.

    “그럼 내가 어떻게 가야 되는데요?”

    웃음기 밴 남자의 물음엔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죠. 채 순경도 자야 하고. 내일 아침 기차잖아요. 몇 시였더라. 7시였나?”

    무경이 질문하면서 그녀의 손에 붙잡힌 손목을 떼어냈다. 쳐내는 것에 가까웠다. 금세 허공에 떨어진 요원의 손이 다 민망할 정도로.

    “역까지는 택시 타고 가요. 내가 데려다주고 싶은데 나도 내일 아침 일찍부터 선약이 있는지라.”

    보통 땐, 그렇게 선을 넘어 다가오더니만, 막상 판이 깔리고 나니 남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서 절대로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고도의 밀당 전략인지 아니면 흥미가 떨어진 건지는 알 수 없다.

    원래 남자들이 다 그렇지 않은가. 공들이던 상대가 손쉽게 넘어오는 그 순간에 모든 의욕을 잃지 않는가.

    하무경 씨도 역시, 그런 건가?

    요원은 왠지 쪽팔리는 기분에 침대에 대충 던져놨던 핸드백 끈을 빠르게 잡아챘다.

    “제가 어린 애도 아니고 알아서 가요. 그리고 이 방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싸 보이는데 얼마죠? 제가 바로 이체해 드릴게요.”

    “나중에요.”

    “그럼 문자로 금액하고 계좌 좀 보내놔 주실래요? 제가 확인하는 대로 입금해 드릴게요.”

    “이봐요, 채요원 순경.”

    딱 두 번의 걸음 만에 가까이 다가온 무경이 요원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왜 자꾸 사람을 지지리 궁상으로 만들지? 나 그만 좀 찌질해지고 싶은데요.”

    시야를 갑자기 꽉 채우는 남자의 벨트 버클에 요원이 놀란 눈을 흡, 크게 떴다.

    “제가 하무경 씨를 찌질하게 만들었나요?”

    요원은 벨트 버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가만 응시한 채 물었다.

    이 여자 봐라?

    불시에 눈매를 찌푸린 무경이 서서히 허리를 굽혀 요원과 얼추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네. 네가요. 나를요. 엄청요.”

    무경이 요원의 오뚝한 콧날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자, 요원이 반사적으로 코끝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또 남자의 무언가가 쿵,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요원은 듣지 못하는 그 소리가 무경의 귓가엔 이명처럼 울렸다.

    “채 순경은 차라리 배우를 해보지 그랬어요. 아니면 광고 모델이나.”

    짜증이 짙게 밴 한숨과 함께 남자가 허리를 바로 세우자, 요원의 눈앞엔 다시 무경의 벨트 버클이 정면에서 그 위용을 과시하듯 나타났다.

    “제가…… 대체 무슨 수로요.”

    요원은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그 버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느리게 대꾸했다.

    “왜요. 벌써 열성 팬 하나 생긴 것 같은데.”

    “그게 누군데요?”

    버클만 응시하고 있던 요원이 고개를 서서히 뒤로 젖혀 무경을 올려다봤다.

    “하무경 씨인가? 하무경 씨가 내 1호 팬이에요?”

    “축하해요. 나 눈 되게 높은데.”

    그 말엔, 요원이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

    여자의 맑은 미소를 내려다보는 무경에게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자는 입술 안 속살을 여러 번 잘근잘근 씹는 모양이다. 아래턱 근육이 규칙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그런데 말이에요, 채 순경.”

    “네.”

    “왜 아까부터 자꾸 내 벨트 버클만 봐요?”

    “예?”

    당황한 요원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농염하게 웃으며 묻는다.

    “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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