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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38화 (38/116)

38화. 파블로프의 개

요원은 지금 거의 만취 상태에 가까웠다.

그 이후로도 위스키를 몇 잔 더 마셨기 때문인데, 무경은 그런 요원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안주를 먹여줬지.

아까는 취한 모습을 보는 게 또 색다른 재미로 다가왔었는데, 속이 안 좋다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지금은 조금 후회했다.

그냥 석 잔만 줄 것을.

81층 바에서 호텔 로비인 79층으로 내려오는 그 순간에도 요원은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런 요원을 로비 내에 마련된 소파에 조심스레 앉힌 무경이 그녀의 앞에 비스듬히 서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푹신한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로.

진짜 잠을 자는 것인지 여자의 새하얀 다리가 점차 옆으로 벌어져 무경이 눈매를 찡그렸다.

츳, 짜증 난 얼굴로 혀를 찬 무경이 소파 쿠션을 잡아채 그녀의 허벅지 위에 내려두곤 제 무릎을 사용하여 그녀의 벌어진 다리 사이의 간격을 다시 좁혔다.

손이 아닌 무릎을 사용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술에 완전히 취해 필름이 끊긴 여자의 맨살을 맘대로 만질 만큼 후진 놈은 아니었고.

두 번째 이유는, 여자의 맨살을 잡는 그 순간, 체온과 체온이 맞닿는 그 순간, 머리의 나사 하나가 제대로 돌아 여기에서 당장 치마를 걷어 올릴지도 모르겠다는 위험한 발상 때문이었다.

맞다. 일관성 없는 아이러니한 이유였다.

“잠시만 기다려요.”

무경이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요원을 등지고 혼자서 프런트로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정갈한 슈트 차림의 프런트 직원이 다가오는 무경을 향해 묵례했다.

“예약은 별도로 안 했고. 방 있으면 아무거나 주세요. 한시가 급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프런트 데스크 시스템을 통해 방의 가능 여부를 확인해 보던 직원이 난처한 듯 웃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이 주말이라 현재는 로열스위트룸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세요.”

“파노라마 시티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저희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세요. 가격은 상관없습니다.”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잡아챈 무경이 한도가 없기로 유명한 블랙 카드를 꺼내 그녀에게로 건넸다.

그 카드를 확인한 직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무경이 방금 내민 카드로 말할 것 같으면, 금융자산만 200억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며 연간 사용액이 2억 5천만 원을 넘어야 손에 쥘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본인이 신청하는 것도 아니다. 카드 회사에서 초대장을 별도로 보내야 발급할 수 있지.

“손님. 혹시 저희 호텔의 VIP 고객님이십니까?”

“아닙니다. 이 호텔 별로 안 좋아해요.”

“예?”

“여기 사장 맘에 안 들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직원은 알아차리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또 애썼다.

그러나 쉽게 알 리 없다. 무경은 하태경이나 하가경과 달리 얼굴이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서둘러 주시면 고맙겠네요. 저 여자분이 지금 저곳을 자기 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예?”

프런트 테이블 위에 한쪽 팔을 얹고 몸을 반쯤 돌리고 있는 무경이 검지로 요원을 가리켰다.

그새 옆으로 쓰러졌는지 소파 팔걸이에 아예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말이다.

“옷이라도 벗어 던질까 두려운데.”

“아. 예. 알겠습니다.”

무경은 웃자고 던진 농이었으나 직원은 비장한 표정을 해선 시스템에 정보를 빠르게 입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형.”

요원을 지그시 응시하는 무경의 곁으로.

“그간 무탈하셨어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상대의 출현에 무경의 평온했던 감정과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깜빡이도 안 켜고.”

요원에게로 향해있던 몸을 프런트 직원 쪽으로 완전히 돌린 무경이 갑자기 목소리를 서늘하게 낮췄다.

“이따위로 갑자기 낯짝을 들이밀어. 형 깜짝 놀라게.”

“아버지가요. 새 임무를 주셔서요.”

“손님, 카드 드리겠습니다.”

프런트 직원이 내미는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무경이 삐딱하게 웃었다.

“넌 그 입으로 여전히 아버지란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자존심도 체면도 뭣도 없이.”

“저분, 백야마을에 거주하시는 채요원 순경이죠?”

제삼자의 입에 담기는 요원의 이름에 무경이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네가 왜 채 순경을 알아.”

무경의 섬뜩한 시선을 마주하면서 상대는 눈을 사르륵, 휘어 웃었다.

“처음에도 느꼈지만요. 딱, 형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에요. 형은 예전부터 형과는 정반대의 여자가 좋다고 하셨어요. 원래 사람이 그렇잖아요. 나와 반대의 매력을 지닌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잖아요. 형의 껍데기는 화려하고 세요.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에요. 형은 쓸데없이 잔정이 너무 많아요. 형은 내유외강. 저분은 외유내강. 그래서 유독 저분에게 끌리는 걸지도 몰라요.”

“아니, 씨발. 요즘은 궁합 봐주는 사람들도 발로 영업을 뛰나?”

무경이 코웃음 치며 한껏 빈정거렸다.

“뭐. 복비라도 챙겨줄까.”

지갑을 벌려 그 안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낸 무경이 피식 웃으며 남자의 셔츠 앞주머니에 구겨진 지폐를 찔러넣었다.

“말씀을 가만 들어보니 저를 꽤 따라다니신 것 같네요, 선생님.”

남자의 셔츠 앞주머니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 번 두드리던 무경이 순식간에 남자의 셔츠 깃을 강하게 틀어쥐어 제 쪽으로 훅 맹렬하게 끌어당겼다.

“!”

말도 안 되는 악력에 남자는 무경에게로 꼼짝없이 끌려갔다.

“언제부터야?”

“얼마 안 됐어요.”

멱살이 틀어 잡혀 있음에도, 무경과 묘하게 닮은 듯 닮지 않은 남자의 표정은 한결같이 부드럽기만 했다.

“회장님께서 저 순경분을 가장 많이 걱정하셨거든요. 그 마을의 유일한 젊은 피잖아요. 순경이고. 그런데 형이 유독 저 순경분과 자주 붙어 계시더라고요. 제가 본 장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보고드렸더니 회장님은 지금 형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계세요. 형이 그 사업건을 위해 미남계도 다 쓰신다고. 젊은 사람은 늙은이들과 또 다르니 형이 계획을 아주 기가 막히게 잘 짰다고요. 그런데 저는 형이 몸까지 파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남자에게 떨어진 그 ‘임무’가 ‘미행’임을 알아차린 무경이 킥, 가볍게 웃으며 그의 깃을 틀어잡고 있던 손을 뒤로 밀쳐내듯 떼어냈다.

셔츠 깃이 구겨진 남자는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미남계라는 하 회장의 구닥다리 표현법에 무경은 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노망이 맞는 것 같은데.

“회장님이 물러나실 때가 되긴 되신 모양이다. 방법이 너무 후져.”

심란한 한숨을 터트린 무경이 지갑에 카드를 넣기 위해 시선을 떨어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못 본 채 가줘라. 형이 이 나이 처먹고 어디서 누구랑 뭘 하고 있는지 까발려지는 건 좀 아니잖아.”

“그럴게요, 형.”

“그리고 형이 널 오랜만에 봐서 욕을 하고 싶진 않은데.”

시선을 약간 올려 남자를 쏘아본 무경이 중지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낮게 비소했다.

“지금 아슬아슬하다, 도현아. 형이 지금 딱 여기까지 올라왔거든?”

“죄송해요, 형. 거기에서 더 올라가지 않게 제가 더 주의할게요.”

도현.

하 회장의 혼외자이자, 혼외자가 아니었더라면 무경 대신 동녘 그룹의 진정한 막내아들이 되었을, 무경과는 두 살 터울의 하도현.

하 회장은 도현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동녘 그룹의 막둥이는, 고귀한 피 100%를 지닌 무경이어야 했으니까.

하룻밤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로 생겨난, 접대부의 피가 50%나 섞인 도현이 아니라.

그래서, 하 회장은 혼외자인 도현에게 ‘하’씨의 성은 주되 제 자식들에게만 붙는 ‘경’은 절대로 주지 않았다.

“그리고, 형. 회장님께서 내일 백운으로 아침 일찍 들어오시라 하세요.”

“전화로 하시면 될 것을 굳이 또 앵무새를 보내셨네.”

“오랜만에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요. 무탈하셨어요?”

“그래. 넌 어디까지 더 내려갈 예정이야?”

“형이 올라갈수록 저는 더 내려가요. 아시잖아요.”

무경이 뒷주머니에 지갑을 끼워 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널 보고 있으면 사람이 바닥 치는 데에도 한계가 없다는 걸 느껴. 이미 밑바닥인 주제에 아직 더 추락할 게 남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형. 전 지금 제 삶에 만족하는걸요.”

“만족은, 씨발.”

무경이 이젠 프런트 직원에게 카드키를 건네받으며 욕설을 짓씹었다.

“곧 저흰 다시 보게 될 거예요, 형.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의외의 장소에서요.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려요.”

“참 친절도 하십니다.”

“오늘 일은 형이 부탁하신 대로 보고 안 드려요.”

“존나 고맙네, 씨발.”

도현을 바라보며 비딱하게 웃던 무경이 손을 저었다.

“앵무새 노릇 끝났으면, 도현아. 그만 그 입 닥치고 좀 꺼져줄래? 깃털 날린다, 새끼야.”

“그럴게요, 형. 좋은 시간 보내세요.”

웨이터와 같은 발언으로 무경의 앞에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도현이 그에게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

제게서 등을 보이고 멀어져가는 도현의 뒤태를 경계하듯 바라보던 무경의 날이 선 검은 눈동자에, 이내 도현에 대한 남다른 감정이 서렸다.

무경과 도현의 사이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하태경과 하가경이 도현을 더러운 걸레 취급할 때에도, 무경은 제 아버지의 피가 섞인 도현을 유일하게 품었던 사람이다.

어른들의 실수로 태어난 너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늘 일깨워 주는 집안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십 대 때만 하여도, 한 방에 틀어박혀 같이 공부할 정도로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

‘루트 일의 제곱 플러스 일의 제곱 분의 절댓값 마이너스 사 마이너스 이 마이너스 삼은…….’

‘어, 싼다, 싼다!’

‘루트 이분의 싼다, 이런, 씨발!’

조금 더 정확히는, 도현은 문제를 푸는 무경의 곁에서 야동을 볼 정도로 아주 거리낌 없는 사이였지.

그런 두 사람을 하 회장은 늘 못마땅하게 여겼고, 도현이 딱 성인인 스무 살이 되었을 적에.

하 회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히 역전시켜 버렸다.

무경을 양지의 빛으로. 도현은 무경의 뒤에 가려진 음지의 그림자로.

12년간, 도현을 무경의 그림자이자 완벽한 조력자로 키워냈다.

무경의 이름만 나와도 충성심이 절로 일게끔.

종만 울려도 침을 질질 흘리는, 동녘 그룹의 파블로프의 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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