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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37화 (37/116)
  • 37화. 마음은 끌리고, 육체는 꼴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이마를 괸 무경은 황당한 표정으로 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을 못 마신다더니 정말이다. 존나게 못 마신다.

    여자는, 정확히 위스키 넉 잔에 몸을 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해있었으니.

    무경은 혀를 내두르며 제 시계를 확인했다.

    이야, 사람이 이렇게도 빨리 취할 수가 있구나. 30분 컷인가?

    요원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헤드뱅잉 하듯이 고개를 떨어트렸다가, 다시 그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았다가, 금방이라도 소파에 누울 사람처럼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앉았다가, 흘러내려 온 머리가 아주 성가신지 후 바람을 불어 머리를 흩날리다가,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지 몇 번 더 후- 후- 바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하무경 씨!”

    소파에 반쯤 기대고 있던 몸을 다급히 세운 요원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후우, 술기운이 밴 한숨과 함께 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꽃향기가 일렁인다. 그녀만의 꽃향기가 무경의 주변을 진동한다.

    “하무경 씨…… 제가 좀 물어볼게요…….”

    그녀가 상체를 숙일 때마다 틈이 만들어진 원피스 사이로는 여자의 가슴골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대놓고 보이는 것보다 저렇게 보여줄 듯, 말 듯 하는 쪽이 남자를 더 자극한다는 것을, 저 여자는 정말 아는 걸까?

    “물어봐요.”

    무경은 이제 그녀의 가슴골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꾸 그쪽으로 시선이 내려가려 하면 할수록 요원의 얼굴을 더 빤히 옥죄듯 쳐다봤다.

    “하무경 씨…….”

    “네. 채요원 씨.”

    “나랑 그렇게 자고 싶어요?”

    그 마음도, 노력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또 남자를 자극하는 음성이 귓전을 순식간에 휘감는다.

    그 맑고도 착한 요원이 뱉은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자극적인 말이었다.

    “나 참 진짜.”

    중지와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빙글빙글 돌리듯 문지르면서 무경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술 드시더니 멘트가 세네.”

    “이렇게 사람을 잔뜩 취하게 만들어 놓고…… 자고 가라고…… 사람 맘 편히 가지도 못하게…… 왜 그래요, 대체?”

    중심을 잘 못 잡아 앉은 채로 비틀거리면서, 요원은 제 이마를 턱 짚었다.

    “그렇게도 나랑…… 자고 싶나……? 잘하나? 잘해요?”

    “이야. 세다. 세.”

    무경은 요원의 취한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했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자를 더 바라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애써 통창 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남자들은 대체 왜 그럴까요……? 왜 병적으로 여자 몸에 집착하지……? 하무경 씨가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알아요……? 아는 것도 개뿔 없으면서 뭘 자꾸 나만 보면 꼴린다느니 달라느니……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해요? 진짜 사람 불편하게……?”

    하.

    냉소적인 한숨을 한번 뱉은 무경이 창가로 향해있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려 요원을 극명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시선이었다.

    “채요원 순경. 아니. 채요원 씨.”

    무경이 갑자기 상체를 훅 기울이자 이미 상체를 기울이고 있던 요원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좁혀졌다.

    보통 때라면 화들짝 놀라며 토끼 눈을 해선 물러났을 요원인데, 술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오히려 뭘 어쩔 거냐는 듯이 저를 뚫어져라 노려보듯 정시하고 있었으니.

    이제야 좀 순경답네.

    무경의 잇새에서 웃음이 흘렀다.

    “채요원 씨는 나에 대해 아주 잘 알아서 한 시간 넘게 키스했어요?”

    훅 들어온 질문에 요원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그런 말들로 채 순경을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한데요. 상대를 잘 알아야만 우리 몸이 그 사람에게 반응할까요? 10년 차 부부와 이제 막 썸타는 사이를 떠올려봐요. 누가 더 서로에게 꼴릴지.”

    무경이 잘 뻗은 중지와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단언했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야.”

    “…….”

    “미지의 상대일수록 마음은 끌리고 육체는 더 꼴리는 법.”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여자의 가슴을 커다랗게 둥둥 울린다.

    원래 순발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상황에 맞는 애드리브를 잘 치는 코미디언 대부분이 머리가 좋다고들 하지 않나.

    고로, 무경은 정말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왜 자꾸만 면접에선 미끄러지는지 순간적인 의문이 들었다.

    요원은 괜히 또 말문이 막힌 이 상황이 짜증이 나서 아직 다 비우지 못한 위스키 잔을 그대로 허공에서 꺾어 쭉 한방에 들이켰다.

    캬아,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쓴맛이었다.

    요원은 코끝을 찡그리면서 위스키 잔을 머리 위에서 툴툴 털었다.

    무경은 하, 웃었고 요원은 다시 상체를 굽혀 무경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무경 씨…….”

    무경의 검은 눈을 직시하면서 요원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무경의 반듯한 이마를 검지로 콕 한번 찍었다.

    음?

    가느다래진 눈을 슬쩍 치켜 올려 제 이마 위에 머무른 요원의 손가락을 확인한 무경이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었지만, 요원은 웃지 않았다.

    “내가 시골 사람이라고. 응? 시골 순경이라고…… 아주 쉬워? 내가 막 우습나? 우스워? 우습냐?”

    “우리 채 순경, 많이 취하셨네. 그만 일어나야겠다.”

    “일어나긴 뭘 일어나.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취하니 여자는 정말로 셌다.

    “우습게 보지 마요. 나 쉬운 사람도 우스운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사람들에게 져주는 거예요. 사람들은 참 이상해요. 그냥 져주는 건데. 한발 물러나 주는 것뿐인데. 친절하게 대해주면 대해줄수록 오히려 사람을 더 호구로 봐요, 기분 나쁘게…… 나는 호구가 아닌데……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하무경 씨.”

    무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나, 요원은 빠르게 굳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무경 씨…….”

    갑자기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하무경 씨…….”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왜 갑자기 우리 마을에 나타나서. 조용히 잘살고 있던 나를. 내 머릿속을 무참히 어지럽히고 내 마음을 무자비하게 흔들어 놔요?

    그 말은 뱉지 않고 삼켰다.

    자꾸만 눈이 감겼기 때문이다.

    요원은 여전히 고개를 기울인 상태로 있었는데, 큼직한 손 하나가 갑자기 다가왔고 그 손이 흘러 내려온 요원의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주었으며 곧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가 쉬웠으면 눕혀도 벌써 눕혔어.”

    잘 듣지 못한 요원이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술에 취해 벌게진 여자의 얼굴이 꼭, 안주로 나온 꿀에 절인 방울토마토를 닮았다 생각했다.

    그녀를 닮은 토마토를 포크로 콕, 찍은 무경은 그것을 요원의 입 앞으로 들이밀며 친절히 웃어 보였다.

    “채요원 순경 하나도 안 쉽다고. 오히려 너무 어렵지.”

    “웃기지 마요. 날 너무 쉽게……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웃긴 적 없는데? 그리고 진짜야. 난 채요원 순경이 되게 어려워요.”

    “하아…….”

    한숨을 크게 내쉰 요원이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하관을 잡아 올린 무경이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반쯤 혼몽하게 풀린 여자의 눈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면서 무경은 말했다.

    “난 지겹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봤어요. 그래서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한데. 채요원 씨, 하나도 안 쉬워. 호구 아니야. 오히려 자존감 높은 멘탈 갑이지. 그래서 특별해. 내 주변엔 채요원 순경 같은 여자가 없거든.”

    남자를 통해 처음 듣는 진심에 요원의 입술이 놀라 작게 떨어졌다.

    “내가 채요원 순경 앞에서 그동안 그따위 성드립을 쳤던 건. 우스워서가 아니라. 호구로 봐서도 아니라.”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저 눈이 바다라면, 그 속에 빠져 헤엄치고 싶었다.

    “내 마음이 진짜로 그래서.”

    한참을 멍하니 두 눈만 깜빡거리던 요원이 곧 두 눈을 예쁘게 휘어 환하게 웃었다.

    나사 하나쯤 풀린 웃음이 또 색다르게 예뻐서, 무경은 제 어딘가가 발밑으로 쿵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인내심이 바닥 치는 것을 느꼈다.

    참는 데에 점차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참았으면, 누군가가 존나 상을 줘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무경 씨. 말씀……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예의 바른 요원이 고개를 꾸벅, 숙여 묵례한다.

    “별말씀을.”

    무경은 다정하게 답하면서 요원의 하관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의 작은 얼굴을 조금 더 위로 들어 올렸다.

    “벌려 볼래요?”

    “……뭘요?”

    “먹여줄게요.”

    무경이 아까부터 쥐고 있던 포크를 다시 그녀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요원은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저 손 있는데요. 먹어도 제가 먹어요.”

    “채 순경 손 있는 거 알아요. 그래도 먹여줄게. 먹여주고 싶어서.”

    요원이 무경을 가만 바라봤다. 무경도 요원을 가만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오묘하게 얽혀들었다.

    이깟 위스키 몇 잔보다도 남자의 시선에 더 몸이 달아오르고 강한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요원은 그의 검은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아직 다홍빛 립스틱이 남아있는 제 입술을 반쯤 벌렸다.

    순간적으로, 무경의 눈썹이 거칠게 찡그려졌다.

    잠시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신 것 같은 남자가 요원의 입안에 포크를 집어넣었다.

    요원은 입안의 혀를 움직여 토마토만 제 입으로 가져갔다.

    무경이 그녀의 입안에 있던 포크를 쑥 빼냈다.

    요원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입안의 달콤상큼한 토마토를 혀로 녹였다.

    입 밖으로 조금 흐른 것 같은 꿀을 손등으로 슥 문질러 닦으면서 시선을 어딘가로 내렸을 때, 요원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벨트 버클 아래, 확연하게 드러난 남성의 욕망을.

    그의 검은 눈에 스친 섬광도, 그녀는 혹시 보았을까.

    서로에게 마음은 끌리고, 육체는 꼴리는 두 사람은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리라 처음부터 예상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밤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를 안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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