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6화 (36/116)
  • 36화. 그러라고

    두 사람이 함께 도착한 곳은 타워와 연결된 호텔 내의 81층 라운지 바였다.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 라고는 생각했지만, 내부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서울 전경에 매료되고 말았다.

    사실은, 제 앞의 남자에게 더욱 매료되어 술 한잔 함께 기울이고 싶었는지도.

    두 사람이 배정받은 자리는 통창 바로 옆이었고, 소파에 앉아 쿠션을 품에 끌어안고 있는 요원은, 꼰 다리를 까딱거리며 메뉴판을 비스듬히 쳐다보는 무경을 가만 응시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조금 전, 민수와 함께 밥을 먹었던 곳도 이 정도의 팬시한 분위기였고 따지고 보면 민수가 오늘 넥타이까지 매고 와서 더 차려입었음에도 불구, 공간을 채우는 색과 무게가 완전히 다르니.

    “위스키 한잔할래요?”

    부드러우면서도 부드럽지 않고, 냉소적이면서도 냉소적이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원은 쿠션을 품에 더 꽉 끌어안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낮에 위스키는 좀 그렇지 않나요? 저는 논알코올 칵테일 한잔이면 될 것 같은데요.”

    “술 마시는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채 순경은 밤이라고 커피 안 마셔요?”

    “커피랑 술이 같나요?”

    “뭐가 다르죠. 어차피 몸에 안 좋은 건 둘 다 매한가지인데.”

    “커피는 적어도 이성을 마비시키진 않죠.”

    “어디 알코올중독 클리닉에서 말씀 나오셨나?”

    “알코올중독 무섭잖아요.”

    “모르나 봐. 카페인도 중독되는데.”

    맞받아치려던 요원이 작게 벌렸던 입술을 다시 굳게 다물었다.

    저 남자는 져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니 자신이 한발 물러나 주기로 한 것뿐이다.

    “네. 그래요. 그렇다고 쳐요.”

    요원은 갑자기 피로해진 눈가를 쓸었고 무경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채 순경, 술 잘 마셔요?”

    “보통이에요.”

    “몇 잔. 위스키 석 잔이면 가나?”

    “모르죠. 위스키는 마셔본 적이 없어서.”

    “그럼 오늘 한번 마셔볼래?”

    메뉴판에 내려가 있던 시선을 슬며시 들어 올린 무경이 검은 속내를 감추지 않으며 웃었다.

    “몇 잔에 필름 끊기나 보게.”

    “곧 기차 탈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예요?”

    무경은 다시 제 시선을 메탈 시계 위로 뚝 떨어트렸다.

    “자고 가요. 6시 기차라며. 그 시간에 뭘 내려가. 기차 도착해서 마을 들어갈 방법은. 있고?”

    “있어요.”

    “뭐. 자전거라도 타고 가실 건가? 내일 아침에 도착하게?”

    “차 세워뒀어요. 그리고 가는 방법은 다 있어요. 하무경 씨보다 제가 그 마을에 더 오래 살았거든요. 제가 더 꿰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방 잡아줄게. 자고 가요.”

    “뭘 자꾸만 자고 가라고 그러세요!”

    무언가에 울컥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불시에 커졌다.

    “무슨 호텔에 방을 잡아줘요? 호텔비가 얼마인지는 아세요? 하무경 씨, 돈이 그렇게 많아요? 실은, 저희 아버지한테 다 들었거든요. 사업 말아 드셨다면서요. 사업하실 때의 그 씀씀이를 아직 다 못 버리셨나 봐요.”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만지작거리던 무경이 킥, 웃었다.

    말아 드셨냐니. 참 신박하게 사람을 맥인다니까.

    “그거 알아? 채 순경은 볼수록 참 고단수야.”

    “어디 하무경 씨만 할까요.”

    “지금도 봐. 나 말문 막히게 하는 거. 내가 웬만해선 말로는 지는 사람이 아닌데. 채 순경한텐 계속 져요, 내가.”

    “기억을 왜곡하신 모양이에요. 늘 지는 쪽은 제 쪽 같은데.”

    “그래요? 그랬나? 그랬어요?”

    사람을 놀리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던 무경이 무던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주문이요.”

    별것 아닌 동작이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안 자고 갈 거예요?”

    웨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또 물었다.

    “네. 가야 해요. 내일 일이 있어요.”

    “그래요?”

    저에게로 향하는 검은 시선이 오늘따라 더 깊어 보여 요원은 위험을 감지했다. 그래서 자꾸만, 남자를 바라보지 못하고 통창 밖으로 계속해서 고개를 틀었다.

    “아쉽네. 이 호텔에서 보는 야경이 정말 예쁘거든.”

    민수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이유로 창밖만 바라보는 것이다.

    “같이 보고 싶었어.”

    저 말의 숨겨진 의미를 잘 안다.

    “채 순경하고.”

    쿠션을 끌어안고 있는 요원의 팔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그가 무심한 어투로 툭툭 던지는 말들이 요원에게 어떠한 크기로 다가오는지.

    “주문하시겠습니까?”

    빠르게 다가온 웨이터가 그의 곁에서 허리를 굽혔다.

    음, 턱을 쓸며 고민하는 척하던 무경이 메뉴판에 가 있던 시선을 치켜떠 다시 요원을 바라봤다.

    “칵테일 시켜달라고 그랬죠? 논알코올로.”

    “네.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래요. 이걸로 주세요.”

    무경의 매끈한 손가락이 메뉴판의 한 부분을 툭, 건드린다.

    조니 워커 블루와 계절 과일, 치즈 플래터로 이루어진 150만 원짜리 위스키 메뉴였다.

    굳이 되물어놓고 칵테일을 시키지 않은 이유는, 저 여자 앞에선 계속 짓궂어지고 싶은 유치한 남자의 마음이라 해야 할까?

    “메뉴판은 치워주시죠.”

    무경은 요원이 메뉴판을 아예 보지 못하게 웨이터에게 건네버렸다.

    “아 참. 소개팅은 어땠어요. 김민폐는 마음에 들었어요?”

    제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웨이터와 가볍게 눈인사한 무경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정면의 요원을 쳐다봤다.

    “즐거웠어요. 예상대로 좋은 분이었고요.”

    요원은 쿠션을 품에 꼭 끌어안은 부동의 자세로 계속해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치마가 위로 올라가 무릎까지 시원하게 다 보이는 저 새하얀 맨다리가 아까부터 자꾸만 무경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거다.

    물잔을 손에 꽉 쥔 무경은 그것을 입가로 가져가면서도 제 시선을 그 매끈한 다리에서 떼질 못했다.

    잔을 기울여 물을 몇 모금 삼키는 그 순간에도, 비스듬히 깔린 눈은 여전히 한 곳에 고정된 상태.

    이야. 하무경이 여자 다리나 훔쳐보고 있고. 이렇게 찌질할 수가 있나?

    무경이 킥,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말이에요, 하무경 씨.”

    통창에서 시선을 거둔 요원이 느른하게 턱을 괸 채 무경을 응시했다.

    “제가 오늘 김민수 씨 만난 건 어떻게 아셨어요?”

    예상 못 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무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의 다리로 향해있던 시선을 겨우겨우 올리면서 무경은 고저 없이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무경은 요원의 얼굴이 꿰뚫릴 듯이 그렇게 바라봤다.

    여자의 다리로 자꾸만 향하려는 제 시선을 제압하는 가상한 노력이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데 왜, 오늘따라 저에게로 향하는 여자의 적갈색 눈동자가 저리도 아련해 보이는지.

    저 여자가 언젠가 나를 죽여도 죽이겠구나, 생각했다.

    복상사가 뭐야. 나는 저 여자의 배 위에 올라타기도 전에 저세상과 하이파이브할지도 모를 일인데.

    물잔을 다시 입에 문 무경은 제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에 낮게 헛웃음 치며 대답했다.

    “왜 몰라요. 눈치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지.”

    무경이 소파에 묻고 있던 몸을 조금 움직여 대리석 상판 위에 물잔을 달칵, 내려뒀다.

    “봐. 오늘은 토요일이고 백야마을에 있어야 하는 채요원 순경은 여기 서울에 있고. 그것도 그냥 와있냐. 아니.”

    엄지와 중지를 맞물려 딱, 하는 소리를 낸 무경이 이젠 엄지와 검지로 총 모양을 만들어 요원을 정확히 가리켰다.

    “평소엔 입지도 않는 원피스까지 쫙 빼입고 오시고.”

    그 손가락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서.

    “기차 타고 먼 길 오시는 분이 굳이 힐까지 신으셨네?”

    요원이 신고 있는 힐을 가리킨다.

    요원은 괜히 제 발을 숨기려는 듯 다리를 X자로 교차했다.

    그와 동시에 무경의 미간도 깊게 패었다.

    요원의 계산되지 않은 저런 소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무경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요원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만약 괴로운 이 마음을 안다면.

    “하무경 씨가 잘 모르시나 본데요. 여자는 친구를 만나도 이 정도는 꾸미거든요.”

    저런 예쁜 미소로 사람을 괴롭힐 순 없을 테니.

    후, 한숨을 터트린 무경이 제 이마를 조금 짜증스레 문지르며 받아쳤다.

    “꾸밀 순 있죠. 친구 만나러 기차 타고 오면서 힐은 오버고.”

    “기차 타면서도 힐 신는 사람 꽤 있는데요.”

    “힐 신는 사람, 물론 있겠죠. 채 순경은 그런 타입이 아니고.”

    “아까 하무경 씨가 그러셨잖아요. 제 표정이 존, 아니, 되게 밝았다면서요.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면서요. 뭐가 그렇게 재밌었냐면서요? 꼭 저희를 보셨던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근방에 계셨어요?”

    “그럼 소개팅하는데 채요원 순경이 팔려온 사람처럼 존나 얼굴 굳히고 어둡게 앉아있었겠어요? 소개팅하는데 채요원 순경이 존나 울었을까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예쁘게 웃어줬겠죠. 착하잖아요, 채요원 순경.”

    “그러니까, 그게 다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그거예요. 막 던져봤어. 열 개 던지면 한두 개는 걸리겠지 하는 심정으로.”

    요원은 창, 무경은 방패.

    절대로 뚫을 수 없는 서로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실례합니다.”

    때마침, 웨이터가 가져온 술과 과일과 치즈 플래터가 대리석 상판 위에 올려졌다.

    무경은 위스키 잔 두 개를 제 앞에 나란히 세운 뒤, 위스키병을 자연스레 손에 그러쥐었다.

    그제야, 요원은 제 칵테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무경 씨. 제 칵테일은요?”

    “안 시켰는데.”

    “왜요?”

    “같이 위스키 마시자고.”

    “저 술 못 마신다고 분명 말씀드렸는데요. 이런 독한 술 마시면 오늘 저 못 간다니까요?”

    “그거예요.”

    “네?”

    위스키병을 비스듬히 기울여 잔을 채우는 남자가 고개를 슬쩍 올려 싱그럽게 웃으며 말한다.

    “그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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