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찌질한 새끼
‘진짜 죄송해서 어떡하죠, 요원 씨? 지금 회사에서 저를 급하게 찾는데요. 저도 정말 가기 싫은데 제가 아직 사원이라 힘이 없네요. 원래는 주말에 이렇게 불러내는 곳이 절대 아닌데요. 아무래도 제가 서류상 실수한 게 있는 모양이에요. 월요일에 당장 보고 올라가야 한다고 팀장님께서 저를 급하게 호출하셔서. 정말 죄송한데요, 요원 씨. 구경 좀 하고 계시면 제가 마무리 짓는 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기차 시간이 여유가 되시면 제가 오늘 저녁까지 사드릴게요. 아니. 기차 타지 마세요. 제가 댁까지 차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너무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렇게 민수는 회사의 급한 전화를 받고 잇따른 사과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요원은 아무렴 괜찮았다.
사실, 민수를 만나러 온 목적보다도 바람을 쐬고 싶은 목적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바람을 쐬고 싶다는 목적을 가장한, 우연적인 만남을 더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가 됐든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전 스치듯 둘러보았던 1층 화장품 매장으로 다시 내려가 구경을 시작했다.
지이잉.
핸드백 속 핸드폰이 울려 꺼내 보니 민수에게 메시지가 또 들어와 있었다.
-요원 씨. 정말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죽일 놈이에요.
요원은 무던한 표정으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시고 편하게 일 보세요. 마침, 친구가 근처라고 해서 친구와 만나기로 했어요. 그러니 저희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밥도 너무 맛있었고요. 잘 지내세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민수에게서 다시 답변이 도착했다.
-그럼 다음 주 주말에 제가 요원 씨에게로 갈게요. 저 어차피 성준이 형도 한번 보러 가야 하거든요. 그때 제가 꼭! 오늘 함께 먹지 못한 디저트까지 대접하겠습니다!
이번에 요원은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다시 핸드백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제 시선을 잡아끄는 컬러의 립스틱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집을 생각 하지 마요. 상당히 안 어울리니까.”
불쑥 등장한 큼지막한 손 하나가 연분홍 컬러 립스틱 바로 옆, 다홍빛 컬러의 립스틱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이거라면 또 모를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요원의 눈이 일시에 휘둥그레 벌어졌다.
숨을 흡, 크게 들이마신 상태에서 산소를 내뱉을 수 없었다.
잘게 떨리는 시야 속에 남자가 꽉 들어차 있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백야마을의 아홉 번째 가구 주민, 하무경이.
“어떻게 채 순경을 이런 서울 한복판에서 다 만나지?”
네이비색의 솔리드 오픈 카라 셔츠에 베이지색의 슬랙스 바지를 멀끔하게 받쳐입은 무경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갑자기 요원의 턱을 덥석 잡아 올렸다.
“참 신기한 인연이지 않아?”
요원은 또 한 번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온몸이 경직된 듯 그 상태로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민수와 있을 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 요원을 순식간에 덮치고 단숨에 집어삼켰다.
“채 순경은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얘서 이런 컬러가 오히려 더 어울려요. 알아둬요.”
그렇게 읊조리면서 무경은 요원의 살짝 벌어진 입술 위에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어설픔을 찾아볼 수 없는 그 능숙한 손길에, 요원은 눈앞의 남자가 그간 이러한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를 홀리고 다녔을지를 짐작했다.
그 생각이 묘하게 또 기분이 나빠서.
“하무경 씨 집에 전 애인이 찾아왔었어요.”
그에게 제 입술을 맡긴 채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중얼거렸다.
“예쁘던데요?”
요원의 그 말엔 무경이 픽, 짧게 웃었다.
“백수 되자마자 그 여자분 버리고 시골로 도망친 거라면서요. 그 여자분이 굳이 또 알려주셔서 알게 됐거든요. 그런 사연인 줄은 또 몰랐네.”
요원의 턱을 붙잡고 있는 무경의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지만, 태연한 얼굴로 남자는 요원의 입술 위에 립스틱을 마저 칠했다.
“여자 쪽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나 봐요?”
잡은 요원의 턱을 스르륵 놓은 무경은 쥐고 있는 립스틱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여전히 무던한 표정이다.
“그래도 도망치는 건 너무 비겁하고 치사하지 않나?”
요원은 왜 그런 오기가 생겼는지, 그의 날렵한 옆태를 보면서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아직도 두 사람 연락하고 지내는 모양이던데. 하나도 정리가 안 된 모양이던데. 그거 여자분에게 희망 고문하는 거잖아요. 정리할 거면 깔끔하게 해요. 아니면 지금 혹시, 어장관리 하나?”
무경은 요원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최신상의 립스틱을 눈으로 훑었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아직도 그 여자분한테 미련이라도 남았어요? 사랑하나? 그런 거면 그 집안의 반대가 얼마나 심하든 당당하게 맞서 싸우든지. 백수가 뭐 어때서! 일이야 다시 구하면 되는 거지. 하무경 씨, 자존감 높은 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자존심만 더럽게 세,”
“거 참, 종알종알 시끄럽네.”
요원의 입술을 큼직한 손으로 텁, 틀어막은 무경이 눈매를 한껏 일그러트린 채로 요원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어장관리는 누가 하고 있는데, 지금 나한테.”
참을 만큼 참았다는 표정으로 뇌까린다.
“안 먹는다며.”
요원은 입술이 꽉 틀어막힌 채로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한번 치떴다.
“고작 식사 한 끼 하러 서울까지 올라가냐고 확언했던 사람이 지금 내 앞에서 어장관리를 논하시는지.”
무경은 제 손바닥을 요원의 입술 위에 아예 붙이듯 더 힘을 주어 꾹, 눌렀다.
“그랬던 사람치곤 표정이 존나 또 밝아서. 밥이 되게 맛있었나 봐. 아니면 김민폐 씨가 위트가 뛰어난가?”
요원은 호흡이 점차 더 곤란해졌다.
그가 제 입술을 틀어막고 있는 이 행동 때문이 아니라, 코끝에서 느껴지는 진한 향수 냄새 뒤에 가려진 남자의 묵직하고도 위험한 살 냄새에.
“입가에서 아주 미소가 떠나질 않던데. 뭐가 그렇게도 재밌었어? 나도 좀 압시다. 같이 웃게.”
중저음의 침착한 목소리와는 대비되는 질문들이 와다다다, 쉼 없이 쏟아졌다.
“잘 들어요, 채요원 순경.”
혼이 쏙 빠진 요원은 그의 손에 입술이 가려진 채로 대답 대신 기다란 속눈썹만 깜빡거렸다.
“그 미친년 있잖아요. 내 애인 아니야.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스토커지.”
요원의 입술을 틀어막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인 무경이 핸드폰을 꺼내 주연의 번호를 찾아 액정을 그녀의 앞에 들이밀었다.
“보여? 미친년의 약자.”
요원의 눈앞에 보이는 선명한 글자 [라주연 MCN].
“내가 설마 내 전 애인을 이따위로 저장했을까. 내가 좋은 사람은 아닌데요. 그렇다고 또 그렇게까지 개차반은 아닌지라.”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짜증스레 욱여넣은 무경은, 금세 또 표정을 바꾸어 전매특허의 상냥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그러니 다음에 걔가 다시 날 찾아오거든 상대해주지 말고 쫓아내 줘요. 순경이잖아. 선량한 마을 주민을 지켜주셔야지.”
요원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로, 난 어장관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누구와는 다르게.”
그제야 그녀의 입술 위를 누르고 있던 손을 치워낸 무경이 제 손바닥 위에 깊게 새겨진 여자의 립스틱 자국을 슬쩍 쳐다봤다.
이야, 입술 모양도 존나게 예쁘네.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요원을 다시 쳐다본 그가, 아예 백지상태가 되어버린 요원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고 어장관리 하는 채 순경이 나쁘다는 건 아니니 부디 괘념치는 마시고.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해요. 즐겨요. 좋잖아요? 어장관리.”
“……네?”
“김민폐 씨를 만나고 싶으면 존나 계속 만나고 존나 계속 관리해 주시라고. 괜찮은 놈이잖아.”
그런 말을 하면서 무경은, 요원을 뚫어져라 직시했고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는 손바닥을 제 입술 위에 꾹, 누르는 생각지도 못한 야릇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남자는, 조금 전보다 조금 더 벌게진 입술로 웃으며 물었다.
“기차, 몇 시예요.”
요원은 사탄에게 홀린 사람의 멍한 얼굴을 해선,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6시…… 20분…… 인가?”
무경이 제 손목에 감긴 메탈 시계로 시선을 뚝 떨어트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세 시간.”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남자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얼굴로 웃으며 말한다.
“그럼 지금부턴 나 관리해 주면 되겠네. 공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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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後日譚]
사실, Clair[클레르]에 민수 다음으로 도착한 사람은 요원이 아니었다.
민수에게서 기어코 장소와 시간을 받아낸 무경이었지.
민수와 일정 거리 떨어진 곳, 그럼에도 그들이 잘 보이고 잘 들리는 최상의 자리를 선정해 앉은 무경은 평소엔 쓰지도 않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챙겨온 뿔테 안경까지 얹고서 제 모습을 반쯤 가렸다.
얼마 후.
또각또각, 강렬한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요원이 웨이터의 뒤를 따르는 모습이 보인다.
그 순간의 기분은 마치…….
이런 표현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날개 없는 천사를 눈앞에서 마주한 기분이었다.
덕분에, 손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쥐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남자 새끼는 결국 다 똑같은 것인지, 저쪽에서 먼저 챙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민수가 접시를 깨트린 것이다.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저렇게 예쁘게 꾸미고 나와서는 남자 새끼 눈 돌아가게.
이어지는 민수의 떨리는 목소리 역시 아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나셔서 그만…… 제가 이런 멍청한 실수를…….”
존나 지랄을 하고 자빠졌네.
아마, 속으로 욕을 씹어 뱉은 쪽은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웨이터보다 무경이 더 빨랐을 것이다.
“아. 이 멘트는 좀 그렇죠?”
그래. 존나 그래. 존나 후져. 세상 어떤 여자가 그따위 구닥다리 멘트에 넘…….
민수를 깔보며 코웃음 치던 무경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따위 구닥다리 멘트에도 눈을 휘어 해사하게 웃는 요원의 표정을.
이런, 씨발.
넘어갔네?
쓰고 있는 모자를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진 무경이 하, 냉소적으로 웃으며 천장을 잠시 올려다봤다.
모자 때문에 반쯤 눌린 머리칼 안쪽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다시 볼륨감을 살리면서, 이번엔 자조적으로 한번 킥 웃었다.
너 뭐 하냐, 지금?
본인이 한심해 미치겠는 그 생각과는 달리 무경은 핸드폰 쪽으로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툭툭, 몇 번의 터치 끝에 누군가의 번호를 찾아 누른 그가 핸드폰을 귓가에 바짝 밀착시켰다.
[네, 상무님. 이은희 팀장 전화 받았습니다.]
“이은희 팀장님. 지금 회사라면서. 주말에도 고생이 많아요. 가서 가족들과 쉬셔야 하는데.”
[아닙니다, 상무님. 제 일인걸요.]
“일손이 더 필요하진 않아요?”
[일손이요?]
“내가 부탁 하나만 할까요?”
[예, 상무님. 뭐든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럼 내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고.”
도수 하나 없는 안경알 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삐딱한 시선과는 달리.
“김민수 사원 좀 회사로 급하게 불러내 봐요?”
아주 단정한 음성이 떨어졌다.
그리고 무경은 그 날, 완전히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새끼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