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4화 (34/116)
  • 34화. 하무경을 아시나요

    요원이 잠실역에서 하차했다.

    민수가 기차역까지 데리러 온다는 것을 여러 번 거절한 뒤에야 그는 깔끔히 물러났다.

    잠실역 연결 통로를 이용하여 지상 123층 높이의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토요일인지라 내부는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늘, 한적한 곳에만 있다가 이렇게 바쁜 도시로 나오니 감회가 또 새로웠다.

    요원은 평소엔 신지 않는 힐을 신었고, 하나뿐인 상앗빛의 핸드백을 들었으며, 순경복이 아닌 아주 예쁜 빨간색의 셔링 원피스도 입었다.

    또각또각, 듣기 좋은 힐 소리를 내면서 다시 한번 민수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83층 Clair로 오시면 됩니다!

    식당이 참 높이도 있네.

    나직한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핸드백 안에 다시 고이 넣은 요원이, 명품 화장품 매장으로 즐비한 1층을 둘러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오랜만의 화려한 서울은 좋네.

    민수가 정한 프랑스식 레스토랑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바로 코앞에 보이는 곳이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 물어 가리는 게 없다고 답하니, 그럼 자신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같이 가줄 수 있겠냐, 는 민수의 귀여운 부탁이 있었다.

    “클레르입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김민수 씨로 되어 있을 겁니다.”

    “확인되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갈한 슈트 차림의 웨이터 뒤를 요원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다리를 덜덜덜 떨며 머리를 매만지는 남자가.

    요원은 그가 민수임을 대번에 알아차렸고, 때마침 고개를 들어 올린 민수 역시 저에게로 다가오는 요원을 알아차리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요, 요원 씨!”

    우당탕, 챙그랑!

    얼마나 조심성 없이 일어났던지, 그가 테이블 다리를 허벅지로 치는 바람에 바로크 양식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어, 어우씨! 어떡해!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이거 비싼 거죠?! 와! 제가 다 배상해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민수가 얼른 상체를 낮춰 깨진 접시를 집으려 손을 뻗을 때였다.

    “조심하세요. 날카로워요.”

    그와 같이 자세를 낮춘 요원이 날카로운 조각으로 향하려는 민수의 손을 저지하면서 생글 미소 지었다.

    “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그런 요원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민수가, 곧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을 입 밖으로 불쑥 내뱉었다.

    “너무 아름다운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나셔서 그만…… 제가 이런 멍청한 실수를…….”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법한 민수의 간지러운 발언에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웨이터는 분명 속으로 욕을 씹었겠지만.

    “아. 이 멘트는 좀 그렇죠?”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민수를 잠시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요원의 입에선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코스 요리를 주문했고 가장 먼저 식전 빵과 두 가지 종류의 버터가 나왔다.

    “여긴 식전 빵부터 맛있대요. 한번 드셔보세요.”

    빵을 집는 민수의 손이 덜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요원은 또 한 번 작게 웃었다.

    “왜 이렇게 손을 떠세요.”

    “예? 아, 죄송해요. 거슬리시죠? 제가 원래 긴장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요. 요원 씨가 너무 미인이셔서…… 그런데 요원 씨도 참 사진발이 안 받으시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끝낸 민수가 괜히 혼자 손사래를 치며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사진 속에서 안 예쁘셨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고요. 제가 요원 씨 사진 보자마자 반해서 성준이 형 괴롭힌 거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뵈니까 감당이 어려울 정도로 더 미인이셔서, 그래서 드린 말씀이니 오해는 마세요.”

    “오해 안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원은 민수와의 이 시간이 편했다.

    분명 첫 만남이었는데, 꼭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말이다.

    잠시 누군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곁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드는 그 누군가를.

    “…….”

    그 남자를 떠올리자 괜히 속이 시끄러워져서, 요원은 미소 짓고 있던 표정을 서서히 지우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83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오후.

    그 사람은 서울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이 넓은 도시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것이 정말 가능하긴 한 걸까? 나는 대체 뭘 기대하고 온 걸까.

    “저기…… 그런데 요원 씨……?”

    민수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요원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요원 씨, 혹시요…….”

    민수가 두 뺨을 붉힌 채로 요원의 말간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곧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하무경 상무님을 아시나요?”

    “하무경이요?”

    민수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겨우 붙잡았던 정신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하무경. 하무경 씨를 민수 씨가 어떻게 아세요?”

    혼란스러워 보이는 요원을 알아차린 민수가 허공에서 손을 휙휙 저으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니요. 요원 씨 동네에도 계신다는 그 하무경이 아니고요. 동녘 그룹 막내아들, 그러니까 저희 상무님이요. 하무경 상무님.”

    “동녘 그룹이요?”

    “네. 저희 상무님이요.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님.”

    아, 요원은 흥미가 사라진 얼굴로 탄식했다.

    그저, 동명이인. 그때까진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

    “재벌가 자제분을 제가 알고 지낼 일이 없는데요.”

    요원이 편안하게 웃으며 따끈한 빵으로 손을 뻗었다.

    “정말 모르세요?”

    “전 동녘 그룹 막내 아드님 성함이 하무경인 것도 얼마 전 민수 씨를 통해 처음 들었는걸요.”

    버터를 빵 위에 바르고 한 입 앙, 크게 베어 문 요원의 두 눈이 버터처럼 사르륵 녹아 웃는다.

    “말씀하신 대로 빵이 정말 맛있네요.”

    그 해사한 미소에 입을 다물지를 못하던 민수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휘저으며 제 핸드폰을 꺼냈다.

    “맛있으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앞으로 제가 맛있는 빵 더 많이 사드릴게요. 그런데요, 요원 씨.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해서 그러거든요.”

    “뭐가요?”

    “저희 상무님은 분명 요원 씨를 잘 아는 눈치였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제가 주말에 요원 씨를 만난다고 하니까, 대뜸 장소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민수 씨 상무님이요? 제 이름을 그분이 알고 계셨다고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아무튼, 요원 씨를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하셔서요.”

    “왜요?”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이상하다는 거고요.”

    세상은 원래 아는 만큼만 보이고 믿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다.

    요원의 머릿속에 백야마을 내에서도 폐가 수준의 집에 거주하는 백수 하무경과, 대한민국 유통업계를 꽉 잡고 있는 동녘 그룹의 막내아들 하무경 상무가 매칭될 리 없었다.

    그래서 요원은,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에이, 란 소리를 냈다.

    “재벌가 자제분이 저를 어떻게 알아요. 제가 아닌 민수 씨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죠.”

    “역시, 그런 걸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희 상무님 얼굴 한 번만 확인해 주시겠어요?”

    민수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여 하무경 이름을 검색했다.

    “어?”

    그런데 검색되는 기사 하나, 사진 하나가 없는 거다.

    “이상하다?”

    민수가 이번엔 포털에 하태경과 하가경을 나란히 검색해봤다.

    하태경과 하가경의 인물 정보와 사진은 정상적으로 나왔기에 더욱 의문스러웠다.

    고개를 반대로 다시 기울인 민수가 하무경을 다시 검색해봤다.

    “잉?”

    그런데 역시, 하무경에 대해선 인물 정보도 사진 하나도 나오는 게 없는 거다.

    “진짜 이상하네.”

    “왜요? 없어요?”

    별 관심은 없지만, 요원이 예의상 물었다.

    “아…… 네. 저희 상무님이 원래 매스컴 타는 걸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긴 한데요.”

    민수가 포털에 ‘동녘가 자제’ ‘동녘 그룹 상무’ ‘동녘 그룹 서열’ 등, 다양한 검색어를 입력해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인터뷰는 하셔도 사진은 절대 찍지 않는 분으로 유명하긴 하거든요. 방송이나 뉴스에도 나갈 일을 절대 만들지 않으시고요. SNS도 안 하시고. 그래도 사진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민수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던 때에 또 다른 음식이 나왔다.

    “아보카도 오일로 마리네이드한 아스파라거스와 캐비어, 꿀에 절인 토마토와 블루치즈로 만든 렐리시입니다.”

    접시를 내려두며 음식 설명을 시작하는 웨이터의 등장에, 아차 싶은 민수가 제 핸드폰을 황급히 내려두며 요원을 향해 다시금 맑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요원 씨. 요원 씨에 대해 알아가기도 부족한 시간에 제가 쓸데없는 말만 했네요.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그러고는 단순하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우리 상무님이 요원 씨를 어떻게 알아. 아무래도 상무님은 내게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다. 그래서 내 연애 생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는 거다. 내가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업무에 지장이 생길까 봐서.

    아무래도 내가, 감사팀의 엘리트 사원으로 소문이 난 게 맞는 모양이야. 그래서, 상무님은 지금 나에 대해 파악 중이신 거다. 내가 하무경 상무 라인에 적합한 인재인지 아닌지를.

    생각보단 망상에 가까웠고 민수의 망상은 갈수록 그 크기를 더욱 키워 문제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 30분이란 시간이 더 흘렀을까?

    메인으로 나온 스테이크와 랍스터를 먹으며 두 사람이 소소한 대화를 즐겁게 나누던 때에.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민수의 핸드폰이 지칠 줄 모르고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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