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3화 (33/116)
  • 33화. 민수는 혼란스럽다

    대청마루 위에 철퍼덕 드러누운 요원이 깨끗하게 씻은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내가 뻥 걷어차였어요. 백수 되더니 날 버리고 이런 시골로 내뺀 거 있죠? 아마 내 얼굴 볼 면목이 없었나 봐요.’

    조금 전, 마주쳤던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남녀 사이에 영원한 헤어짐이 어디 있겠어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반대로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 아니겠어요? 우리 자기랑 나랑 보통 사이가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쉽게 멀어질 사이가 아니라는 거죠.’

    예쁘다, 라는 수식어만으론 한없이 부족한 여자.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여자.

    저와는 결이 전혀 다른 사람.

    요원이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고는 제 차림을 힐끗 살폈다.

    어딘지 푸석한 듯한 제 머리칼도 살폈다.

    저와는 달리, 그 여자의 머리칼은 관리를 오래도록 받아온 고운 비단결 같았는데.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어 보이는 그런 여자를 두고 시골로 내빼다니. 사람 매너 한번 참.

    백수 된 게 그렇게도 창피했나? 하긴. 집안의 반대가 있었을 수도 있지. 두 사람 일은 둘만이 아는 거다. 제삼자가 왈가불가할 사안이 아니야.

    그나저나, 전 애인과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고 있었으면서, 아직 다 잊지도 못했으면서, 정리도 하나 안 됐으면서.

    그래놓고 나한테 키스한 거야?

    나만 보면 한 번만 달라느니 꼴린다느니 어쨌느니 그따위 성드립이나 친 거야?

    순경인 나한테 겁도 없이?

    이런 시골에선 딱히 만날 여자가 없으니 당장에 욕구를 분출할 곳이 필요했던 모양이지?

    그래서 가장 나이대가 비슷한 내게 작업을 걸었나?

    그 여자를 보니 여자 취향 딱 나오던데. 나와는 정반대의 여자가 취향인 듯한데.

    요원이 사과를 와사삭, 씹으며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곧 작게 실소했다.

    아니지. 하무경 씨 탓이 아니지.

    키스도 같이 좋아서 한 거고, 그가 농담처럼 던졌던 음담패설 혹은 더티 토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나는 전혀 싫지가 않았고, 오히려 즐겼으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귀기를 해, 뭘 해?

    전 애인이 찾아오든 말든. 정리했든 말든. 그런 남자에게 여자가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선수일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니까.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와사삭,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던 요원이 핸드폰을 얼굴 가까이 끌어왔다.

    액정에 뜨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 그러나 누구의 번호인지 잘 아는 요원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네, 민수 씨. 안녕하세요?”

    하긴. 상대에게 못 할 짓 하고 있는 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요원 씨!]

    조금 전, 무경의 전 애인이란 화려한 여자를 보자마자 성준에게 민수의 번호를 물어 홧김에 민수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토요일에 서울로 가겠다고. 식사 한 끼 같이하자고.

    오랜만에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을 벗어나 바람을 쐬고 싶기도 했고. 머리를 좀 비우고 싶기도 했고.

    사실은 잘 모르겠다.

    혹시라도, 서울에 있다 보면 누군가를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기도.

    [제가 연락을 너무 늦게 드렸죠? 정말 죄송해요. 메시지는 진작 봤는데 제가 조금 전까지 저희 상무님과 같이 식사를 했거든요.]

    “괜찮습니다. 바쁘신 거 다 아는데요.”

    [그래서, 이번 주 토요일이요?]

    “민수 씨만 괜찮으면요.”

    [저 괜찮죠. 안 괜찮아도 무조건 괜찮아야죠.]

    “다행이네요.”

    [기차 타고 오실 거죠? 어느 역으로 오시죠? 기차표 끊으면 말씀해 주실래요? 제가 시간 맞춰 모시러 갈게요. 요원 씨는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제가 맛집 찾아서 예약해 둘게요.]

    고작해야 영상 통화 딱 한 번, 그리고 이 통화 한 번일 뿐이지만, 요원은 민수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나지 않고 진솔한 사람.

    그런 남자가 제 취향이라고 당당히 얘기했었는데.

    왜 자꾸, 굉장히 모난 것 같고 진솔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그 남자가 자꾸만 제 머릿속에 둥둥, 공기처럼 떠다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후우. 요원 씨도 내가 싫진 않았나 봐. 정말 다행이다.

    20층 복도 끝에서 요원과의 통화를 막 끝마친 민수가 맑게 웃으며 반 바퀴 뒤돌던 때였다.

    헉.

    민수의 잇새에서 절로 그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임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삐딱하게 서있는 남자가, 계기판을 표정 없이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조금 전까지 저와 같이 식사한 검은 재규어 하무경 상무다.

    “사, 상무님!”

    핸드폰을 제 주머니에 다급하게 욱여넣은 민수가 무경의 곁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오늘 식사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은 민수가 그의 앞에서 고개를 45도 각도로 칼같이 숙였다.

    “제게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전히 계기판을 올려다보고 있는 무경은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리며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별말씀을.”

    “상무님과 식사할 수 있어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영광까지야.”

    “제가 앞으로 더 열심히 배워서 동녘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시든지.”

    땡.

    때마침, 임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촤르륵 열리고 안으로 올라탄 무경이 다시 반 바퀴 뒤돌아 엘리베이터 문밖의 민수를 비스듬히 깔아봤다.

    민수가 주춤거리다가 다시금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러고는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웠는데, 주머니에 있던 한쪽 손을 느릿하게 빼낸 무경이 검지를 까딱거리며 민수에게 타란 신호를 보냈다.

    ***

    민수는 혼란스러웠다.

    왜 자신이 상무실에 앉아 검은 재규어를 독대하고 있는지, 아무리 머리로 이해를 해보려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혹시 이제 상무 라인 타나? 근데 상무 라인을 나 같은 애송이 따위가 탈 수 있나? 동녘에서 가장 잡기 힘든 라인이 상무 라인이라던데. 혹시, 내가 엘리트 사원으로 사내에 소문이 났나? 그래서 상무님이 날 눈독 들이고 계셨나? 날 키우려고?

    엉성한 생각들의 꼬리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그럴수록 더 이해는 되지 않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이고 또 엉켜 들었다.

    “드세요. 우리 차태호 실장 어머님께서 직접 담가주신 매실청인데 아주 기가 막힙니다.”

    무경이 민수 앞에 놓인 유리잔을 점잖게 가리켰다.

    “예, 상무님.”

    얼음이 든 유리잔을 두 손에 조심스레 그러쥔 민수가 그를 곁눈질하듯 힐끔거렸다.

    무경은 다리를 넓게 옆으로 벌리고 앉아 핸드폰을 툭툭 터치하며 무언가를 읽고 있었는데, 고급스러운 슈트 자태와 어울리지 않는 저 다리를 쩍 벌린 자세가 그가 하니 또 어딘지 모르게 특별해 보였다.

    그래서 민수는, 저도 그를 따라 다리를 옆으로 조금 넓게 벌려봤다가 지금 누구의 앞인지를 깨닫고는 얼른 다시 다리를 콱 다물었다.

    “식사를 하시나 봐요.”

    “예?”

    급하게 고개를 드니 무경은 여전히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식사요. 그 마음 간다는 분과.”

    “……네?”

    이해가 되나 싶다가도 또 이해가 되지 않아서 민수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어디에서 먹는데요.”

    “어…….”

    “서울엔 언제 오는데요.”

    “……네?”

    민수는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저 역시, 제가 몸담은 이 회사의 실세 앞에서 이렇게 바보처럼 계속해서 되묻고 싶진 않은데,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아무리 대답을 해보려 노력해도 뭐 하나 이해되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무경은 분명 제 앞에서 같은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었는데, 민수의 귀엔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로만 들렸으니.

    핸드폰을 보고 있던 시선을 슬쩍 올린 무경이 민수를 극명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순경 말이에요. 김민수 씨가 마음에 담고 있다는 그 순경.”

    “아.”

    “주말에 식사한다면서요. 아까 복도에서 우연히 들었거든요. 안 들을 수가 없더라고. 김민수 씨 목소리가 워낙에 커야지.”

    “죄, 죄송합니다!”

    “아니.”

    무경이 그게 아니라는 듯 단호하게 손을 들어 올려 저지했다.

    “사과 말고.”

    길쭉한 팔을 뻗어 제 앞의 유리잔을 쥔 무경이 인내의 끝을 보여주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젠 답을 해보세요. 그 순경, 주말에 만나요?”

    잠시 입을 작게 벌리고 있던 민수가 아, 소리를 내며 자세를 다잡았다.

    “예, 맞습니다, 상무님. 그분과는 토요일에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어디서.”

    “……예?”

    “몇 시에.”

    “그, 글쎄요? 이, 이제 알아보려고 합니다.”

    소파 등받이에 다시 몸을 깊숙이 묻어 앉은 무경이 유리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씩, 웃었다.

    “맛있는 거 사줘요. 이왕이면 중식은 피하도록 하고.”

    “……예?”

    “그리고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는 대로 내게 좀 알려줄래요?”

    “왜…….”

    그리고, 민수는 정확히 보았다.

    “좀 알려주지?”

    제게로 쏟아지는 친절한 미소와는 달리.

    “아무것도 묻지 말고.”

    제 목을 금방이라도 물어뜯어 버릴 듯한 수컷 재규어의 칼날 품은 서늘한 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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