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2화 (32/116)
  • 32화. 1차 위기 경보

    ……채 순경.

    채 순경?

    무경이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니 챙그랑! 그 반동에 흔들린 테이블 위에서 포크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여태까지 가시방석 위에서 식사하던 은희와 민수도 덩달아 그를 따라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주연 상무.”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제 머리칼 안쪽에 대충 찔러넣은 무경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 옆에 누구예요.”

    [글쎄요. 예쁘장한 동네 순경?]

    맞구나. 채요원 순경.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잠시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선생님, 여긴 어떻게 오셨죠?]

    [나요? 나는 우리 하무경 상,]

    “라주연!”

    불시에 높이 치솟은 무경의 날카로운 음성에, 가뜩이나 조용했던 임원 식당 내에도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한 정적이 감돌았다.

    [어머, 자기. 방금 내 이름 부른 거야?]

    그녀를 알아온 수많은 세월, 단 한 번도 라주연 상무를 이름으로만 부른 적이 없기에 주연도 잠시 놀란 듯 보였다.

    “그래, 주연아. 빌어먹을, 주연아. 젠장, 주연아.”

    잠시 두 눈을 감고 제 머리를 짜증스레 문질러 마구 헝클어트린 무경이 잠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라주연 상무.”

    일정 시간이 지나고 무경이 눈을 부릅떴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더 검게 보였다.

    “동녘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으면 지금 그 순경하고 당장 거리 벌리고 서요. 멀찌감치 떨어져.”

    그 말을 뇌까리면서 무경은 제 주변을 인지했다.

    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은희와 민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어깨를 잔뜩 움츠러트린 채였다.

    “동녘의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걸린 일이라 그래요.”

    무경이 그들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며 상냥한 미소와 함께 앉으라 다시 손짓했다. 그러나, 은희와 민수는 여전히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라주연 상무에겐 입은 없고 귀만 있는 겁니다. 누가 말을 걸든 그 입 닥치고 내 말만 잘 들으면 돼요. 할 수 있죠?”

    리넨 냅킨을 소파 위에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진 무경이 테이블 밖으로 나와 은희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앉으란 신호를 보냈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렇게 해라, 주연아. 응?”

    성큼성큼, 임원 식당 밖을 빠져나가는 무경의 발걸음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 못 한 1차 위기 경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뚜벅뚜벅, 복도를 묵직하게 가르는 무경의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사방에 울려 퍼졌다.

    “순경하고 최대한 멀리 떨어졌어요?”

    [응.]

    “잘했어요. 이제 입은 다물고 귀만 열면 완벽하겠네요.”

    뱀처럼 가느다래진 무경의 시선이 제 주변을 스윽 살핀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다시 입을 연다.

    “지금부터 내가 라주연 상무에게 하게 될 이야기는 동녘의 일급 기밀입니다. 이 얘기가 밖으로 유출될 시, 나는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이 세상에 딱 한 사람, 라주연 상무 너만 조질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현명한 분이시니 잘 알리라 생각합니다.”

    쉽게 풀어, 지구 끝까지 쫓아가 반드시 널 찾아내 확실하게 죽여버리겠단 얘기였다.

    “지킬 수 있겠어요?”

    [어우 무서워. 대체 뭔데 그래?]

    “대답이나 해. 지킬 수 있겠어요?”

    [알았어요. 지킬게.]

    빈말이 아니다. 라주연은 지킬 것이다.

    입으로만 의리를 외치고 다니는 사내새끼들보다 훨씬 더 의리 있고, 가벼운 언행과는 달리 입이 무거운 여자임을 알고 있으니.

    “회장님이 1년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무경은 아무도 없는 20층 복도를 계속해서 거닐었다.

    “우리 회장님의 마지막 소원은 회장님의 어릴 적 고향인 그 백야마을에 우리 동녘 아웃렛을 크게 짓는 겁니다. 아름다운 곳이잖아요.”

    [어머. 정말?]

    “그래서 내가 지금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동녘 사람인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 마을에 왔는지조차 몰라요. 회장님께선 마을분들과 좋게 합의 보는 걸 원하시거든요. 어찌 되었든 회장님의 고향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딴 후진 집에 살면서 평민 코스프레를 하신다? 여기 사람들하고 정 좀 들고 나면 살살 구슬려서 합의서에 사인받아 조용히 내쫓으려고?]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똑똑한 주연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냈다.

    무경의 거침없던 발걸음이 불시에 멈춰 섰다.

    멈춰 선 남자의 표정 역시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제삼자의 입을 통하여 듣는 그 방법이 꽤 잔혹했기에.

    [회장님께서 하무경 상무에게 내건 조건은 뭔데요?]

    “조건은 무슨 조건.”

    되묻는 무경의 눈썹이 혼란한 감정을 지우고 매섭게 휘었다.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내가 자기를 원 데이 투 데이 봐요? 내가 아는 하무경은 그 아무리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라 할지라도 이런 격 떨어지는 짓을 공짜로 할 인간이 절대로 아닌데. 뭐. 차기 수장 자리라도 내준대요? 그걸로 합의 본 거예요?]

    허리춤에 한 손을 얹은 무경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게 작정하고 오늘 나 맥이나? 이렇게 들으니 나 존나 답 없는 쓰레기 새끼네?

    [맞구나? 참으로 회장님다운 발상이란 생각이 드네요. 참으로 하무경 상무다운 결정이고. 그나저나…….]

    뒷말을 길게 늘이던 주연이 갑자기 피식, 웃으며 뜻밖의 말을 던졌다.

    [날 아까부터 계속 수상쩍게 노려보는 저 순경도 여기 마을 사람인가 봐?]

    요원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또 한 번 어딘가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위가 뒤틀리는 건가, 싶어 무경은 슈트 베스트에 가려진 제 윗배를 괜스레 한번 눌러봤다.

    [저 순경은 그럼 자기를 어떻게 알고 있어? 농사짓는 젊은 총각?]

    무경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완전히 구겨진 상태였다.

    [근데 둘이 꽤 친한가 봐. 자기 이름도 정확히 알고 있던데?]

    그래. 그 순경. 나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

    “백수.”

    탄식과도 같이 터진 무경의 그 말에 주연이 깔깔깔, 마을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냥 백수도 아니지. 회사 면접에서 늘 미끄러지는 존나 가여운 백수로 알고 있지.

    아, 이런. 채요원 순경.

    이렇게 되짚어보니 내가 채 순경에게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몹쓸 짓을 하고 있네요. 이거 정말, 내가 채 순경에게 미안해서 어떡하지?

    한껏 찡그려진 미간을 문지르며 무경은 픽, 자조적으로 한번 웃었다.

    [우리 자기도 참 열심히 산다.]

    그 말을 중얼거리던 주연이 선심 쓰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좋다. 나는 항상 우리 하 상무 자기 편인데 내가 당연히 우리 자기 도와줘야지. 우리 자기가 꼭 동녘 먹어야 해?]

    “도와주고 싶거든 이제 그만 얌전히 꺼져. 듣기 거북한 자기 소리도 좀 그만하시고.”

    [걱정 마, 자기. 나 연기 잘해.]

    내가 아주 소 귀에 존나 경을 읽고 있지.

    [저기요, 선생님. 실례지만 왜 아까부터 대답을 안 하시는지. 이 동네는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제가 여러 번 여쭈었는데요.]

    다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요원의 목소리에 무경의 싸늘했던 시선이 금세 그 색을 바꾸었다.

    [어머, 순경님! 나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주연은 일부러 무경에게 들으란 듯이 전화를 끊지 않고 요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요! 나 하무경 찾아왔어요! 그런데 이제 괜찮아요. 통화했거든요.]

    얌전히 꺼지라니까 그걸 또 못 하시네.

    무경의 꽉 다문 아래턱 근육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런데, 선생님. 실례지만 하무경 씨와는 어떤 사이신지. 혹시 가족이신가요?]

    [어머. 우리 자기랑 나랑 닮아 보여요? 가족 아닌데?]

    자기는, 씨발.

    [자기……요?]

    요원의 의문 가득한 음성에 무경이 핸드폰을 금방이라도 부서트릴 듯이 손에 꽉 쥐었다.

    자기 아니라고.

    주연은 지금 무경의 타들어 가는 속마음도 모르고 고장 난 기관차처럼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물론 지금의 자기는 아니구요. 내가 뻥 걷어차였어요. 백수 되더니 날 버리고 이런 시골로 내뺀 거 있죠? 아마 내 얼굴 볼 면목이 없었나 봐요. 이제 어디 살았는지 알았으니 종종 찾아와 봐야죠.]

    [헤어지신 게 아니에요?]

    [헤어졌죠. 그렇지만 남녀 사이에 영원한 헤어짐이 어디 있겠어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반대로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 아니겠어요? 우리 자기랑 나랑 보통 사이가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쉽게 멀어질 사이가 아니라는 거죠. 순경님은 나와 같은 여자니 제 마음 이해하시죠?]

    넌 진짜 미친년이다, 이 미친년아.

    뻐근한 제 목덜미를 붙잡으며 고개를 좌우로 우두둑, 비틀어 꺾은 무경은 그 순간 다짐했다.

    하가경을 [SSN]으로 저장했으니, 이제부터 라주연 넌 내게 영원한 [MCN]이라고.

    [내 볼일은 다 봤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순경님?]

    마지막 ‘수고하세요.’라는 말은 핸드폰에다 대고 일부러 크게 외친 주연이 전화를 뚝, 대번에 끊었다.

    “이 미친년이…….”

    핸드폰을 귓가에서 떨어트린 무경은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얼굴로 헛, 기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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