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1화 (31/116)

31화. 검은 재규어

오전 11시 50분이 되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은희 팀장과 김민수 사원이 임원 식당이 있는 20층에서 함께 내렸지만, 그들의 표정은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

하무경 상무와의 갑작스러운 식사 일정에 이은희 팀장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이지만, 짬밥은 무시할 수 없는지 평온한 얼굴로 걸어 나아갔고.

김민수 사원은 마치, 총 없이 전쟁에라도 끌려가는 사람인 양 탈색된 얼굴을 해서 이은희 팀장의 뒤를 바들바들 떨며 따랐다.

“티, 팀장님?”

“응.”

“근데, 저는 왜, 지금 상무님께 가는 거죠?”

“나도 몰라.”

“하무경 상무님께 가는 게 맞나요?”

“응.”

“제, 제가 혹시, 뭐, 실수한 게 있을까요?”

“글쎄.”

은희의 무던한 반응에 민수가 그녀의 뒤를 바짝 쫓으며 자기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전 근데 상무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거든요. 상무님을 뒤에서 씹은 적도 물론 없을뿐더러 저는 개인적으로 상무님을 굉장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존경하면 제 퇴사 전 소원이 상무님 실물 영접이겠습니까.”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이따 상무님 앞에서나 해.”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너무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동녘 감사팀은 사장 직속이야. 하태경 부사장님이 내년에 사장으로 취임하신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어.”

“왜요?”

“감사팀 막내까지 챙기는 모습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보일지 잘 아시는 거지. 원래 하무경 상무님이 이미지 메이킹 선수야.”

“남매분끼리 사이가 좋다던데 혹시, 하태경 사장님 잘 부탁드린다고, 뭐 그런 걸까요?”

“사이 좋다는 건 대외적인 이미지일 뿐이고. 실제론 아무도 모르지 않겠니?”

“그럼 혹시, 미리 감사팀을 상무 라인으로 매수하는 건가요?”

“매수라니. 말 가려 해.”

“죄, 죄송합니다.”

“상무님 앞에서 말실수하지 말고 넌 입 다물고 가만있어.”

두 사람이 임원 식당 앞에 우뚝 멈춰 섰고, 은희는 입고 있는 재킷을 단정하게 한번 매만지면서 마지막 말과 함께 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긴장해. 절대로 긴장 풀지 마라. 동녘 삼 남매 중 가장 센 분이시다.”

동녘 그룹의 임원 식당은, 직원들이 가는 구내식당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사방이 햇살이 잘 드는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으며, 나오는 음식도 죄다 호텔 뷔페 식이었다.

은희가 잠시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무경을 찾았다. 민수는 그녀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 여전히 발발 떨고 있었다.

무경을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창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고 있는 그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존재였으니까.

“김 사원. 저분이야. 인사 잘 드려.”

뒤에 바짝 붙어있던 민수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은희가 가리키는 인물을 바라봤다.

민수는 그를 보자마자 입을 떡 하니 벌렸다.

검은 슈트 베스트에, 목을 단정히 조이고 있는 검은 넥타이. 손목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블랙 메탈 시계.

검은 재규어. 남자를 보자마자 왜 그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바로 납득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무경은, 검은 재규어 바로 그 자체였으니.

“상무님. 이은희 팀장입니다.”

은희가 그의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니 민수도 얼른 그녀를 따라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태블릿 PC에 비스듬히 가 있던 시선을 치켜든 무경이 은희를 한 번, 민수를 한 번 바라봤다가 태블릿 PC를 테이블 위에 완전히 내려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팀.”

커다란 그가 기둥처럼 높이 우뚝 치솟자, 그보다 키가 작은 민수는 입을 쩍 벌린 채 분위기로 압살해버리는 그를 넋을 놓고 올려다봤다.

민수의 그 얼빠진 표정에 무경의 잇새에서 웃음이 비집고 나왔던 것도 같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맑은 표정이 묘하게 누군가와 잘 어울리네, 짜증 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경은 신사답게 손을 내밀어 근사한 미소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무경입니다.”

이 김민폐 새끼야.

물론, 무경의 속은 신사답지 못했지만.

민수는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먹지 못하고 맞은편의 무경만 힐끗힐끗 계속해서 쳐다봤다.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스테이크를 써는 동작, 샐러드를 포크로 휘적거리는 동작, 물잔을 쥐고 입가에서 기울이는 각도, 별것 아닌 동작 하나하나에서 이미 남자가 갖출 수 있는 품격을 모두 다 본 기분이었다.

“김민수 사원은 왜 그렇게 못 먹어요. 원래 입이 짧나?”

“예? 아, 아니요. 많이 먹고 있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

투명 물잔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무경은,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맞은편의 민수를 가만 응시했다.

인상은 좋네. 눈빛도 좋고.

‘모나지 않은 사람이요. 그리고…… 진솔한 사람이요.’

어젯밤 들었던 요원의 목소리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

그래. 좋은 사람 만나야지, 채 순경.

물잔을 달칵 손에서 내려둔 무경이 열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꼈다.

“김민수 사원은 만나는 사람 있습니까.”

“예?”

예상치 못한 돌발 질문에 민수와 은희가 동시에 고개를 올려 그를 직시했다.

“만나는 사람. 무슨 뜻인지 몰라요?”

무경이 가볍게 눈썹을 한번 들었다가 내리자, 그 표정을 잠시 살피던 은희가 민수의 다리를 테이블 아래에서 툭 하고 쳤다.

흠칫, 놀란 민수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대답했다.

“어, 없습니다! 없지만! 최근 마음이 가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숨김없이 진솔하시네.

맞물리고 있던 손깍지를 푼 무경이 이젠 독일식 호밀빵을 쥐어 버터용 나이프로 그 위에 버터를 치덕치덕 발랐다.

“그 여자분 직업이 뭔데요.”

“순경입니다.”

“자주 만나요?”

“아니요. 멀리 계셔서 아직 한 번도 실제로는 뵙지 못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봤다?”

“예. 그런 셈입니다. 아. 얼마 전엔 영상 통화도 잠시 했었습니다.”

민수가 헤에,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적인다. 저와는 확실히 결이 다른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음이 생겨요? 사람이 좀, 쉽네.”

퉁명스러운 읊조림과 함께 무경이 버터 바른 빵을 민수의 앞으로 내밀었다.

“드세요. 여기에서 가장 맛있고 비싼 빵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민수가 두 손을 얼른 공손하게 뻗어 그 빵을 건네받았다.

허공에서 손을 두 번 탁탁, 턴 무경이 허벅지 위에 내려뒀던 리넨 냅킨을 집어 입가를 닦으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김민수 사원은 모나지 않은 사람입니까?”

“……예?”

그때부터 민수의 머리가 바삐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건 뭐지? 혹시 나 재면접 보는 건가? 내가 원래는 불합격인데 잘못 합격 처리가 되어 이런 식으로 압박 면접을 다시 보는 건가?

창백한 낯빛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던 때에 은희가 자세를 바르게 잡고 대답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이력서를 보았습니다, 상무님. 그중에서도 김민수 사원의 이력서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유는?”

무경이 세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타다닥, 타다닥, 타다닥, 연속적으로 두드렸다.

“10년간 꾸준히 봉사 활동을 해왔더군요. 그 기간이면 이력서상의 보여주기식이 아닌 봉사가 생활이 된 거로 생각합니다.”

“봉사 정신이 투철하다.”

“네. 자기밖에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청년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그렇습니까?”

무경이 은희가 아닌 민수를 보며 물었다. 민수가 티가 날 정도로 침을 꿀꺽 한번 삼키며 대답했다.

“어, 어렸을 적에, 부모님과 함께 봉사 활동을 다녔던 그 기억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습관이 된 것 같긴 합니다.”

“습관으로 봉사를 다니신다?”

다양한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한 무경의 눈에, 김민수가 자라온 성장 환경, 성격 등이 한눈에 주르륵 읽혔다. 단 몇 마디에.

김민수는 채요원과 잘 어울린다. 두 사람은 성격도 둥글둥글하니 아주 잘 맞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기분이 아주 뭣 같은 거다.

존나 모나지 않은 사람이네, 씨발.

느른하게 팔짱을 끼며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어 앉은 무경이 민수를 왠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지이잉, 지이잉, 테이블 위에 엎어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손을 뻗어 액정을 확인한 무경의 눈썹이 보기 좋게 와락, 일그러졌다.

“나 잠시 통화 좀 할게요.”

“예.”

편하게 식사하라는 손짓을 취한 무경이 몸을 조금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라주연 상무. 오랜만이네요.”

[자기야!!]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무경이 츳 혀를 차며 핸드폰을 잠시 귓가에서 멀찌감치 떨어트렸다.

[자기야. 자기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니?]

호탕하게 웃는 그 웃음소리에 어쩐지 싸한 기분이 들어 무경은 얼른 핸드폰을 귓가에 붙여 긴박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어딘데.”

[우리 하무경 자기가 그간 이런 후진 데서 어떻게 지냈데? 진짜 좌천이야?]

“어디냐고.”

[나? 백야마을.]

쾅!

무경이 앉은 채 구둣발로 테이블 다리를 세게 한번 걷어차자, 은희와 민수도 동시에 몸을 움찔 떨며 바르게 앉았다.

이, 씨발.

아래턱에 힘을 꽉 한번 줬던 무경이, 사색이 된 두 사람을 발견하곤 꾸며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금 식사하란 손짓을 취했다.

두 사람은 업무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냉큼 나이프를 바르게 잡고 경직된 얼굴로 다시 스테이크를 썰었다.

“후.”

머리를 쓸어올리며 깊게 심호흡한 무경이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아까보단 부드러워진 어투로 물었다.

“라주연 상무가 거긴 왜 갔는데요.”

[오해하지 마요. 나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이니까.]

“그럼 조용히 갈 길이나 처갈 것이지 거긴 왜 처들렀는데요.”

[어우, 자기야. 진정해. 자기 얼굴 보고 싶어서 잠시 들른 거지, 내가 괜히 들러요?]

“나 지금 서울이니까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마을 사람 그 누구와도 말 섞지 말고. 아주 조용히 입 닥치고 올라와요. 응?”

[어머. 우리 자기 욕 맛있게 하는 것 좀 봐.]

무경이 강적의 주연 때문에 혈압이라도 오른 것처럼 뻐근한 목덜미를 덥석, 붙잡던 때였다.

[선생님?]

핸드폰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은.

[어떻게 오셨나요?]

구슬이 또르륵, 굴러갈 듯한.

[혹시, 하무경 씨를 찾아오셨나요?]

초록색 이파리에 맺힌 이슬과도 같은, 투명하고도 아주 영롱한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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