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0화 (30/116)
  • 30화. 동이 트는 새벽하늘 위에

    현재 시각 새벽 5시 45분.

    목요일이었음에도 불구, 무경은 서울로 올라가는 첫 기차 안에 몸을 실었다.

    백야마을과 가장 가까운 기차역은 차로 한 시간은 더 가야 하는 곳인지라, 차태호 실장이 기차표와 차를 급하게 준비하느라 새벽부터 진땀을 뺐다.

    평소라면 제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을 무경이겠지만, 지금은 상대를 배려할 여력이 그에겐 없었다.

    무경은 어젯밤, 요원과 그렇게 헤어진 뒤로 잠을 한숨 이루지 못했다.

    밤새도록 톰과 제리가 쫓고 쫓기는 천장을 긴 어둠 속에서 올려다보며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했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여자만 보면 짜증이 났다가, 웃음이 났다가, 어쩔 땐 머리가 지끈거렸다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가, 단전이 저릿했다가.

    이 기묘한 감정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뻐근한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보던 무경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워 아직 새카만 창밖을 보며 결단을 내렸다.

    과수원 알바고 뭐고, 민심이고 뭐고, 일단은 서울로 올라가자. 지금은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

    무경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캐리어를 끌고 폐가 수준의 시골집 밖을 나섰을 때, 산 능선엔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동이 트는 새벽하늘 위에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무경이 몸을 실은 평일 새벽 기차엔 승객이 없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는데 핸드폰이 지이잉, 지이잉, 시끄럽게 진동했다.

    걸치고 있는 후드 집업의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든 무경이 피곤함에 충혈된 눈으로 액정을 확인했다.

    화면에 뜨는 익숙한 국제번호에 무경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흠, 이른 시간이라 잔뜩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으며 핸드폰을 귓가에 밀착시켰다.

    “전화 받았습니다.”

    [잘 지냈니?]

    꽃다운 나이 21세에 하 회장과 결혼하여 동녘의 삼 남매를 낳고 키워, 8년 전, 황혼 이혼 후 이탈리아 로마로 떠난 삼 남매의 어머니, 서정연.

    “거긴 지금 몇 시예요?”

    질문하며 시계를 힐끗, 확인한 무경이 다시 한번 목청을 가다듬었다.

    “밤 10시 좀 안 됐겠네요. 주무시지 않고 왜.”

    [너는 안 자고 왜.]

    “기차 안이에요.”

    [이 시간에? 출장?]

    “그렇죠. 뭐.”

    [그래서 목소리가 안 좋구나? 너 지금 잠이 부족해.]

    “잠잘 거 다 자고 어떻게 살아남습니까.”

    [그래도 사람이 잠은 자야지.]

    “남들 잘 시간에 더 열심히 해야죠. 그래도 살아남을까 말까인데.”

    [넌 왜 열심히 살아?]

    재벌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나 던질 법한 질문에 무경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우리 어머니께서 8년간 외국물 드시더니 감 다 잃으셨네.”

    그러고는 이마를 괴었다.

    “재벌도 열심히 살아요.”

    존나 피곤하게 산다고, 라는 혼자만의 생각도 했다.

    “위에선 누르고 밑에선 치고 올라오고. 이 바닥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서운하게.”

    [위에서 누르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면 좀 어떠니? 네가 달고 있는 동녘 딱지 어디 가니? 지금 위치에서 마음 편하게 즐기며 좀 살아. 넌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아.]

    “8년 전과는 상황이 또 많이 달라요, 어머니.”

    [넌 꼭 네 아버지야. 그래서 밉다.]

    “아직 한국은 6시도 안 됐는데요.”

    잔소리를 듣기엔 이른 시간이니 그 정도만 하라는 뜻이었다.

    무경의 말뜻을 모를 리 없는 정연이 짧은 한숨을 터트리며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 많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다.]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풀면서 무경은 기차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새가 무리 지어 날아가는 광경이 꽤 절경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이 엄마한테 아무도 얘기를 안 해줄 수가 있니. 나 이제 너희 엄마 아니니? 아버지와 헤어지면 나 이제 너희 가족이 아닌 거니?]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하세요. 걱정하실까 봐 그런 거죠.”

    [그래서. 얼마나 남으셨대?]

    “1년 봅니다.”

    정연에게선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경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무미건조한 질문을 던졌다.

    “오실 거예요?”

    [가야지.]

    “뭐 하러요.”

    [가시기 전까진 곁을 지켜드려야지. 그게 사람 간의 의리 아니겠니.]

    “찢어지신 분들이 의리는 무슨.”

    [우리가 나쁘게 헤어졌니, 어디. 너희들 아버지다. 나 네 아버지한테 악감정 없어.]

    “아버진 있는 것 같던데요.”

    무경의 농에 정연이 핸드폰 너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스케줄 나오면 알려주세요. 모시러 갈게요.”

    [그래.]

    전화가 끊겼다.

    무경이 액정 속 핸드폰 시간을 확인했다.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말도 없이 와서 혹시 화났을까.

    요원을 생각하다가 굳게 다물린 잇새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씨발, 사귀냐? 미친 새끼가 별.

    츳 혀를 찬 무경이 이마를 다시 괴며 피로한 두 눈을 감았다.

    오전 6시 40분.

    자전거를 끌고 막 무경의 집 앞을 지나가던 요원이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아직 자고 있을까?

    굳게 닫힌 철제문을 가만히 응시하던 요원이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 낮은 담벼락 너머를 훔쳐보듯 힐끔거렸다.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대청마루와 마당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는데, 문득 무경이 집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요원이 입술 안 여린 속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젠 내가 좀 심했나? 개그를 너무 다큐로 받아들였지? 하무경 씨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농담 한번 던진 것뿐이었을 텐데.

    무언가를 결심한 듯 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요원이 핸드폰을 꺼내고 몇 번의 터치 끝에 무경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뚜우.

    신호음 한 번에 요원의 심장은 두 번 바닥으로 떨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흘러 내려온 머리칼을 한번 쓸어올리며 담벼락 너머의 집 안을 다시금 바라봤다.

    혹시 자는 건 아니겠지? 자고 있으려나?

    생각이 그렇게 바뀐 요원이 황급히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내서 막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액정이 숫자로 금세 바뀌었으니.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요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핸드폰을 다시 귓가에 갖다 대며 남자를 다급하게 불렀다.

    “하무경 씨?”

    [네.]

    “저, 채 순경인데요.”

    [알아요.]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무경은 오늘따라 과묵했고 요원도 막상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상태였다.

    “댁에…… 안 계신가 봐요.”

    [어떻게 알았어요.]

    “지나가는 길이거든요.”

    [아.]

    나직이 탄식한 그가 한숨을 한번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서울에 좀 가고 있습니다. 집안 행사가 있어서.]

    “그러시군요.”

    요원은 아랫입술을 계속해서 씹었다.

    뭐지? 왜 하룻밤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 왜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지?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아니요.”

    [그럼?]

    “언제 오세요?”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요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엔 오래 걸리세요?”

    [글쎄. 진짜 잘 모르겠네.]

    그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

    요원은 그를 따라 웃지 못하고 발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용건은. 끝?]

    “죄송합니다.”

    툭 뱉은 사과 한마디에 무경은 답이 없었다.

    “제가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요원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제의 그 사소한 일로 이렇게 둘 사이가 틀어질까 봐. 그건 또 싫어서.

    “황당하셨죠?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벼들어서.”

    […….]

    “죄송해요. 백야마을을 떠나란 소리만 듣고 제가 어젠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

    “저 재미없는 사람 아니거든요. 저 장난도 잘 치고 농담도 잘 받아주고 그런 사람이거든요. 근데 어제는 제가 아무래도 뭐에 씌었던 것 같아요. 제가 원래는 그런 사람이 진짜 아니거든요.”

    온 힘을 다해 자신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위트 있는 사람이라고 어필을 해보지만 여전히 그에게선 반응이 없다.

    “하무경 씨? 듣고 있어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침묵이 불안해서 요원이 무경을 불렀다.

    “혹시, 화나셨어요?”

    그 이후에도 무경에게선 아무런 말이 들려오질 않아서, 요원은 몇 번이고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어 액정을 확인했다.

    숫자는 여전히 위로 치고 올라가고 있었음에 그가 아직 건너편에서 듣고 있음을 알았다.

    “저기요, 선생,”

    [미안해요.]

    이번엔 그가 다짜고짜 사과를 툭 내뱉었다.

    [내가 미안해요.]

    무미건조한 듯 감정이 짙게 밴 목소리.

    [미안합니다, 내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뚝 끊겼다.

    “…….”

    요원은 끊긴 핸드폰을 한동안 멍하니 귓가에 붙인 채로 그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

    왠지 이상한 기분에. 왠지 이상한 마음에.

    ***

    동녘 그룹 지하주차장 고급 세단 안에서 무경은 태호가 챙겨온 슈트로 갈아입고 있었다.

    슈트 바지에 다리를 한쪽씩 끼워 넣으면서 무경은 짜증이 깃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씨발, 입었다 벗었다. 매주 차에서 이게 무슨 짓거리야.

    “오늘은 오실 줄을 몰라서 일정을 모두 비워뒀고요. 내일은 오전에 회의 두 개, 오후에 외부 일정 하나 잡혀 있습니다.”

    태호는 조수석에 앉아 태블릿 PC로 그의 일정을 읊었다.

    무경은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뱀처럼 목에 길게 두르며 하프 윈저노트 매듭을 금방 완성했다.

    “오늘 점심은 감사팀장하고 먹을까 합니다. 나랑 전에 통화했던.”

    이번엔 셔츠 소매에 커프스링크를 채우면서 말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은희 팀장입니다.”

    “아. 그래.”

    “어디서 식사하시겠습니까? 예약 잡아두겠습니다.”

    가슴께에서 달랑거리는 넥타이를 잡아 매듭을 순식간에 위로 끌어올려 목을 꽉 조인 무경이 이젠 블랙 컬러의 슈트 베스트를 챙겨 입으며 답했다.

    “굳이 나갈 거 있어요? 12시까지 임원 식당으로 오라고 하세요.”

    “예. 연락해 두겠습니다.”

    최고급 원단으로 생산된 맞춤 슈트 재킷에 팔을 끼워 넣으면서 무경이 뜻밖의 말을 던졌다.

    “감사팀 김민수 사원도 함께 올라오라고 하세요.”

    “누구요?”

    줄곧 앞을 바라보고 있던 태호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어느덧 세련된 슈트 태를 자랑하는 무경과 시선을 맞췄다.

    “김민수라면. 전에 알아보라고 하셨던 그 사원 아닙니까? 상무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데에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괜찮은 놈 같다잖아요.”

    “예?”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린 무경은 여전히 태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진짜 괜찮은 놈인지는 사람 잘 보는 내가 한번 봐줘야지.”

    좋은 분이신데.

    아리송한 말에 벙찐 태호를 남겨두고 뒷좌석 문을 덜컥, 연 무경이 길쭉한 다리를 뻗어 세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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