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29화 (29/116)
  • 29화. 감기는 건

    [ ※ 추천곡 : 장범준 – 주홍빛 거리 ]

    시간이 흐를수록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앞서 마셨던 고량주 두 병이 여유롭게 비워졌더라면, 남은 한 병은 어딘지 모르게 갈급한 손길로 비워졌으니.

    잔에 술을 들이부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잔을 넘친 독한 술이 테이블 위에 여러 번 쏟아졌으니.

    빈 잔을 채우고. 마시고. 비우고.

    채우고 마시고 비우고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 마지막 고량주가 전부 다 비워졌다.

    그럼에도 무경은 여전히 얼굴색 하나 변하질 않아서 겉으로 보기엔 술 한잔 입에 대지 않은 사람과도 같았다.

    중간중간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팔꿈치 하나가 삐끗 엇나가 앉은 채로 비틀거리는 모습만 없었더라면, 그를 취한 사람으로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채 순경.”

    무경이 기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가 채 순경에게 꼭,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술에 취한 남자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탁한 기운이 강했다.

    “채요원 씨.”

    무경은 처음으로 채 순경이 아닌,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부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네, 하무경 씨.”

    요원은 눈 감은 매끈한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감상하겠다는 듯이 아예 턱까지 괴고서 그를 가만 응시했다.

    술은 한잔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왠지 맞은편 남자와 같이 취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배우처럼 생겼나, 싶다가도. 그를 닮은 배우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남자의 평범치 않은 저 고유의 분위기. 저런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배우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무경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바르게 앉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깊은 밤이 되었고 고량주를 세 병이나 비웠음에도, 이마 위에 고작 몇 가닥 흘러내려 온 머리칼과 약간의 구김이 생긴 셔츠를 제하곤 아침과 똑같은 모습이라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채요원 씨.”

    그가 다시 한번 제 이름을 불렀는데, 그의 입을 통하여 듣는 제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새로웠다.

    “채요원 씨.”

    이번엔 제 이름이 남자의 잇새에서 한숨처럼 길게 뱉어졌다.

    “채요원 씨에게.”

    그의 가슴이 크게 한번 들렸다가 내려간 것을 보아하니, 남자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은 듯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감았던 눈꺼풀이 서서히 밀려 올라가고 남자의 숨겨졌던 눈동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12억, 아니, 채요원 씨에겐 특별히 20억이 주어진다면.”

    사람을 한순간에 아무 생각도 못 하는 바보로 만드는,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습니까.”

    평소와는 다른 사무적인 목소리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로또에 당첨되면 뭘 하고 싶은지를 물어보시는 거예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무경이 한 박자 느리게 그 입을 열었다.

    “비슷합니다. 로또보다 확률이 높고 현실성 있는 것을 제외하곤.”

    “현실성이요? 전 그런 큰돈이 생길 구석이 전혀 없는데요?”

    “있어요.”

    무경이 평소와는 달리 요원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있다고.”

    순간적으로 섬광이 번뜩인 남자의 눈이 새파랗고 차가운 심해를 닮았다 생각했다.

    “그러니 편하게 말해봐요, 채요원 씨.”

    짐짓 당황한 요원을 알아차렸는지, 무경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친절한 미소를 드러내며 상대를 안심시켰다.

    “상상만으로도 재밌잖아요.”

    “딱히 생각해본 게 없는데요.”

    “해봐요, 지금.”

    테이블 위 빌지를 낚아챈 무경이 영수증에 찍힌 음식값을 별 뜻 없이 확인했다.

    “글쎄요.”

    요원이 어색한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괜스레 그가 비운 고량주 병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20억.”

    빌지에 가 있던 시선을 슬쩍 치켜든 무경은 그런 요원의 분초로 변해가는 표정 하나, 행동 하나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20억이라…….”

    20억. 일평생 아낀다 해도 손에 쥐기 어려운 엄청난 액수.

    “……글쎄요.”

    요원은 왜, 현실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이 정도로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잠시 가볍게 웃었던 것도 같다.

    “그 돈이면 저희 아버지 고생하실 일은 없겠네요. 요즘 기후변화 때문에 과수원 운영이 아주 힘드시거든요.”

    빌지를 다시 테이블 위에 던진 무경이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착한 딸이네. 아버지를 먼저 다 생각하시고.”

    “그 돈이면 저희 할머니도…… 아니. 저희 할머닌 사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셔서.”

    고량주 병을 긁어내리던 행동을 마친 요원이 이젠 팔짱을 낀 채로 어둠에 잠식된 창밖 풍경을 가만 응시하다가 상념에 잠긴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쎄요…….”

    “집 사서 서울이나 경기권으로 가요.”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요원의 눈동자가 제게 이상한 말을 넌지시 건네는 남자에게로 서서히 향했다.

    “수도권에서 순경 생활하는 쪽이 채요원 씨에게도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무경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요원의 적갈색 눈동자가 일순 크게 한번 휘청였다.

    “떠나라고.”

    평소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도 장난기를 한가득 품은 남자가.

    “기분 좋게.”

    이 우스운 주제를 대하는 태도에선 조금의 장난기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고.

    “좋잖아요?”

    쓸데없이 진중한 남자의 태도에 온갖 의문이 들면서.

    “20억인데.”

    요원의 목덜미에 알 수 없는 찬 기운이 스쳤기 때문이다.

    “땡잡았지.”

    그 말을 끝으로 피식, 웃는 남자의 얼굴이 잔혹하리만큼 냉랭해서, 요원은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

    그 이상한 대화 이후로 팔각정에서 나온 두 사람에게선 대화가 완전히 끊겨 있었다.

    그 이상한 대화 이후로 무경의 술기운도 장난처럼 모두 다 깨어있었다.

    주량이 그새 또 늘었나, 생각하면서 무경은 팔각정 앞 의자에 대충 몸을 앉혔다.

    “잘 먹었습니다.”

    영수증을 손에서 와락, 구기는 무경을 향해 꾸벅 묵례한 요원이 별말 없이 그를 스쳐 포터로 향한다.

    “…….”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고 앉은 무경은, 포터로 향하는 요원의 꽃잎을 닮은 뒤태를 고요한 눈빛으로 훑으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찾아 꺼냈다.

    쾅!

    포터의 운전석 문이 세게 닫히고 핸들을 끌어안는 요원의 옆모습이 창 사이로 안개처럼 뿌옇게 보인다.

    떠나라 해서 기분이 많이 상하셨나, 우리 순경 나으리.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던 무경이 라이터를 위로 올려 불을 붙이려다가, 오늘따라 물고 있는 담배 맛이 뭣 같아서 그냥 손가락 사이에서 부러트리는 것을 택했다.

    씨발, 근데 기분이 존나 왜 이래?

    험악한 욕설을 짓씹으며 혀를 찬 무경이 주머니를 다시 뒤적여 늘 소지하고 다니는 레몬 허브 맛의 멘톨 틴케이스를 꺼냈다.

    틴케이스를 탕, 신경질적으로 열어 입에 여러 개의 사탕을 약처럼 털어 넣은 그가 의자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세우며 요원이 있는 포터를 향해 비틀비틀, 걸었다.

    “운전시켜서 화났어요?”

    멘톨 사탕을 혀로 굴리면서 조수석에 훌쩍, 올라탄 무경이 문을 쾅, 닫으며 안전벨트를 당겼다.

    “한 번만 좀 봐주지? 순경 앞에서 음주 운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전벨트를 철컥, 채운 무경은 시선을 사선으로 깔아 여전히 핸들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요원의 조그마한 뒤통수를 시야에 담았다.

    “아니면 대리도 없는 이 후진 동네를 탓하든지.”

    괜스레 짜증이 치밀어서 한껏 비아냥거린 무경이 이내 조소하며 아래턱에 힘을 꽉 주어 사탕을 와드득, 씹었다.

    그제야, 요원이 핸들 위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얼굴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무경은 혀끝에서 화- 하게 번지는 레몬 허브 맛을 느끼면서, 평소보다 냉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 요원의 옆태를 힐끗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비딱한 시선으로.

    “내가 채 순경한테 뭐 실수한 거라도 있어요?”

    요원은 함묵한 채 계속해서 정면을 주시한 채로, 손목에 걸었던 끈을 잠시 입술 사이에 꽉 물고, 히피펌이 돋보이는 숱이 풍성한 머리를 하나로 잡아채 빠르게 묶고 있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여자의 길고도 새하얀 목선이 어느 때보다 더 돋보여 남자의 시각을 자극하는 건 확실하다.

    눈매를 가늘게 찡그린 무경이 헛웃음 치며 제 시선을 간신히 그녀에게서 떼어냈다.

    일부러 저런다니까.

    시트에 머리를 툭 기대고 피로한 두 눈을 감으며 찌르르르 하게 울리는 관자놀이를 원을 그리며 문지르던 때였다.

    “못 가요.”

    미약하게 떨리는 여자의 음성이 이번엔 무경의 청각을 제대로 자극했다.

    주어도 없고 짐작도 되지 않는 요원의 말에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서.

    “어딜?”

    손을 확 치워낸 무경이 그녀를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순간.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

    요원의 적갈색 눈동자와 허공에서 맞닥트린 그 순간에, 무경의 동공이 평소와는 달리 커다랗게 벌어지고 말았다.

    “전 못 가요.”

    내가 보는 앞에서 당장 혀 깨물고 죽어, 라는 소리를 들은 듯한 비극적인 여자의 눈빛이 무경에게로 애처롭게 닿아 있었기 때문에.

    “아니? 안 가요.”

    머릿속이 아주 엉망이다. 모든 게 죄다 개판이야.

    “그러니까…….”

    실타래처럼 얽혀든 그 정신 사나운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내듯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무경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어딜.”

    “백야 떠나 수도권으로 가라고 제게 함부로 말씀하셨잖아요. 앞으론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제 앞에서 쉽게 하지 마세요.”

    조금 전, 아주 얼핏 보였던 무경의 본모습에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던 것인지.

    “하무경 씨에겐 이곳이 그저 그런 후진 동네일 수도 있겠지만요. 제겐 사방이 엄마와 함께했던 기억으로 물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곳이니까요.”

    요원은 이 모든 것이 마치 실제로 일어난 상황인 줄로만 알고.

    “눈만 돌리면 보이는 곳곳이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인데. 아직 모든 곳에 엄마가 살아 계시는데. 그걸 버리고 어딜 가요, 제가. 어떻게 가요, 제가.”

    제 마음속의 빗장을 열어 그의 앞에서 마음을 다해 절규하고 있었다.

    “여길 떠나면 엄마를 완전히 떠나는 건데…….”

    엄마가 내 곁에 더는 안 계심을 인정해야 하는 건데.

    “하무경 씨 같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한 여자의 낙엽을 닮은 쓸쓸한 얼굴을 본 그때.

    “……갈 수 있겠어요?”

    무경은 알 수 있었다.

    씨발, 큰일 났구나.

    내 착각이자 완벽한 오만이었구나.

    내게 감기는 건 저 여자가 아니겠구나.

    감기는 건 바로, 내가 되겠구나.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엉망으로 취했어야 했다.

    아무런 기억도 못 할 정도로 필름이 완전히 끊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

    무경의 큼직한 손에 찰나적인 힘이 들어가며, 의미 없이 쥐고 있던 멘톨 틴케이스가 남자의 손아귀 안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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