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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28화 (28/116)

28화. 필름이 끊겨야

무경의 뜻밖의 말에 머리를 쓸어올리던 요원이 눈을 한번 치떴다.

“아니에요? 어디 취직하셨어요?”

요원이 갑자기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바짝 기울이며 밀착시키는 바람에, 동시에 훅 치고 들어온 요원의 은은한 꽃향기가 무경의 정신을 뜨겁게 어지럽혔다.

“취직은 좀 거창하고…….”

일부러 그녀와 더 거리를 벌리기 위해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깊숙이 기대고 앉은 무경은, 갑작스레 찌르르하게 울리는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아찔해진 두 눈을 잠시 감았다.

“아, 혹시……?”

뒷말을 길게 늘이던 요원이 두 손바닥을 짝, 부딪치며 신이 난 음성으로 묻는다.

“저희 아버지 과수원에서 일하시기로 한 거예요?”

“사과나무가 참 많던데요.”

무경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사과 과수원이니까요.”

요원은 그런 무경을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바라보며 맞장구쳤다.

“풍경도 예쁘고.”

“너무 예쁘죠.”

“사과 향기도 좋고.”

“부사가 원래 향이 좋아요.”

“밤엔 아무것도 안 보일 것 같고.”

“밤…….”

남자의 마지막 말뜻을 곱씹어보던 요원은 더는 받아치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언제 한번 심심하면 놀러 와요.”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던 손을 치워냄과 동시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린 무경은 여자의 당황한 얼굴을 시야에 고요히 담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같이 사과나 따 먹고 놀게.”

그 사과가, 그 사과가 아니란 것 즈음은 요원도 잘 안다.

새하얀 얼굴에 이어 여자의 흔들리는 적갈색 눈동자도 감정을 참 숨기지 못한다 생각했다.

무경은 요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올곧게 바라보며 제 입술을 검지로 두 번 툭툭, 두드렸다.

네가 지금 하는 생각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사과는…… 혼자 따먹으세요.”

어차피 다 보이는 감정을 또 숨겨보겠다고 입술 안 여린 속살을 꾹 깨물며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남자의 본능을 묘하게 자극하는 거다.

어휴. 오늘따라 더럽게 예쁘네.

맘 같아선 당장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데. 사실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여유도 없이 당장 벨트 버클부터 풀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꾸만 머릿속을 치미는 이 찌질한 생각들에 짜증이 나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씨발, 진짜. 하무경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무경이 큼직한 손으로 제 목덜미를 거칠게 문지르며 낮게 욕을 짓씹었다.

심란한 손짓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린 그가 요원의 앞에 차 키를 툭, 던지며 웃음기를 숨기지 못한 냉소적인 음성을 꺼냈다.

“포터. 운전할 줄 알죠.”

“포터요?”

“운전 좀 대신해주면 고맙겠는데.”

“제가 왜요?”

“오늘은 내가 좀…….”

요원을 쳐다보지 않으며 메뉴판을 탁, 덮은 그가 의미심장한 발언과 함께 손을 들어 올려 팔각정 사장을 불렀다.

“필름이 끊겨야 될 것 같아서.”

한 시간 반 만에 고량주 두 병이 비워지고 그가 새 고량주 한 병을 더 땄다.

요원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로, 53도의 술 두 병을 비우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뿐이랴. 얼굴색도 행동도 말의 속도도 발음도 모두 다 그대로지. 입에 술 한 모금 대지 않은 사람처럼.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선생님은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글쎄요. 딱히 세면서 마시진 않는데요.”

“대충이라도.”

빈 잔에 술을 채우고 고량주 병을 내려둔 그가, 술로 꽉 채운 잔을 쥐면서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앞으로 일곱 잔이면 갈 것 같긴 한데.”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려 웃은 그가 술이 찰랑거리는 잔을 허공에서 단칼에 꺾어 원샷했다.

“아. 주량은 대충 고량주 세 병이시구나.”

남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면서 요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술을 목넘길 할 때마다 울렁이는 남자의 목울대와 아까부터 자꾸만 제 시선을 잡아끄는 남자의 전완근을 힐끗거리면서, 요원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야해…….

요원이 불순한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물잔을 입에 물었다.

“왜 또 물 마시면서 얼굴을 붉히고 그래. 채 순경이 취했어요?”

무경의 웃음기 밴 그 음성엔 이제 요원의 귀까지 벌게졌다.

“덥나? 더워요?”

일부러 놀리려 저러는 건지, 진짜 신경을 써주는 건지.

요원은 그를 티 나지 않게 슬쩍, 흘기면서 무경의 앞에 있는 깐풍기 쪽으로 젓가락을 뻗었다.

“잘 드시네. 깐풍기 좋아하나 봐요.”

무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깐풍기 그릇을 들어 요원의 앞에 자리를 만들어 그것을 내려두었다.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남자는 또 처음이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어쩔 땐 무례하게 선을 넘어 한발 주춤 물러나게 하다가, 어쩔 땐 또 몸에 밴 듯한 매너로 사람을 배려하니.

이 남자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원의 머릿속에 현재 있는 하무경에 대한 수식어는 미스터리의 남자, 베일에 싸인 남자, 같은 것들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도 또, 어딘지 모르게 두려운 감정이 밀려들고 있었다.

왠지 이 남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런 걸 무서운 여자의 촉이라 해야 할지, 예리한 순경의 촉이라 해야 할지.

“채요원 순경.”

홀로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요원이 느리게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네?”

“김민폐랑 밥 먹을 거예요?”

“왜요?”

“말했잖아. 궁금하다고.”

어떠한 대답 없이 젓가락을 움직여 깐풍기를 제 작은 입안으로 밀어 넣은 요원은 음식만 꼭꼭 씹었다.

느른하게 턱을 괸 무경도, 요원의 먹는 모습을 똑같이 바라만 보고 있다가 피식,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우리 지금 눈으로 대화하는 거예요? 미안한데 난 입으로 대화하는 걸 조금 더 선호해서.”

“안 먹어요. 고작 식사 한 끼 하자고 서울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채 순경이 왜 가요. 이거 하나면.”

엄지와 중지를 맞물려 딱, 소리를 크게 낸 무경이 어딘지 모르게 비딱하게 웃었다.

“꼬리 흔들면서 당장에라도 내려올 것 같던데.”

요원은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입안의 깐풍기만 꼭꼭 더 열심히 씹었을 뿐.

“괜찮은 놈 같은데. 한번 만나보지 그래요?”

고량주 병을 잡아챈 무경이 제 빈 잔을 쪼르르 다시 채웠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요원은 다시 깐풍기 쪽으로 젓가락을 뻗으며 선을 그었다.

“김민폐 씨가 취향이 아닌 모양이네.”

“괜찮은 사람 같긴 해요.”

“괜찮은 사람 같다. 김민폐 씨가.”

그 애송이가.

잔을 털어 원샷한 무경이 빈 잔을 다시 달칵, 내려두며 열 손가락을 맞물려 손깍지를 꼈다.

“원래 그런 티 없이 해맑은 친구 좋아해요?”

저를 비스듬하게 쳐다보는 그 검은 시선엔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진다.

“채 순경 취향이 어떻게 되는데요.”

“제 취향이요?”

“네. 어떤 남자 좋아하는데요.”

아까부터 손가락 마디가 아려서 쳐다보니, 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에 굉장한 힘이 들어가 있음을 깨닫고 요원은 손가락에 힘을 조금 풀며 대답했다.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지금 생각해봐요. 하나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아직 음식을 다 씹어 넘기지 못한 입안으로 새 깐풍기를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요원은 저를 꿰뚫어 볼 듯한 그 시선을 애써 또 외면했다.

“그냥…….”

뒷말을 흐린 요원은 깐풍기를 집어 또 입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작게 웅얼거렸다.

“모나지 않은 사람이요.”

“모나지 않은 사람.”

요원의 말을 한번 따라 해본 무경이 갑자기 하하, 소리 내 크게 웃었다.

“역시 신선하다니까. 그런 취향은 또 처음 들어보네.”

“그리고 진솔한 사람이요.”

“진솔한 사람까지.”

여자의 말을 다시금 따라 한 무경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아 보이는 건 자신만의 착각인 걸까?

“난 안 되겠네.”

혼잣말처럼 읊조려지는 그 나직한 음성엔, 요원의 분주하게 움직이던 젓가락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던 것 같기도 하다.

“정리하면 채요원 순경은.”

빠른 화제 전환을 위해 박수를 짝, 한번 크게 친 무경이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남자 성격 보는구나? 성격 좋은 사람을 좋아해. 꼭 자기처럼.”

“성격 좋은 사람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내 주변엔 많던데요.”

“아는 여자분이 상당히 많으신가 봐요.”

요원은 입안으로 계속해서 음식을 밀어 넣고 있었다.

여자의 뺨이 점점 불룩해지는 모습이 꼭, 해바라기 씨를 비축하는 햄스터 같다 생각하며 무경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근데 며칠 굶었어요?”

요원의 혼란스러운 지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드세요.”

무심한 얼굴로 냅킨 한 장을 뽑은 무경이 그 냅킨을 허공에서 딸랑, 흔들어 요원에게 받으란 신호를 보냈다.

“아직 우리의 밤은 기니까.”

남자는 선수다. 선수임이 틀림없다.

그 냅킨을 받아 입술을 닦으면서 요원은, 탐정처럼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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