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27화 (27/116)
  • 27화. XX 불굴의 의지

    민수는 성준처럼 말이 제법 많았다.

    [제가 성준이 형을 계속해서 졸랐어요. 근처에 사시면 찾아가서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이렇게 영상으로라도 꼭 한번 뵙고 인사 나누고 싶다고.]

    “아. 네…….”

    [소개팅과는 별개로 꼭 한번 대화라도 짧게 나눠보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완벽한 제 이상형이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옆에서 핸드폰 각도를 조절하던 성준이 이열, 소리를 내며 제법이네, 라며 웃었다.

    [그리고 사진보다 훨씬 더 미인이십니다.]

    “민수야. 우리 채 순경은 실물이 훨씬 더 예쁘다.”

    성준이 중간중간 껴들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그때마다 요원은 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난처한 듯 웃었다.

    [성준이 형이 채요원 순경님을, 아니, 요원 씨를 어찌나 칭찬을 하시는지.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시간만 내주신다면 제가 가도 상관없는데요.]

    “아니요. 서울에서 오시기엔 너무 멉니다.”

    [전 상관없습니다. 운전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아니요. 제가 상관이 있어요. 너무 멀어서 제겐 부담입니다.”

    요원의 뼈 있는 거절에 일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성준은 흠, 헛기침했고 화면 속 민수는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억지로 웃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김민수 씨.”

    [어…… 혹시 그 말씀은 저와의 소개팅이 부담스럽다는…….]

    “네.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지금 누굴 만날 마음이 없어요.”

    [아…….]

    “경장님 통해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영상 통화를 하게 될 줄은 몰라서요. 죄송합니다.”

    [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요원이 화면 속 민수를 보며 여러 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잠시 입을 작게 벌리고 있던 민수가 곧 손사래 치며 하하, 커다랗게 웃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영상 통화도 요원 씨 의사도 묻지 않고 갑자기 건 거라서 제가 더 죄송하죠. 저는 정말 괜찮고요. 그럼 다음에 혹시라도 서울 올라오실 일이 있으시거든 꼭 연락 주세요. 제가 맛있는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어 그렇습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이잖아요.]

    해사하게 웃는 민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오전에 들었던 한 남자의 삐딱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성격 무난. 무리에 잘 섞임. 맡은 일 열심히 함. 성실. 착함. 한 마디로.’

    스쳤다기보다는.

    ‘존나 맘에 안 듦.’

    뜨겁게 어지럽히나?

    아아, 정말이지.

    이마를 턱 짚은 요원이 그 음성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으면서 심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김민수 씨는 듣던 대로 진짜 반듯하고 성실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인물도 사진보다 영상이 훨씬 더 낫고. 근데 왜 나는 거절하고 있는 걸까?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식사 한 끼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괜찮지 않나?

    요원은 그 이유를 아는 듯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아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요원 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요. 저와 가끔 연락하고 지내시는 건 어때요? 친구처럼요.]

    민수는 포기를 몰랐고 성준은 그의 적극적인 태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락이요? 아. 연락은…….”

    요원이 화면이 아닌 발끝으로 시선을 내리며 고민하듯 뒷말을 길게 늘일 때였다.

    “이야. 역시 동녘! 존나 불굴의 의지!”

    갑자기 껴든 제삼자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요원과 성준이 동시에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빠르게 홱, 돌렸다.

    상대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고 요원과 성준의 잇새에서 동시에 헉,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언제부터 와있던 건지, 요원과 성준이 앉아있는 벤치 바로 뒤쪽에 무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를 넓게 옆으로 벌리고 앉아 애꿎은 라이터만 위로 탕, 탕, 탕, 연속으로 올리면서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선생님? 여긴 어쩐 일로?”

    요원의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를 불만스럽게 정시하면서 무경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가에 물었다.

    “나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요. 잊었어요?”

    “제가요?”

    “어제 내가 분명 말했는데요. 오늘 저녁은 우리 단둘이 팔각정에서 먹자고.”

    담배를 물고 있어 뭉개진 발음도 꽤 매력적이라 무의식중에 생각하면서 요원은 생각과는 반대로 대답했다.

    “근데 전 대답 안 했는데요.”

    “했어요.”

    “제가요?”

    “눈으로.”

    차가운 음성과 대비되는 어이없는 답변으로 요원의 입을 막아버린 무경의 가느다래진 눈동자가, 성준이 여태 들고 있는 핸드폰 화면 쪽으로 슬며시 향한다.

    네가 김민수 사원이구나? 우리 동녘의 애송이.

    라이터를 위로 올린 무경이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을 확인한 그가, 양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듣던 대로 열심히 하시네, 김민폐 씨.”

    무경의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를 들은 성준이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가슴을 다시 탕탕, 두 번 치며 소리쳤다.

    “제가 말씀드렸죠, 하무경 씨! 얘는 경찰인 내가 진짜 보장하는 녀석이라고! 내가 얼마나 사람을 잘 보는데요! 이 녀석, 아주 괜찮은 놈이에요! 내가 이 연령대에 이렇게 괜찮은 놈을 본 적이 없어요!”

    [형. 누구요? 하무경이요?]

    민수의 놀란 음성이 밤공기를 가르고 퍼졌다.

    무경은 담배를 태우면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무경을 돌아보고 있던 성준은 핸드폰을 제 얼굴 앞으로 끌고 와 민수와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

    “응. 우리 동네분. 하무경 씨.”

    [신기하네요. 우리 상무님 존함도 하무경인데. 그게 흔한 이름인가?]

    “너희 상무?”

    [네. 동녘 그룹 막내아들이요. 그분이야말로 정말 다 가진 분이거든요. 존멋에 존잘에 능력치 만렙에 젊고. 저랑 몇 살 차이도 안 날걸요? 세 살 위였나? 카리스마도 대박이어서 사내 별명이 검은 재규어인데요. 상무님 한번 실물로 뵙는 게 퇴사 전 제 소원이잖아요. 제가 회장님 자제분들은 스쳐 지나가면서 다 한 번씩 뵀는데요. 상무님만 여태 입사하고도 실물로 한 번을 못 뵈었어요. 얼굴 보기 너무 힘든 분이에요.]

    “야, 능력은 모르겠고 존멋에 존잘 하면 우리 동네 하무경 씨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백수라 문제지…….”

    성준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끝말을 대충 흐렸다.

    [하무경이란 이름이 원래 다 잘생겼나 봐요?]

    “그러게나 말이다. 인사할래?”

    [아니요. 제가 남자랑 인사 나눠 뭐해요.]

    “너희 상무 대신이다, 하고 인사하면 되지.”

    곁에서 성준과 민수의 의미 없는 영상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요원은, 여자나 남자나 대화 주제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건 매한가지라 생각했다.

    “인사해. 알았지? 하무경 씨! 우리 민수랑 인사 한 번만!”

    성준이 방긋 웃으며 제 핸드폰 카메라 방향을 무경에게로 돌리던 때였다.

    뚝.

    성준의 어깨너머로 갑자기 뻗쳐진 남자의 손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 하무경 씨!”

    끊긴 핸드폰을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던 성준이 무경을 돌아보며 빽 소리 질렀고,

    “가자, 채 순경.”

    무심한 얼굴로 담뱃재를 바닥 위에 툭툭 털던 무경은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요원의 새하얀 얼굴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다 곧 매력적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랑 밥 먹으러.”

    쿵쿵. 쿵쿵. 쿵쿵.

    심장이 귀에도 존재하는 듯했다.

    그 정도로 빠르게 뛰는 제 심장 소리를 요원은 들을 수 있었으니.

    ***

    “옴마! 하무경 씨 왔소? 채 순경도 왔네요잉?”

    무경과 요원이 팔각정 문을 열고 나란히 들어서자, 카운터에서 벌떡 일어난 팔각정 사장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두 사람을 반겼다.

    “하무경 씨. 참말로 잘 왔어요잉.”

    다짜고짜 무경의 손을 덥석, 붙잡은 팔각정 사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그 손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오늘 자장면 기대해부러요. 면발이 더욱 쫄깃하다고잉.”

    무경은 최대한 싫은 티를 억누르기 위해 아래턱에 힘을 꽉 주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정말…… 기대가 되네요.”

    쉬울 거라곤 진작부터 예상했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쉬울 수가 있나?

    고작 한 번의 술자리로 저에게 마음을 활짝 연 팔각정 사장을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쳐다보던 무경은, 붙잡힌 그 손을 먼저 거두며 어느덧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요원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마을분들과 잘 지내시니 정말 보기 좋아요.”

    요원은 제 앞에 앉는 무경을 바라보며 새하얗게 웃었다. 그의 검은 속내도 모른 채.

    “보기 좋을 것까지야.”

    낡은 메뉴판을 펼쳐 든 무경이 그것을 요원의 앞으로 밀치며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둥둥, 걷어붙였다.

    막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려던 요원의 눈동자가 남자의 전완근에 일순 고정되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핏대가 서는 팔뚝이 남자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격 급한 무경이 두 손가락으로 메뉴판 위를 툭툭툭, 연신 두드리며 빨리 고르란 신호를 보낸다.

    “자장면.”

    요원은 저의 새로운 습관을 알게 되었다. 당황하면 단어부터 내뱉는 습관 말이다.

    “면심입방격자.”

    끝말잇기를 하듯,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뱉은 무경이 그 나른한 시선을 메뉴판 위로 깔았다.

    “자장면 둘에 라조육, 깐풍기, 유산슬까지. 어때요.”

    “그렇게나 많이요?”

    “내가 살 테니까. 팔각정 매출도 좀 올려드려야지.”

    “선생님.”

    팔각정 사장의 눈치를 살피던 요원이 무경에게 잠시 귀 좀 달라는 손짓을 보냈다.

    “잠시만…….”

    그녀의 신호를 알아차린 무경이 제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슬쩍 기울여 요원과의 거리를 좁혔다.

    팔각정 사장은 보지 못하게 제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요원이 무경의 귀에 이런 말을 작게 속닥거렸다.

    “팔각정 장사 잘돼요. 그리고, 아직 백수이신 분이 자꾸 그렇게 돈을 펑펑 쓰시면 어떻게 해요?”

    하하! 전에 없던 호쾌한 웃음이 무경의 잇새에서 갑작스레 터져 나왔고, 요원은 그 웃음소리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우리 채 순경. 정말 재밌으신 분이라니까.”

    10만 원도 채 안 되는 이 음식값에 하무경의 지갑을 걱정해주는 여인이라니.

    참으로 신선하지 않은가.

    신선하다. 신선해. 그래서 존나 매력 있어.

    느른하게 팔짱을 낀 무경이 웃으며 요원과 다시 멀어졌다.

    적정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요원을 한참이나 말없이 관망하던 무경이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백수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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