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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26화 (26/116)
  • 26화. 내가 쿵 하면 너는

    요원이 눈을 몇 번 더 깜빡거리다가 예? 하고 되물었다.

    “왜 있잖아. 김민수인지. 김민폐인지.”

    “아.”

    머릿속에서 멀끔히 지우고 있던 인물의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와 요원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제가 알아서 해요.”

    “당연히 알아서 해야죠. 채 순경 일인데.”

    뱉어지는 말과는 달리 무경의 자세는 한없이 비딱했다.

    냉정과 열정, 서늘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남자의 묘한 눈동자를 오래도록 마주하지 못한 요원은, 제 시선을 휑한 마당에 아무렇게나 툭 던지며 또 선을 긋는다.

    “네. 맞아요. 제가 알아서 해요. 제 일이니까요.”

    “채 순경 일인 거 알아요. 누가 몰라 물었어? 그러니까 할 거냐고 묻잖아요.”

    “꼭 지금 대답해드려야 해요?”

    “그래 주면 고맙겠는데요.”

    그가 재촉하듯, 검지로 손목시계를 톡톡 가리킨다.

    음, 시선을 발끝으로 내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던 요원이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걸 제가 왜 하무경 씨한테 말씀드려야 하죠?”

    “궁금해서요.”

    “왜 궁금하신데요?”

    “왜 궁금하냐고?”

    “네. 하무경 씨가 그걸 대체 왜 궁금해하시는 건지. 제가 마음이 있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거절하는 거죠.”

    하, 냉소적인 한숨을 뱉은 무경이 찡그리듯 웃었다.

    “이야. 정말이지.”

    감정 없는 감탄사를 내뱉은 무경이 마당 한가운데에 김치통을 내려뒀다.

    다시 허리를 세운 그가 브라보를 외치듯 손뼉을 짝짝 치며 웃는다.

    이번에도 역시 기분 좋아 짓는 미소는 아니라 생각했다.

    “일부러 그래요? 그거 일부러 그러지?”

    “제가 뭘 일부러 그래요?”

    “보통은 직접 말을 해줘야 아는 게 남자들인데. 채 순경이 지금 딱 그래. 직구로 때려 박지 않으면 아는 게 하나 없거든.”

    “제가요?”

    “네.”

    네가요.

    무경은 피로한 눈가를 쓸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는 그게 가끔은 진짜 답답해서 미치고 환장하고 돌아버리겠는데요, 채 순경.”

    그 손을 치우자 거친 화법과는 다른 웃음기 가득한 눈빛이 요원에게 매끄럽게 내려앉는다.

    “또 그게 존나 매력 있어서.”

    요원의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살짝 틈을 만들어냈다.

    “신선해요. 보통은 내가 쿵 하면 상대는 짝 해줬으니까.”

    “…….”

    “근데 채 순경은 뭐랄까.”

    내가 쿵 하면 너는.

    무경이 뒷말을 삼키며 요원에게 한 발 크게 다가서자, 두 사람의 하체가 아슬아슬하게 맞닿았다.

    “내가 채 순경 일을 궁금해하는 이유를 직구로 때려 박아드릴 테니 귀 열고 잘 들으세요.”

    그의 큼직한 손이 요원의 새하얀 두 뺨을 붙잡아 세웠다.

    “내가 등신이라 그래.”

    고백이 아닌데.

    “그깟 키스 한 번에 누구만 보면 몸이 달아오른 등신이라.”

    고백을 받은 기분이었다.

    “채 순경이 키스를 쓸데없이 존나 잘해서 그래. 혀끝에서 도무지 잊히질 않잖아.”

    로맨틱한 멘트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음에도.

    “그래도 괘념치는 마요.”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어차피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잖아.”

    요원은, 제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뛸 수 있음을 30년 평생 처음으로 자각했다.

    “그렇지?”

    요원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 장난스레 두드린 남자가 백야마을의 햇살처럼 환히 웃어 보인 탓일까?

    저런 음담패설에도 심장이 뛰는 저의 새로운 취향도 깨달은 날이었다.

    “그래서 난 궁금하다고. 대답이 됐나?”

    어제에 이은 서운하단 말에 이어 자꾸만 가슴이 뛴다.

    이깟, 궁금하단 말이 대체 뭐라고.

    “채 순경이 결정 내리기 쉽게 내가 김민폐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요. 어떻게. 알려드릴까?”

    “……뒷조사라도 하셨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에게 붙잡혀있는 뺨이 복숭앗빛처럼 상기되어 있었지만, 요원은 그 뜨거운 얼굴을 해서도 경찰답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뒷조사 아니고.”

    무경이 제 손에 약한 압력을 주어 요원의 뺨을 꾹 눌렀다. 일시에 여자의 입술은 오리 주둥이처럼 쭉 나왔다.

    무경은 그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혹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지인에게 사내 평판 정도 전해 들은 것뿐이지.”

    “그래서. 어떤 분이신데요?”

    “관심은 또 있으신 모양이네?”

    “관심이라기보단. 경장님 아는 분이라고 하시니까요.”

    “그게 관심 아닌가?”

    “어떤 분인데요?”

    “궁금해요?”

    “조금요.”

    사실, 궁금하진 않지만 물었다.

    지금 그가 제 뺨을 잡은 이 손길이 좋아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해서. 최대한 오래도록 대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으므로.

    “…….”

    시원하게 뻗은 눈매로 요원을 잠시 침묵한 채 내려다보던 무경이 곧, 이런 말을 나직이 읊조렸다.

    “성격 무난. 무리에 잘 섞임. 맡은 일 열심히 함. 성실. 착함. 한 마디로.”

    그리고, 그 중저음의 매력적인 톤과 남자의 검은 시선은.

    “존나 맘에 안 듦.”

    중력이 비틀리듯 순식간에 모두 다 비틀렸다.

    ***

    점심시간이 되어서 갑순이 무경을 찾아왔다.

    하필이면 오전 내내 치열한 화상 회의를 끝내고 잠시 쉴 겸, 옷을 갈아입고 대청마루 위에 드러누워 담배를 태우는데 갑순이 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이잉. 저 백수를 으짜믄 좋을까잉.”

    이런, 젠장.

    무경이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찡그린 얼굴의 반을 큼직한 손으로 가렸다.

    갑순은 한량으로 보이는 무경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는.

    “퍼뜩 따라 온나!”

    무경에게 고함친 갑순이 홱 하고 위엄있게 돌아섰다.

    무경과 갑순은 부사 사과나무 250주가 심어진 「채채 과수원」으로 함께 들어섰다.

    “너 여그서 잠깐만 좀 있어라잉.”

    은쟁반을 머리 위에 얹은 갑순이 뒷짐을 진 채로 과수원 저 너머로 사라졌다.

    후, 짜증이 깃든 한숨과 함께 주변에 널린 사과나무를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구슬 굵기의 부사 알을 검지로 톡, 한번 건드려보았다.

    채요원 순경은 과수원집 딸이었군. 사과와 잘 어울리긴 하지. 달콤하고 새콤하니.

    무의식중에 한 제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등신 새끼, 를 읊조린 무경이 요원을 닮은 푸릇한 사과에서 막 시선을 거두던 순간이었다.

    “댁이여?”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체격이 좋은 중년 남자가 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무경은 그가 요원의 아버지임을 단박에 알아차리곤 직업병처럼 손을 내밀었다.

    “채요원 순경 아버님 되시는군요. 하무경입니다.”

    “채일섭이오.”

    무경의 큼직한 손을 또 다른 큼직한 손이 다가와 맞잡는다.

    무경은 적절한 압으로 상대의 손을 한번 쥐었다가 제 손을 떼어냈다.

    “이잉. 이 청년 사람 잔 많이 만나봤구마잉.”

    나무랄 데 없는 악수에 일섭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해서 허허, 웃었다. 웃을 때마다 눈이 부드럽게 휘는 모양이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서울서 멋하다 왔소? 영업?”

    “뭐, 이것저것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따 속 시원히 말 잔 해보쇼. 정확히 멋하다 왔소?”

    그렇지 않아도 이 마을 사람들의 오지랖에 진절머리가 난 무경은, 언젠가 이런 각본을 준비했었다.

    “저는 서울에서 사업을 좀 했습니다. 대차게 말아먹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빚이 산더미네요. 당연히 빚쟁이에게 쫓기겠죠?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다 보니 어느덧 백야마을까지 내려오게 됐습니다. 어떻게. 저에 대해 좀 알게 되셨습니까?”

    짜인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 무경의 말에 집중하던 일섭이 갑자기 과수원이 떠나가라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무경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가볍게 한번 쳤다.

    “이잉, 이 총각 흥정 잔 하네잉.”

    “흥정이요. 제가 방금 사장님과 뭘 흥정을 했죠.”

    “시급은 만 원.”

    “제가 시급을 왜 받을까요.”

    “울 엄니가 그러시네요잉. 내일부터 여그서 일할 총각이라고.”

    “아니요. 전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요.”

    “와요. 시급이 부족해 그라요? 나가 사정이 딱해서 최고로 쳐주고만 그라네요잉? 다른 덴 9,200원이여라.”

    “지금 시급이 문제가 아니라요, 사장님.”

    “내일 6시까지 오쇼잉. 내일은 옷 잔 잘 입고 오시고잉. 과수원서 일할 양반이 뭐슬 그라고 꾸미고 왔대? 누구한테 잘 보일라고?”

    일섭은 무경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에게서 빠르게 돌아섰고.

    “잠시만요. 채 사장님. 채 순경 아버님!”

    사과나무 아래, 무경의 처연한 외침은 저 멀리 비닐하우스로 사라지는 일섭에게까진 닿지 않았다.

    ***

    하루의 긴 해가 지고 백야파출소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기지개를 쭉 켜며 파출소 밖으로 나온 요원이 근처 벤치에 몸을 앉히며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갈 때였다.

    “채 순경! 채 순경!”

    “네, 경장님!”

    긴박하게 요원을 뒤따라 나온 성준이 그녀의 옆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높이 위로 추켜올리며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인사해. 민수.”

    “누구요?”

    “민수라고. 민수. 영상 통화.”

    “경장님!”

    “한 번만. 응?”

    성준의 웃는 옆모습을 황당하단 얼굴로 잠시 쳐다보던 요원이, 그래도 성준의 입장을 고려해서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띤 채 핸드폰 카메라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채요원 순경입니다.”

    민수라는 상대는 화면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다가 요원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안녕하세요! 필승!]

    “민수야. 그거 아니야.”

    [아. 이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긴장을 좀 해서요.]

    성준의 핀잔에 민수가 수줍게 웃으며 거수경례하던 손을 내렸다.

    [채요원 순경님. 반갑습니다. 저는 김민수라고 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상대가 흰 셔츠 위에 걸고 있는 사원증이 보인다.

    「동녘 그룹」이란 선명한 회사 이름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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