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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25화 (25/116)
  • 25화. 백야에, 여름이

    새벽 4시 40분이 되면 요원네 가족은 대청마루 위 밥상 앞에 모인다.

    “아함.”

    길게 하품을 하며 밥상 앞에 앉은 요원이 기지개를 쭉 켰다.

    “아따, 우리 딸 입 찢어지겄네잉.”

    “안녕히 주무셨어요?”

    요원이 막 방에서 나온 제 아버지 채일섭을 보고 눈을 반으로 휘어 생글 웃었다.

    “오야.”

    요원의 정수리 위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은 일섭이 밥상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따, 아침부터 진수성찬이네요잉. 오늘도 잘 먹을께라, 엄니.”

    “이잉. 많이 먹어라잉.”

    “우리 딸도 맛나게 먹고잉.”

    “네, 아버지도 많이 드세요.”

    “아야, 너는 이따 저짝 총각한티 물김치 잔 갖다줘라잉.”

    오이냉국을 막 크게 한 입 뜨던 요원이 갑자기 콜록, 사레에 걸려 잔기침을 시작했다.

    콜록, 콜록!

    이제 무경의 이야기만 나와도 과민반응하는 요원을 알 리 없는 갑순과 일섭은, 얼굴이 벌게져 기침하는 요원의 앞으로 동시에 물잔을 내밀었다.

    “저짝 총각, 어저께 소똥 푼다고 고생 쪼까 했자네. 그 냄시가 겁나게 고약했을 것인디, 물김치 국물 시원하게 마시고 쑥 내려가 부라고 갖다 줘라.”

    “그라고 봉께 나는 저짝 총각을 한 번도 못 봤네요잉.”

    “이잉, 걱정하덜 말어. 곧 볼 텡께.”

    “어째라?”

    “내가 오늘 저짝 총각을 과수원에 데불고 갈 거니께.”

    “어째라?”

    “일을 해야제!”

    “우리 과수원서요?”

    “할머니. 하무경 씨가 한대요?”

    어느 정도 기침을 진정시킨 요원이 숟가락을 입에 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진, 잠이 덜 깨 반쯤 감겨있던 눈동자가 이젠 별을 박은 듯 총명하게 빛난다.

    “지가 안 하믄 또 어짤 것이여? 우리가 공짜로 시키는 것도 아니고 지 밥값 정돈 벌어야제!”

    갑순이 무생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일섭의 밥 위에 한 젓가락, 요원의 밥 위에 한 젓가락 내려두며 구시렁거렸다.

    “어저께도 봉께 아주 그냥 엉망으로 해놨다 하드만. 그래도 부임이가 3만 원 찔러줬다드만 그걸 한사코 안 받것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또 부임이한테 처맞어부렀다 안 하냐잉. 어디서 저런 꼴통이 와가꼬 내 속이 터져 죽거써야?”

    “하하. 우리 엄니 꼴통 아들 하나 더 생겼네요잉.”

    일섭이 입안에 밥을 욱여넣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울 엄니 밥은 참말로 꿀맛이어라?”

    늘 사이좋은 일섭과 갑순을 조용히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던 요원이 작게 허밍하며 붉은 꽃이 알록달록 피어있는 마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눈을 감은 요원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따뜻한 바람에서 여름 냄새가 느껴지는 하루였다.

    엄마. 백야에 여름이 다 왔나 봐요.

    ***

    마당에서 볼품없이 찬물로 샤워를 마친 무경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잘 말리고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겼다.

    후진 옷장에 잘 걸어놨던, 구김 하나 가지 않은 셔츠와 슈트 바지를 챙겨 입은 그가 빳빳한 셔츠 깃을 잘 세워 솔리드 넥타이를 둘렀다.

    능숙한 손길로 하프 윈저노트 매듭을 빠르게 완성한 뒤에, 넥타이 위에 실버 색 타이바까지 착용하니 그가 지닌 고유의 부티가 몇 배는 더 상승했다.

    시골에서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굳이 챙겨입는 이유는, 아침부터 화상 회의가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휴. 이놈의 밥상.

    촌스러운 양은 밥상을 대청마루 위에 우당탕 던지듯 내려둔 그가 그 앞에 노트북과 함께 양반다리하고 앉았다.

    이거 근데 씨발, 배경 괜찮은 거야?

    무경이 주변 풍경을 심란한 얼굴로 한번 바라봤다가 답이 안 나오자 다시 어휴, 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소매를 팔뚝까지 반듯하게 접어 올리면서 메일로 도착한 회의 아젠다를 읽으려는데, 그보다도 더 눈에 띄는 메일 제목 하나가 무경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메일 제목은 [부탁하신 내용입니다.]

    어젯밤, 무경이 팔각정에서 나오면서 김민수에 대해 알아보라던 내용일 테다.

    메일을 클릭한 무경의 고요한 눈빛이 빼곡한 글자를 빠르게 읽는다.

    서론은 장황했지만, 본론은 결국 그거였다.

    감사팀장이 별도로 전화드린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대청마루 위에 대충 내려둔 무경의 핸드폰이 지잉, 지잉, 지잉,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감사팀장이겠구나, 싶어 핸드폰을 곧바로 귓가에 갖다 대며 응답했다.

    “하무경입니다.”

    [예! 상무님! 감사팀장 이은희입니다!]

    한껏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에 무경이 핸드폰을 잠시 제 귓가에서 슬며시 떨어트렸다.

    [상무님? 안 들리시나요?]

    “아. 이은희 팀장님. 처음 말씀 나누네요.”

    [예! 영광입니다!]

    또 한 번 설핏 눈매를 찡그리며 핸드폰을 잠시 귓가에서 떨어트렸던 무경이 다시 그 핸드폰을 귓가에 붙이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목소리는 좀 낮춰주시면 어떨까요. 내가 아침엔 유독 소리에 민감해서.”

    [아. 죄송합니다.]

    감사팀장은 곧바로 알아듣고 목소리를 작게 낮췄다.

    “뜻밖의 요청에 많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다만, 저희 아이가 상무님께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제가 잠을 한숨도 못 이뤘습니다.]

    “아니요. 확실하게 해두죠. 그런 거 아닙니다. 김민수란 친구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단지 내가 개인적으로 좀 알아보고 싶은 부분이 있을 뿐이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였나.

    지금의 무경은, 어제 소똥을 제대로 푸지 못해 부임에게 뒤통수를 처맞았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안심이고 뭐든 편히 물어보십시오.]

    “어때요? 그 친구.”

    [예?]

    생각보다 싱거운 질문에 감사팀장의 목소리가 순간 삐끗하였다.

    “어떤 친구인지 좀 궁금해서.”

    [김민수 사원 말씀입니까?]

    “사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내년에 대리 진급 년차죠.]

    “아직 애송이네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을 제 머리칼 안쪽에 무심하게 찔러넣은 무경이, 두피 마사지를 하듯 천천히 문지르며 나른한 음성을 꺼냈다.

    “능력은요. 일은 잘하고? 성실합니까. 성격은. 착해요?”

    나른한 음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질문들이 와다다 쏟아졌다.

    [맡은 일 열심히 합니다. 무리에 잘 섞이고요. 성실하죠. 성격도 무난하니 착합니다. 다들 좋아해요. 저 역시 좋게 보는 친구고요.]

    감사팀장은, 하무경 상무와의 통화를 위해 미리 연습한 사람처럼 막힘 없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내 앞이라고 일부러 칭찬만 하는 건 아닙니까? 참고로 그 친구와 난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입니다? 욕을 해주는 편이 오히려 난 더 좋아.”

    [아닙니다, 상무님. 사실만 말씀드린 겁니다.]

    “맘에 안 드네.”

    [예?]

    “맘에 안 들어요. 나무랄 부분이 하나 없잖아.”

    [아…….]

    이건 칭찬인지, 욕인지.

    감사팀장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에게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니.

    후,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쉰 무경이 제 목덜미를 사납게 문지르며 말했다.

    “하긴. 동녘 그룹 면접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우리가 능력 없고 이상한 사람을 뽑았겠어요. 안 그래요?”

    무경의 그 말에선, 동녘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이은희 팀장님.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죠.”

    [물론입니다.]

    “김민수 사원에겐 평소처럼 잘 대해주세요.”

    [당연합니다.]

    “내가 지금 지방에 내려 와있는데요. 서울에 올라가면 언제 한번 같이 식사합시다.”

    [예? 예! 영광입니다! 상무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무경은 다시금 인상을 좁히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누군가 찾아왔다.

    “선생님?”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어여쁜 사슴 한 마리, 아니, 여자가 파도처럼 향기롭게 제집 앞마당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 채 순경.”

    노트북을 탁, 덮은 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188㎝의 커다란 신장을 자랑하는 남자가 장승처럼 우뚝 높이 치솟았다.

    요원은 마당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조금 눈이 부셔 눈매를 찡그렸던 것도 같다.

    오늘따라 유독 차려입은 잘생긴 얼굴이 빛을 발한 느낌이라.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물김치.”

    잠깐 넋을 놓고 있던 터라 문장이 아닌 단어만을 툭 내뱉었다.

    “뭐. 끝말잇기 하자고? 치사량.”

    남자의 짓궂은 반응에 요원은 갑자기 창피해져 얼굴이 화르륵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무, 물김치요. 물김치를 좀 가지고 왔는데요.”

    “물김치를 왜요.”

    미적지근하게 되물은 무경이 대청마루 위에서 훌쩍 내려와 요원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는 반듯한 자세 때문인지, 다가오는 기세가 말도 못 하게 압도적이라서, 요원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저희 할머니께서요. 어제 소똥 푸느라 고생하셨을 거라고. 물김치 국물 시원하게 마시고 쑥 내려보내시라고. 예. 그러시네요.”

    참나. 무경의 잇새에서 웃음이 비집고 흘렀는데 정말 즐거워서 짓는 미소는 아닌 듯했다.

    “마음은 정말 감사한데요. 그걸 아시면 날 좀 가만 내버려 두라고 하세요. 노예 취급하며 이 집 저 집 만 원 단위에 팔지 마시고.”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던 무경이 요원이 들고 있는 물김치 통으로 제 손을 쭉 뻗었다.

    김치통의 손잡이를 겹쳐 잡는 순간, 또 한 번 두 사람의 손끝이 스쳤다.

    요원은 흠칫거렸으며 무경은 요원을 환상적인 각도로 내려다본 채 옅게 미소 지었다.

    “들고 오느라 고생 좀 했겠는데. 꽤 무거운데.”

    “아니요. 하나도 안 무거웠습니다.”

    요원은 영락없는 사업가의 모습을 하고 김치통을 쥐고 있는 무경의 언밸런스한 모습을 힐끗 수줍게 쳐다봤다가, 이내 감정을 숨기듯 얼른 뒷짐 지며 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또 차려입으셨어요? 서울 가세요?”

    “아니요. 면접 봅니다. 화상으로.”

    “요즘은 면접도 화상으로 보나요?”

    “이 회사가 좀 깨어있는 것 같네요.”

    “하긴. 블라인드 면접도 그렇고. 회사들이 깨어나려고 노력을 많이 하나 봐요.”

    요원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채 순경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요.”

    “예. 물어보세요.”

    “소개팅.”

    남자가 웃으며 묻는다.

    “할 거야?”

    검은 눈은 웃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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