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24화 (24/116)
  • 24화. XX 등신

    무경이 제 앞에 앉은 팔각정 사장의 빈 잔에 고량주를 쪼르르 따랐다.

    술병을 기울이는 손의 각도, 절제된 표정과 동작 등이 너무도 품격있어서 팔각정 사장은 저 역시도 격식을 차리듯 양손으로 잔을 붙잡고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 사장님 요리 정말 잘하세요. 제가 먹어본 자장면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듭니다.”

    “아따, 참말로 감사하네요잉.”

    “여기에서 썩기엔 아까운 맛을 내는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서울에서 하셔도 잘될 것 같은데. 생각 없으십니까?”

    “항상 꿈은 키우죠잉. 근데 먼 돈이 있어 간다요.”

    “어느 날 갑자기.”

    젓가락으로 깐풍기 하나를 집어 팔각정 사장의 접시 위에 내려둔 무경이 점잖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사장님께 12억이 생긴다면요.”

    “12억이라? 로또 5등도 안 된디 어디서 그런 큰돈이 생기거써라?”

    “만약, 생긴다면. 가실 겁니까?”

    “가야제라! 당장 가불제!”

    참 쉽다. 쉬워.

    무경이 잇새를 비집고 흐르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시군요.”

    그리고 팔각정 사장의 잔엔 53도의 고량주를, 제 잔엔 시원한 물을 채웠다.

    “그러면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혹시 또 압니까? 로또보다 더 현실성 있는 제안이 들어오게 될지.”

    그 말을 끝으로, 팔각정 사장과 건배하고 53도의 술 대신 물을 쭉 들이켰는데, 맹물의 맛이 오늘 밤은 유독 달게 느껴졌다.

    딸랑.

    그 단 기운을 깨는 여자가 팔각정 안으로 들어온 건 그즈음이었다.

    아니. 자신의 단 기운을 더 강하게 끌어올리는 여자라고 해야 하나?

    ***

    자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 中자를 하나 시킨 요원과 성준의 표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원래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쉬지 않고 요원에게 이 얘기 저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제 TV에서 무슨 방송을 봤는데 정말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냐부터 시작해서, 나도 이젠 적극적으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야겠다, 까지.

    원래도 성준의 말을 반은 흘리는 요원이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바로, 저희와 일정 거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무경 때문이었다.

    성준은 팔각정에 들어오자마자 무경을 등지고 있어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무경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는 요원은 아까부터 그가 신경 쓰여 죽을 것만 같았다.

    들어오자마자 서로 짧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론, 거의 모르는 사람인 양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있는 상황인지라 그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요원은 자신을 잔잔한 바닷가, 무경은 그 바닷가에 갑자기 떨어져 거대한 파동을 일으킨 혜성이라 생각했다.

    그가 백야마을에 온 뒤로, 저의 잔잔했던 마음에 자꾸만 거친 파도가 일었으니.

    ‘왜 내 앞에서 그렇게 웃지. 주지도 않을 거면서.’

    그 야릇한 말이 요원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재생되자, 무경의 반듯한 옆태를 힐끗거리던 요원의 얼굴은 금세 다시 노을처럼 붉어지고 태양처럼 뜨거워졌다.

    “채 순경.”

    “…….”

    “채 순경?”

    “…….”

    “채 순경!”

    “네!”

    커다란 목소리에 흠칫, 놀란 요원이 소리쳐 대답했다.

    “와, 뭔 목소리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불러도 잘 듣지도 못하고.”

    “아.”

    짧게 탄식한 요원이 한숨을 쉬면서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 위아래로 쓸어내린 뒤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잠을 잘 못 자서요.”

    “왜. 무슨 일 있어?”

    성준이 스탠 물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물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있는데 뭐. 오늘 종일 이상했잖아.”

    “아니에요. 없어요.”

    “아차.”

    물잔을 다시 내려두고 핸드폰을 꺼내든 성준이 몇 번의 터치 끝에 남자 사진 하나를 찾아 요원의 말간 얼굴 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얘 어떤 것 같아?”

    요원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 사진을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생김새의 남자였다.

    “인상이 좋으시네요.”

    요원은 형식적으로 대꾸하며 식당 벽에 붙어있는 TV로 시선을 올렸다.

    “소개팅할래?”

    “아니요.”

    “에이, 그러지 말고. 내 동생 녀석 후배인데 나랑도 꽤 친해. 우리 얼마 전에 소장님하고 같이 찍은 사진 있잖아. 그거 내가 프사로 해놨었는데 네 사진 보더니 누구냐고. 자기 이상형이라나? 장거리 연애도 상관없다면서 날 계속 귀찮게 하잖아. 어때? 할래?”

    “안 한다니까요.”

    요원의 단호한 거절에도 성준은 포기를 몰랐다.

    “조건은 훌륭해. 서른한 살이고 대기업 다녀. 동녘 그룹 알지? 감사팀이고. 연봉도 꽤 높다던데. 억 단위랬나?”

    “억이요?”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숫자에 놀란 요원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진 그 순간.

    “이름이 뭔데요.”

    어느 테이블 쪽에서 제삼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 공간에 짙게 깔렸다.

    요원과 성준의 눈동자가 목소리가 들려온 그곳으로 동시에 향했다.

    테이블 위, 핸드폰을 무심하게 낚아챈 무경이 의자를 끼이익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감사팀 누군데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잡아챈 무경이 카운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계산해 주세요, 사장님. 저기 순경분들 것까지도.”

    카운터 앞에 선 무경이 팔각정 사장을 향해 조용히 고갯짓했고, 팔각정 사장은 “아따, 남자네요잉.” 하며 얼른 결제를 끝마쳤다.

    “근데 그분이 평소에도 약을 좀 파시나?”

    계산을 끝마치고 영수증을 손에서 와락, 구긴 무경은 두 사람에게로 다시 뚜벅뚜벅 다가서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이상해서.”

    불쾌한 기운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지인이 동녘 그룹을 다녀 꽤 아는데. 30대 초반에 억 단위로 버는 직원은 없는 거로 아는데. 임원을 제외하곤.”

    “얘는 거짓말을 모르는 애예요.”

    “그래요?”

    그들의 테이블 아래에 있는 휴지통에 영수증을 던져 넣은 무경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으며 머리를 굴리듯 눈매를 가늘게 찡그렸다.

    “그럼 보자. 31세면 사원이나 잘해야 대리 정도 달고 있을 테고. 연봉 6천에 성과급 포함해도 8천, 성과가 좋은 해엔 9천 정도 될 테니. 아하. 아예 반올림을 하셨나?”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 무경이 성준을 내려다본 채 픽, 조소했다.

    “그럼 내가 잘못 들었나?”

    제법 신빙성 있는 수치에 성준이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그 나이에 8~9천이면 진짜 많이 버는 거지, 채 순경. 우리 쥐꼬리만 한 월급을 생각해봐.”

    성준이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요원과 다시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그래서. 그 친구 이름이 뭔데요.”

    무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저들의 대화를 방해하려 들었다.

    “얘요? 왜요?”

    성준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무경을 의아하게 올려다보다가 다시 요원을 쳐다봤다.

    왜 저래? 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데 무경이 또 껴든다.

    “방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주머니에서 한 손을 빼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요원의 순경 모자를 부드럽게 낚아채면서.

    “지인이 동녘 다닌다고. 그래서 좀 알아봐 드리려고.”

    그 모자를 요원의 머리 위에 폭 얹으며, 성준이 바라보고 있던 얼굴의 반 정도를 가리고는 매끈하게 웃어 보인다.

    “우리 채 순경님 아무 남자나 만나면 안 되잖아. 좋은 분이신데.”

    요원은, 차마 제 곁의 무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물잔만 손에 꽉 쥐었다.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는 듯, 선을 쉽게 넘는 남자란 생각이 들었으나 이상하게 싫지가 않다. 대체 왜 이럴까.

    “아무 남자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의 이상기류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성준은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툭툭 치며 당당하게 외쳤다.

    “경찰인 내가 보장하는 녀석이에요! 오래 알고 지낸 내가 더 정확하지! 진짜 괜찮은 녀석이에요! 우리 채 순경 못지않게!”

    “그러니까. 그 괜찮은 녀석의 이름이 대체 뭔데요.”

    손만 대도 상처를 입힐 것 같은 까칠한 목소리였지만 성준은 굽히지 않았다.

    “이름이 뭐냐면! 김민수예요! 김민수!”

    “김민수.”

    상대의 이름을 제 입가에서 나직이 한번 읊조려보던 무경이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가, 곧 성준을 향해 큼직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백야마을에 새로 이사 온 하무경입니다.”

    “아.”

    제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질러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성준도 그 손을 맞잡으며 환히 웃었다.

    “저는 채요원 순경과 같이 일하는 임성준 경장입니다.”

    이 사람도 단순하겠네, 순간적인 판단을 내린 무경이 제 손을 먼저 떼어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순경님들. 식사 맛있게들 하세요.”

    저를 바라보지 않는 요원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검지와 중지로 테이블 위를 툭툭, 두드린 무경이 막 두 사람을 지나쳤다가.

    “아 참. 그런데 말이에요, 채요원 순경.”

    그 자리에 다시 멈춰 서며 요원을 돌아보았다.

    “예?”

    아까부터 줄곧 아래로 떨어져 있는 시선을 겨우겨우 들어 올린 요원이 무경과 어렵사리 눈을 맞췄다.

    아주 잠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들더니만 이런 말을 무경이 불시에 툭 던졌다.

    “서운하네요.”

    눈을 동그랗게 뜬 요원이 검지로 저의 말간 얼굴을 가리키며 되묻는다.

    “저에게요?”

    그와 동시에 무경의 얼굴은 사납게 찌푸려졌다.

    짜증 나. 사슴처럼 생겨선. 얼굴은 또 왜 저렇게 작아서 모자는 왜 저리도 잘 어울리는지.

    “뭐가 서운하신데요?”

    요원이 의문을 가득 담아 다시 묻는데, 왜 저렇게 쓸데없이 눈처럼 새하얀 걸까, 더럽히고 싶게, 라는 불순한 생각이 또 머리를 스몄다.

    “그걸 잘 모르겠네.”

    “……네?”

    “더럽게 서운하고 짜증 나는데요. 이유를 또 모르겠어.”

    하얬던 여자의 얼굴이 금세 귀까지 벌게지는 것을 보니, 쓸데없는 게 아니구나, 하얘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을 바꿨다.

    “그렇다고 날 좀 어떻게 해달라는 건 아니니 부디 괘념치는 마시고.”

    적어도, 여자의 분초로 변하는 감정을 엿볼 순 있으니.

    “내일은 나랑 둘이 식사하죠. 여기 팔각정에서.”

    황당해하고 있는 요원을 보며 농염하게 미소 지은 무경이 팔각정 밖을 아예 나갔다.

    열렸다가 금세 닫힌 문 사이로 파도처럼 밀려들어 온 바람에는, 남자의 짙은 향기가 넘실넘실 실려있는 듯했다.

    “…….”

    팔각정 밖을 나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무경이 주머니 속 핸드폰을 찾아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감사팀에 김민수라고 알아봐요. 어떤 애송인지.”

    짧은 지시만을 내리고 통화를 종료한 무경이 하늘의 수많은 별을 잠시 올려다보면서 킥, 자조적인 웃음을 한번 흘렸다.

    그러고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의 필터를 앞니로 꽉 물어 까딱 흔들면서 제 포터를 향해 느릿느릿 걸었다.

    한눈팔지 말자, 마음먹은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저 여자 앞에서 무너졌다.

    다른 새끼가 저 여자에게 보내는 관심에 어쩐지 배알이 좀 꼴렸던 것 같기도.

    이제 보니 나는, 존나 등신 새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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