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23화 (23/116)

23화. 서커스의 막이 열리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죠.”

핸드폰을 주머니에 급하게 욱여넣은 무경이 갑작스레 제 눈앞에 등장한 요원을 넌지시 바라봤다.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여긴 어쩐 일이냔 질문을 대신하기도 했다.

“방금 이 삽이요. 저 주고 가셨는데. 저인 줄 모르셨어요?”

요원이 한 손에 쥐고 있는 삽을 허공 위에 올려 보이며 다가왔다.

“아. 그 사람이 채 순경이었어요?”

무경이 담배를 빨며 웃었다.

“미안하게 됐네. 아깐 역류 직전으로 정신이 없어서.”

요원이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왔는데 기분 좋은 꽃향기가 넘실넘실, 파도처럼 무경에게로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비누 냄새인지, 원래 여자가 지닌 체취인지.

이 향기를 방해하는 담배 냄새가 싫어, 얼마 태우지도 않은 담배를 발밑에 던지고서 장화를 신고 있는 발로 대충 짓이겼다.

“드세요.”

요원이 그런 무경의 앞에 작은 생수병 하나를 내밀었다.

“속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그 말엔 무경이 마지막 연기를 길게 뱉으며 웃음을 흘렸다.

“채요원 순경한텐 내가 참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이게 되네요. 위가 뒤틀려 혼절을 하질 않나. 헛구역질하질 않나.”

“전 더한 모습도 많이 보는 사람인데요. 그 정돈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무경이 그 시선을 비스듬히 틀어 요원을 내려다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요원의 그 새하얀 질문엔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아름다운 백야마을을 검은 시야에 담으며 말했다.

“그냥. 만약 그쪽이 우리 동,”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내가 채 순경을 좀 많이 예뻐했을 것 같아서.”

“좋은 뜻인가요?”

동녘 그룹에서 가장 뚫기 힘들고 잡기 힘든 것이 바로 하무경 상무 라인이었으니, 이건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적어도 동녘 그룹 사람에게라면.

음, 뒷말을 길게 늘이던 무경이 매력적으로 웃으며 답했다.

“상당히?”

그 눈부신 미소에 요원은 더워지는 것을 느끼고 괜히 시선을 멀리 두었다.

“물 잘 마실게요.”

팔을 뻗은 무경이 요원이 내민 생수병을 제 손으로 부드럽게 낚아채 갔다. 스친 손끝이 잠깐이었지만 또 한 번의 저릿함을 선사한다.

“이렇게 또 채요원 순경한테 신세를 지게 되네.”

“신세라뇨. 겨우 물 한 병인걸요.”

“귀하고 깨끗한 한 병이죠. 진흙탕 물 마시고 사는 물 부족 국가도 많아요.”

생수 뚜껑을 돌려 연 무경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목 넘김 할 때마다 거침없이 울렁이는 그의 목울대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럴 때 보면 또, 생각이 참 바른 사람인 것 같은데.

무경의 반듯한 옆선을 감상하듯 가만히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요원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그의 현재 차림새를 살폈다.

부티 나는 생김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줏빛 작업복 바지와 보라색 장화에 푸흡, 결국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요?”

무경의 눈썹이 불시에 휘어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아. 죄송해요.”

제 입술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눈을 휘어 웃고 있는 요원을 극명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깔아보던 무경이 이상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왜 내 앞에서 그렇게 웃어요. 주지도 않을 거면서.”

무경의 마지막 말을 잠시 곱씹어보던 요원이 그 뜻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경고하듯 무경의 발 옆에 삽을 콱, 힘차게 꽂기도 했다.

“제가 분명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시라고 부탁드렸죠?”

요원은 위협을 주려던 행동이었을 수도 있으나, 안타깝게도 여기 있는 무경에겐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귀여운 시골 백구의 애교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어 난감했지.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고요?”

“난 채요원 순경이 확실하게 범위를 정해줬으면 좋겠는데요.”

“범위요? 무슨 범위요.”

요원이 흙에 박아둔 삽을 손쉽게 빼든 그가 또 헛소리를 지껄인다.

“키스까지 되는 건 알겠어요. 그럼 목도 되나?”

“네?”

“목이요. 채 순경의 목. 내가 거길 좀 씹어도 되겠어요?”

무경이 삽을 쥔 손으로 제 목을 툭툭 두드리는 제스처를 가볍게 취하니, 요원의 입술은 또다시 작게 벌어졌다.

대체 사람이 어느 경지에 오르면 저런 음담패설을, 밥 먹었어? 상대에게 안부를 묻는 듯한 태연한 얼굴로 말할 수가 있는 건지, 싶어서.

여러모로 이상한 남자다.

“하. 기막혀.”

요원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남의 멀쩡한 목을 씹긴 왜 씹지? 선생님이 무슨 뱀파이어라도 되나요?”

가시 돋친 음성과는 달리 요원의 얼굴은 어느덧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뱀파이어. 요즘 사람답지 않게 참으로 순수한 발상이지 않은가.

무경은 눈앞의 여자가 마냥 흥미로워 또 웃었다.

“키스 마크 몰라요? 성인이면 다 알 텐데?”

“알아도 모른다고 하고 싶네요.”

“모르면 알려줄까?”

“알려주긴 뭘 알려준다고!”

당황한 모습이 재미있어 더 짓궂게 굴고 싶다. 저 새하얀 얼굴이 벌게지는 모습이 또 더럽게 예쁘니까.

“아무튼요, 하무경 씨. 선생님.”

찡그리고 있는 눈매를 들어 올린 요원이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하나 더 꺼냈다.

“담배보단 이게 더 메슥거리는 데에 도움 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요원이 갑자기 새하얀 손을 그의 작업복 바지 주머니 안에 쑤욱- 집어넣는 돌발 행동을 취했다.

아.

전혀 예상치 못한 요원의 행동에 이번에 당황한 건 무경이었다. 그의 눈 밑이 잘게 경련했으니.

“하무경 씨가 계시니 저는 다시 복귀해도 되겠네요. 그럼, 마저 수고하세요?”

요원은, 무경이 잡을 새도 없이 황급히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은 손짓 하나가, 표정 하나가, 행동 하나가, 남자의 본능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과연 저 여자는 알까?

무경은, 제게서 점차 멀어져가는 요원의 꽃잎 같은 뒤태를 검은 눈으로 훑다가, 조금 전 요원의 손이 들어왔다 빠져나간 제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어 딱딱한 무언가를 꺼내 보았다.

손안에 잡히는 자두 맛 사탕에 웃음이 흘렀다.

참, 저 같은 걸 준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두와 잘 어울리긴 하지. 달콤하고 새콤하니.

쓸모없는 생각에 무경은 자조적으로 한번 웃으며 피로한 눈가를 쓸었다.

하무경. 욕정에 안달이 나 여자에게 한눈이나 팔고 있는 이 한심한 새끼야.

정신 차려. 노력을 해.

백야마을 못 가지면.

너도, 네 사람도 다 죽는다.

눈가를 쓸던 손을 치우자, 무경의 검은 눈동자는 한층 더 짙고 차가워져 있었다.

***

해가 진 저녁, 무경이 타고 있는 포터가 팔각정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아직 저녁 7시도 되지 않았는데 작은 시골 마을의 시내는 쥐 죽은 듯 숨을 삼켰다.

덜덜거리는 포터의 시동을 끄자 그 정적은 배가 되었고, 무경은 핸들을 품에 끌어안은 채 팔각정 건물을 주시했다.

팔각정 사장은 어쩐지 마을 사람 중 가장 단순해서 쉬울 것만 같은 촉이 온다.

무경이 동의서를 받아낼 가장 첫 주자가 될 것이란 이야기다.

그리고, 저녁 7시 25분경.

팔각정의 구석진 자리에 앉은 무경은 팔짱을 낀 채로 제 고가의 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계속 재고 있었다.

‘옴마. 이게 누구여? 불쾌하신 양반 아니여?’

팔각정 사장이 그 첫마디를 끝으로 저를 투명인간 취급한 지도 벌써 24분째.

다른 테이블은 이미 음식도 나왔는데 무경은 아직 주문도 못 하는 상황이었으니.

이게 바로 시골의 텃세구나, 생각한 무경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낮게 조소했다.

사실, 이런 기 싸움이야 무경에겐 귀여운 애교 정도가 아닌가.

동녘 家의 사람으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탯줄이 잘리던 그 순간부터, 차원이 다른 싸움판에서 밥그릇 싸움을 위해 태어난 거나 진배없으니.

“사장님.”

카운터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는 팔각정 사장을 나직이 부른 무경이 제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던졌다.

“이번에도 나 모른 체하시면. 그땐 영원히 문 닫게 해드립니다.”

점잖은 음성에 그렇지 못한 협박성 짙은 발언에 팔각정 사장이 기겁하며 제 핸드폰을 내려뒀다.

“옴마? 그짝이 무슨 수로 문을 닫게 한대요?”

“수까지 아실 건 없고. 결정이나 하세요. 주문받으실 겁니까, 말 겁니까.”

“고거 지금 협박이요?”

“압력 정도로 하죠.”

팔각정 사장이 한쪽 다리를 덜덜덜 떨며 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는 무경을 불만스레 쳐다봤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검지로 톡톡톡, 일정한 박자로 내리치는 무경은 어서 결정하라는 듯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릴 뿐이었다.

해도 무언가를 정말 할 것만 같은 미친놈의 느낌이 강력하게 와서, 팔각정 사장이 결국은 백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향했다.

“내가 그짝을 불편하게 한담시로 여근 머더러 또 왔소? 피차 불쾌한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디.”

뒤끝 한번, 참.

혀를 내찼던 무경이 곧 얼굴색을 싹 바꿨다. 다가온 팔각정 사장을 따뜻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다정하게 미소 짓는다.

“이 집 자장면 맛이 잊혀야 말이죠.”

애송이 하나쯤 맘 돌리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지 않은가. 뻔한 칭찬 몇 마디에, 뻔하게 좀 웃어주고, 뻔하게 장단 좀 맞춰주면.

“사장님 요리 참 잘하시네요.”

무경은, 팔각정 사장을 향한 미소를 절대 잃지 않으며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디에서 배우신 겁니까? 면발이 좀 다르던데.”

“그걸 어찌케 알았소? 내 스승이 수타 장인이었지라! 인자 본께 음식 좀 아는 분이었구마잉! 면에 대한 그거슨 다들 모르던디!”

무경을 바라보는 팔각정 사장의 눈빛에 적의보다 호의가 더 가득 담기던 순간이었다.

봐. 쉽지.

메뉴판을 탁, 덮은 무경이 그 메뉴판을 팔각정 사장에게로 다시 넘기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미식가입니다. 맛집 다니는 거 좋아하고. 먹는 거 좋아하고.”

“옴마, 그랬구마잉? 멀로 드릴까요잉?”

“자장면이랑 깐풍기 하나 주세요. 배갈도 한 병 주시고.”

“배갈이 먼디요?”

“모르세요?”

“모르는디요?”

“고량주요, 사장님. 장사하시면서 그 정돈 아셔야지.”

마지막 말을 뱉는 무경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또다시 불쾌함을 감지한 팔각정 사장이 메뉴판을 확 빼앗으면서 구시렁거렸다.

“아따 고라믄 첨부터 고량주라고 하면 되제, 먼 아는 체를 저라고 한디야.”

배갈이 어떻게 아는 체야. 본인이 무지한 거지.

그 말을 목구멍으로 간신히 집어삼킨 무경은, 팔각정 사장의 성향을 이미 대화 몇 마디로 모두 다 간파한 뒤였기에.

“그 고량주는 사장님 겁니다.”

단 한 마디로 주방으로 돌아가려는 팔각정 사장의 마음을 다시 제게로 되돌릴 수 있었다.

“와서 같이 한잔하세요.”

서커스의 막은 열렸고 나는 외줄 위에 섰다. 이젠 쇼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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