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22화 (22/116)
  • 22화. XX 파국

    ‘니 소똥 푸라고.’

    갑순의 조금 전 말을 머릿속에서 수십 번은 더 되뇌어보던 무경이 골 때린다는 듯 킥, 웃으며 찡그린 눈썹 앞머리를 문질렀다.

    “어르신. 제가 그 짓을 대체 왜 합니까? 전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야이 오사랄 놈아! 그런 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냐잉? 너 말이여! 은제까지 백수 짓 하고 다닐 것이여! 젊은 놈이 일을 해야제, 일을! 사지 멀쩡한 놈이 어째 그라고 있냐잉?”

    “그 욕 좀.”

    갑순의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선 무경이 시선을 더 비스듬하게 깔고 목소리는 더욱 서늘하게 낮춰 경고하듯 짓씹었다.

    “이제 그만하시죠?”

    “야이, 육시랄 놈아!”

    퍼억! 두 사람의 대화를 관망하고 있던 부임이 무방비 상태의 무경의 뒤통수를 후려친 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앞으로 다 휘청, 거릴 정도의 세기에 반사적으로 제 뒤통수를 부여잡은 무경이 부임에게로 황당한 시선을 내렸다.

    “지금 저 때리셨습니까.”

    “그랴! 너 말이여! 으디 우리 성님한테 눈을 부라리고 대드냐잉?”

    제 옷소매를 걷어붙인 부임이 한판 뜨잔 식으로 무경에게로 꼿꼿하게 다가서며 소리 질렀다.

    “얌마! 이 성님이 백야마을의 큰 성님이신디 니가 그러면 돼야? 니가 참말로 이 시상의 쓴맛을 보고자픈 것이여?”

    갑순이 한 성격 하는 부임의 옷깃을 냉큼 붙잡으며 말렸다.

    “부임이가 참어. 원래가 느자구가 없는 놈이라고 저게.”

    “참말로 그라네요, 성님.”

    “아야. 3만 원이 적어서 그라냐. 니 3만 원 무시하지 말어. 3만 원이면 니가 나테 준 그 스카프가 석 장이라고잉?”

    와, 나 씨 진짜 미치겠네.

    무경이 정말 돌아버리겠단 얼굴로 제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사람이 정말 당황했을 땐 말도 잘 안 나온다더니.

    동녘 그룹 면접 시, 면접자를 단 한 개의 질문으로 벼랑 끝에 몰아넣기로 유명해서 ‘압박 면접 전문가’로 불리는 그 천하의 하무경이, 지금은 그 면접자들과도 같은 벙찐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못 하는 꼴이라니.

    게다가, 일당 3만 원에 축사에서 소똥이나 퍼야 하는 꼴이라니.

    제 앞에 던져진 촌스러운 작업복 바지와 보라색 장화에, 늘 세련된 패션만을 추구하는 무경의 머리가 깨질 듯 다 지끈거렸다.

    ***

    요원은 오후 내내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달콤한 레몬 향이 남아있는 것만 같은 제 입술을.

    키스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그런 자극적인 키스는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신선한 그 무엇이었다.

    키스 하나를 해도 그렇게 자극적이고 야한데, 그 이상을 하게 되면 남자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순간적으로 훅 치고 올라온 호기심에 자신이 더욱 흠칫 놀란 요원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평상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요원의 노력을 신랄하게 비웃듯이 남자의 목소리가 자꾸만 요원의 머릿속을 뜨겁게 어지럽혔다.

    ‘채 순경님, 나는요. 채요원 순경한테 좀 많이 꼴립니다. 나 채요원 순경하고 자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그런 절제된 얼굴로 할 수가 있는지.

    ‘그럼 우린 앞으로도 계속 키스만 하는 것으로?’

    어떻게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다 던져놓고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행동할 수가 있는 것인지.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나봐야 그 경지에까지 오를 수가 있는 것인지 남자가 더 궁금해진다.

    “채 순경 쟈, 오늘 어째 저란대?”

    종이컵을 나란히 쥔 소장과 성준이 오늘따라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는 요원을 수상쩍게 바라봤다.

    그 얼굴이 마치 사탄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온 사람과도 같아서 소장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쟈 오늘 좀 내보내야 쓰겄제?”

    “네, 소장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바람 좀 쐬고 오게 하시죠.”

    “이잉. 그거시 좋거써. 저기, 채 순경?”

    “네?”

    소장의 부름에 요원이 얼른 대답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부임 할머니네 있자네.”

    “네.”

    “을마 전에 허리를 크게 다치셨다는디 오늘이 해필 소똥 푸는 날이라고만.”

    “아, 그래요?”

    “우덜이 째깐 도와드리믄 좋겄는디, 채 순경이 지금 잔 가볼 수 있겄는가?”

    “그럼요, 소장님. 제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완벽하게 평상심을 되찾은 얼굴로, 아니, 그런 척 자리에서 일어난 요원이 벗어둔 모자를 푹 눌러쓰며 파출소를 나섰다.

    ***

    “어르신, 계세요? 저 채 순경입니다.”

    넓은 축사 앞에 자전거를 세워둔 요원이 막 모자를 벗으며 축사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

    축사 안에서 빠르게 튀어나온 누군가가 요원의 가슴에 삽을 퍽, 강하게 안겨주며 어디론가 다급하게 향하는 뒷모습을 보았는데.

    “어?”

    그 잘난 뒤태가 누구의 것인지 너무도 잘 아는 요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상대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하무경 씨?”

    욱. 축사에서 최대한으로 멀어진 무경이 담벼락을 붙들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조금 전 축사 안에서 무경은,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대충 둥둥 걷어붙이고서 삽질을 시작했다.

    삽질 한 번엔, 입엔 차마 담을 수 없는 욕을 씹어 뱉고.

    삽질 두 번엔, 생전 처음으로 제 아버지를 씹었다.

    어차피 가시는 마당에 뭔 욕심과 미련이 그리도 남으셔서, 마지막 소원을 빌미로 이 귀한 막내아들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시키시는지. 마음을 그렇게 못되게 잡수시니 그런 무시무시한 병에 걸린 겁니다, 회장님.

    씨발, 씨발, 존나 씨발, 거리며 삽질을 하다가 소똥이 저의 값비싼 셔츠에 튀었을 땐, 더는 참지 못한 무경이 끼고 있는 장갑을 손수레 위에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며 그곳을 뛰쳐나온 것이다.

    담벼락을 붙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메슥거리는 가슴을 몇 번 더 문지르던 무경이 그 담벼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서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았다.

    음메-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무경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라이터를 탕, 위로 올려 불을 붙였다.

    눈매를 가느다랗게 찡그린 그가, 양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담배를 깊게 빨면서 백야마을을 한눈에 담았다.

    부임 어르신네가 제법 언덕에 있어 백야마을이 한 시야에 다 담겼는데 아름다운 마을임엔 이견이 없다.

    후우.

    매캐한 연기를 길게 내뱉던 무경이 머릿속으로 청사진을 그렸다.

    마을 밀어버리고. 북유럽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아웃렛 건물 세우고.

    저 맑은 하천 주변으론 아이들을 위한 플레이 존을 만들까?

    쇼핑도 하고, 시골 체험도 하고. 좋잖아?

    검지로 백야마을 위에 X자를 그리던 때에,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액정에 뜨는 태호의 이름에 무경이 담배를 빨며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네, 실장님.”

    [상무님. 하 부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담뱃재를 바닥에 툭툭 털면서 무경은 무던하게 반응했다.

    [상무님 라인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이미 손을 뻗었습니다. 회장님 가시면 가장 먼저 상무님부터 쳐낼 거고 그다음엔 상무님 라인 모두 다 함께 도려낼 거라고. 가장 첫 주자는 차태호 실장 네가 될 테니 이제 그만 선택하라고. 제가 상무님께 보고할 거라는 것을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런 겁니다. 상무님 귀에 들어가라고.]

    “그래요?”

    [경고한 겁니다. 상무님께.]

    “어이쿠, 무서워라.”

    무경이 비아냥거렸다.

    [저는 어떻게 되든 아무렴 상관없지만…….]

    조금 전, 바닥으로 떨궜던 담뱃재의 불씨를 무던하게 짓이기던 무경은 태호의 마지막 말엔 잠시 숨을 멈췄다.

    [저는 상무님이 진심으로 걱정됩니다.]

    침묵을 유지한 채 잠시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던 무경이 제 목덜미를 짜증스레 문지르며 그 말을 되뇌었다.

    “차태호 실장은 내가 걱정된다고.”

    피식, 어이없는 웃음도 함께 흘렸다.

    “재밌네요.”

    [상무님.]

    “지금 실장님의 그 말씀이 조금 전까지 소똥을 푸다 나온 내 상황보다 더 재밌습니다.”

    [예? 상무님께서…… 소똥을……요?]

    똑 부러진 태호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이렇게 놀라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무경 상무는 비위가 약하다.

    특히 냄새에 정말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이다.

    지난달, 신사업과 관련하여 중요한 손님들과 선짓국을 먹었던 그 날을 태호는 똑똑히 기억한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한 그릇을 보란 듯 뚝딱 비우고, 손님들과 웃으며 커피까지 마시고, 여유롭게 악수를 하고 헤어진 뒤에 그는 화장실로 뛰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세단 뒤에서도 한참이나 고통을 호소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 그들이 탄 세단은 갓길에 수십 번이고 멈춰 섰고, 그때마다 창백한 낯빛의 무경은 차 밖으로 몇 번이고 뛰어내려 더는 게워내지도 못하는 속을 문지르며 정말 괴로워했었다.

    그러고는 정확히 3일간, 그는 아무런 음식에도 손을 대지 못하고 물만 마셨다. 음식 냄새만 맡으면 역하다는 이유로.

    그 당시에 하무경 상무를 지켜보던 태호의 마음은 경이로운 마음 반, 안쓰러운 마음 반이었는데.

    그 정도로 냄새에 민감한 사람이 지금 소똥을 푸고 있다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으랴.

    “차태호 실장님.”

    어느덧 짧아진 담배꽁초를 발밑으로 던진 무경이 싸늘하게 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태호에게선 답이 없었다.

    “순서가 잘못됐잖아.”

    짜증이 밴 손끝이 셔츠 윗단추를 끄른다.

    “지금 내 걱정을 왜 해요. 나를 왜 걱정을 해. 걱정이란 걸 하려거든 책상 앞에 고고하게 앉아 사인이나 휘갈기는 그들을 걱정해야지, 왜 모든 거 다 내던지고 여기 있는 나를 차태호 실장 당신이!”

    무경의 목소리가 일순 평정심을 잃고 까칠하게 높이 치솟았다.

    [아, 아닙니다, 상무님!]

    그제야, 무경의 말뜻을 정확하게 간파한 태호가 기계 너머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는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상무님을 얼마나 믿고 또 존경하는지요! 동녘의 차기 수장은 당연 상무님이 되실 겁니다! 그 믿음엔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귓가에선 태호의 억울한 음성이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무경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백야마을을 다시금 시야에 담았다.

    안다. 차태호 실장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저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임을. 제게 유일하게 100%의 신뢰를 주는 사람임을.

    다만, 무경이 평소와 답지 않게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래. 어쩌면 말이다.

    된다고 하는 사업은 무조건 됐을 정도로 날카로운 촉을 지닌 그가, 이상하게 이 프로젝트에서만큼은 그 ‘촉’이 안 된다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거 절대 안 돼. 존나 다 파국이다.

    “차태호 실장님.”

    부정적인 생각이 치민 머리를 느릿하게 흔든 무경이 아래턱에 강한 힘을 주니 턱 근육이 사납게 치솟았다.

    “나한테 이러지 마세요, 진짜. 내가 속상하잖아.”

    [죄송합니다, 상무님. 다신 그러지 않겠습니다.]

    무경은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려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냈고 그것을 입에 물었다.

    필터를 앞니로 꽉 씹으며 라이터를 위로 올려 불을 붙이려던 때에.

    “선생님?”

    이 살벌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무경의 귓전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