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21화 (21/116)
  • 21화. 좀 많이 꼴립니다

    “도의요?”

    요원이 눈매를 찌푸리며 그에게 붙들려있는 손목을 빼냈다.

    “이렇게 덥석덥석 붙잡는 건 도의가 있는 거고요?”

    “주고 가야지.”

    “뭘요.”

    무경이 제 목가를 툭툭 가리키며 웃는다.

    “어르신 거라니까?”

    아, 짧게 탄식한 요원이 제 목에 둘려있는 스카프를 다급한 손길로 풀어헤쳤다.

    “여기요.”

    촉감 좋은 스카프를 그의 앞에 내밀자, 무경은 요원과는 반대편의 실크 패브릭을 한 손에 꽉 움켜쥐며 말했다.

    “채 순경 선물, 집에 진짜 있는데. 오늘 안 올 거예요?”

    각자의 손에 한쪽씩 붙잡혀있는 실크 스카프가 마치 팽팽한 줄다리기의 로프처럼 보였다.

    “네. 오늘은 못 갈 것 같습니다.”

    서로 제 쪽으로 강하게 당겨야만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상대에게 끌려가선 안 되는, 줄다리기 로프.

    “진짜?”

    “네. 진짜요.”

    요원이 대답하며 그 스카프를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겨 보았지만, 스카프는 더욱 팽팽해지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슨 힘이…….

    요원은 진심으로 기겁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렇게 강한 악력은 생전 처음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어젠 그렇게 적극적이시더니 오늘은 그렇게 또 어렵네요, 채요원 순경.”

    그는, 이런 무자비한 힘을 주고 있음에도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아니. 여유롭게 웃는 미소와는 달리 검은 눈은 웃지 않고 있었나?

    “못 오는 이유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아직 제대로 발화되지 않은 불씨가 서서히 피어오르는 듯했다.

    “바빠서라고 하고 싶어요?”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요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선생님 속마음이 눈에 뻔히 다 보여서, 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런 말을 한 요원은 오기가 생겼는지, 다시 그에게서부터 스카프를 빼앗아보려 힘을 꽉 주어 당겼다.

    “내 속마음이 뭔데요.”

    그러나, 팽팽한 패브릭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텐션을 유지하기만 할 뿐, 제게 조금도 넘어오질 않는다는 것에 요원은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순경으로서 꽤 많은 남자를 상대해보았지만, 이처럼 뚫을 수 없는 철옹성 같은 단단한 남자는 생전 처음 겪어봤기 때문이다.

    지금껏 상대해왔던 대부분의 남자가 죄다 힘이 없던 것인지, 아니면 이 남자의 힘이 다른 차원인지, 고찰할 때에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응? 내 속마음이 뭔데요.”

    “그건……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나는 내 마음이니까 당연히 잘 알고.”

    무경이 실크 스카프를 손에 몇 번 더 감으며 가볍게 웃는다.

    “내 마음이 뻔히 다 보인다며.”

    그가 스카프를 감을 때마다 그 길이는 짧아졌고 요원도 그 힘에 점차 끌려가고 있었다.

    “채 순경이 정말 잘 본 건지 확인해 보려고 묻는 거니까 편히 말해 봐요. 내 속마음이 뭔데.”

    요원이 대답 대신 입술 안 여린 속살을 깨물 때 그가 확신했다.

    “모르네.”

    웃음기 밴 남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낮게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채 순경님.”

    무경이 요원을 부르며 스카프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훅, 주어 당기자 요원의 잇새에서 비명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고, 그의 앞으로 속절없이 끌려간 요원은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벌어진 무경의 다리 사이에 우뚝, 멈춰 선 뒤였다.

    “나는요.”

    요원을 꽤 로맨틱한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무경은 말했다.

    “채요원 순경한테 좀 많이 꼴립니다.”

    여전히 두 사람의 손엔 같은 스카프가 쥐어져 있었다.

    “저한테 뭘…… 네?”

    요원은 제 귀를 의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꼴린다는 뜻이 뭔지 몰라 되묻는 거예요, 아니면 황당해서 되묻는 거예요. 전자라면 내가 꼴린다는 뜻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선생님은 왜 자꾸…….”

    몰아치는 기세에 자꾸만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면서 요원은 스카프를 얼른 손에서 놓았다.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 거죠?”

    “내가 말씀을 뭘 자꾸 그렇게 했죠.”

    “말이라는 건 머리에서 한번 걸러져 나와야 하는 거죠.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입으로 먼저 뱉고 보는 게 아니라요.”

    “채 순경 원래 직설화법 좋아하잖아요. 아니에요?”

    “직설화법도 직설화법 나름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다르게 어떻게 표현을 할까. 내가 그쪽과 성교하고 싶다고 합니까? 교미를 나누고 싶다고 해요? 그게 더 변태 같고 이상하지 않겠어요?”

    “하무경 씨.”

    “나 채요원 순경하고 자고 싶어요. 뭐 이 정도의 수위를 원하시는 건가?”

    “그만요!”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아 소리를 빽, 내질렀다.

    “저 경찰입니다. 선생님 지금 제게 되게 무례하신 거예요.”

    “언젠 순경도 욕구가 있다 하지 않았나?”

    “그거랑 이건 다른 얘깁니다.”

    “뭐가 다르죠.”

    “그땐 서로 원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무경이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눈썹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전 하무경 씨와 잘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마음도 없는 사람과 살 맞댈 만큼 개방적인 사람이 못 돼요.”

    무경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그 사이로 기가 찬 웃음이 흘렀던 것도 같다.

    “내 입술에 환장했던 어젯밤의 그 여자는 채요원 순경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키스랑 잠자리랑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번엔 요원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고, 역시 그 사이로 기가 찬 웃음이 흘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잠시만요. 정리 좀 해볼게요.”

    요원의 냉담한 반응에 찡그려진 눈썹을 긁어 올리던 무경이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혼자서만 움켜잡고 있던 스카프를 대청마루 위에 대충 내려둔 그가 뻐근한 목덜미를 좌우로 비틀자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채 순경님 말씀은 그거잖아요, 지금.”

    두 개의 손가락으로 찌르르한 관자놀이를 원을 그리듯 문지르던 무경이 픽, 짧게 웃으며 요원의 말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마음도 없는 사람과 한 시간 넘게 물고 빨고 키스하는 건 가능한데 그 이상은 안 된다. 왜냐. 채 순경은 개방적이지 못한 사람이니까. 맞아요?”

    되묻는 무경의 짜게 식은 눈은 더는 웃지 않고 있었다.

    요원이 그에게서 들려온 그 말을 잠시간 심각한 얼굴로 곱씹어봤다.

    막상 상대의 입을 통해 듣는 말은 어딘가 어폐가 있긴 했지만, 요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다.

    “맞습니다.”

    “맞다고?”

    “네.”

    장난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요원의 진지한 낯빛을 물끄러미 살피던 무경이 나 참,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요.”

    주머니에 양손을 무심하게 찔러넣은 그가 요원의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요원을 더욱 비스듬하게 내려다보았다.

    “올해 들어본 말 중 가장 재밌는 말이긴 한데요. 채요원 순경의 진심은 잘 알겠습니다.”

    “이해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우린 앞으로도 계속 키스만 하는 것으로?”

    “볼일 보시고 가세요. 저는 좀 바빠서요.”

    예의가 몸에 밴 요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에게 꾸벅, 묵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무경은, 마당을 빠르게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시선으로만 좇으며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상대는 정작 여유로운 척하지만, 무경의 눈엔 다 보였다.

    지금 요원은 평상심을 완전히 잃었고.

    곧, 제 손에 감기리라는 것도.

    “야이 오사랄 놈아!”

    퍽! 상념에 잠겨있는 무경의 뒤통수를 누군가가 강하게 후려친 것은 그즈음이었다.

    “이봐요, 어르신!”

    제 뒤통수를 부여잡은 무경이 갑순을 돌아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상스러운 행동입니까.”

    “이잉. 그라는 너는 한나도 안 상스럽고야?”

    “제가 누군지 아시면 어르신 제게 절대!”

    “니가 누군디.”

    그 질문엔 무경이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아래턱에 강하게 힘을 주고 있는 무경을 가만 바라보던 갑순이 대청마루 위에 흩어져있는 실크 재질의 스카프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시 머시당가?”

    “감사해서 드리는 겁니다.”

    “니가 나한테 감사할 일이 머시 있당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신 무경이 마당에 피어있는 붉은 꽃들을 바라보며 넌지시 대답했다.

    “전에 죽이요. 채 순경 통해서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실크 재질이라 지금 하시기엔 더울 수 있으니 나중에 날이 좀 더 선선해지거든…….”

    “이잉. 이거 이거 딱이구마잉?”

    무경의 말을 무 자르듯 댕강, 자른 갑순이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스카프를 머리 위에 얹고 그 위에는 점심을 나르기 위한 꽃무늬 쟁반을 보란 듯 올렸다.

    그런 갑순을 잠시 기함하듯 쳐다봤던 무경이 한쪽 허리춤에 손을 비스듬히 얹으며 냉소적으로 물었다.

    “어르신. 그 스카프가 얼마짜리인지는 아시고 지금 그런 용도로 쓰시는 겁니까?”

    “이거시 을만디? 한 오천 원 줬냐잉?”

    “그게 어딜 봐서 오천 원입니까?”

    “이잉. 한 만 원 줬구마잉.”

    저 스카프가 어디 5일장 같은 데서 산 줄 아시나.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무경이 재차 헛웃음 치며 고개를 젓던 때에, 대청마루 위에서 내려온 갑순이 무경에게 대뜸 말했다.

    “니 그라지 말고 나랑 으디 좀 같이 가자잉.”

    무거운 은쟁반을 흔들림 하나 없이 안정적으로 머리에 인 갑순이 무경을 지나쳐 붉은 꽃으로 뒤덮인 마당을 가로질렀다.

    ***

    “부임이 자네, 거 있능가?”

    갑순이 무경을 데리고 온 곳은, 백야마을에서 소를 가장 많이 키우는 최부임네였다.

    “옴마, 성님. 오셨어요잉?”

    축사에서 뛰어나와 갑순을 반기던 부임이 일정 거리 떨어져 있는 무경의 기막히게도 잘생긴 얼굴에 옴마!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성님, 저짝이 이번에 새로 이사 온 그 총각이요?”

    “이잉. 맞어.”

    “옴마, 요즘 친구들은 으찌 저라고 잘생겼소?”

    “부임이, 오늘 소똥 풀 사람이 필요하다 안 했는가?”

    “필요하죠잉. 혼자 할랑께 아주 허리가 아퍼 죽거써라.”

    “저짝 총각 시켜부러.”

    “고거시 참말이요?”

    “공짜는 정 없응게 한 3만 원 정도 찔러주고잉. 저짝이 지금 백수여.”

    “잠시만요, 어르신.”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있던 손을 빼낸 무경이 뚜벅뚜벅, 두 어르신 앞에 삐딱하게 서며 싸늘한 시선을 내렸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갑순은 창백해진 무경의 잘나 빠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귓가에 마지막 말을 정확히 때려 박았다.

    “니 소똥 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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