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7화 (17/116)
  • 17화. 동녘 남매의 난

    [ ※ 추천곡 : 자우림 - PÉON PÉON ]

    한강 전망이 끝내주는 73층의 레스토랑 안에 하태경과 하가경이 있었다.

    “요즘 하 상무가 회사에서 잘 안 보이던데.”

    하태경의 입에서 나온 무경의 이야기에,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위로 챙, 사납게 집어 던진 하가경이 볼멘소리를 냈다.

    “부사장님. 나 그 자식을 정말 어떻게 해야 해요?”

    하태경은 무표정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로 스테이크를 서걱서걱 썰며 침묵했다.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그 새끼 그게 나 엿 먹인 거?”

    “말 가려 해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어디든 많으니.”

    주변을 슥, 한번 훑은 하가경이 제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바짝 붙이고서 고자질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하무경 그 새끼가 내 라인들을 하나둘 정리하고 있다고요.”

    “하 상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정리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무슨 뜻이에요?”

    “회사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은 정리하는 게 맞지.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일이다.”

    “오빠!”

    “가경아.”

    테이블 위의 와인병을 부드럽게 낚아채어 하가경의 빈 잔을 쪼르르 채우는 하태경의 자세는 품격 그 자체였다.

    “넌 능력이 없다.”

    목소리는 절대로 높이지 않으며 톤은 항상 일정하다.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한들 네 자리는 딱 거기까지야.”

    와인병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둔 하태경이 나이프와 포크를 다시 손에 쥐고 스테이크를 서걱서걱 썰었다.

    “넌 욕심 내지 말고 내게 힘을 실어라. 그게 네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하 상무를 이기는 길이니.”

    하태경이 써는 레어 스테이크의 핏물이 접시를 흥건히 적시기 시작하던 때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저…… 부사장님, 전무님.”

    “뭔데요?”

    찌르르한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던 하가경이 그 손을 확, 신경질적으로 치워내며 제 앞에 선 매니저를 퉁명스레 바라보았다.

    “상무님 오셨습니다.”

    “누가 와요?”

    매니저의 경직된 목소리를 같이 들은 하가경과 하태경이 동시에 한 곳을 바라보았고, 여태껏 견고하던 하태경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운이 스친 건 찰나였다.

    “저 새끼가 왜?”

    하가경이 갑작스레 나타난 무경을 보고 놀랐다면 하태경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앉으세요.”

    바로 무경과 함께 온 여인 때문이었다.

    “신수민 씨.”

    하태경의 옆, 빈 의자를 빼낸 무경이 신사적으로 미소 지으며 신수민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아…… 네.”

    잠시 머뭇거리던 신수민이 그 의자 위에 조심스레 몸을 앉혔고, 무경은 테이블을 빙 돌아 하가경의 옆 빈 의자를 빼내 점잖게 몸을 앉혔다.

    “저희도 같은 것으로 주세요. 레어 말고 웰던으로. 핏물은 비위가 상해서.”

    격식을 갖춰 다가온 웨이터에게 주문을 마친 무경이 슈트 재킷을 벗어 의자 뒤에 걸었다.

    “아차. 신수민 씨는 레어로 시켜드릴 걸 그랬나?”

    하얀 리넨 냅킨을 허공 위에서 팔락, 흔들어 제 허벅지 위에 담백한 동작으로 떨군 무경이 신수민을 보며 활짝 웃었다.

    “하태경 부사장님은 원래 레어만 드시니까. 두 사람, 취향이 같지 않을까 해서.”

    챙그랑!

    하태경이 양손에 각각 쥐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로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자, 하가경의 눈썹이 일순 묘하게 위로 치솟아 하태경을 이상한 눈으로 응시했다.

    “하무경 상무.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가?”

    절대로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하태경이 아래턱에 강한 힘을 꽉 주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선 넘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하태경과 달리 무경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메뉴판을 넘겨봤다.

    “저도 그 수준에 맞춰 선을 좀 넘어드렸는데. 왜요. 우리 형님 맘엔 안 드셨나?”

    흥미가 떨어졌단 얼굴로 메뉴판을 탁, 덮어 테이블 위로 던진 무경이 하태경을 직시한 채 픽 하고 비소했다.

    “왜들 그래? 저 여자가 대체 누군데?”

    하가경이 불쑥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어 물었고.

    “누구겠습니까. 부사장님 이거지.”

    무경은 제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두 번 까딱 흔들었다.

    “뭐?”

    더러운 것 보듯 신수민을 노려보던 하가경이 곧장 무경을 질타했다.

    “하 상무.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이런 자리에 저런 년을 데리고 오면 어떡해!”

    “에이. 년이라니.”

    제 턱을 하가경의 어깨 위에 넌지시 기댄 무경이 하가경의 턱을 큼직한 손으로 덥석 붙잡아 정면으로 돌리자, 하가경은 제 의지와는 달리 하태경을 정시하는 자세가 되었다.

    “말 가려 하세요, 하가경 전무님. 우리 부사장님 언짢아하시잖아.”

    하태경이 언짢은 건 사실이다. 무경이 신수민을 이 자리에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확실하게 조롱하고 깔보기 위함임을 아니.

    “요즘 우리 부사장님이 저분 때문에 아주 정신을 못 차리신다는데. 그 나이 먹고 힘도 좋으셔.”

    “하무경 상무!”

    테이블 다리를 발로 쾅, 세게 걷어찼던 하태경이 주변의 시선을 자각하곤, 넥타이를 살짝 끌러 내리며 깊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그래. 하무경 상무. 한번 들어나 보고 싶구나. 내가 무슨 선을 넘었다는 건지.”

    “명분이 있어야 확고하게 지배한다. 누구 말인지 아십니까. 아셔야 할 겁니다. 인터뷰에서 봤거든요. 하태경 부사장님은 그에게서 리더십을 배우신다고.”

    “칭기즈칸의 격언이로구나.”

    찡그려진 미간을 엄지로 누르면서 하태경이 조용히 대꾸했다.

    “정확하십니다.”

    웃으며 웨이터가 세팅해주고 간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집어 든 무경이 그 나이프를 냅킨으로 다시 한번 잘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제게 더 이상의 명분은 심어주지 마실 것을 부탁드리기 위해.”

    “명분. 무슨 명분 말이더냐.”

    “확고하게 지배하고 싶은 명분 말입니다.”

    “좀 더 쉽게 이해시켜라.”

    “제 혼사 이야기를 나누고 다니신다 들었습니다.”

    “너도 이제 네 가정을 꾸려야지.”

    “부사장님 가정 먼저 돌보시는 편이 어떠한지.”

    쥐고 있는 나이프로 신수민을 비스듬하게 가리킨 무경이 씩 웃으며 보란 듯 선을 넘는다.

    “까딱하면 나락인 것 같은데.”

    “하무경 상무. 거기까지만 해라.”

    “우리 형수님 빡빡한 분이잖아요. 뭐, 형님이 밖으로 도는 이유를 내가 모르는 건 아닌데. 그래도 조강지처 놔두고 딴 여자랑 흘레붙는 건 도의가 아니지.”

    “하무경 상무!”

    “하태경 부사장님!”

    하태경의 날이 선 음성을 그보다 더 매서운 목소리가 우습게 찍어누르며 분위기는 일순 싸해졌다.

    “형님.”

    평온을 되찾기 위해 제 머리를 한번 쓸어올린 무경이 제 나이프를 태경의 스테이크 위에 강하게 콱, 박아넣으며.

    “나한테 제발 개기지 마세요.”

    아까와는 다른 얼굴로 마지막 말을 짓씹었다.

    “더는 안 참습니다.”

    하태경의 눈매는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어머. 웬일이니. 나 너무 재밌어.”

    하가경은 허공에서 물개처럼 손뼉을 치며 깔깔 웃어댔다.

    나이프의 손잡이에서 손을 스르륵 떼어낸 무경이 느른하게 팔짱을 끼며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

    고개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하태경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듯 눈매를 가늘게 좁힌다.

    빈틈없는 완벽한 자태와는 달리 하태경의 손에 쥐어져 있는 나이프와 포크가 부들부들 크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무경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제 허벅지 위에 내려뒀던 리넨 냅킨을 낚아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게 자-알 구경했습니다.”

    리넨 냅킨을 의자 위에 탁 집어 던진 무경이 슈트 재킷을 잡아채 허공에서 팔을 끼워 넣는 사이에, 하가경은 하도 웃어 고인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냈다.

    “막내한테 엿 먹은 기분이 어때요, 오빠? 이제 내 심정을 좀 알겠어요?”

    “하가경 전무님.”

    슈트 재킷을 다 챙겨입은 무경은 제 입꼬리는 끌어올리고 시선은 한껏 밑으로 깔아 하가경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뇌까렸다.

    “누님은 뭐 좋다고 그리 실실 처웃고 있어요. 본인이 처한 현 상황도 모르고 존나 한심하게.”

    “이 새끼가 왜 또 나한테 지랄이야?!”

    그 한마디에 하가경의 웃고 있던 얼굴엔 서슬 퍼런 날이 드리웠고.

    “그래. 그럼 지금부터 그 새끼 말 잘 들어, 누님.”

    무경은 하가경을 작정하고 도발하려는 사람처럼 그대로 허리를 굽혀 하가경과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하가경의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주는 다정한 제스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음성을 그녀의 귀에 곧장 때려 박았다.

    “하가경 전무님은 오늘부로 은평점에서 아웃입니다. 오늘부로 그 은평점은 이 새끼가 맡게 됐고.”

    하가경의 눈이 흡 하고 큼지막하게 벌어지는 것을 무경은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허리를 세웠다.

    “그간 개판 치느라 수고 많았어요.”

    슈트 재킷의 마지막 단추까지 정갈하게 걸어 잠근 무경이 킥, 웃으며 레스토랑 밖으로 뚜벅뚜벅 향할 때였다.

    “아악! 저 개씹! 야이 개좆같은 씨발 썅놈의 새끼야!”

    하가경의 화려한 욕설이 무경의 넓은 등 뒤에서 퍼레이드처럼 낭랑하게 울려 퍼졌고.

    “옳지, 잘한다!”

    무경은 그에 추임새를 넣듯 흥얼거리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앞으로 벌어질 ‘동녘 남매의 난’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블랙코미디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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