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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14화 (14/116)
  • 14화. 어제도 그제도 지금도

    챙! 하고 대청마루 위에 부딪힌 숟가락이 작은 소란을 만들어냈다.

    조금 전, 그에게 행했던 제 행동과 생각을 모두 다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꽃을 피운다.

    남자는 자는 척했던 것일까?

    “아하.”

    무경이 양은 밥상 위의 식기류를 옆으로 한꺼번에 밀어내며 그곳에 팔꿈치를 기댔다.

    “꿈인 줄 알았는데 이게 생각하면 할수록 꿈이 아닌 것 같아서 한번 떠봤더니만. 지금 채 순경님을 보니 내가 확실해졌네요.”

    균열 하나 가지 않은 견고한 얼굴로 요원을 똑바로 직시한 그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그거, 꿈 아니었네.”

    제 속마음까지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 요원은 이제 얼굴도 모자라 귀, 목, 몸 전체가 불에 타는 기분을 받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만지려던 건 아니었고…… 아, 아까 선생님 입술에 뭐가 좀 묻어서…….”

    “에이. 거짓말.”

    “정말이에요.”

    “순 거짓말.”

    “저, 정말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핑계도 변명도 대지 말고 그 어떠한 거짓말도 내 앞에서 하지 말고. 그냥 툭 까놓고 솔직히 말해요. 채 순경님 아까 무슨 생각 하셨어요?”

    남자의 낮게 깔린 목소리는 감미로운 듯 절대 감미롭지 않았고.

    “그냥…… 저는 그냥…… 선생님이 잘 주무시기에 아, 이제 안 아프시구나, 다행이다, 하고.”

    요원은 평소와 달리 횡설수설했다.

    “그게 다예요?”

    “네.”

    “그래요?”

    “네.”

    “정말?”

    “네.”

    우당탕!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양은 밥상을 걷어차 옆으로 대번에 밀어버린 무경이 요원의 팔목을 덥석 붙잡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헉!”

    어찌할 새도 없이 그의 앞으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요원의 몸은, 그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털썩, 주저앉은 모양새가 되었고.

    “아니잖아.”

    요원의 팔뚝을 붙잡고 있던 무경의 큼지막한 손이 요원의 얼굴 쪽으로 서서히 향했다.

    “그거 아니잖아요.”

    요원의 뺨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남자의 손짓이 꽤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키스하고 싶었지. 아까 나랑.”

    “선생님. 그런 게 아니라요.”

    “난 그러고 싶어서.”

    고개를 뒤로 젖혀 요원을 올려다보는 남자가 농염하게 웃으며 말한다.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지금도.”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있는 태연한 얼굴과는 달리, 아니, 점잖아 보이기까지 하는 무던한 얼굴과는 달리.

    “나 없는 며칠간 이 논제에 대해 잘 한번 생각해봐요.”

    흥분한 남성이, 팽팽한 앞섶이, 요원에게 확연히 전달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무경보다 높은 위치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요원의 시선이 가파르게 흔들렸고.

    “채요원 순경과 나.”

    중심을 잡기 위해 그의 어깨를 살짝 짚고 있는 요원의 손끝은 잘게 떨렸으며.

    “내가 백야마을로 돌아오는 차주에.”

    온몸에 번지는 긴장감에 하도 힘이 들어가서, 대청마루 위를 찍어내리 듯 누르고 있는 양 무릎엔 곧 멍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이 논제에 대해 다시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속삭여지는 남자의 음성이, 독약을 숨긴 사과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시각 무경은.

    저를 수줍게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요원을 가느다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한참을 올려다보면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존나 다 망하겠구나.

    ***

    동녘 그룹 정문 앞에 고급 세단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내린 태호가 뒷좌석의 문을 열기도 전에 무경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왁스로 넘긴 멀끔한 헤어 스타일, 탄탄한 몸을 감싸고 있는 세련된 슈트의 자태.

    그가 동녘 그룹의 높은 빌딩을 한눈에 올려다보며 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서울의 탁한 공기. 빼곡한 빌딩 숲. 여유도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는 현대인들의 얼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니 이 얼마나 좋은가.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출근하던 동녘 직원들이 그를 발견하곤 냉큼 고개를 숙였다.

    무경이 직원들에게 묵례하며 뚜벅뚜벅, 정문으로 향하자 그의 뒤를 태호와 이준이 곧장 따라붙었다.

    그가 향하는 길은 홍해처럼 쫙 갈라져 그의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 따윈 없었다.

    보장된 탄탄대로. 그게 바로 하무경의 인생이 아닌가.

    “상무님, 올라가십니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안 요원이 임원용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딸깍 누르고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무경이 보안 요원과 까딱 인사를 나누며, 이미 열린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홍보실에 잠시 들릅니다. 담당자들에게 연락 좀 넣어주시고.”

    “예, 상무님.”

    이준이 7층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꺼냈고 무경은 슈트 재킷의 단추를 잘 걸어 잠그며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댔다.

    “상무님 지금 오신답니다!”

    갑작스러운 하무경 상무의 방문에 홍보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가 직접 내려오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회의실 불을 켜고 상쾌한 공기를 위한 청정기를 틀고 그가 앉을 상석의 자리 위에 커피를 미리 세팅한다.

    얼마 후, 무경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니 7층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일동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 숙였다.

    “상무님. 회의실로 바로 가시면 됩니다.”

    그의 오른편에 서있는 태호가 비밀스럽게 중얼거렸고, 무경은 넥타이를 휘날리듯 성큼성큼 회의실로 직진했다.

    그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홍보팀의 대표로 상무를 상대하기 위해 들어온 네 명의 담당들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공손하게 섰다.

    “앉으세요.”

    상석에 앉은 무경이 커피잔을 손에 쥐며 담당들에게 손짓했다.

    그제야 담당들이 그를 빙 둘러싸듯 자리에 앉았고, 무경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작게 웃었다.

    “향이 참 좋네요. 맛도 좋고.”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달칵 내려둔 무경이 슈트 재킷을 벗으니 곁에 서 있던 이준이 그것을 얼른 받아들었다.

    “홍보팀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사항이 있어 아침부터 좀 급하게 찾아왔는데요. 업무를 방해했다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상무님. 뭐든 말씀하십시오.”

    “지금으로부터 2개월로 합시다.”

    “예? 뭘…….”

    대답 대신 다시 커피 한 모금을 삼킨 무경이 진짜 맛있네, 중얼거리며 잔을 내려뒀다.

    “포털에서 하무경이란 이름을 검색했을 때. 기사고 뭐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조치 부탁드립니다.”

    “예?”

    “더 간단히 해드려요?”

    여전히 이해 못 하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깍지 낀 손 위에 느른하게 턱을 기댄 그가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 2개월. 하무경을 동녘 그룹에서 깔끔히 지워주시라고.”

    하실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한 무경이 또 비밀스럽게 웃었다.

    동녘에서의 하무경은, 할 일이 없어 온종일 선풍기와 싸우던 백야의 빈둥거리는 하무경이 아니다.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하고 데스크에 쌓인 서류를 늦은 오후까지 훑어야 했고, 몇 개의 임원 회의에 참석했으며, 오늘 소화해야 할 마지막 일정은 대한 클럽의 정기 모임 참석이다.

    무경이 몸담은 대한 클럽은 정·재계 인사만 가입할 수 있는, 오랜 전통을 지닌 사교 클럽이다.

    한 달에 한 번씩, 혹은 분기별로 한 번씩 만나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그리고 경제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거나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친목을 다지는 등의 의도는 굉장히 좋은 곳이었으나.

    사실상 이 대한 클럽은 그냥.

    서로 누가 누가 더 잘났나 존나 허세만 부리다 오는 게 전부인 곳이었다.

    “하무경 상무!”

    대한 시그니처 호텔 VVIP 라운지 바에 들어서는 무경을 가장 먼저 발견한 라주연이 그를 향해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와. 쟤는 어떻게 된 게 한 번을 안 빠지네.

    잠시 고개를 옆으로 틀어 욕지거리하던 무경이 다시 표정 관리를 하듯 웃으며 제 앞으로 다가온 주연과 눈을 맞췄다.

    “라주연 상무. 오랜만이네요.”

    “우리 자기는 안 본 사이에 더 맛있어졌네? 먹고 싶게?”

    “또 주사 부리시네. 그놈의 술 좀 작작 드시라니까.”

    “우리 하 상무 자기,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나 너무 행복한데?”

    주연이 보란 듯 무경의 팔에 팔짱을 꼈고 무경이 보란 듯 그 손을 밀어내니, 주연의 입술은 금세 삐죽거렸다.

    “또 비싸게 구는 거야?”

    “구는 게 아니라 비싸요.”

    “자기 얼만데? 내가 다 줄게.”

    “라주연 상무한텐 안 팔아요.”

    주연이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멀어지는 남자의 잘난 뒤태를 흘기다가 작게 웃었다.

    대한 클럽의 모임엔 각 멤버들의 지정석이 있고 그 지정석도 그 사람의 레벨에 따라 정해지는데, 무경의 지정석은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이미 대한 클럽 내에서도 동녘 그룹 차기 수장을 하무경으로 봤으니 당연했다.

    제 지정석에 앉은 무경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리 하 상무는 그 담배 참 못 끊어?”

    “술이나 끊고 말하세요.”

    눈매를 좁히며 라이터를 탕, 탕, 탕, 튕긴 무경이 연기를 깊게 빨아들임과 동시에 소파에 몸을 길게 늘어트리며 제 앞에 앉는 주연을 퉁명스레 바라봤다.

    “자리도 많은데 다른 데 가 앉지? 좀 부담스러운데.”

    연기를 길게 내뱉은 무경이 담배를 걸고 있는 팔을 소파 헤드 위에 올렸다.

    “아무튼, 더럽게 튕겨요.”

    그런 무경을 잠시 흘겼던 주연이 아, 소리를 내며 그에게로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하 상무 자기, 소식 못 들었지?”

    무경은 대답 대신 담배를 물고 볼이 움푹 팰 정도로 연기를 깊게 빨았다.

    “저기 쟤 보이지? 바이올리니스트, 정나경. 아버지는 현 국무총리 정상철.”

    무경이 담배 연기를 후-, 길게 내뱉으며 주연의 손끝을 시선으로 따라갔다.

    “이번에 자기랑 혼사 얘기 오간다던데?”

    그 말엔 푸스스 웃음이 흘렀다.

    “당사자도 모르는 혼사 얘기를 라주연 상무가 다 아시네.”

    그의 잇새에서 웃음과 함께 흐른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길게 늘어졌다.

    “자기가 원래 소식통이 느리잖아?”

    “느린 게 아니야. 관심이 없는 거지.”

    “어머, 그러면 자기야. 자기는 계속 지금처럼 관심 갖지 마? 내가 다 전달해줄게. 나 자기한테 도움 되는 거 너무 좋잖아.”

    무경은 큰 반응 없이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저쪽에선 자기 되게 마음에 들어 한대. 봐봐, 하 상무. 정나경이 하 상무를 보는 눈빛. 안 보여?”

    무경이 연기를 길게 뱉으며 정나경을 가만 바라봤다.

    아까부터 바에 비스듬히 기대어 자신을 응시하는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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