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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13화 (13/116)
  • 13화. 오히려 좋아

    오전은 그렇게 금방 도망가고 오후 2시 즈음이 되었다.

    파출소 벤치 앞에 앉아있는 요원에게로 다가온 성준이 그녀에게 종이컵을 내밀며 옆에 앉았다.

    “채 순경. 오늘따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경장님.”

    “응.”

    “집에 의사가 찾아오는 경우가 흔할까요?”

    “집에 의사가 와?”

    요원이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을 덧붙였다.

    “아프다고 의사가 집까지 찾아오는 경우요.”

    “왜 없어. 우리 옥남이 원장님도 이 집 저 집 잘만 다니시잖아.”

    “아니요. 그런 느낌은 또 아니라서요.”

    “그럼 무슨 느낌인데?”

    “뭐랄까.”

    아까 보았던 그 남자는 남이와는 결이 확실히 달랐지.

    “이게 말로는 설명하기 좀 그런데요.”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집이 오지게 잘사는 모양이지.”

    “잘사는 것 같긴 한데. 아니. 그게 또 딱히 잘사는 것 같진 않아서요.”

    “그게 대체 뭔. 채 순경, 너 언어 다시 배우고 와.”

    핀잔을 준 성준이 종이컵을 와락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들어오기나 해. 소장님이 찾으셔.”

    “왜요?”

    “저기 그 소하마을 영순이네. 누가 자꾸만 배추를 훔쳐간대. 면밀히 조사를 좀 해봐야겠어.”

    “아. 배추.”

    성준처럼 종이컵을 손안에서 구기며 벤치에서 일어나던 때에 요원의 핸드폰이 지잉, 지잉, 지잉, 울렸다.

    누군가의 전화를 온종일 기다리던 사람처럼 주머니를 다급히 뒤진 요원이 핸드폰을 빠르게 꺼냈다.

    그러고는 기대에 찬 얼굴로 액정을 확인하는데,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그 얼굴이 금세 김이 새선 전화를 받는다.

    “네, 할머니.”

    [이잉. 저짝 총각 지금 집에 있겠제?]

    “총각이요? 하무경 씨요?”

    [이잉. 아프담서. 나가 죽을 좀 썼는데 그짝이 이짝으로 오긴 좀 그랄 테고 내가 저짝으로 쪼까 갖다 줘야거써.]

    “제가요! 제가! 제가 갈게요!”

    [옴마? 요원이 니가야?]

    “네. 제가요.”

    머리보다 입이 먼저 반응한 드문 경우였고.

    “저 마침 그쪽에 갈 일이 있어서요. 하무경 씨에겐 제가 갖다 줄게요.”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는, 참 희한한 경우였다.

    자전거를 타고 백야마을까지 20분. 죽이 든 냄비를 양손에 쥐고 무경이 거주하는 집까지 뛰어선 5분.

    굳게 닫혀있는 철제문 앞에서 헐떡이는 호흡을 몇 번 가다듬은 요원이 손이 없어 발로 문을 쿵쿵, 두드렸다.

    “선생님? 저 채요원 순경입니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요원의 얼굴빛이 금세 걱정이란 감정으로 물들었다.

    혹시, 아직도 아파서 못 일어나는 건가?

    허리를 굽혀 냄비를 잠시 바닥에 내려둔 요원이 철제문을 잡아 열려는데 안에 있던 사람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엄마야?”

    상대가 철제문을 확, 젖히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요원이 휘청이며 누군가의 품에 폭 안기다시피 기울어졌으니.

    “아…….”

    반사적으로 제 허리에 팔을 휘감아 저를 지탱해준 남자를 요원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멍하니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하무경…… 씨?”

    남자의 향기를 실은 바람이 어디에선가 넘실넘실 흘러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 가세요?”

    정신을 차리고 던진 첫마디는 이거였다. 몸은 괜찮아요? 가 아니라.

    고급스러운 슈트 차림에 왁스로 깔끔하게 넘긴 단정한 헤어 스타일 때문이었다.

    무경은 여전히 요원의 허리에 팔을 휘감은 채였다. 아니.

    “서울에요.”

    작정하고 한 걸음 더 다가와 제 하체를 요원에게 바짝 밀착시켰다.

    “서울은, 왜요?”

    요원은 제게로 겁주듯이 바짝 다가온 남자를 피하지 않으며 또 물었다.

    상대가 겁을 먹지 않아 김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욱 흥미롭단 얼굴로 피식, 웃음을 터트린 무경이 한 걸음 뒤로 깔끔하게 물러나며 대답했다.

    “볼일이 좀 있어서요.”

    그녀의 얇은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도 스르륵 뱀처럼 제게서 빠져나간다.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채요원 순경. 안 그래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또 친히 다 방문을 해주시고. 역시. 백야마을의 지킴이다워?”

    “언제 오시는데요? 다시 오시는 건 맞죠?”

    요원의 잇따른 질문에 웃고 있던 무경의 눈빛이 불시에 서늘해진 것도 같았다.

    “…….”

    어딘지 모르게 싸늘해져선 요원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그 차가운 빛을 지우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다시 돌아올 겁니다.”

    “서울엔 왜 가세요? 면접 보러 가세요?”

    “면접을. 내가.”

    그 말을 읊조리던 무경이 재미있다는 듯 킥 웃으며 셔츠 깃을 세웠고, 요원은 뒷짐을 지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 차림이 딱 그래서요.”

    “맞아요, 면접.”

    “면접이 늦게 잡혔나 봐요. 지금 서울 가시면 밤일 텐데. 아니다. 내일 아침 면접이군요?”

    “그렇죠, 뭐.”

    “그런데 벌써 슈트를 입어요?”

    “아버지는 나 백수 된 거 모르시거든요. 이 정도로 차려입고 가야 의심을 안 하시겠죠. 워낙 엄하신 분이라.”

    “아.”

    그럴 수 있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요원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요. 합격하시면 다시 서울로 완전히 가실 계획인가요? 근데요. 서울에 면접을 보러 다닐 거면서 여긴 굳이 왜 내려오신 거예요?”

    넥타이를 목에 두르던 무경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오늘 좀 이상하시네, 채요원 순경.”

    깃을 교차시켜 빠르게 매듭을 만드는 손길이 한두 번 넥타이를 매본 솜씨가 아니라 생각했다.

    “하루 만에 내가 그렇게 궁금해졌나? 이젠 나에 대해 다 물어보기로 한 거예요?”

    “불편하셨다면,”

    “아니.”

    넥타이의 매듭을 쭉 끌어올려 목을 꽉 옥죈 무경이 상냥하게 웃으며 시원스레 말한다.

    “오히려 좋아.”

    기다란 검지로 요원의 콧등을 툭툭 두드린 무경이 요원을 등졌다.

    “내가 채요원 순경에게 너무 고마워서 답례를 좀 하고 싶은데요.”

    요원은 남자의 손가락이 스쳤던 제 콧등을 살짝 만져보며 남자의 넓은 등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답례요?”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진 것도 모른 채로.

    “채요원 순경은 혹시 뭐 좋아해요? 가방? 옷? 쥬얼리? 신발? 뭐든 좋으니 말만 해요.”

    어느새 대청마루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남자는 검은 정장 구두에 발을 넣으며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죽…….”

    “죽?”

    요원은 또 머리보다 입이 먼저 반응해 그런 단어를 뱉었다.

    “죽을 사달라고?”

    무경이 믿기 어려운 얼굴로 되물었고 요원은 말을 빠르게 정정했다.

    “아니요. 그러니까, 죽. 죽을 좀 드시고 가세요.”

    “죽을 먹고 가라고?”

    “네.”

    철제문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간 요원이 냄비를 다시 두 손으로 쥐고 마당 안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저희 할머니가 선생님 드리라고 해서 이 죽을 좀 가져왔거든요. 이거. 이거요.”

    냄비를 허공 위에서 번쩍 들어 올린 요원이 대청마루 위의 무경을 바라본 채 해사하게 웃으며 부탁했다.

    “드시고 가시면 안 돼요?”

    순간적으로 쨍하니 여자의 얼굴 위에서 햇살이 새하얗게 부서졌고, 무경은 눈이 부셔 눈매를 찡그렸다.

    “…….”

    남자의 현재 기분을 대변하듯 다리를 넓게 옆으로 벌린 그가, 구둣발로 바닥 위를 타탁탁탁 이상한 박자에 맞춰 두드리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몇 번 터치한 뒤에 그것을 귓가에 밀착시킨 그가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나 30분만요.”

    양은 밥상 위에 냄비 한 그릇. 은수저는 두 개.

    집 안에서 우당탕탕 거린 무경이 다시 대청마루 밖으로 나와 밥상 앞에 양반다리 하고 앉았다.

    앞접시 두 개와 국자를 챙겨 나온 남자가 냄비 안에 국자를 넣고 몇 번 휘적이더니 죽을 떠서 그릇에 담고 그것을 요원의 앞에 내밀며 물었다.

    “할머니는 뭘 좋아하세요.”

    “저희 할머니요?”

    “감사해서요. 답례를 좀 하고 싶은데.”

    “아니에요. 그냥 죽인데요.”

    “그냥 죽 안에 무려 전복이 들어갔네요.”

    “여긴 전복이 싸요.”

    국자로 냄비 안을 다시 휘적거리던 무경이 제 반대편 손목의 시계를 힐끗 확인하며 말했다.

    “내가 할머님 얼굴 뵙고 갈 시간까진 안 되고 나 대신 감사 인사 좀 전해주죠. 돌아와서 적절하게 답례할 테니.”

    “답례를 되게 좋아하시는 모양이에요.”

    “좋아한다기보단, 원래 나 같은 사람들은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해야 뒷말이 안 나오는 법이거든.”

    “선생님 같은 사람이 뭔데요?”

    제 그릇에 죽을 담던 무경이 잠시 멈칫해선 요원을 쳐다봤다.

    “아깐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내가 진짜 궁금해졌나 봐.”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그릇 위로 시선을 내릴 때였다.

    “궁금해요.”

    또 한 번 멈칫했던 무경이 국자를 조금 거칠게 내려두며 받아쳤다.

    “누가.”

    “선생님이요.”

    요원이 숟가락을 입에 물며 두 눈을 사르륵 접어 웃는다.

    꽃을 닮은 화사한 미소를 보자마자 무경의 눈썹이 다시 한번 움찔.

    거기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달까.”

    저런 예쁜 얼굴로 저런 나긋한 말을 던지니까.

    “누굴.”

    “선생님을요.”

    “나를?”

    “네. 하무경 씨요. 앞으로 더 많이 알려주세요.”

    내가 환장을 해? 안 해.

    어딘가가 또 욱신거리는 기분에 무경은 찌르르하게 울리는 관자놀이를 짜증스레 문질렀다.

    하, 시니컬한 한숨도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이봐요, 채요원 순경.”

    무경의 낯빛이 금세 안 좋아졌음을 깨달은 요원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또 어디가 아프세요?”

    “아프네요.”

    “어디가요?”

    “몰라요.”

    “몰라요?”

    “어딘가가 아파 죽겠는데 그게 어딘지를 잘.”

    씨발, 나도 잘 모르겠네.

    허탈하게 실소하며 제 피로한 눈가를 쓸던 무경이 요원과 다시 친절히 눈을 맞추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나도 하나만 물읍시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시끄럽게 느껴진 것은, 저만의 착각인 걸까?

    “아까 무슨 생각 했어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요원은 두 눈만 깜빡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이해를 잘 못 하겠네요.”

    “아까 내 입술 계속 만지면서.”

    순간적으로 요원의 손에 힘이 빠졌고.

    “채 순경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느냐고.”

    쥐고 있던 숟가락을 그대로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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