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2화 (12/116)

12화. 혼절한 새벽

간신히 핸드폰을 집어 얼굴 앞으로 끌고 온 무경이 가느다래진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45분.

태호의 번호를 찾은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예! 상무님!]

태호는 신호음이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곧장 응답했다.

불쌍한 영혼이라 생각했으나 어쩔 수가 없다. 당장 나부터 저세상 가게 생겼으니.

“하아…….”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배를 더 꽉 움켜쥔 무경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실장님…… 나…… 나 아무래도 그게 또…….”

[상무님. 혹시, 위경련이 또 왔습니까?]

“야, 약…… 약…… 어딨어요…….”

[사, 상무님! 구급약 상자 안에 진경제가 있습니다! 약상자가 어딨냐면요! 방에 들어가 보시면 서랍장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 마지막 서랍 열어보시면 있습니다. 바로 보입니다! 상무님!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움직일 수 있으세요? 상무님!]

윽, 무경이 신음했다. 순간적으로 명치 끝에 감당이 어려운 통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제 명치에 칼을 박아넣는 강한 통증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동시에 무경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마저 툭 떨어졌고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 배를 감싸 쥔 무경이 몸을 더욱 작게 움츠러트렸다.

[사, 상무님! 상무님! 제가 지금 바로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상무님!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세요!]

핸드폰 너머에서 태호의 절규 비슷한 외침이 들려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무경은 헉헉대며 제 명치를 문질렀다.

오래도록 위경련을 달고 산 무경은 이다음 패턴을 예상할 수 있었다.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나는 곧 호흡곤란이 올 테고.

그리고 나는, 혼절할 것이다.

아버지가 가시기 전에 내가 먼저 가게 생겼구나.

난, 이 낯선 시골 마을에서 이대로 쓸쓸하게 뒤지겠구나.

고작 상무 자리 하나 해먹으려고 그렇게 악착같이 버텼나.

그것참 존나게 억울하네.

그러나, 그 정리되지 않은 잡생각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감당되지 않는 통증에 무경의 눈앞이 아찔해졌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에게 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솟구쳤는지 그가 다시 떨어진 핸드폰 쪽으로 부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누군가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뚜우. 뚜우. 뚜우.

정확히 세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는 것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원래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건지 목소리가 태호와는 달리 깔끔하고 단정했다.

정말로 다행이다, 생각하며 무경은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겨우겨우 끄집어냈다.

“채요원, 순경…… 이 시간에 전화…… 많이 미안한데요…….”

[선생님?]

“내가…… 내가 지금 좀 아파서 그러는데…….”

[아프시다고요?]

“여기에 좀…… 와주면…… 나…… 내가 진짜…… 죽을 것…….”

[여보세요? 선생님?]

“나 좀…….”

……살려줘.

그 탄식과도 같은 마지막 말과 함께 무경은 핸드폰을 손에서 놓쳤다.

눈앞이 새카만 암전이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당탕, 누군가 집 안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선생님?! 눈 좀 떠보세요!”

무경은 자꾸만 가라앉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려 상대를 확인했다.

“선생님?”

시야가 흐리고 아득해서 상대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보였지만 무경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 하무경 씨?”

“채…….”

요원이 제 곁에 왔음을 깨달은 순간.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하무경 씨!”

무경은 까무룩 깊은 잠에 빠졌다.

혼절한 새벽이었다.

***

백야마을엔 옥남이란 중년의 명의가 산다.

남이는, 시내에서 남이 병원이란 작은 병원을 운영했고 백야마을 주민이 아프면 그녀가 늘 출동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모 서울 대학병원장까지 하던 엘리트인 그녀가 모든 것들에 진절머리를 느낀 나머지 이 머나먼 시골에 내려와 은둔하는 거라고 하는데.

소문은 소문일 뿐.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트레스성 위경련이야. 일시적인 페인팅 현상이고. 푹 좀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위경련으로 기절까지 하는지는 몰랐어요.”

“통증이 심하면 그럴 수 있어. 생리통 때문에 기절하는 사람도 있잖아.”

“듣고 보니 또 그렇네요.”

“근데 훤칠하니 참 잘생겼네.”

무경에게 놔준 링거를 살피던 남이가 요원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둘이 뭐 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원장님!”

요원의 손사래 치는 모습에 남이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더 수상해?”

“아니에요, 정말.”

“그래. 채 순경이 아니라면 아닌 거지.”

남이가 가져온 가방을 챙겨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내 할 일 했으니 가야지.”

대청마루와 연결되는 문 쪽으로 향하는 남이를 요원이 따라나섰다.

“나오지 마. 저 총각 일어나면 연락 주고.”

“감사합니다, 원장님.”

남이가 수고, 하며 무경의 집 밖을 나섰고, 마당을 넘어서는 그녀를 대청마루 위에서 지켜보던 요원은 다시 무경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숨 돌리고 난 뒤에야 무경의 집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좁은 거실, 좁은 주방, 그리고 단 한 칸의 좁은 방.

그는 방이 아닌 거실에 줄곧 이부자리를 펴고 생활한 듯 보인다.

양은 밥상 위엔 노트북이 한 대 놓여있는데 꽤 최신 모델로 보인다.

요원이 남자에게 죽이라도 만들어줄 심산으로 주방으로 걸어가, 작고도 낡은 냉장고의 문을 열어보았다.

허리를 굽혀 냉장고 안을 살피던 요원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거라곤 생수 1리터 한 병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밥도 안 해 먹고 사나?

요원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세웠다.

싱크대 위에 젓가락 하나 나온 게 없는 것을 보니 정말인 모양이다.

이제 요원은, 이 낡은 시골집과는 제일 어울리지 않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몸에 핏되는 새하얀 반소매 티를 입고 있어 그런지, 남자의 팔뚝이 어느 때보다도 훤히 드러났는데, 선이 고운 얼굴선과는 달리 핏줄이 성난 듯 튀어나온 남자의 팔뚝은 운동을 꽤나 한 듯 보였다.

셔츠를 입고 있을 때도 그의 몸이 상당히 좋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저런 티셔츠를 입고 있으니 남자의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상체에 자꾸만 눈이 갔다.

겉보기엔 저렇게나 건장한 남자가 대체 뭐가 그리도 힘이 들기에 위경련으로 혼절까지 하나.

대체 평소에 무슨 스트레스를 그리도 받기에.

사연이 많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원래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마음의 문은 닫고 표현은 잘못된 방식으로 한다고들 하니까.

사실은 마음이 너무도 여린 사람인데, 또 사람에게 상처받기 싫어 마음에 벽을 치는 것은 아닐까?

혼자 머릿속으로 소설을 써 내려가며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남자의 이마 위에 헝클어져 있는 몇 가닥의 머리를 깔끔하게 쓸어넘겨 주었다.

맞닿은 그 손길에 남자의 눈썹 앞머리가 살풋 찡그려지니, 요원이 흠칫 놀라며 제 손을 빠르게 거뒀다.

남자의 일그러졌던 표정이 다시 온화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요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다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나 사실은, 하무경 씨가 많이 궁금한 것 같아요.

새하얗고 기다란 검지가 남자의 이마에서 뺨으로, 그리고 날렵한 턱선으로 곡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내려갔다.

고우면서도 남성적인 우월한 매력을 동시에 지닌, 참으로 희한한 매력을 가진 남자라 생각했다.

이런 사람은 화면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로만 알았지.

요원의 손가락의 마지막 종착역은 남자의 살짝 벌어진 입술 위였다.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틈이 생긴 입술을 연신 건드리면서 요원은 생각했다.

이런 남자와 키스하면 어떤 느낌일까? 키스도 참 잘하겠지?

저의 거침없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요원이 그의 입술 위에 머물러 있는 제 손가락을 황급히 거둬가 이마를 짚었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잠자는 사람 앞에 두고 이러는 거. 이거 완전한 추행이야. 순경이 되어선 잘하는 짓이다.

현실을 자각한 요원이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때였다.

“실례합니다.”

단정한 슈트 차림의 한 남자가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대청마루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시죠?”

요원이 무경을 보호하듯 남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고, 남자는 요원에게 가려진 무경을 확인하곤 요원을 지나쳐 그에게로 향했다.

“저기요, 선생님? 누구신데 이렇게 남의 집에 함부로 막.”

“의삽니다.”

뒤따라 오는 요원을 그 한마디로 멈추게 만든 남자가, 가져온 브리프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두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의사요?”

“네. 하무경 씨를 보러 왔습니다.”

남자는 딱딱하게 대답하면서 무경의 손등에 꽂혀있는 수액 바늘을 빼냈다.

“어? 그건 저희 원장님이!”

“새로 놔드릴 겁니다.”

의사라는 남자가 브리프케이스를 활짝 열어 그곳에서 새로운 수액을 꺼내 들었다.

그 바늘을 다시 연결하고 남이가 놓아준 수액은 옆으로 치워버린다.

그리고 혈압 측정기를 꺼낸 그가 무경의 왼팔에 커프를 채우고는 혈압을 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접니다. 바이탈 정상이고 호흡 정상이고 체온 또한 정상입니다.”

남자가 이젠 이불을 걷어 무경의 복부 여기저기를 눌러보며 진단을 내린다.

“위경련 맞습니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있는 요원을 돌아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쪽은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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