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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11화 (11/116)
  • 11화. 기묘한 밤

    팔각정은 음식이 빨리 나오는 곳이었는데 오늘따라 요원은 음식이 참 늦게 나온다 생각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는데 남자와 함께하는 1분이 마치 한 시간처럼 길었다.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요원은 평소엔 하지 않을 법한 제안을 남자에게 건넸다.

    “저 손금 되게 잘 보는데. 손금 좀 봐 드릴까요?”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업무 사항을 읽어내려가던 무경이 눈을 치떠서 맞은편의 요원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갑자기 손금은 왜요.”

    “저 정말 잘 보거든요.”

    눈썹을 한 번 들었다 내린 무경이 그래요, 하며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뒀다.

    “어떤 손을 드릴까?”

    “25세 이전의 운은 왼손. 25세 이후의 운은 오른손을 보는 거래요.”

    “그럼 왼손을 드리면 되나?”

    무던하게 농담을 던진 그가 민망했는지 곧장 오른손을 펼쳤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실례하세요.”

    요원의 작고도 새하얀 손이 남자의 큼직한 손을 살포시 그러쥔다.

    부드럽고 섬세한 여자의 손끝이 남자의 손등 위를 문지른다.

    툭 튀어나온 손등 위 성난 핏줄을 제하고는 고생 한번 안 해본 고운 손이라 생각하면서 남자의 매끈한 손가락 끝까지 만져보았다.

    이제 요원의 그 손끝은 무경의 손바닥을 스쳐 지나간다.

    자신의 손바닥을 문질러보는 손짓에선 유혹의 기술이란 단 1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무경은 그 손길에 몸을 움찔 다 떨었다.

    이건 간지러운 건가? 어딘가가 욱신거리는 것 같은데. 와씨. 나 지금 목덜미에 소름 돋은 거야? 이게 씨발 대체 무슨 기분이야?

    전혀 야릇한 행위가 아니었음에도, 야릇한 행위보다 더 야릇한 느낌을 받은 무경이 살풋 눈매를 찌푸렸다.

    “손금을 원래 이렇게 보나?”

    “아니요. 손금 보기 전에 한 가지 확인 좀 하고 있었어요.”

    “뭘 확인을 하죠?”

    “확실히 농사지은 분의 손은 아니네요.”

    이렇게 한 방 먹이시고.

    “이번엔 진짜 봐 드릴게요.”

    요원이 생글 웃으며 무경의 손목을 다시 그러쥐던 찰나.

    “채 순경은 그짝을 불쾌하게 안 하나 보네요잉.”

    팔각정 사장이 무경에게 뒤끝을 내비치며 음식을 들고 다가왔다.

    “대충 내려놓고 가세요.”

    하지만 지금, 무경에겐 팔각정 사장의 기분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계속 여자가 제 손을 만져줬으면 좋겠으니까.

    “나중에 봐 드릴게요.”

    그 마음을 역시 알 리 없는 요원이 사르륵 눈매를 접어 웃으며 무경의 손목을 놓자, 피가 통하지 않던 손바닥에 찌르르한 전기까지 감돌았다.

    “잠시만.”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은 무경은 멀어졌던 요원의 손목을 다시금 덥석 붙잡았다.

    그의 돌발 행동에 요원이 눈을 크게 뜬 사이, 무경은 시선을 비스듬히 깔아 그녀의 손금을 읽듯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장수하시겠네. 배우자 복도 있으시고. 돈도 꽤 만지시겠어.”

    “손금을 볼 줄 아세요?”

    무경이 요원의 손을 놓으며 뻔뻔한 낯짝으로 대답했다.

    “못 보는데요.”

    “그럼 지금 봐주신 건 뭔데요?”

    “그러게요. 뭘까요.”

    오히려 되물으며 시선을 내리깐 무경은 저의 팽팽해진 앞섶을 확인하곤 자조적으로 킥 웃었다.

    내가 시골에 있어서 그래. 시골 밤은 조용하고 할 일도 없으며 쓸데없이 존나 길기만 하니까.

    그래서 내가, 아무래도 내가, 이 백야에선 여자를 안고 싶은 모양이지.

    ***

    주문한 음식이 한 상을 금세 가득 메웠다.

    자장면만 한 그릇 먹으려 했을 뿐인데 요리가 두 개나 되니 요원의 젓가락이 자꾸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행복한 방황을 하면서 요원은 무경을 힐끗 바라봤다.

    앞접시 위에 동파육 하나를 가져가서 입안으로 깔끔하게 밀어 넣는 절제된 동작이 어딘지 모르게 교양있어 보인다.

    식사 예절을 어디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사극으로 가면 그는 양반. 서양 고전문학으로 가면 그는 공작일 것이다.

    “왜 안 드세요. 부지런히 드세요. 다 남겠네.”

    “네. 많이 먹고 있습니다.”

    요원이 깐쇼새우를 입안에 와앙 한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무경은 젓가락으로 면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 면을 후루룩 빨아들이는데 신기하게도 입가 어디에도 소스는 묻지 않았다.

    요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작게 떨어트렸다.

    이렇게 음식을 깔끔하게 먹는 남자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요원은 순간, 제가 너무 게걸스럽게 먹은 건 아닌가 싶어 황급히 냅킨을 찾아 입가를 툭툭 닦았다.

    “채요원 순경은 원래 말이 없나 봐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제 입가를 냅킨으로 점잖게 닦던 남자가 말했다.

    “말이 없지도 않고 많지도 않고.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요원이 동파육 쪽으로 손을 뻗으며 답했다.

    “잘못 알고 있네. 내가 볼 땐 과묵한 편에 속하는 것 같은데.”

    “제가요?”

    “내 앞에 채 순경밖에 없네요. 그럼 채 순경이겠죠?”

    무경이 습관처럼 비아냥거리며 제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봤는데, 시계 브랜드는 잘 몰랐지만,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싸구려가 아님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들어온 지 30분이나 지났는데 나에 관해 묻지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고작 말한 게 손금 하나 봐주겠다고.”

    “아.”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없는 건지. 궁금한 건 많은데 묻지를 않는 건지. 뭐가 됐든 입이 무거운 편은 맞는 것 같은데.”

    무경은 점쟁이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위치상 저절로 사람을 잘 보는 눈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 하무경이 보는 채요원은, 흔히들 말하는 진국일 것이다.

    “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를 않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진짜 서울에서 온 건 맞는지. 그렇다면 왜 이 먼 시골에까지 들어왔는지. 뭐 하다 온 사람인지. 손금 봐준단 핑계로 내 손 여기저기 만져보면서 내가 농사를 짓다 온 사람인지 아닌지 가늠했던 걸 보면 내게 충분히 궁금한 점은 많아 보이는데.”

    이 남자는 말발이 보통이 아니라고 요원은 첫 만남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핑계는 아니었습니다. 진짜 손금을 봐 드리려다가 한번 만져본 것뿐이에요.”

    요원이 의미 없이 입맛을 한번 다시면서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사실 궁금한 건 많아요. 그렇지만…….”

    무경은 마치 압박 면접을 보는 면접관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해선 요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생님처럼 젊은 분이 이런 머나먼 시골에까지 내려오셨다는 건 분명 어떠한 사연이 있어서일 텐데. 저는 그 사연이 딱히 좋은 일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서요.”

    무경의 눈썹 앞머리가 불시에 찡그려졌다.

    “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선생님의 상처를 건드리긴 싫었습니다.”

    허를 찔린 기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다.

    “그러니까 지금…….”

    조용한 동작으로 젓가락을 쥔 무경이 그 젓가락의 끝부분으로 테이블 위를 두 번 콕콕 찍어누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쪽이 날 배려하셨다는 거 아니야.”

    웃음이 자꾸 잇새를 비집고 흐른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원래가 다 이런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면서 그렇게도 사람을 믿나.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시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럼에도, 만약 이 순간이 동녘 그룹의 면접이었더라면 채요원은 더 볼 것도 없이 합격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또 그만큼 마음에 드는 인성이 보이는 답변인지라.

    “채요원 순경.”

    무경의 나직한 음성이 그녀를 불렀고, 다시 젓가락을 쥐고 자장면을 비비고 있던 요원은 고개를 올려 말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슴같이 생겨서는.”

    작게 읊조린 무경이 츳 혀를 차며 찡그려진 제 눈썹을 문질렀다.

    “네?”

    잘 듣지 못한 요원은 즉시 되물었고, 무경은 짜증 난 얼굴을 싹 지우며 다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좀 그렇네.”

    “뭐가요?”

    “채요원 순경이, 나는 좀 그렇다고.”

    요원은 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무경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미소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정한 듯, 다정하지 않고.

    상냥한 듯, 상냥하지 않으며.

    인간적인 듯, 인간적이지 않은 면모를 지닌 남자.

    그런 남자가, 요원을 온종일 헷갈리게 하는 기묘한 밤이었다.

    ***

    새벽녘, 남자의 앓는 소리가 시골집 안을 가득하게 메웠다.

    아니. 타타타타타타탁 거리는 시끄러운 고물 선풍기 소리에 묻힌 것 같기도.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무경은 제 아픈 배를 움켜쥔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 위엔 흥건한 식은땀이,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하고, 질끈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에도 핏기가 하나 없다.

    무경은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성이었고 체력도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은 편이었는데, 완벽한 그에게도 신이 딱 하나 주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건강한 위장이었다.

    태어나기를 워낙 위가 약하게 태어난지라 집안에선 걱정이 많았는데, 웬걸?

    짧은 시간 내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이 오면 그에겐 어김없이 위경련이 찾아오곤 했다.

    하무경의 인생에 늘 애매한 건 없었기에 그에게 찾아오는 위경련 또한 대단했다.

    누군가가 상복부를 붙잡고 쥐어짜는 듯한 강한 통증이 수 시간에 이어 나타나고, 숨을 쉬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며, 심한 경우 혼절까지 가는 경우도 잦아서, 동녘 그룹 내엔 그를 위한 담당의도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언제든 담당의가 뛰어 올라가서 응급 처치할 수 있게끔 말이다.

    행여라도 담당의가 없는 해외 출장 중에 스트레스성 급성 위경련이 찾아오면, 그땐 차태호 실장이 무경을 부축하여 응급실로 냅다 향하는 거다.

    담당의가 담배를 끊으라 권고하여 몇 달 끊어도 봤는데.

    담배를 끊었음에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자 무경은 그때부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담배를 마음껏 태워댔다.

    이러나저러나 아픈 거, 스트레스받아가면서 뭐하러 담배를 끊어. 이 좋은걸.

    무경에게 위경련이 오는 주기는 심하게 오는 해엔 분기별로 한 번, 보통은 반년에 한 번, 컨디션이 좋은 해엔 아예 안 올 때도 있다.

    타고난 위장 상태가 워낙 뭣 같은지라 딱히 치료도 되지 않고 위경련은 이제 무경에겐 몸의 일부분 같은 것이라 기간에 크게 의의를 두진 않지만.

    백야마을에 거주한 지 이제 겨우 며칠일 뿐인데 벌써 이렇게 그에게 위경련이 찾아왔다는 건, 그가 지금 여기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방증이었다.

    아…… 이런 씨발, 신이시여…….

    무교인 주제에 그는 아플 때마다 신을 찾는다.

    이 죄 많은 영혼을 한 번만 더 용서하소서.

    나름대로 고해성사도 해보지만, 매번 효과는 없는 것 같고.

    더는 안 되겠는지, 무경의 덜덜덜 떨리는 손이 마룻바닥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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