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화 (10/116)
  • 10화. 만인에게 친절해라

    7시가 되기 이십 분 전부터, 요원은 평소답지 않게 거울을 꺼내 이리저리 얼굴을 살폈다.

    머리를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가 또다시 풀어도 보고.

    데스크 서랍을 열어 딸기향이 나는 립밤도 꺼내 입술 위에 얹어도 본다.

    다시 거울을 보며 피부 상태를 살피다가 쿠션도 툭툭 쳤다.

    그러다가 그만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이건 꼭 무슨 데이트 나가는 사람처럼.

    내가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관두자. 식사 한 끼 하는 게 전부인데.

    손거울과 립밤을 다시 서랍에 던져넣고 문을 닫은 요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탈의실로 향했다.

    순경복을 벗은 요원은 흰 티에 연한 청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얼굴이 워낙 하얘서 그런지, 평범한 복장이었으나 그녀에게선 청초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우리 채 순경 오늘 좀 예쁘네. 어디 좋은 데 가?”

    같은 소에서 근무하는 40세 미혼남, 임성준 경장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요원처럼 주로 서울말을 썼는데 흥분하면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오긴 했다.

    “저 선약이 있어서요.”

    “누구랑?”

    “저희 마을에 새로 이사 오신 분 계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아. 그 젊은 남자?”

    “네.”

    “설마. 벌써 데이트?”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뺨이 붉은데.”

    “블러셔예요.”

    “블러셔가 뭔데?”

    “아무튼, 그런 관계 아니고요. 마을 내에 비슷한 또래가 저밖에 없으니까요.”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정말 맞아?”

    요원을 계속해서 떠보던 성준이 파출소 문 너머로 막 멈춰 서는 포터 한 대를 보았다.

    정확히는 달달달 거리며 요란하게 멈춰 서는 포터를.

    “혹시, 저 인간?”

    성준의 고갯짓에 요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문밖을 바라봤다.

    포터 운전석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무경이 훌쩍 뛰어내렸다.

    핸드폰을 받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한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오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성준은 무의식중에 탄성을 내질렀다.

    “배우가 와버려써야! 그래서 우리 채 순경이 이렇게나 꽃단장을!”

    “티 쪼가리에 청바지가 어떻게 꽃단장이에요? 저 맨날 이렇게 입거든요?”

    “아니야, 채 순경. 오늘은 느낌이 확실히 달라.”

    “내일 봬요.”

    놀리는 데에 재미가 붙은 성준에게 꾸벅 묵례한 요원이 그를 등지며 파출소 문을 열고 나섰다.

    “일요일에 은평점을 방문할 겁니다. 준비들 제대로 해야 할 거고. 옷이고 속옷이고 세면도구고 죄다 가지고 오라고 덧붙이세요. 결론이 나기 전까진 24시간이고 48시간이고 집에 안 보낸다고. 마라톤 회의라고 하죠.”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선생님?”

    “또 통화하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요원의 목소리에 무경이 서둘러 태호와의 통화를 종료하며 뒤돌았다.

    요원의 사복 차림을 처음으로 접한 무경은, 그녀를 음미하듯 고요한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명품 하나 걸치지 않은 평범한 흰 티에 청바지 차림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시각적인 자극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저 기다랗고 하얀 목선 때문인가. 내가 언제부터 목선 페티시가 있었다고.

    “타세요, 채요원 순경.”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무경이 운전석 문을 열었다.

    “네!”

    그러면서도 그 검은 시선은, 조수석으로 졸래졸래 향하는 요원의 동선을 계속해서 좇다가 이내 작게 조소하며 고개를 젓는다.

    나 하무경이, 포터에 여자를 태울 줄은 또 몰랐네?

    인생은 존나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팔각정은 백야파출소에서 차를 타고 5분이면 도착하는 시내의 유일한 중국집이었다.

    요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정적으로 훑는 무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옅은 블루 계열의 셔츠 차림에 단정하게 왁스를 발라 넘긴 헤어 스타일.

    새벽에 하천에서 처음 만났던 고귀한 자태가 줄줄 흐르는 남자가 다시 눈앞에 있다.

    요원은 괜히 시선을 밑으로 내려 제 복장을 살폈다.

    나도 조금 더 신경 쓰고 나올 걸 그랬나?

    “뭐 먹을래요?”

    그 목소리에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니 남자는 여전히 메뉴판 위에 진득하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메뉴판은, 글씨는 반쯤 지워져 있었고 지워진 부분은 팔각정 사장이 네임펜으로 손수 덧쓴 흔적이 확실한 오래된 것이었다.

    “여긴 자장면이 맛있어요.”

    “또.”

    “또요?”

    “요리는 안 드세요?”

    “요리요?”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켜요.”

    “아니요. 전 자장면이면 되는데요.”

    “깐쇼새우에 동파육 어때요.”

    “아니요. 저는 자장면 한 그릇이면 충분한데요.”

    “내가 살 테니까. 여기요.”

    요원의 말을 싹둑 자른 무경이 손을 들어 올리자 앞치마 차림의 팔각정 사장이 국자를 들고 건들건들 다가와 그들의 옆에 섰다.

    “채 순경. 이짝은 누구여. 남자친구여?”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여. 지금 두 사람 분위기가 말이여? 겁나게 거시기 하다고.”

    하. 일순 고개를 뒤로 젖힌 무경이 냉소적인 한숨을 뱉었다.

    어떻게 된 게 이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남 일에 관심들이 많은지.

    “정말 그런 거 아니고요, 사장님. 이분은요.”

    “이잉. 채 순경이 애인이 없을 리가 없제. 우리 동네서 채 순경이 미모 남바 원 아녀? 나가 야그했자네. 채 순경 같은 사람이 내 이상형이었다고잉. 나가 결혼만 안 했어도,”

    탁. 쥐고 있던 낡은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내던진 무경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서늘한 빛으로 말했다.

    “사람 참 불쾌하게 하시네.”

    “나 말이요?”

    무경은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팔각정 사장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여기 지금 사장님밖에 없네요. 그럼 사장님이겠죠?”

    “옴마? 나가 와 불쾌하다요?”

    “장사하시는 거잖아요. 그럼 일단 손님에겐 주문을 받으세요, 사장님. 주문을.”

    무경의 검지가 메뉴판을 탁탁탁 연달아 정확히 가리키며 그 주문이라는 걸 했다.

    “자장면 두 개. 깐쇼새우 하나. 동파육 하나.”

    알아들었냐는 듯 눈썹을 한 번 올렸다 내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메뉴판을 덮은 무경이 그 메뉴판을 팔각정 사장에게 비스듬히 건네며 그를 불렀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장님.”

    팔각정 사장의 기분이 이미 상할 대로 상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무경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보란 듯 불을 지폈다.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말이에요. 팔각정은 보통 한식에 어울리지 않나? 왜 중국 음식 팔면서 식당 이름은 팔각정인지?”

    “그게 뭐시 중하다요. 난 대한민국을 사랑하니께요.”

    킥,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 무경의 잇새에서 터졌다.

    아. 이 동네 사람들 진짜 골 때리네.

    살짝이 찡그린 미간을 긁적인 무경이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며 팔각정 사장과 시선을 맞추며 애써 웃었다.

    “그래요. 답변 감사드리고. 대한민국도 계속 많이 사랑하시고. 음식 좀 빨리 가져다주시죠? 배가 좀 많이 고파서.”

    무경에게 여러 번 후드려 맞은 팔각정 사장은 “아따. 성깔 한번 상당히 거시기하고만.” 구시렁거리며 주방 안으로 다시 터벅터벅 들어갔다.

    팔각정 사장은 겉으로 보기엔 덩치도 꽤 크고 인상이 세 보이는 쪽에 속했지만, 속마음은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제야 무경은 요원에게 난색을 보였다.

    “채요원 순경은 마음씨도 참 곱지. 귀찮지도 않나? 뭘 그런 걸 다 일일이 해명하고 있어요. 딱 보면 모르나? 채 순경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더 가지고 노는 거잖아요. 학교 안 다녀봤어요?”

    머리를 쓸어넘기며 스탠 물잔 쪽으로 무던하게 손을 뻗는 무경을 요원은 당혹스럽게 쳐다보며 운을 떼었다.

    “저…… 선생님?”

    “네.”

    그가 냉담하게 대꾸하며 물잔을 입에 문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은 절대로 오해하지 말고 들으셨으면 해요.”

    “일단 해보세요.”

    차가운 액체가 지나가는 남자의 목울대가 세차게 움직였다.

    그 목울대를 잠시 신기한 것 보듯이 넋을 놓고 바라보던 요원이 고개를 깔끔하게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 서울 생활이 어떤지 잘 알아요. 서로 내외하고 모르는 사람 경계하는 거, 너무 당연하다는 것도 잘 알고요.”

    “그래서요.”

    스탠 물잔을 달칵 내려둔 그가 곧바로 요점을 물었다.

    “여기에선 그 경계를 조금만 푸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예민함도 조금만 더 내려두시고요.”

    “내가 왜 그래야 할까요?”

    “여긴 서울과 다르니까요.”

    “서울과 다르다.”

    요원의 말을 곱씹으며 느른하게 팔짱을 낀 무경이 요원을 정시하며 턱을 문질렀다.

    “글쎄.”

    그 시선의 각도가 비스듬해져서 요원의 입술 위에 잠시 머무른다.

    “만인에게 친절해라.”

    분명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아닌데 뭐가 저리도 색이 예쁜가 싶어서.

    “나는, 글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랜 숙련의 결과다.

    남자의 불순한 머릿속을 알 리 없는 요원은 무경을 최대한 설득하려 노력했다.

    “만인에겐 아니더라도 적어도 백야마을 사람들에겐 좀 나긋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가구도 얼마 안 되는데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잘 지내면 좋잖아요.”

    “백야마을.”

    고저 없이 되묻는 무경의 눈썹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건 찰나였고.

    “네.”

    요원은 다정하게 웃으며 그에게 날벼락을 선사했다.

    “팔각정 사장님도 백야마을에 거주하시니까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막 입을 연 무경에 의해 깨졌다.

    “그러니까 저분이…….”

    피로한 눈꺼풀을 여러 번 문지르면서 무경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백야마을 주민이시라고.”

    “네. 저분이 백야마을의 여덟 가구, 아니, 이젠 아홉 가구 주민 중 한 분이시니까요.”

    “진작 말해줬으면 내가 참, 좋았을 텐데.”

    “저도 선생님께서 그렇게 나오실 줄은 미처 몰라서.”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좀 늘어트린 무경이 무의식중에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고 앉았다.

    “이런.”

    이마를 문지르며 작은 한숨을 내쉰 무경이 주방 안에서 웍을 능숙하게 다루는 팔각정 사장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저 팔각정 사장이 백야마을 주민 중 하나라는 거 아니야.

    내가 민심을 얻어야 할 가구 중 하나라는 거 아니야, 지금.

    내가 이해한 그 말이 맞는 거지?

    순간, 팔각정 사장과 눈이 마주쳤고 무경은 그제야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팔각정 사장이 뭐라 뭐라 구시렁거리며 웍으로 시선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는데, 무경은 그 입 모양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저거 시방 또라이 아니여?」

    나, 첫인상 존나게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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