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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9화 (9/116)
  • 9화.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 올 때

    박 실장을 보내고 나서 무경은, 잠그지 않은 철제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대청마루를 밟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도 꽤 자연스러운 걸음이다.

    무경이 봉지 안에서 눈이 환해지는 옅은 블루 컬러 셔츠를 꺼냈다.

    시골에 사는 총각이라고 꼭 촌스러운 옷을 입으라는 법은 없지. 그거야말로 고정관념이고 절대적인 색안경이지.

    무경이 회색 후드티를 벗어 던지자, 수영 선수와도 같이 떡 벌어진 어깨에 탄탄한 잔 근육이 자리 잡은 조각 같은 몸이 시원스럽게 드러났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때마침,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 진동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땅이 다 울리는 기분이었다.

    셔츠에 팔을 다 끼워 넣은 무경이 단추를 툭툭 걸어 잠그면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아 액정을 확인했다.

    [하가경 전무 SSN]

    뒤에 붙은 SSN은 흔히들 아는 그 한국 욕을 영문화하여 스펠링으로 표기한 것뿐이다. 썅년의 SSN이랄까.

    어휴, 씨발. 왜 또 전화질이야.

    혀를 츳 차며 허리를 굽힌 무경이 땅에 떨어진 핸드폰을 쥐고 스피커폰으로 돌려 양은 밥상 위로 짜증스레 던졌다.

    “네. 하무경입니다.”

    [하무경 상무.]

    “말씀하세요.”

    감정 없는 기계 덩어리 너머로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격한 감정이었다.

    그 소용돌이치는 하가경의 감정이, 이 적막한 시골집에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시골집 벽 한편에 걸려있는 거울 앞에 우뚝 멈춰 선 무경은 셔츠 윗단추 두 개 정도만 끌러둔 채로 손목 위에 잘그락, 시계를 채웠다.

    [하무경 상무,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지?]

    “글쎄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그것참 알쏭달쏭하네.”

    물건을 집어 던지고 난 그녀는 여전히 격분이란 감정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내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힌 무경이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52분.

    어제 과음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속이 다 쓰렸다.

    [너 착각하지 마. 나 이번 일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가.]

    거울을 다시 쳐다본 무경이 킥 웃으며 오른쪽 셔츠 소매 버튼을 단정하게 걸어 잠갔다.

    무경은 사실 하가경이 제게 전화한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지금 웃었냐? 야. 하무경 너 이 새끼야! 네가 아주 처돌았지, 이 개새끼야?!]

    지금껏 점잔 떨고 교양있는 척하던 하가경의 화법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을 때, 무경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오히려 더욱 견고해져서.

    “개새끼?”

    단 한 마디로 상대를 대번에 휘어잡는다.

    “씨발, 전무님. 우리 말 가려 합시다?”

    거울을 응시하는 무경의 검은 눈동자는 차갑다 못해 아주 서슬 퍼레져 있었다.

    동생의 그 한 마디에 긴장한 하가경이 반대편에서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미안해. 내가 잠시 흥분을 좀 한 것 같네.]

    “전무님. 그 은평점 있잖아요.”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깐 무경이 반대편의 소매 버튼까지 걸어 잠그며 말을 덧붙였다.

    “거기선 동녘 이름 달고 짝퉁을 팔아도 잘 팔려. 왜일까?”

    질문이 아닌 질문을 던진 무경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 바지의 허리춤에 손을 걸며 밑으로 단숨에 끌어내렸다.

    “거기엔 우리 경쟁 상대가 없거든.”

    트레이닝복 바지를 벗어 던진 그가 베이지색의 슬랙스 바지를 낚아챘다. 정확히는 슬랙스는 아니었는데 그나마 슬랙스 스타일과 제일 비슷한 걸 골라왔다.

    “그런 조건 좋은 황금 땅에서도 물건을 못 팔아먹는데. 동녘 타이틀만 달고 있으면 중국산도 팔 수 있는 그런 비옥한 환경에서. 응?”

    두 발을 하나하나 집어넣고 바지 윗단을 허리춤으로 끌어올린 그가 지퍼를 주욱 올리고 단추를 걸어 잠갔다.

    “전무님이 꽂아둔 그 사람 말이에요. 은평점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부턴 3년간 매출이 역대 최저치를 찍었어요.”

    시골엔 저만큼 키가 큰 사람이 없는지 바짓단이 매우 짧았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에요. 인정합니다. 그런데 나는요. 그런 무능력한 새끼만 보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말이에요.”

    바짓단을 이리저리 살피던 무경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전무님이 머리라는 게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한번 해보란 말이야.”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린 무경이 싸늘하게 비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능력도 없는 새끼가 거기 한자리 떡하니 차지하고 처앉아있는데.”

    […….]

    “내가. 응? 내가!”

    그리고, 사납게 소리쳤다.

    “동녘 사람으로서. 응?”

    하가경은 분명 핸드폰 너머에서 흠칫거렸을 것이 분명하다.

    “불구경하듯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있었겠어요? 그래요, 전무님? 내가 그런 사람이야?”

    아무리 10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라 할지라도, 동녘 내에서 하무경 상무의 카리스마는 실로 엄청났으니.

    [하무경 상무. 그래. 다 좋아. 그런데. 나 하나만 묻자.]

    그래서인지 한껏 고조됐던 하가경의 목소리도 꼬리를 내린 듯 금세 볼륨을 낮췄다.

    [나와 먼저 논의할 마음은 없었니?]

    “글쎄. 딱히. 별로요.”

    [나 전무야. 상무 나부랭이가 전무를 거쳐야지. 어디 건방지게 너는 대체 왜 매번!]

    감정이 점차 격앙되자 하가경이 숨을 깊게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너 지금 내가 이 건 때문에…… 상무가 전무 라인 건드렸다고…… 상무가 전무 라인도 손쉽게 정리할 수 있다고…… 사내에서 내 체면이 어떤지는 아니?]

    “어떻긴. 아주 바닥에서 기겠지.”

    [하 상무, 넌 내가 정말 안 무섭구나?]

    “무서워요. 무서우니까 이렇게 기를 쓰고 하고 있지.”

    지갑을 찾아 슬랙스 바지 뒷주머니에 무심하게 찔러 넣은 무경이 대청마루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누님이야말로 내가 별로 안 무서운가 봐. 그러니까 그렇게 천하태평이지.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고.”

    그리고 대청마루 위에 우뚝 선 그가 백야마을을 관망했다.

    “하가경 전무님. 하가경 전무. 하가경 누님.”

    아름다운 노을에 물든 풍경을 한눈에 담은 그가 씩 웃으며 말한다.

    “가경아. 우리 잘 좀 하자?”

    [아악! 저 개씹새끼!]

    하가경의 마지막 절규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입에 걸레를 문 건 집안 내력인가? 누구더러 개씹새끼래? 이 천하의 썅년이.

    어휴. 저것들 저러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이 짓 빨리 끝내고 내가 동녘을 다 먹어버려야지.

    한숨과 함께 양손을 허리춤에 비스듬히 얹은 무경은 이 백야마을을 이미 손에 다 쥔 사람처럼 마을 전체를 한눈에 바라봤다.

    붉은 노을에 잠식된 백야마을은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다시 목표를 설정하고 나니 머릿속이 어느 순간 깨끗하게 리셋되었다.

    백야마을 사람들을 단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본다면, 그들의 앞에서 고개 숙이고 어울려주는 게 뭐 그리 어렵겠나 싶다.

    맘에도 없는 칭찬 몇 마디에, 맘에도 없는 안부 몇 마디 더하고, 맘에는 없지만, 일단은 상냥하게 한번 웃어주고 장단 맞춰주는 일 어디 한두 번 해본다고.

    내게 주어진 시간, 단 2개월.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 올 때 나는, 이 마을을 완전히 떠나야겠다.

    그의 눈앞에서 붉은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

    무경은 파출소에 가기 전, 시내에 하나 있는 ‘대박나 부동산’에 잠시 들렀다.

    “백야마을 시세요?”

    대박나 사장이 무경의 앞에 종이컵을 내려두며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집마다야 다르지만 보통 뭐 이거 할라나.”

    대박나 사장이 손가락 네 개를 펼친다.

    팔짱을 낀 채 종이컵엔 손도 대지 않는 무경이 눈썹을 치떴다.

    “4억?”

    무경의 말에 대박나 사장이 파핫! 웃음을 터트리며 종이컵을 내려둔다.

    “아따. 통이 크신 양반이구마잉. 그 돈 주고 누가 시골집을 산대요.”

    “그럼 얼마요. 4천은 아닐 테고.”

    “4천 맞는디요.”

    “4천? 집이 4천이란 말입니까?”

    “그라죠?”

    “집 한 채가?”

    “아따. 멀 그라고 자꾸 묻는데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더욱 깊숙이 묻어 앉은 무경이 눈썹 앞머리를 문질렀다.

    집 한 채가 4천이라니. 무경의 머리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금액에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사는 집만 해도 매매가만 175억인 곳이 아니던가.

    내가 세상 물정을 모르긴 몰랐네.

    고개를 뒤로 젖힌 무경이 천장을 가만 올려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그럼 시내 아파트 시세는요.”

    “뭐 이거 하죠잉.”

    대박나 사장이 이젠 손가락 두 개를 올려 보인다.

    시선을 슬쩍 내려 대박나 사장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무경이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앉으며 차게 물었다.

    “근데 사장님은 입이 없으신가?”

    “예?”

    무경은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두 번 두드리며 웃었다.

    “내가 볼 땐 있는데.”

    웃고는 있으나 베일 듯한 그 표정에 대박나 사장이 하핫 웃으며 제 미간을 긁적인다.

    “아따 말씀을 참말로 무섭게 하시네잉.”

    “그래서. 얼마요?”

    “2억 정도 하죠잉.”

    “아파트가 2억?”

    “그라죠?”

    흠, 손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 무경이 잠시 눈꺼풀을 닫았다.

    머릿속으로 적절한 액수를 그려본다.

    시내 아파트 대략 2억에. 동녘 그룹 이미지 생각해서 조용히 백야마을 떠난다는 조건 달고 합의금 및 위로금 포함 한 집당 10억 정도 얹어주면 12억.

    여덟 가구 96억. 플러스 알파 4억 잡고 총 100억.

    이 정도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꽤 괜찮은 장사가 아닌가.

    윈윈이 뭐 별거인가? 이런 게 바로 윈윈 전략이지.

    이거, 생각보다 더 쉬울 수도 있겠는데?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린 무경이 영문도 모른 채 앉아있는 대박나 사장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희미하게 웃는 낯빛에 자신감을 동반한 교만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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