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백야의 아홉 번째 가구
백야마을에 드디어 해가 졌다.
해가 지는 순간, 빛이 별로 없는 시골 마을은 금세 어둠에 잠식되었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높고 화려한 빌딩으로 가득한, 서울 도심에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하천 주변에선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린다.
수많은 별을 품은 아름다운 밤하늘은 서울과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다.
이제 무경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태호와 이준은, 이런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 앞에 섰다.
태호가, 저들을 배웅 나와준 무경을 바라봤다. 이런 시골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무경은, 제 라인에 선 사람들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동녘 내에서 그를 광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저, 상무님.”
태호가 회색 후드티에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무경을 바라봤다.
지금 무경이 입고 있는 저 회색 후드티와 검은 바지로 말할 것 같으면, 이준이 한 시간 전 시장에 나가 부랴부랴 구매해온 것이었다.
태호가 조금 전 일을 떠올려봤다.
하 회장의 컨펌하에 마련되었던 옷을 걸레 쪼가리 집듯 엄지와 검지로 하나하나 들어 올려보던 무경이 처음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고.
그다음엔, 조용히 라이터를 탕, 튕겨 옷가지에 불을 붙이려는 것을 간신히 뜯어말렸다.
그래. 아무리 순박한 총각 행세를 해야 한들 명색이 동녘 그룹의 상무가 아닌가.
그것도 그냥 임원인가?
34년 동안 귀한 재벌집 막내아들의 대접만 받으며 자란 남자가 아닌가.
늘 최고만 누리던 남자.
오늘 안 그래도 여러모로 충격이 크실 텐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드려야 하지 않겠니, 이준을 조용히 설득하여 그를 시장으로 보냈었다.
태호가 다시 무경을 제 시야에 담았다.
이만 원짜리 후드티에, 만오천 원짜리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를.
결국은 얼굴과 비율이 개연성인지, 그가 입으니 꼭 티 한 장에 수백을 호가하는 명품 같다.
아무리 싸구려 원단의 옷을 입혀놔도 남자가 지닌 특유의 고귀한 자태가 어딜 가나.
여전히 그는 날렵하고 날렵하고 또 날렵하기만 한데. 고귀하고 고귀하고 또 고귀하기만 한데.
아직은 잘 세팅되어 있는 저 멀끔한 헤어 스타일 때문인가? 왁스를 안 바르고 자연스레 흐트러트리면 조금 더 순박한 이미지가 나오려나?
아니면 진짜 밀리터리 패턴의 몸뻬라도…….
제안을 해볼까 하다가 관뒀다.
하긴. 그가 설령 밀리터리 패턴의 몸뻬를 입는다 한들 저 특유의 분위기가 어딜 가겠나.
무려 34년이란 긴 시간 동안, 그 상황에선 어떠한 제스처를 취해야 적절한지, 어떻게 앉아있어야 하는지, 걸음걸이는 또 어때야 하는지,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
목소리의 톤, 말투, 몸짓, 손짓, 심지어 무표정한 얼굴까지도.
모든 걸 다 트레이닝받고 자란 남자인데.
저런 남자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순박한 총각 행세를 할 수가 있겠나.
겉모습을 바꾼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대체 회장님은 무슨 생각이신 걸까? 태호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며 무경을 향해 말했다.
“상무님. 저녁 꼭 챙겨 드시고요. 오늘은 저희가 사 온 것으로 끼니를 챙겨 드시면 되지만 내일부터는 온전히 상무님께서 챙겨 드셔야 합니다. 여기에서 차 타고 20분만 더 나가면 시내가 있습니다. 제가 시내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등은 조금 더 면밀히 조사해서 메일로 보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상무님 앞으로 차량 한 대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런 시골은 차가 필수라서요.”
“그래요. 연락 주세요.”
“상무님.”
무경을 바라보는 태호의 눈빛이 마치, 강가에 어린아이를 두고 떠나는 부모의 것과 닮아있었다.
무경이 스무 살일 때부터 그를 곁에서 오랜 시간 보좌했으니 당연했다.
그 눈빛을 모를 리 없는 무경은 나직이 웃었다.
“차 실장님이 날 자꾸 그렇게 바라보니 내가 꼭 유배 나온 기분이네. 가세요.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예. 상무님.”
제 앞에서 묵례하는 태호의 어깨 위에 큼직한 손 하나를 올렸던 무경이 이젠 운전석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를 발견한 방 기사가 얼른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사, 상무님.”
“매번 이 먼 길을 왔다 갔다. 고생이 많으셔서 어떡하죠, 방 기사님.”
“아닙니다, 상무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쪼록 안전 운전 하시고. 내일 세 분은 오후에 출근하셔도 됩니다. 내가 들어가서 바로 처리해둘 테니. 가는 길에 세 분, 맛있는 거라도 좀 사드세요.”
챙겨온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방 기사에게 무던하게 찔러주면서 무경이 뒤돌았다.
태호, 이준, 방 기사 모두가 그런 남자의 넓은 등에다 대고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동녘 그룹의 최종 실세이자 차기 수장이 될, 하무경 상무를 향하여.
***
집으로 돌아온 무경은 다른 곳엔 앉지도 못하고 태호가 깔아둔 새 이불 위에만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지금 무경에겐 이 집의 모든 것이 전염력 강한 세균 덩어리라서.
시골의 밤은 서울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조용하고 또 고요하고 모든 것이 멈춘 기분.
얼마나 조용한지 바깥의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고 TV 하나조차 없는 집 안의 그 적막은 어딘지 좀 무서울 정도.
혼자서만 저 까맣고도 광활한 우주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시골집에서 유일하게 소음을 만들어내는 건 위이이잉, 조금 시끄럽게 돌아가는 구식 냉장고와 타타타타타타탁, 금방이라도 팬이 튕겨 나갈 것만 같은 고물 선풍기뿐.
이 와중에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는 거의 소음공해 수준이라서.
무경은 낡아빠진 선풍기를 발로 툭툭 짜증스레 건드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여름에 이거 돌리면 다 시골에 사는 소박한 청년이야? 그러면 내가 내일 동물원에 가면 나는 내일부터 씨발 존나 호랑이 새끼네?
다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는 그 논리에 무경이 짜증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아…….”
느른하게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등을 기댄 무경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내부를 눈으로 휘- 훑었다.
서울의 거주 환경을 떠올려본다. ‘초호화’란 수식어가 붙었던 그 모든 것들을.
지금은 모든 것들에 비천함이 느껴져 볼수록 심란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은 무경이 액정에 뜨는 그 이름에 눈썹 앞머리를 찡그리면서 핸드폰을 귓가에 대충 갖다 댔다.
“하무경입니다.”
[자기야아!!]
기계 너머로 들려오는 그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무경이 혀를 한 번 차면서 핸드폰을 귓가에서 슬며시 떨어트렸다.
발신자.
국내 최대의 금융 그룹, 신아의 막내딸 라주연 상무.
좋은 벗인 듯 아닌 듯 벗인, 라주연.
[하 상무 자기, 지방 내려갔다면서? 좌천이야? 아니면 도약을 위한 시간이야?]
이야, 벌써 소문이 돌았어?
낡아빠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무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하여간 신아는 뭐든 다 빨라. 그 정보력의 비결이 대체 뭐야?”
[신아가 아니라 내가 빠른 거지. 나 자기한테 관심 많잖아.]
“아무튼, 라 상무님 능력 좋아.”
[그러니까. 나 능력 좋으니까. 나 꽉 잡으라니까? 생각해봐, 자기야. 동녘이랑 신아랑 사돈 맺으면 우리 몸집 완전 커지는 건데. 우리 형부네가 켐스인 건 자기도 잘 알지?]
국내 요식업을 꽉 잡고 있는, 켐스 그룹.
[동녘이 우리 신아랑 사돈 맺으면, 동녘이랑 켐스랑도 결국 패밀리 되는 건데. 유통업계랑 요식업이 떼려야 뗄 수 있어?]
“없지.”
[그러니까! 자기랑 나랑 결혼하면 이거 완전 게임 끝인데!]
“글쎄요. 난 결혼을 게임으로 생각하진 않아서.”
[어머? 우리 자기 말 맛있게 하는 것 좀 봐. 나 방금 좀 꼴렸어.]
넌 진짜 또라이다, 이 또라이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비집고 나왔으나 간신히 씹어 삼켰다.
신아를 건드려 동녘에게 좋을 건 없으니.
“우리 라 상무는 아무래도 사내 성희롱 교육을 조금 더 받고 오셔야겠다.”
진심 어린 충고였는데 주연은 지나가는 낙엽만 보아도 꺄르르르 웃는 사춘기 소녀처럼 그렇게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아니, 씨발. 대체 어디가 웃긴 거야?
눈썹을 콱 찡그린 무경이 짜증스러운 감정을 죽이면서 입을 열었다.
“라 상무님?”
[으응, 자기야?]
“술은 늘 적당히 하시기를.”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통화를 종료하며 핸드폰을 옆으로 휙 던졌다.
“…….”
다시 찾아온 적막감에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나마 빼앗기지 않은 제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이제 겨우 밤 8시 37분.
헛웃음을 터트린 무경이 제 목 언저리를 짜증스레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야말로 술이 필요한 밤이다.
풀벌레 소리를 빼고는 모든 게 다 조용한 밤이었으니.
***
단정한 순경복 차림의 요원이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오늘은 백야마을이 아홉 가구가 된 기념비적인 날이다.
백야마을을 누군가가 떠나면 떠났지, 이사를 온 것은 십 년 만의 일이었기에, 요원은 어느 때보다도 설레는 마음을 품고 인사를 가는 길이었다.
마침, 제집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고.
이사 온 사람에 대해 자세히 들은 건 없다.
남자라고 한 것 같은데. 그것도 젊은 남자. 가족은 없고. 혼자 왔다는 것 같던데.
젊은 남자가 왜 백야마을까지 왔을까? 그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요원과 그녀의 자전거는 남자의 집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자전거에서 내려 순경복을 단정히 매만진 요원이 굳게 닫힌 녹슨 철제문을 쿵쿵 두드렸다.
대문의 색은 파란색이었는데, 페인팅 칠이 여기저기 전부 까져 있는 모양새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언제 한번 페인팅을 다시 해주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상대에게서 반응이 없자 요원은 문을 한 번 더 쿵쿵, 두드려 보았다.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안에 사람은 있는 것 같은데.
오늘은 실례일까? 아무래도 좀 늦은 시간이긴 하지? 내일 다시 오자.
생각하며 자전거에 다시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익- 녹슨 철제문이 그런 기괴한 소리와 함께 반쯤 열렸고.
“……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요원의 작게 떨어진 입술 사이에선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