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3화 (3/116)

3화. XX 좌천

용산구 한남동에 소재한 하 회장의 저택에 동녘의 삼 남매가 한데 모였다.

하 회장의 저택은 동녘 가에선 白雲(백운: 흰 구름)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동녘과 백운.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하 회장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녘의 삼 남매는 모두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서로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 정도?

무경은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식탁 위 프랑스식 럭셔리 금박 샹들리에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요즘 세대와는 맞지 않는 촌스러운 취향이지 않은가.

“요즘 무리한 사업 많이 벌였더라.”

고요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식탁 위에 뚝 떨어진 건 그즈음이었고.

샹들리에로 향해있던 무경의 시선 또한 큰형이자 동녘의 부사장 하태경에게로 단숨에 떨어졌다.

하태경 부사장, 나이 53세. 무경과의 나이 차는 19세.

“젊은 패기 좋지. 그런데 조심해라. 까딱하다간 꼬꾸라져 나락이니.”

하태경은 점잖은 얼굴로 얌전하게 말했다. 우려를 가장한 협박이다.

무경은 팔짱 낀 손을 풀지 않고 느른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꼬꾸라져도 백운 위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새삼스레.”

“아무튼 애새끼가 나이도 어린 게 싸가지도 없어선.”

크리스털 물잔을 손에 쥔 하가경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혀를 내둘렀다.

하가경 전무, 나이 44세. 무경과의 나이 차는 10세.

“누님.”

무경이 하가경을 나지막하게 부르자, 물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하가경이 시선을 비딱하게 틀어 그를 바라봤다.

“누님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됐었죠?”

식탁으로 제 몸을 느릿하게 기울인 무경이 중지와 검지를 동시에 펼쳐 들었다.

“마흔둘인가, 아니면.”

그리고 검지 하나를 접어,

“하나였나.”

중지만을 남겼다.

“저 새끼가 진짜!”

물잔을 쾅 세게 내려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하가경의 과격한 행동은 “하 상무님,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백운의 업무를 총괄하는 심 여사의 목소리에 의해 그대로 멈추었다.

“회장님이, 저를요.”

무경이 되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이, 저만요.”

어느덧 하가경과의 키 차이가 크게 벌어졌고, 무경은 넥타이를 좌우로 비틀어 중심을 맞추면서 저를 노려보듯 올려다보고 있는 하가경을 내려다보며 픽 조소했다.

똑똑.

“이잉.”

허락의 뜻에 무경이 서재 문을 열었다.

검은 가죽 소파 위에 몸을 편안하게 기대고 있던 하 회장이 무경을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저 주름진 눈가는 자랑스러운 세월의 상징이다.

“아야. 백야마을에 댕겨왔담서?”

“예, 회장님.”

“으짜디?”

“왜 회장님께서 그곳을 탐내시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 회장의 뒤로 걸어간 무경이 적절한 압력으로 하 회장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하 회장의 마음에 딱 들 만한 말들만 골라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백야마을은.”

“그라제?”

“총 여덟 가구. 2개월 안에 다 내몰고 공사 기간 8개월로 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빨랑 될랑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겠습니다, 회장님.”

무경의 대답이 마음에 든 하 회장이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제 어깨 위 무경의 손을 겹쳐 잡고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그라믄 말이여? 나가 세팅은 다 해놨응께 무갱이 니는 몸만 내려가면 돼야.”

***

일주일이 지나고 무경은 백야마을을 다시 찾았다.

지난번과 같은 당일치기가 아닌, 앞으로는 일요일 밤에 내려와 목요일 밤까진 이곳에서 거주하며 마을 사람들과 안면을 터야 했다.

금요일 오전까진 서울로 다시 올라가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토요일에도 회사 업무 및 개인적인 용무를 처리한 뒤, 다시 일요일엔 이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전혀 다른 두 인생을 살 앞날이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졌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다.

고작해야 2개월. 잘하면 더 빨리 끝낼 수도 있고.

그깟 2개월 투자해서 차기 동녘 수장 자리만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하 회장이 알려준 주소에 도착하니 저녁 6시가 이미 훌쩍 넘은 상태였다.

이제 곧 6월의 여름이 다가오는지라 해가 길 뿐인데도, 마을 이름이 백야(白夜)라 그런지 마을을 품고 있는 해가 더 오래도록 머무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상무님.”

그리고, 집 대문을 들어선 무경의 얼굴이…….

“지금 나더러…….”

앞으로 제가 몇 개월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집을 바라보는 무경의 얼굴이…….

“여기에…….”

아주 처참하게.

“여기에서…….”

아주 신랄하게.

“씨발, 여기.”

일그러진 건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살라고.”

영락없는 시골집. 리모델링도 되지 않은 시골집.

프라이버시 따윈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낮은 담벼락, 문은 제대로 잠길지 의문인 녹슨 철제문,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은 작고 허름한 마당, 곧 무너질 것만 같은 대청마루는 늘 최고만 누리며 살던 무경에겐 세상의 종말과도 다를 게 없었으니.

무경의 성난 발걸음이 성큼성큼, 삐거덕거리는 대청마루를 구둣발로 콱, 밟아 안으로 급하게 들어선다.

마룻바닥의 방 하나, 거실 하나, 주방 하나.

꿉꿉한 곰팡냄새인지 뭔지. 습기가 가득한 것인지 뭔지.

여태껏 한 번도 집에선 본 적 없던 쥐, 바퀴벌레, 꼽등이 등. 당장에 튀어나와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한 묘한 기시감이 든다.

만 원에도 안 팔릴 것 같은 고리짝 장롱하며 처음 접하는 추억의 양은 밥상.

이 공간의 모든 것들이 다, 돈을 더 얹어주고 가져가라 사정해야 할 형국이었으니.

침대도 없고. TV도 없고. 라디오만 하나 달랑 있네?

우리 회장님은 내게 레트로를 알려주고 싶으셨나.

무경의 서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얼마 되지도 않는 공간을 둘러보다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다시 대청마루를 밟아 마당을 나갔다.

“차 실장님.”

“네, 상무님.”

이준과 함께 무경의 캐리어를 체크하던 태호가 얼른 허리를 세워 무경의 앞에서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여기 욕실이 안 보이는데요.”

“아…… 욕실은…….”

무경보다 며칠 전에 내려와 이 집을 살피고 관리했던 태호의 낯빛이 금세 안 좋아졌다.

“그 욕실은 말입니다, 상무님.”

“네.”

“여기 있습니다.”

태호가 손가락을 펴서 가리키는 곳, 마당 한구석의 수도꼭지다.

“…….”

그 기다랗고 촌스러운 색의 파란 호스를 고요하게 내려다보던 무경의 잇새에서 결국, 여태껏 참고 참던 웃음이 한꺼번에 픽, 비집고 흘렀다.

“그러니까 지금, 차 실장님 말씀은.”

뚜벅뚜벅, 곧은 걸음으로 수도꼭지 앞으로 걸어간 무경이 허리를 숙여 파란 호스를 쥐었다.

“내가. 벌거벗고 여기에 서서. 그러니까 이렇게 똑바로 서서. 저기 담벼락도 낮은데 다 벗고 이걸. 이렇게. 응?”

꽉 쥐고 있는 호스로 제 머리를 한 번 가리키고 가슴, 그다음엔 앞섶까지 주욱 내려간 무경이 결국, 쥐고 있던 호스를 거칠게 옆으로 내팽개치며 목소리를 더 서늘하게 낮췄다.

“차 실장님. 나랑 장난하지 말고.”

머리를 쓸어넘기는 손끝은 어딘지 모르게 갈급하다.

“어딨어요, 욕실.”

감히 마주 볼 수조차 없는 서릿발 선 냉랭한 시선에, 태호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며 예의를 갖춰 자세를 다잡았다.

“제가 어찌 상무님께 이런 것으로 장난을 칩니까. 진짜 여기에서 씻으셔야 합니다.”

무경에게서 이렇다 할 답이 없자 태호가 슬쩍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아래턱에 힘을 꽉 주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온 힘을 다해 화를 억누르는 모양이다.

태호가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저희 쪽에서 리모델링을 제안드렸었습니다. 하지만, 전부 그냥 다 놔두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여기 환경에 맞춰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정말입니다, 상무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청마루 위에 몸을 앉히려던 무경이 잠시 멈칫했다.

“서 비서님.”

무경이 딱, 딱, 딱, 허공에서 연달아 빠르게 세 번 손가락을 맞물려 소리를 냈다.

그의 속뜻을 단박에 알아차린 태호가 머뭇대는 이준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태호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준이 손수건을 허공 위에서 펄럭거리며 무경에게로 달려가 그가 앉을 곳에 세이브하듯 손수건을 깔았다.

“하…….”

손수건 위에 엉덩이를 기대고 앉은 무경의 잇새에서 고단한 한숨이 흘러나왔고 주머니를 더듬거려 담배를 찾는다.

담배 개비를 꺼내 입에 비스듬히 문 그가 라이터를 탕, 탕, 탕, 튕겨 불을 붙였다.

스읍, 후우.

찡그린 눈매를 유지한 채 담배를 깊게 빨고 연기를 또 길게 뱉는다.

아무리 연기를 뱉어도 가슴속에 연기가 꽉 들어찬 듯이 갑갑한 건 여전했다.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흙먼지 가득한 마당을 바라보는 무경의 시선이 혼란에 번져있었다.

존나 나 좌천된 건가?

그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의 곁으로 다가온 태호가 재떨이 대신 종이컵을 두 손으로 내밀며 하 회장의 의중을 전달했다.

“상무님은 당분간 이곳에서 소박하고도 소탈한, 순박한 청년처럼 살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 살 맞대고 지내면서 민심을 얻으라 하셨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담배를 다시 입에 문 무경이 피식 시니컬하게 조소했다.

선거 앞두고 시장 방문하는 대선 후보랑 대체 뭐가 다른지.

태호가 내민 종이컵 안에 담뱃재를 툭툭 무심하게 털어 넣으며 무경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욕실도 없이 저딴 곳에서 씻으면 그게 노출증 걸린 변태 새끼지, 순박한 청년이에요?”

태호의 잘못은 아닌데 괜히 태호에게 화풀이한 듯한 기분에 무경이 연기를 길게 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에어컨도 없던데. 곧 6월인데.”

담배를 걸고 있는 그의 손이 방 안을 대충 성의 없이 가리킨다.

“에어컨은 사치라고 하셔서 선풍기를 준비했습니다.”

“그게 다 색안경이란 겁니다. 시골 사람들은 여름에 에어컨도 안 튼답니까?”

“이곳은 그렇지 않습니다.”

“확신하세요?”

“뒤에가 바로 산이라서요. 앞엔 하천이고. 주변은 바다입니다. 백야마을이 원래 여름에 시원한 것으로 유명하거든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본 무경이 후우- 그 청명한 하늘에다 대고 매캐한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소박하고도 소탈한, 순박한 청년 코스프레란 말이지?

다시 한번 되지도 않는 말을 곱씹은 무경이 한숨을 삼켰다.

무경은 심란할수록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려 앉는 습관이 있었는데, 지금 그는 다리를 정말 한껏 벌렸다.

옷감이 감싸고 있는 것의 크기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보통의 순간에도 팽팽한 앞섶이 눈에 다 띌 정도였다.

그의 바닥 친 기분을 조심스레 살피던 태호가 이준에게 큼, 신호를 보내며 비스듬히 고갯짓했다.

“제가…… 합니까?”

“그럼 내가 하리.”

두 남자가 작당 모의라도 하듯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경은 대강 무엇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담배 연기만 깊게 빨고 또 길게 뱉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저…… 상무님.”

대청마루의 무경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간 이준이 허리를 조금 숙여 그와 시선을 얼추 맞췄다.

“말씀하세요.”

무경은 시선을 먼발치에 내려두며 무던하게 답했다.

“지금 입고 계신 옷을 좀 벗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옷을.”

“네.”

“여기서.”

끝 음을 올리지 않는 특유의 말투가 평소보다 낮게 착 가라앉아 있음이 느껴진다.

“예. 그게…….”

이준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상무님께서 앞으로 여기에서 입고 지내실 옷들을 저희가 세팅을 좀 해왔습니다. 물론, 이 또한 회장님의 지시이고요.”

담배꽁초를 발밑에 떨군 무경이 눈썹을 치뜨고 턱짓했다.

한번 보여달란 뜻이었다.

캐리어를 드르륵 끌고 온 태호가 그것을 쓰러트려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무경은 보았다.

캐리어를 한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촌빨 날리는 트레이닝복을.

‘나가 세팅은 다 해놨응께 무갱이 니는 몸만 내려가면 돼야.’

하 회장의 목소리가 두둥실 구름처럼 머릿속을 맴돌았으며, 그 세팅이 이런 세팅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무경의 굳게 다물렸던 잇새에서도 기어이 실없는 웃음이 킥, 비집고 나왔다.

나, 존나 좌천된 거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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