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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2화 (2/116)

2화. 백야마을에 어서 오세요

동녘 그룹의 본사가 위치한 서울 중구에서 전라남도 백야마을까지, 내비게이션에 찍히는 시간만 7시간 37분.

그리고 근 두 시간 반 동안, 급작스러운 출장길에 오른 뒷좌석의 무경에게선 말이 없었다.

오늘 태호 대신 무경의 지방 출장길을 보좌하기로 한 비서실의 막내 서이준이 룸미러를 통하여 그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폈다.

장장 두 시간 반 동안을 눈가를 가리고 있는 무경에게서 볼 수 있는 곳이라곤 그의 날렵한 하관이 전부인지라, 이준은 그의 현재 기분 상태를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잠이 드셨나?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중간중간 핸드폰이 울리면 또 시선을 밑으로 내려 핸드폰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으니.

고속도로를 세 시간 내리 달리던 대형 세단이 휴게소의 출입구로 들어가 주차를 마쳤다.

흠.

무경에게 말을 걸기 전, 이준이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 상무님. 방 기사님하고 저하고 커피 한 잔만 사 오겠습니다.”

여전히 이마를 괸 자세로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두 분은 아예 식사도 하고 오세요. 여태 식사도 못 하셔서 많이 출출하실 텐데.”

한 박자 느리면서도 낮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아.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

“상무님은 안 가십니까?”

“전 됐습니다.”

“그럼 올 때 커피 한잔 사다 드릴까요?”

“됐습니다.”

“상무님도 아직 식사 전이시지 않습니까. 뭐라도 사 오겠습니다. 호두과자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여기 소떡소떡이 유명하다던데, 그럼 그거라도.”

하. 차갑고 시니컬한 한숨이 들려오자 이준은 아차 싶었다.

“사, 상무님. 제가,”

“서 비서님.”

이준의 말을 무 자르듯 댕강 자른 무경이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자, 밤보다 더 짙고도 깊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새카만 눈동자가 이준을 정면으로 쳐다봤는데 이준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다 돋아날 정도의 굉장한 눈빛이었다.

“대체 왜 그러세요.”

“……예?”

“나랑 일하기 싫으세요? 다른 임원 곁으로 보내드려요?”

“예……?”

“내가 지금 여기 호두과자랑 소떡소떡 먹으러 왔습니까? 지금 내가 그걸 먹을 기분으로 보여요?”

“아, 아니요! 죄, 죄송합니다, 상무님! 제가 크나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범 앞의 연약한 사슴처럼 파르르르 눈을 떠는 이준을 못마땅히 바라보던 무경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한 번 휘저으며 후, 하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편하게 식사들 하고 오시죠.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 그럼, 다,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상무님.”

무경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준과 방 기사의 인사를 대충 받았다.

문이 쾅 닫히고 차내엔 무덤 속처럼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무경은 다시 이마를 괴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하 회장과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무갱아 나는 있자네. 죽기 전에 소원이 한나 있어야. 무갱이 니가 그 소원을 들어줘쓰믄 해야.’

‘소원이요?’

‘그려. 나는 내 어릴 적 고향 백야마을에다가 우리 동녘을 새겨 넣고 싶다.’

‘동녘을 새겨 넣는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마을에다 우리 동녘의 아웃렛을 싹 다 깔아 불자고잉.’

‘마을을 밀어버리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라제. 그거슬 니가 잔 해줘야거써.’

‘이해가 잘 안 되네요. 보통은 고향을 보존하지 않습니까.’

‘아니여. 나는 말이여? 그곳에다 내 업적을 깊게 새겨 부라야 거써.’

‘그러니까 지금 회장님 말씀은, 저더러 마을 사람들과 적당한 금액에 협의를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한입에 약을 털어 넣던 하 회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경이 마냥 귀엽다는 듯 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만큼은 아픈 사람이라곤 절대로 볼 수가 없었다.

‘무갱아. 이 시골 사람들은 안 있냐잉. 특히 백야마을 사람들 텃세는 허벌라게 씨야. 니가 지금 그라고 동녘 이름 달고 종이 쪼가리 들고 가자네? 안 처맞으면 다행이제잉.’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리기를 원하시는지…….’

‘니가 백야마을로 들어가 잔 살어부러.’

‘네?’

‘착하고 순박한 총각 노릇함시로 민심을 확 잔 사로잡아 부라고야. 마을 사람들 맴을 살살 잔 구슬려부러. 좋게좋게 가자고잉. 그래도 이 아부지 고향 아니냐잉.’

‘아버지. 아니 회장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무갱이 니, 이 프로젝트 성사시키자네?’

나는 동녘을 위해 가야겠다.

‘이 동녘, 너 줄게. 너 해부러.’

저, 백야마을로.

***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 되어서야 무경이 탄 세단이 백야마을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상무님, 도착했습니다.”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낸 무경이 운전석의 방 기사를 바라보며 무던하게 말했다.

“방 기사님이 고생이 많아요.”

“고생은요. 상무님 모시는 게 제 일인걸요.”

무경의 가느다래진 시선이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준에게로 비스듬히 향했다.

흠칫 놀란 방 기사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려는데 무경이 손을 들어 올려 방 기사의 행동을 저지했다.

“놔둬요. 피곤할 테니.”

“예, 상무님.”

“나는 한 바퀴 둘러보고 올 겁니다. 방 기사님도 눈 좀 붙이고 계세요.”

“아닙니다. 저도 상무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계세요. 괜찮습니다.”

따라 나오려는 방 기사를 또 한 번 저지한 무경이 뒷좌석 문을 덜컥 열고 내렸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마을 입구를 향해 뚜벅뚜벅 걷던 그가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챙겨온 손전등을 꺼내선 딸깍- 버튼을 누르고 한 곳을 비췄다.

「백야마을에 어서 오세요.」

입구 앞, 인조 바위에 새겨진 글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무경이 그 인조 바위를 지나쳐 이젠, 마을의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산대 위 물건을 스캔하듯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추면서.

마을은 작았다. 어둠에 잠식된 지붕들이 몇몇 눈에 띈다. 집은 그리 많지 않다. 다행이다.

마을 뒤에는 산, 마을 앞에는 하천.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나가면 바다와 항구, 그리고 조금 더 가면 거대한 폭포가 있다지?

해가 뜨는 일출은 가히 장관일 것이고 해가 지는 노을 녘은 또 어떠할까.

이 마을 밀고 아웃렛 깔면…….

잭팟이다.

회장의 사업가 정신을 가장 많이 빼다 박은 무경이 피식 웃으며 꽃들이 알록달록 피어있는 하천길을 거닐었다.

자연의 물소리가, 물 냄새가, 꽤 서정적이라 생각했다.

딸깍- 딸깍- 계속해서 손전등의 전원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던 그가 이젠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비스듬히 물었다.

눈매를 좁히며 라이터를 탕, 탕, 튕기며 불을 붙이려다가 말았다.

‘무갱이 니도 그 담배 그만 끊어라잉. 내 꼴 나지 말고.’

하 회장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경은 담배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서 툭 부러트리면서 마을 안에 지붕이 몇 채나 있나, 다시 손전등을 비추며 눈으로 대강 세었다.

하나, 둘, 셋.

“……님?”

넷, 다섯, 여섯, 일곱.

“……생님?”

그리고, 여덟.

“선생님.”

지붕을 모두 다 세고 나서야 무경의 귓가에 나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잘못 들었나?

발걸음을 멈춘 무경이 문득 제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새벽 3시 14분.

“선생님?”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인지한 무경이 손전등과 함께 몸을 반 바퀴 돌려 상대를 비췄다.

갑작스러운 그 밝기에 눈매를 찡그린 여자가 제 눈가를 가리는 것이 보인다.

단정한 순경복 차림의 자전거를 붙잡고 있는 여자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수상한 사람 아니니 그 손전등 좀 치워주시겠어요?”

무경이 한 박자 느리게 손전등을 치우자 여자가 자전거와 함께 다가왔다.

새벽이 무색하리만큼 청량한 미소였다.

무경은 어느덧 자신과 거리를 좁히고 선 여자를 몇 초간 더 가만 응시하다가 다시 제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는, 새벽 3시 16분.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

무경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조금 들어 올렸다.

“저희 마을분은 아니신 것 같아서요.”

무경이 웃음을 흘리면서 다시 딸깍- 손전등을 켰다.

그 손전등이 그녀의 가슴팍으로 망설임 없이 향하고 「경찰」이란 단어를 확인한 그제야 손전등이 딸깍- 소리를 내며 다시금 꺼졌다.

“채요원 순경입니다.”

여자가 웃으며 자신을 소개한다.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그것도 이런 느지막한 시간에, 젊은 순경을 만나게 될 줄은 또 몰랐네.

“마을 순찰 중입니다.”

“아. 순찰. 도셔야죠. 순찰.”

요원의 말에 처음으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인 무경이 형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지녔다.

이곳의 순경이라면 언제 또다시 마주칠지 모르니 늘, 친절하고 상냥하게.

“순경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이 새벽에.”

“매일 하는 건 아니라서요. 그리고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순찰을 더 자주 돌거든요.”

“아. 어르신들.”

“선생님. 정말 길을 잃으신 건 아니죠?”

“내가 설마 이 나이에 길을 잃었을까.”

무경이 상냥히 웃으며 요원에게로 시선을 내렸지만, 요원의 제법 진지한 눈빛은 남자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사실 요원의 ‘길을 잃으셨나요?’라는 뜻은 정말로 그 ‘길’이 아니다.

종종 이 시간에, 이런 으슥한 곳을 찾아와 목숨을 끊는 자들이 가끔 있어 떠본 것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순경님.”

딸깍- 손전등을 다시 켜며 마을 쪽을 비춘 무경이 조용히 물었다.

“여기, 총 여덟 가구 맞습니까.”

“백야마을이요?”

무경은 눈썹을 가볍게 올렸다 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덟 가구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그냥…….”

뒷말을 흐리는 무경의 검은 시선이 제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빠르게 훑는다.

“궁금해서요.”

“아. 네. 궁금하셨군요.”

요원도 웃는 낯빛을 지우지 않은 채로 남자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주욱 한 번 훑어내렸다. 예리함을 숨긴 상냥한 시선이었다.

남자는 꼭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잘생긴 얼굴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그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세련된 헤어 스타일, 새하얀 와이셔츠, 목을 단정히 옥죈 깔끔한 문양의 넥타이, 검은 슈트 바지,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느껴지는 자태.

수상한 놈인 건 맞는 것 같은데, 그게 마을을 털러 온 좀도둑 같은 유는 아니다. 풍기는 분위기가 그걸 말해주고 있으니.

범상치 않은 분위기라 생각했다.

그게, 범법자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세상을 등지려는 자는 더더욱 아니고, 조금 더 뭐라고 해야 할까……?

“지나가는 길에 바람이나 좀 쐐볼까 하고 내렸습니다. 마을이 워낙 예뻐서. 잠도 좀 깰 겸.”

자신을 가늠하는 요원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무경의 낮은 음성이 요원의 생각을 한숨에 어지럽혔다.

“아.”

잠시 생각을 멈춘 요원이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듯 그를 올려다보며 호선을 그린 입술로 대답했다.

“백야마을, 참 아름답죠.”

“순경님은 어디 출신이세요.”

“저요?”

“사투리를 안 쓰셔서. 이쪽이 사투리가 굉장히 심한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어릴 때 서울에서 이사 왔어요. 저희 어머니가 서울분이셨거든요.”

“아. 그래서.”

“선생님도 서울에서 오셨죠?”

“그래 보여요?”

“네. 선생님은 특히 더 그렇게 보이시네요.”

“그것참, 큰일이네요.”

웃으며 나직이 읊조리던 무경이 다시 시선을 비스듬히 내려 제 앞의 요원을 시야에 담았다.

이마에 자연스레 흘러내려온 몇 가닥의 앞머리, 화장기 하나 없는 수수한 얼굴, 복숭앗빛의 뺨, 단정하게 하나로 질끈 묶은 긴 머리, 그래서 더 눈에 띄는 가느다란 새하얀 목선.

순경복 안에 꼭꼭 숨겼어도, 숨길 수 없는 유려한 라인.

무경은, 여자란 종족을 마치 처음 보는 남자처럼 계속해서 그녀를 눈으로 곱씹었다.

부러트린 담배 필터를 앞니로 잘근잘근 무의식중에 씹기도 했다.

제 주변에선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수수해서 또 청초함마저 느껴지는 여성인지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면, 선생님. 너무 늦지 않게 조심히 올라가세요. 위험한 일도 번번이 생기는 지역이라서요.”

진짜 위험한 남자를 앞에 두고서 요원은 자전거 위에 올라타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요. 순경님도 살펴 가시길.”

무경이 살짝 몸을 틀어 그녀에게 길을 터주니 요원이 무경을 향해 꾸벅 묵례하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

멀어지는 여자의 모습을 한동안 그곳에 멈춰 서서 바라보던 무경이 곧, 그녀와 정반대 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점차 더워지는 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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