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화 (1/116)
  • 1화. 동녘의 막내아들

    [ ※ 오프닝 추천곡 : 장기하와 얼굴들 – ㅋ ]

    백화점, 아웃렛, 대형마트, 편의점 등. 대한민국 유통업계를 꽉 잡고 있는, 동녘 그룹.

    상무 집무실 내, 검은 가죽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남자를, 홍보실 직원들이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까부터 말이 없는 남자는,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조금 느슨하게 연기를 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회장님이 폐암이라고.”

    끝 음을 올리지 않고 묻는 것은 남자가 지닌 일종의 버릇 같은 것이었는데, 부드러운 어투였으나 상대를 강렬하게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네, 상무님.”

    그의 비서인 차태호 실장이 신속히 대답했다.

    “얼마나 심각하대요.”

    “꽤…….”

    “그래서, 얼마나.”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병원에선 길면 1년이라고…….”

    태호가 말을 차마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까 지금, 회장님이 시한부라는 거 아니야.”

    피식,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의 잇새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연달아 태운 담배만 벌써 다섯 개비째.

    매캐한 연기로 자욱한 꽉 막힌 공간을 잘 버텨낼 수 있는 비흡연자는 별로 없다.

    꾹 참고 참던 기침을 쿨럭, 터트린 직원 한 명의 낯빛이 금세 하얗게 탈색되어 남자를 얼른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상무님!”

    유독 짙은 검은 눈으로 해당 직원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번 더 빨던 남자가 눈썹을 가볍게 들었다 내리며 답했다.

    “별말씀을. 내가 미안하지.”

    테이블 위에 마련된 재떨이에 담배를 대충 비벼 끈 그가 찡그려진 눈썹을 중지로 문지르며 태호를 나직이 불렀다.

    “차 실장님.”

    “예, 상무님.”

    “거기, 내…….”

    남자는 마음과 머릿속 모두가 심란한지 잠시 뒷말을 잇지 못하고 미간을 더욱더 좁혔다.

    “……커프스링크랑 재킷이랑 넥타이랑 시계랑 다 좀 챙겨주세요. 회장님께 갈 겁니다.”

    “네, 상무님.”

    상무실 한편에 마련된 선반과 행거에서 방금 남자가 말한 모든 것을 다 챙긴 태호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그것들을 내밀었다.

    “자, 홍보팀. 잘 들으세요.”

    먼저 시계를 받아든 남자가 제 손목에 시계를 잘그락 채웠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할 거라 좀 세게 나갈 겁니다.”

    다음으로 커프스링크를 받아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병원 원장이야 내가 물론 믿지만.”

    188㎝의 커다란 신장을 자랑하는 남자가 갑자기 장승처럼 우뚝 솟아나니, 주변 직원들이 상대적으로 너무나 작아 보였다.

    “뒷구멍으로 이 이야기 새어 나갈 일 없도록 병원 입단속부터 다시 하세요.”

    팔뚝까지 대충 걷어붙였던 셔츠 소매를 단정하게 내려 단추를 채운 그가 실버 색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커프스링크를 손목에 채운다.

    “우리 직원들이야 내가 물론 너무도 믿지만.”

    이제 셔츠 깃을 세운 그가, 짙은 네이비 바탕에 세련된 문양이 새겨진 넥타이를 목가에 둘러 넥타이 깃을 빠르게 교차시켰다.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

    순식간에 하프 윈저노트 매듭이 완성되었다.

    “그 순간 나는 홍보실부터 조질 예정입니다. 어떻게 조질 거냐.”

    남자가 팔을 옆으로 넓게 벌리자, 그의 등 뒤로 다가온 태호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기다란 팔 한쪽에 재킷을 끼워 넣었다.

    “아주 화끈하게 조질 거예요. 어디까지 조질 수 있는지 궁금하면 한번 떠벌리고 다녀보든지.”

    홍보실 직원들이 동시에 입을 꽉 다물었다.

    “경영권 승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 마당에 회장님 시한부 판정받았다는 얘기까지 외부에 돌아봐요.”

    재킷에 두 팔을 모두 다 끼워 넣은 남자가 앞 단추를 툭툭 단정하게 걸어 잠그며 말을 이었다.

    “기자들 그것들, 이슈 하나 잡아내려고 눈에 쌍심지 켜고 다닐 게 뻔하고. 우리 형 누나 말이에요. 서로 흠집들 내려고 아주.”

    남자는 생각만으로도 질린다는 듯한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녘의 ‘남매의 난’ 벌어지고 그땐 존나 다 개판 되는 겁니다.”

    태호가 건넨 왁스 통을 받아든 남자가 집무실 한편에 놓인 거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왁스 통을 열었다.

    “내 라인이 왜 하태경과 하가경이랑 다르겠어요. 우리는 끝까지 점잖고 품격 있게. 응?”

    거울을 똑바로 바라본 그가 손가락 끝에 왁스를 묻혀 아주 능숙한 손길로 머리를 매만졌다.

    조금 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저렴한 욕설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자태가 거울 속을 꽉 채웠다.

    “상무님 올라가십니다. 곧장 타실 수 있게 엘리베이터 대기시켜주세요.”

    집무실 밖으로 나온 태호가 임원 층을 지키고 있는 보안 요원에게 무전을 넣었다.

    [네. 바로 대기시키겠습니다.]

    무전이 끝나자마자 벌컥, 집무실 문이 열리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가 회사 복도를 한 걸음 한 걸음 힘있게 내디딜 때마다, 그를 발견한 직원들이 홍해처럼 쫙 갈라지며 그에게 황급히 묵례했다.

    헤어 디자이너가 만져줬다 해도 믿을 만큼 흠 하나 잡을 곳 없는 깔끔한 포마드 헤어, 탄탄하고 비율 좋은 몸을 감싸고 있는 값비싼 원단의 슈트,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몸에 지닌 고귀한 자태, 우월한 기럭지의 범접할 수 없는 남성적인 아우라와 압도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가진 남자.

    동녘의 막내아들이자 사실상 최종 실세.

    검은 재규어, 하무경 상무다.

    ***

    동녘 그룹 회장 집무실은 사방이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어 볕이 잘 들었다.

    상석에 앉아 기침을 콜록콜록하는 제 아버지 하 회장과 그런 하 회장을 붙들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둘째 누나, 하가경 전무의 모습이 눈앞에서 영화처럼 생생히 펼쳐졌다.

    “아버지이! 우리 아버지이! 가여우셔서 어떡해! 흐윽! 흑!”

    소리를 빽빽 지르며 오열하는 제 누나의 모습에 무경은 제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간신히 참아냈다.

    “아버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누구야. 우리 동녘이에요. 전 세계 다 뒤져서 최고의 의료진들로만 선별해서 아버지 다 낫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아버지…… 흑.”

    손수건을 쥐고 있음에도 뺨을 타고 떨어진 눈물을 굳이 닦지 않으시고.

    “아무…… 정말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세요?”

    목소리는 보란 듯 한 번 또 떨어주시고.

    미친년. 아주 지랄을 하고 자빠졌네.

    콜록콜록!

    하 회장의 기침이 멈출 줄을 모르자 결국 키폰을 들어 올린 사람은 무경이었다.

    “회장님 기침이 심하시네요. 따뜻한 물 한 잔 부탁드립니다.”

    비서와의 짧은 통화를 끝마친 무경이 키폰을 달칵 내려두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 회장의 뒤로 뚜벅뚜벅 걸어가니, 그의 동선을 악어의 눈물이 서린 하가경의 눈동자가 뒤따른다.

    “저도 이야기 들었습니다, 회장님.”

    그의 야윈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린 무경이 그 손에 약한 힘을 주어 그 어깨를 지압하듯 주물렀다.

    “먼 야글 들었당가. 나 죽는다고잉?”

    전라남도가 고향인 하 회장은 사투리를 썼는데, 어떻게 70년 넘게 서울에서 살았으면서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지는 늘 무경이 가진 의문 중 하나였다.

    “근디 표정이 어째 그려. 웃어잉. 갈 사람은 얼른 가야제.”

    무경은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머릿속은 이미 암전이다.

    그 마음을 알아챈 하 회장이, 제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무경의 한 손을 겹쳐 잡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웃어잉.”

    그러고는 무경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는다.

    하 회장의 나이 84세. 무경의 나이 34세.

    아버지보단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더 어울릴 법한 그림이었다.

    “그라고 무갱이 니도 그 담배 그만 끊어라잉. 내 꼴 나지 말고.”

    “그러게요. 저도 끊으려고는 하는데 생각보다 잘 안 되네요.”

    “노력을 해야, 노력을.”

    “네,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잉. 내 새끼.”

    야윈 손으로 무경의 손등 위를 툭툭 두드리던 하 회장이, 저들을 감시하듯 지켜보는 하가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경이 니는 잔 나가 있어잉.”

    “예?”

    “나가 우리 무갱이랑 할 말이 잔 있응게.”

    “제가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너는 난중에 다시 와잉.”

    “아…… 예. 아버지.”

    하가경은 제가 언제 울었냐는 듯 하 회장의 뒤에 서있는 무경을 서늘하게 한 번 쳐다봤다.

    무경은 뭐 문제 있느냐는 듯 가경을 직시하며 웃었다.

    “살펴 가세요, 하 전무님. 멀리 못 나가요.”

    “그래. 그럼 수고해, 하 상무?”

    하가경은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느릿느릿 집무실 밖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힌 그제야 하 회장의 짙은 한숨 소리가 고요해진 집무실 안에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내가 가는 건 안 무선디 회사가 늘 걱정이여. 니들이 걱정이고.”

    “다 큰 자식들 걱정을 왜 하세요.”

    “남매끼니 싸우지잔 마야. 동녘 사방이 내 귀고 입이여. 들리는 것이 있당께.”

    “저 두 분만 절 가만 놔두시면 크게 싸울 일 없습니다.”

    “무갱이 니가 너무 잘해서 그렇다. 이사진들도 이미 니를 동녘의 차기 수장으로 본다던데잉.”

    “과찬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형, 누님을 제치고.”

    “무갱아, 니 혹시 나한테 서운하냐?”

    뜻밖의 질문에 무경의 비스듬히 깔린 눈동자가 오늘따라 부쩍 작아 보이는 노인을 제 시야에 담았다.

    “내가 니 형이랑 누나만 챙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제?”

    “그럴 리가요. 저를 너무 예뻐하셔서 탈이죠.”

    “그랴, 이잉. 무갱이 니는 말이여? 내 나이 쉰에 가진 귀한 막둥이여. 나는 솔직히 말이여? 같은 자식이라도 더 아픈 손구락이 있다고 본다잉. 무갱이 니가 바로 그 손구락이고. 알제?”

    “잘 압니다, 회장님.”

    “그랴. 그럼 말이여?”

    제 어깨를 주무르는 무경의 손목을 덥석 붙잡아 단숨에 저지한 하 회장이 고개의 각도를 비스듬히 위로 올려 무경을 쳐다봤다.

    그리고, 더는 약한 노인이 아닌 동녘의 수장다운 강한 눈빛을 해선 말한다.

    “하 상무는 지금부텀 내 얘기를 잘 듣더라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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