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一장. 대리 승은 (2/7)
  • 一장. 대리 승은

    “아야…….”

    연우가 손으로 뺨을 만졌다.

    해마다 이맘때면 항상 화상을 입은 뺨이 쓰리고 아파 온다.

    몇 년 전 연우는 뺨에 심한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생각시로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고 아직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후로 시간이 꽤 지나 벌써 6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계절이 돌아오면 뺨이 쓰려 온다.

    얼굴의 화상 흉터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벌겋게 뺨 한쪽에 남아 있다.

    20년 정도 더 지나면 조금 더 흐려지긴 하겠지만, 화상의 흉터가 아예 사라지진 않는다고 했었다.

    이 화상 덕분에 연우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빨래터에만 처박혀 사는 세답방의 나인이 되었다.

    함께 입궁했던 생각시 동무들은 전부 대명궁, 소명궁, 화정궁, 모란궁, 침방, 수방, 생과방의 나인이 되었지만 연우만 세답방의 나인, 그것도 무수리에 가까운 나인이 되었다.

    무수리란 무엇인가.

    황궁을 출입하지만 황궁에서 물 긷기나 불 때기 같은 허드렛일만 하는 가장 낮은 신분을 가리켜서 무수리라고 부른다.

    연우는 정식 나인이지만 그 취급은 무수리와 비슷했다.

    이게 전부 얼굴의 흉터 때문이라는 걸 연우도 알고 있다.

    이 얼굴의 흉터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지금의 황제다.

    물론 6년 전에는 황제가 아니라 태자였지만 말이다.

    그때 태자가 집어 던진 불 붙은 숯이 얼굴에 부딪히며 지금의 이 흉터가 생겼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린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울던 자신과 소란스럽던 주위 분위기만 기억만 난다.

    6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아픔과 두려움은 생생한데 아직도 왜 태자가 제게 불 붙은 숯을 던졌는지 그 이유를 연우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제게 화풀이를 한 것인지, 아니면 심심해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물론 그때까지 연우가 알던 태자는 심심풀이나 화풀이로 나인에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자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아는 부분보다 더 많을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아는 것은, 그날 자신은 실수를 한 것이 없다는 것뿐이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 작은 실수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제게 벌어졌다.

    그 이후로 며칠 내내 앓아누워 있어야 했었고 결국 지워지지 않는 얼굴의 흉터 때문에 황궁 가장 구석진 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이전에는 생각시들 중에서 제일 얼굴이 곱다는 말을 들었던 연우였다.

    ‘연우는 미인이라서 분명히 나중에 폐하의 승은을 입게 될 거야.’

    ‘당연하지. 연우보다 얼굴이 더 고운 나인은 없을 거야. 폐하의 눈에 띄기만 하면 승은은 따 놓은 당상일걸?’

    동무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손사래를 쳤지만 내심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물론 황제의 승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승은이라는 것이 황궁의 나인들이 꿈꿀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결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바라지는 않았었다.

    저를 황궁으로 데려온 오라비 형우는 ‘승은을 입어야지. 그래야 팔자가 펴지.’라고 입이 아프게 말을 했었지만, 정작 연우는 그런 식으로 신분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는 것보다는 황궁에 나인으로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일해 조금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처음 황궁에 들어올 때의 마음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마음을 변하게 한 것이 태자였다는 것은 인정한다.

    어렸던 시절 태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황제의 승은은 바라지도 않게 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태자에게 줘 버렸던 마음은 결국 안 좋은 결과로 끝나지 말았지만 말이다.

    연우도 안다.

    연우도 바보는 아니다.

    황궁에 입궁하는 순간, 궁녀의 삶은 궁에 매이게 된다.

    죽는 것이 아닌 이상 궁을 벗어날 수 없었다. 늙거나 병이 들어서 더는 궁녀로서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그제야 궁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황궁을 나가서도 제대로 살 수 있는 지경이 되어 있을 때였다.

    결국 궁녀의 삶은 죽기 직전까지 궁에 매여 일생을 사는 것이었다. 황궁의 높은 담장을 일생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궁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자유를 얻는 방법은, 유일하게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승은을 입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연우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승은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연우는 황제의 승은을 받기보다는 태자를 몰래 바라보는 작은 행복에 만족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얼굴에 화상의 흉터가 생기는 순간, 연우는 가슴에 품고 있던 작고 소중했던 행복마저도 잃고 말았다.

    “괜찮니, 연우야?”

    세답방에서 함께 일하며 같은 방을 사용하는 동무인 기령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걱정스레 물어왔다.

    “응. 좀 쓰려서.”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서두르자.”

    “그래. 알았어.”

    항상 같은 양의 빨래가 나와도 겨울에는 빨래를 하는 것이 조금 더 어렵다.

    물이 얼어붙는 겨울이라고 해서 솥에 데운 더운물에 빨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는 우물이 얼어붙어서 빨래를 하는 것이 어렵다.

    얼어붙은 우물의 수면을 두레박으로 몇 번이나 깨뜨려서 겨우 구멍을 내고 차가운 물을 길어 그 물에 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찬물에 한 빨래를 널면 마르는 것이 아니라 물기를 머금고 얼어 버린다.

    그래서 빨래를 하는 것도 문제, 말리는 것도 문제다.

    그런 이유로 겨울 내내 세답방의 나인들은 손이 시퍼렇게 어는 것은 예사였다.

    황궁에서 편안한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생과방이나 수방, 침방에 비해서 세답방이 가장 고생스러운 것은 봄, 여름, 가을이 전부 힘겨운 일이지만 겨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답방 나인들의 손은 항상 거칠거칠하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고 겨울이면 언 물에 손을 담가야 해서 손이 부드럽기는 애당초 틀렸다.

    그래서 세답방 나인들이 하는 소리가 있다.

    님을 봐야 별을 따는데, 세답방에서는 평생을 가도 님을 볼 수가 없고, 별을 딴다 한들 이 거친 손으로 별을 가져가면 곤장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그런 말이었다.

    게다가 세답방의 나인은 하루 종일 빨래터에서만 산다.

    빨래터에 황제가 나타날 일이 없으니 당연히 황제의 눈에 띄게 될 일도 없어서 세답방의 나인이 되는 순간 입궁하면서 가졌던 모든 꿈들은 다 사라지는 것이 수순이었다.

    물론 연우도 그랬다.

    그나마 연우는 황궁 안에 피붙이가 있다.

    다른 궁녀들과는 달리 황궁 안에 피붙이가 있어서 그나마 위로를 받고 있다.

    만약 혼자였다면 정말 힘들었을 황궁 생활을 피를 나눈 가족이 있어서 덜 힘들 수 있었다.

    “연우야.”

    그 피붙이인 오라비 형우가 찾아온 것은 연우가 한참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어 가며 빨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레박 이리 내놔라. 내가 물을 길어 주마.”

    연우의 오라비 형우는 황궁의 환관이다.

    어려서 개에게 물려 고환이 뜯겨 나간 후에 고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황궁에 들어갈 환관을 구한다는 소리에 자진해서 일찌감치 황궁으로 들어와 환관이 되었다.

    환관이라고 해 봤자 권세 있는 큰 환관이 아니라 내전에서 겨우 말단을 벗어난 환관에 불과하다.

    연우가 궁녀로 입궁하게 된 것도 오라비 형우 때문이었다.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차피 지참금이 없어 좋은 곳에 시집도 못 갈 것이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궁녀가 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형우가 제 누이를 입궁시키는 것을 도와줬다.

    연우의 고향 집에는 아직 연우의 동생들이 줄줄이 남아 있다.

    배를 띄울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땅도 없는 바닷가 촌마을에서 병든 아버지와 귀가 먹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연우와 형우가 보내 주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한겨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혀를 차며 형우가 두레박으로 길은 물을 빨래 통에 쏟아부었다.

    “내가 너 이런 고생하라고 궁에 데리고 온 것이 아닌데.”

    형우가 연우를 데리고 입궁할 때 그런 말을 했었다.

    ‘너는 얼굴이 고우니까 분명 폐하의 눈에 띄게 될 거다. 그러면 팔자를 고치는 거라니까. 이 오라비가 도와주마. 네가 폐하의 눈에 띄게 말이다.’

    아직 화상을 입기 전에는 형우도 연우를 더 곱게 키워 황제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열여섯 살이었던 연우의 나이를 일부러 열네 살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었다.

    어리지만 얼굴만큼은 고운 누이가 더 자라면 분명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미인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동생의 팔자도 피고 자신의 팔자도 피게 할 생각이었지만 누이가 화상을 입으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궁에서 내보낼 수도 없다.

    아니, 내보낼 방법도 없다.

    그래서 형우는 늘 연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냥 궁 밖에서 자유롭게 살게 내버려 둘 것을 괜히 궁으로 데려왔다고 말이다.

    “이건 나중에 쓰거라.”

    빨래통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형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연우의 소매에 뭔가를 쓱 밀어 넣었다.

    “오라버니, 이건…….”

    “그냥 쓰거라. 난 가마.”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형우를 쳐다보던 연우가 소매 안에 손을 넣었다.

    “그게 뭐니?”

    기령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얼른 물어왔다.

    “빨리 꺼내 봐. 그게 뭐니?”

    “분첩인데…….”

    형우가 소매 안에 넣어 주고 간 것은 작은 분첩이었다.

    “내가 이걸 쓸 일이 어디 있다고.”

    분첩은 귀한 것이다.

    환관의 녹봉이 많지도 않은데, 더군다나 이걸 어떻게 구했을까.

    황궁을 아침저녁으로 출입하는 겸내취(兼內吹)들에게 뒷돈을 주지 않으면 이런 것은 구할 수 없다.

    “그걸로 얼굴 흉을 가리라는 거겠지.”

    “그런가?”

    분으로 얼굴의 흉이 가려질까.

    하지만 오라비의 마음이 고마워서 연우가 분첩을 다시 소매 안에 고이 넣어 뒀다.

    다들 제 얼굴의 흉을 알아서 이제 가릴 이유도 없지만, 그럴지라도 연우도 여자다.

    제 얼굴의 흉은 시간이 얼마가 지나도 계속 신경 쓰였고 앞으로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것을 분으로 조금이라도 가릴 수 있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나중에 나도 좀 빌려 주라.”

    “응. 알았어.”

    연우가 다시 거품이 이는 빨래를 벅벅 문질렀다.

    여전히 물이 차갑지만 소매 안이 이상하게 따뜻해서 손이 시린 것도 몰랐다.

    * * *

    달도 없는 밤이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숙직 당번을 바꿔 주기 위해서 어둠 속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던 형우가 갑작스런 요의를 느꼈다.

    “급하다, 급해.”

    형우가 바지춤을 움키고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뛰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는데 뒷간은 여기서 멀기만 하다.

    “어쩔 수 없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형우가 좁은 담벼락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얼른 소변을 누기 시작했다.

    환관이라고는 하지만 형우의 경우는 고환만 개에게 물려 뜯겨나갔고 음경은 멀쩡하다.

    하지만 역시 숨어서 누는 소변은 쪼그려 앉아서 눠야 편하다.

    그렇게 담과 담 사이의 좁고 어두운 곳에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볼 때였다.

    저벅, 저벅.

    ‘바, 발소리?’

    난데없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고 이곳은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다.

    그런데 누가 이런 외진 곳까지 온 것일까.

    게다가 발자국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오셨습니까?”

    ‘여자 목소리? 상궁인가?’

    나이가 있는 여자의 목소리이니 어쩌면 상궁이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늦은 겁니까?”

    앙칼진 이 목소리를 형우는 들어본 적이 있다.

    ‘누구였지? 누구 목소리가 저렇더라.’

    “죄, 죄송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오느라 늦었습니다.”

    이 목소리는 또 젊은 사내다.

    ‘상궁과 환관이 몰래 밀회라도 가지나?’

    그럴 수 있다.

    승은을 입지 못한 나이 든 상궁들이 젊은 환관, 그중에서도 고환만 없을 뿐 음경을 가지고 있는 젊고 잘생긴 환관들을 유혹해서 잠자리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음경이 보존되어 있으면 그중에 절반 정도는 적어도 발기가 가능하다고 들었다.

    다만 형우의 경우는 발기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저런 경우는 그냥 부럽다고 할 수밖에 없다.

    ‘좋겠구만.’

    그러면서도 혹시 이곳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을 들킬까 열심히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은밀하게 나인 한 명 구해 보세요. 절대로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을 그런 아이로 말입니다.”

    ‘나인? 은밀하게? 이건 무슨 말이지?’

    형우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여자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자꾸 듣고 있자니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생각이 날락 말락 가물거린다.

    “어떤 나인을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셔야…….”

    “스무 살 정도의 나이에, 얼굴은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얼굴은 보지도 않을 테니까요. 다만 반드시 처녀여야 합니다.”

    “나인이 다 처녀 아니겠습니까.”

    “개중에 발칙하게 군사 나부랭이와 놀아난 년이면 다 죽는 겁니다.”

    “알아보겠습니다.”

    “금은보화를 안겨 준다고 하세요.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되 일이 성공하면 금은보화를 안겨 준다고 하면 비밀을 지킬 겁니다. 대신 발설하면 목이 달아난다는 말도 꼭 함께 해야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금은보화를 안겨 준다는 거지?’

    형우의 정신이 찬물에 맞은 것처럼 번쩍 들었다.

    아니, 대체 뭐기에 금은보화를 안겨 준다고 하질 않나 발설하면 목이 달아난다고 하질 않나.

    “소문이 나면 안 됩니다. 은밀하고 또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가만 있자. 이 목소리는, 분명히…….’

    틀림없다.

    이 목소리는 새로 입궁한 황후의 시중을 드는 상궁의 목소리다.

    정 씨 성을 가진 황후의 처소 모란궁의 정 상궁, 그녀의 목소리가 틀림없다.

    궁녀 출신이 아니라 원래는 황후의 사가의 몸종이었는데 황후를 따라 입궁해서 상궁의 첩지를 받은 정 씨 성을 가진 그 매부리코의 여자.

    그 목소리가 워낙 앙칼져서 귀에 남았는데 지금 이 목소리는 틀림없는 그녀다.

    목소리가 워낙 앙칼져서 형우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황후를 수발드는 상궁이 왜 스무 살짜리 나인을 은밀하게 찾는 거지? 그것도 금은보화까지 안겨 준다고 하고…….’

    형우가 더 귀를 기울였다.

    바지를 추어올리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바짝 기어가서 그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잘만 하면 운수대통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슬슬 들고 있었다.

    궁 생활을 오래 한 형우는 눈치도 빠르고 감도 좋다.

    잠깐 듣기만 했는데도 벌써부터 뭐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하룻밤이면 됩니다. 들키지 않으면 서로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찾아는 보겠지만 그런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하는 나인이 있을지…….”

    “폐하를 모시는 겁니다. 그리고 황후 마마께서 직접 하시는 일입니다. 위험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형우의 눈이 커졌다.

    ‘황제 폐하를 모시는 일이라고? 승은을 입을 나인을 찾는 건가? 얼굴은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이건 기회다. 그것도 하늘이 준 기회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그건 바보 천치다.

    “이,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어요!”

    형우가 다짜고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곳에 뛰어들었다.

    “누구냐!”

    “웬 놈이……!”

    갑자기 뛰어든 형우 때문에 대화를 나누던 환관도, 정 상궁도 놀라 기겁을 했지만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고 형우가 정 상궁의 앞에 엎드렸다.

    “그런 나인을 제가 압니다. 입이 무겁고 스무 살 정도에 절대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그런 나인입니다.”

    “네 이놈! 어디까지 엿들은 것이냐?”

    정 상궁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형우를 노려봤다.

    “폐하의 승은을 입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딱 알맞은 나인을 소인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형우에게 있어서 이건 반드시 잡아야 하는 동아줄이다.

    동생을 그 세답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

    잘 되면 황제의 승은을 입어 신분이 상승하고, 안 되더라도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다.

    자신이 데려온 동생 연우에게 이렇게라도 해 줘야 한다.

    그 생각으로 형우는 필사적이었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잘못되어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하지만 성공하면 금은보화를 얻는 것이니 죽을 힘을 다하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그런 나인을 아느냐?”

    “제 누이가 세답방 나인입니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그런 아이입니다.”

    형우는 필사적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이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형우는 정 상궁으로부터 대답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네 누이를 데리고 모란궁으로 오거라, 은밀하게.”

    * * *

    정작 아닌 밤중에 봉변을 당한 것은 연우다.

    자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저를 깨운 오라비 형우의 손에 끌려 나온 연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황후궁인 모란궁으로 불려 갔다.

    오라비는 자신을 부른 것이 황후라고 했지만, 연우는 황후가 왜 자신을 부른 건지 그 이유는 몰랐다.

    모두가 잠든 밤에 은밀하게 모란궁으로 자신을 데려가며 오라비 형우가 해 준 말은 ‘이번에는 진짜 단단히 팔자 고칠 수 있으니까 오라비 말만 잘 들으면 된다.’였다.

    ‘네가 승은을 입게 되는 거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연우는 오라비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대체 오라비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미쳐 버린 걸까.

    하지만 오라비의 손에 이끌려 모란궁에 이르렀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던 모란궁 정 상궁을 보는 순간 오라비가 미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네가 세답방의 나인이라지?”

    잠깐 본 황후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얼굴에 흉이 있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황후 앞에서 연우가 바짝 겁을 먹었다.

    “네, 마마. 그러하옵니다.”

    제 앞에 앉은 황후를 잠시 쳐다봤지만 더는 감히 쳐다볼 수 없어 바닥에 이마를 대고 바짝 엎드린 연우가 덜덜 떨며 겨우 대답만 했다.

    “얼굴은 어쩌다가 그리되었느냐?”

    “어려서 화로의 숯에 화상을 입었나이다.”

    이 아름다운 황후는 얼마 전에 새로이 간택을 받아 책봉되었다.

    작년에 태자비가 없는 상태로 황위에 오른 황제는 몇 개월 동안 황후가 없이 지내다가 이번에 간택령을 내려 처녀를 간택하고 황후로 봉했다.

    그녀가 바로 연우의 눈앞에 있는 여인이다.

    좋은 집안의 고귀한 핏줄인 것이다.

    자신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네가 해 줄 일은 폐하의 승은을 받는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저처럼 미천한 것이 어찌 폐하의 승은을…….”

    “네가 승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는 그저 대역을 해 주면 되는 것이다.”

    “대역이라 하시면…….”

    대역?

    승은에도 대역이 있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 연우가 자신이 대체 뭘 놓쳤는지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황후의 말에서 자신이 놓친 것은 없다.

    지금 황후가 제게 한 말은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궁 안의 모두가 아는 것이겠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는 아직 폐하와 초야를 치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내일 밤 초야를 치러야 하는데, 그 하룻밤만 네가 내가 되는 거다. 내가 되어서 폐하의 하룻밤 승은을 받는 것이다.”

    하룻밤, 단 하룻밤 가짜 황후가 되어서 대신 승은을 받으라고?

    그게 가능한 걸까?

    아니, 애당초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걸까.

    그러다가 들키면 혼자 목이 달아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황제를 속이고 기만한 죄로 가족들까지 전부 죽을 수 있다.

    “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초야를 치를 수가 없다. 그러나 정해진 초야를 내 사정으로 치르지 못한다고 하면 폐하께서 노하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니 네가 하룻밤만 내가 되어 다오. 무사히 끝내면 금은보화를 넘치도록 하사하고 너를 황궁 밖으로 출궁시켜 주마.”

    황후의 말에 연우의 귀가 번쩍 트였다.

    출궁에 금은보화까지 하사한다면 목숨을 걸어 볼 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라비가 제게 ‘팔자가 피는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6년 전 그 일 이후로 이 황궁은 연우에게는 항상 불편하고 불안한 곳이었다.

    만약 정말로 출궁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오나 폐하께서 소인의 얼굴을 보시면…….”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황궁의 관습에 초야를 치르기 전에는 부정을 탄다 하여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가운데에 주렴을 내리니 말이다. 초야를 치르는 내내 폐하는 네 얼굴을 보지 못하실 거다.”

    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정말 이 대역 승은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6년이나 지났는데 황제가 제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뺨의 흉터를 보면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제 얼굴을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간에 자신이 황후가 아닌 것은 알아볼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네가 해 보겠느냐?”

    황후가 재차 물어왔다.

    연우는 바보가 아니다.

    이런 은밀한 일을 다 듣고 나서도 못하겠다 하면 분명 저와 오라비의 목숨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이건 무척이나 은밀하고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황제의 귀에 들어가거나 누가 알기라도 하면 큰 파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자신을 비롯하여 황후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거절하면 후환을 피하기 위해 황후는 저와 제 오라비를 기어이 죽이려 들 것이 분명하다.

    아예 듣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들은 이상, 이건 해도, 하지 않아도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는 없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우가 바닥에 이마를 조아린 채로 대답했다.

    하룻밤이다.

    딱 하룻밤.

    그 하룻밤만 무사히 넘기면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

    “내일 밤이다. 단장을 해야 하니 내일 해가 지면 바로 모란궁으로 오거라.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단짝인 기령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건 정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비밀이다.

    머리를 조아린 연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6년 전 그 일로 황제는 제게 무서운 사람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마음 한구석에는 태자 시절의 그를 보며 두근거리고 설렜던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황제를 6년 만에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는 것이다.

    비록 황후 대리이지만 말이다.

    * * *

    “저 아이를 믿을 수 있겠느냐?”

    연우가 나간 후, 황후 진홍이 제 곁에 앉은 정 상궁을 쳐다봤다.

    진홍의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연우 앞에서 당당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만에 하나 들통나면? 그때는 어쩌지?”

    “다 잘 될 것이옵니다, 마마.”

    정 상궁이 진홍을 안심시켰다.

    “초야를 치르는 신방의 불은 모두 끌 것이고, 폐하와 저 아이 사이에는 주렴이 드리워져 있어서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하오니 폐하께서는 저 아이가 마마라 여기실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

    “폐하께서 어찌 아시겠습니까. 하룻밤만 넘기면 되는 것이니 마마께서는 마음을 편히 놓으세요.”

    “하룻밤만…….”

    진홍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황후가 될 줄은 몰랐다.

    원래 황후가 되는 것은 진홍의 언니인 연홍이었다.

    연홍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 우태사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진홍도 안다.

    황제는 태자 시절부터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고자니, 남색가니 하는 소문까지 파다할 정도였었다.

    그래서 태자비도 없이 황위에 올랐다.

    황위에 오른 후에도 몇 개월이나 황후가 없이 지내다가 이번에 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그제야 겨우 황후를 들이기로 했는데 모두가 노리는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진홍의 아비인 우태사였다.

    제 딸을 황후로 만드는 대신, 그 일에 도움을 준 이들의 딸들에게 후궁 첩지가 내려지게 해 주겠다는 모종의 거래가 오갔다는 것도 진홍은 안다.

    그렇게 아비는 진홍의 언니인 연홍을 황후로 만들려고 했지만 정작 간택령이 내려지기 직전에 연홍이 그만 홍역에 걸려 버렸다.

    홍역이 무엇인가.

    전염력이 강한 열병이다.

    홍역에 걸려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연홍을 간택 자리에 내보낼 수 없었던 아비는 진홍을 대신 간택 자리에 내보냈다.

    다만 문제는 진홍이 이미 정혼을 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정혼만 한 것이 아니라 얼마 전 그 정혼자가 죽어 곧바로 파혼을 하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아이가 들어선 상태였었다.

    정식으로 혼례만 올리지 않았지 정혼자가 되는 사내가 우태사의 집을 밤마다 드나들며 진홍과 잠자리를 가져 이미 진홍은 잉태를 한 상태였고 그 와중에 사내가 죽자 파혼을 한 진홍은 뱃속의 아이를 지웠다.

    그렇게 몇 년 후 파혼이 잠잠해지면 적당한 가문을 찾아 시집을 보내는 것이 우태사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연홍이 홍역에 걸리며 황후 자리를 놓치게 될 수도 있자 우태사는 진홍을 연홍의 자리에 밀어 넣었다.

    물론 진홍의 이름이 아니라 연홍의 이름으로 말이다.

    연홍과 진홍은 쌍둥이 자매다.

    누가 봐도 얼굴은 똑같다.

    일단 간택 자리에 내보내고 황후가 되고 나면 나중에 연홍과 바꿔치기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언니 연홍이 그만 덜컥 죽어 버린 것이다.

    홍역을 앓던 연홍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덜컥 죽자 진홍은 이도 저도 못 하고 꼼짝없이 연홍이라는 이름으로 황후로 살게 생겼다.

    물론 황후의 자리는 진홍도 욕심이 났었다.

    언니를 황후로 생각하고 있다는 아비의 말에 화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저는 금방 죽을 사내와 정혼을 시키고 언니는 황후로 만들고, 그게 너무 화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언니 연홍이 죽었을 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뻐서 어쩔 줄 몰랐었다.

    상을 치르며 황후 책봉이 조금 늦어졌지만, 무사히 입궁했고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진홍이 처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초야를 치르면 자신이 처녀인지 아닌지 들통나게 된다.

    일부러 금침에 피를 묻힐 수도 있지만, 그러다 들키면 어떻게 변명을 하겠는가.

    게다가 초야의 신방을 주관하는 것은 모란궁이 아니라 경사방이다.

    경사방의 환관들과 상궁들이 초야를 치르는 신방을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치우는 것까지 전부 관리하기 때문에 진홍은 거기에 손을 쓸 수가 없다.

    물론 모든 처녀가 다 초야에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느슨해진 질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진홍은 예전 정혼자와 매일 밤 관계를 가졌었고, 아이를 출산은 하지 않았지만 유산은 했다.

    황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과 교합을 하면 분명 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대리 승은이다.

    저를 대신할 가짜를 신방에 들여보내 황제와 초야를 치르게 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일단 처녀 혈만 보이면 그 후에는 느슨한 질은 원래 몸이 그렇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초야의 처녀 혈이다.

    그걸 대신 흘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문제 없겠지? 만약 그 세답방 나인 년이 발설이라도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마마, 어차피 살려 둘 년이 아닙니다. 이 일이 끝나면 그년을 죽여야 이 비밀을 평생 보존할 수 있습니다. 언제 발설할지 모르는 그런 년을 살려 두면 반드시 후환이 됩니다.”

    “그렇지?”

    “네, 마마.”

    “그러면 죽이는 건…….”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해 놓겠습니다. 마마는 저만 믿으시어요.”

    정 상궁은 진홍이 사가에서 데려온 몸종 출신이다.

    몸종이라고는 하지만 머리가 똑똑하고 영악해서 아비 우태사가 데려가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라며 진홍에게 붙여 준 측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태사와 긴밀하게 연락하는 것도 전부 정 상궁의 몫이다.

    “마마는 그저 마음만 푹 놓으시어요. 초야만 치르고 나면 그 후에는 폐하와 합방을 치르셔도 됩니다. 하루빨리 용종을 잉태하시라는 것이 태사님의 전언이옵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진홍은 욕심이 많다.

    그리고 이제 황후가 되었으니 남은 것은 태자를 낳고 태후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많은 후궁들이 입궁하겠지만 그래 봤자 태자를 낳는 것은 자신이고 태후가 되는 것도 자신이다.

    “전부 다 내 것이야.”

    하룻밤, 그 초야만 무사히 넘기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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