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하는 글. 스무 발자국 (1/7)
  • 시작하는 글. 스무 발자국

    겨울이 막 시작되려는 가을의 막바지였다.

    황궁에도 어김없이 찬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전부 떨어지고 나무들은 앙상하게 변했다.

    그 추운 담벼락 아래에서 올망졸망한 어린 생각시들이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고개를 숙인 채로 엄한 훈육 상궁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이곳에서는 함부로 봐서도 안 되고, 함부로 들어서도 안 되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너희 같은 것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는 곳이니 그저 무엇을 보든 눈을 감고 무엇을 들어도 모르는 척해야 하느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마님.”

    어린 생각시들은 태자궁의 상궁이 엄하게 이르는 말에 고개를 조아리며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 살, 열세 살가량의 어린 생각시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우는 올해로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다.

    하지만 열네 살이라고 속이고 입궁했다.

    나이가 많으면 생각시가 될 수 없다며 오라비가 ‘누가 묻거든 열네 살이라고 하거라.’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생각시가 된 이후, 입궁을 담당하던 상궁이 ‘나이보다 조숙하구나.’라고 말했을 때 들켜서 쫓겨날지 모른다고 겁을 먹었지만 그대로 잘 넘어갔다.

    “너희들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이곳에서 태자마마의 수발을 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곳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곳과는 다르니 매사에 언행을 조심해야 하느니라.”

    “네, 마마님.”

    생각시로 입궁을 하면 처음부터 황궁의 어느 처소에서 일하는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 년 가까이 황궁의 각 처소에서 일을 한 다음 어느 처소의 나인이 될지 결정이 된다.

    생각시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정해져 있다.

    황제의 침전이 있는 대명궁, 태후의 궁인 화정궁, 황후의 처소인 모란궁 그리고 태자궁인 이곳 소명궁이 생각시들이 저마다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특히 대명궁과 소명궁의 경우는 나인들이 신분 상승을 위해서 기를 쓰고 가려는 곳이었다.

    황궁의 나인들이 팔자를 고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황제나 태자의 눈에 들어 후궁의 첩지를 받는 것이다.

    거기에 황손까지 낳으면 후궁들 중에서도 높은 반열에 설 수 있다.

    생각시가 된 소녀들은 대부분이 집이 가난하여 팔려 오듯이 입궁한 경우다.

    그들은 누구보다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이 높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후궁이 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승은을 입으려 했다.

    물론 열 살, 열두 살의 생각시들이 승은을 입을 일은 없지만 미리 소명궁이나 대명궁의 나인이 되어야 나중에 열일곱, 열여덟 살 한참 꽃이 피듯 아름다워지는 나이가 되었을 때 황제와 태자의 눈에 들 수 있다.

    지금 황제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고 있는 강 귀비의 경우에는 아홉 살에 생각시로 입궁해서, 열 살에 대명궁의 나인이 되어, 열여덟 살에 황제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은 덕분에 지금은 공주 두 명을 낳고 귀비의 첩지를 받았다고 했다.

    이미 나인으로 입궁했다가 후궁이 된 선례가 지금의 황제에게만 해도 벌써 열 명이 넘는지라 어린 생각시들의 생각에는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 어린 생각시들이 가장 바라고 있는 곳은 황제의 궁인 대명궁보다는 태자의 궁인 소명궁이었다.

    황제의 나이는 이미 예순이 넘었지만, 태자는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예순 넘은 황제의 후궁이 되는 것보다는 장차 황제가 될 태자의 후궁이 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어린 생각시들도 안다.

    무엇보다 흰머리가 성성한 황제보다는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진 태자를 흠모하지 않는 나인들이 없을 정도였다.

    열두 살 어린 생각시들이 열아홉 살의 태자를 보며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시 중에는 연우도 끼어 있었다.

    열네 살이라고 속이고 입궁했지만 연우는 벌써 열여섯 살이다.

    열아홉 살의 청년 태자를 보며 가슴이 설렐 수 있는 나이다.

    실제로 태자를 처음 본 그때, 연우는 숨이 막혔었다.

    세상에 그렇게 잘난 사내는 처음 봤다.

    연우는 시골 출신이다.

    도성에서도 이틀을 꼬박 걸어가야 나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연우는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청년들은 물론이고 또래의 소년들도 본 적이 없다.

    바닷가라고는 하지만 물살이 워낙에 사나운 곳이라 배를 띄워 고기를 잡을 수 없는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사내아이들이 태어나서 열서너 살이 되면 돈벌이를 하려고 타지로 나간다.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배도 탈 수 없는 곳에서는 무엇을 해도 돈을 벌어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열서너 살이 되면 사내아이들은 타지로 가서 돈을 벌었다.

    연우와 어렸을 때 한동네에서 자랐던 사내아이들도 열두 살이 넘으면 전부 타지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탓에 그 마을에는 노인과 아이들 외에는 사내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작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점점 다른 곳으로 떠났다.

    처음에는 돈벌이를 위해 사내아이들과 젊은이들만 떠났지만, 점점 마을에 남아 있던 다른 가족들도 집을 버리고 타지로 옮겨 갔다.

    그렇게 한 집, 두 집 떠나고 나중에 연우마저 떠나 올 즈음에 그 작은 마을에 남아 있던 집은 고작 스무 집이 되지 않았었다.

    백 가구가 넘던 마을에서 스무 가구만 남게 될 정도로 모두가 마을을 떠날 때에 연우의 식구들이 끝까지 그 마을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성에서 돈을 벌어 집으로 보내 오는 오라비 덕분에 굳이 마을을 떠날 이유도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것보다는 돈을 벌러 도성으로 간 오라비가 보내 오는 돈으로 식구들이 굶지 않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열여섯 살까지 연우는 온통 바다 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 작은 마을에서 동생들을 돌보고 다리를 다쳐 운신이 힘든 아버지와 젊어서 귀를 다쳐 말소리를 들을 수 없는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다.

    오라비가 돈을 보내 주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아버지의 약값과 식구들의 끼니를 근근이 이어 갈 뿐이었다.

    물살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에서 조개를 주워 그것을 팔아 집안 살림에 보태기도 했었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또래의 소년들이나 청년들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오라비가 불러 도성으로 와서 입궁한 후에 황궁 안에서 만난 젊은 환관들과 병사들이 연우가 거의 처음으로 본 젊은 사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젊고 늠름한 태자를 보았으니 가슴이 설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당연히 가슴이 설레고 자연스레 시선이 태자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계절은 겨울인데 마음은 봄인 것은, 그것이 연우가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첫 연정이었기 때문이다.

    * * *

    톡.

    처마에서 눈이 떨어졌다.

    ‘추워…….’

    추위에 새빨갛게 언 코와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슬슬 흘러나왔다.

    입고 있는 옷에 솜을 넣어 누비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동설한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손이 시려워…….’

    다행스럽게 오늘은 눈이 그쳤지만 어제까지 내린 눈이 지붕 위에 잔뜩 쌓여 있다.

    눈이 내릴 때보다 눈이 그친 후가 더 춥다는 말이 맞는 듯 지금 연우는 너무 추운 나머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안 되겠다. 난 잠시 화로에 불 좀 쬐고 올 테니까 너 혼자 잠시만 있으렴.”

    연우와 함께 당번을 서던 나인이 더는 추위를 참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저 혼자 어찌…….”

    “괜찮아. 마마께서는 아침까지는 절대로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으실 테니까, 내가 한두 번 야간 당번을 서는 것이 아니니까 잘 알아.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돼.”

    원래 이곳 소명궁의 나인인 그녀가 하는 말에 연우가 고개만 끄덕였다.

    “상궁 마마님들도 그런 줄 알고 코빼기도 안 보이시잖아.”

    “네.”

    “한 시간만 불을 쬐고 올게.”

    그 말을 남기고 나인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소명궁의 침전 앞에는 연우 혼자 남겨졌다.

    “하아……. 후우, 후우.”

    너무 추운 나머지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불며 연우가 발을 동동 굴렀다.

    교대를 하는 새벽까지는 아직 멀었다.

    ‘어떻게 하지? 너무 추워.’

    하지만 자신마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

    아무리 태자가 평소에 아침까지 절대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소명궁 앞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 오후에 산책하실 때 걸음이 정말 빠르셨는데……. 다리가 기니까 보폭이 넓어서 걸음이 빠르시구나.’

    추위를 잊기 위해 연우가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태자는 오후면 항상 북쪽 정원을 산책한다.

    얼어붙은 연못 주변을 돌아 눈이 하얗게 쌓인 나무들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지만 거리가 상당히 길다.

    태자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다.

    그 때문에 보폭이 넓어서 태자는 평범하게 성큼성큼 걷지만, 그보다 체구가 작은 연우로서는 종종걸음으로 뒤쫓아가야 한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버선을 신은 발이 꽁꽁 얼어붙어서 걷는 것이 너무 힘들고 빨리 걸을 때마다 발가락과 발바닥이 무척이나 아팠었다.

    태자의 뒤를 따라가다가 주저앉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궁을 비롯해서 바로 위의 나인들에게 혼쭐이 날 것이고, 운이 나쁘면 황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는 뜻밖의 일이 일어났었다.

    평소처럼 큰 보폭으로 걷던 태자가 도중에 걸음을 멈춰 줬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태자가 왜 갑자기 걸음을 멈췄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그 덕분에 잠시 발을 쉴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숨이 턱에 닿도록 쫓아가던 중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주셨지.’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태자는 멈추기 전보다 훨씬 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었다.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이후에 연우도 수월하게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밤새도록 저렇게 책을 읽으시는 걸까? 눈이 아플 텐데…….’

    연우가 소명궁의 수습 나인이 된 지 보름째였다.

    보름 동안 연우는 열 번이나 밤 당번을 섰다.

    한밤중이 되면 너무 춥기 때문에 다들 밤 당번을 꺼려 하는 탓에 전부 연우의 차지가 된 것이다.

    태자는 새벽까지 처소의 불을 끄지 않는다.

    왜 불을 끄지 않느냐는 연우의 물음에 소명궁의 나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었다.

    ‘뭘 하긴 뭘 해. 책을 읽으시는 것이겠지.’

    연우는 글을 모른다.

    그래서 책을 읽는 법도 모르고 책이 재미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책을 읽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밤을 새워서 저렇게 책을 읽겠지.

    ‘어떤 책을 읽으실까?’

    연우가 뒤를 힐끔 돌아봤다.

    불이 켜진 저 처소 안에 태자가 있다.

    연우는 태자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

    스무 발자국.

    그보다 더 가까이 태자에게로 다가가 본 적이 없다.

    연우는 항상 태자에게서 스무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여기서 태자가 앉은 저 처소 안까지는 열 발자국 정도밖에는 되지 않지만, 저 문을 열 수는 없다.

    저 문이 열리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저 문을 열 수도 없다.

    열 발자국이든 스무 발자국이든 자신이 태자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너 같은 미인은 분명 폐하의 눈에 들 거야.’

    연우는 항상 어여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걱정 마라. 너 정도로 예쁜 얼굴은 내가 황궁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오라비도 그렇게 말했었다.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자라 얼굴이 바닷바람과 햇볕에 그을리긴 했지만 연우는 항상 곱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분명히 팔자를 고칠 수 있을 거야.’

    저를 황궁에 불러온 오라비가 바라는 것은 연우의 고운 얼굴로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는 것이다.

    후궁만 되면 팔자가 고쳐진다고 오라비는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연우는 황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입궁할 때만 하더라도 그런 바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오라비의 말처럼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면 가족들에게도 좋은 일이라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지금은 더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태자 때문이다.

    태자를 보고 설레기 시작한 마음은 후궁이 되어 팔자를 고치고 싶다는 생각을 누르기에 충분했다.

    이왕 승은을 입는다면 태자의 승은을 입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을 연우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황궁 안의 나인들에게 승은을 내리는 황제와는 달리 태자는 금욕적인 성품으로 이미 황궁 안의 모든 생각시, 나인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다.

    지금까지 태자가 소명궁을 비롯해서 다른 궁의 나인들에게 승은을 베푼 적은 없다.

    오죽하면 태자가 고자가 아니냐는 불미스러운 소문까지 은밀하게 돌고 있다.

    다들 늙은 황제보다는 젊은 태자의 승은을 입기를 바라고 있지만 누구도 태자의 승은을 입은 나인이 없으니 이제 슬슬 다들 포기하는 것이다.

    아무리 고운 나인이라고 해도 태자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승은을 입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연우 역시 마찬가지다.

    태자의 승은을 입는 것에 대한 기대는 접은 지 오래다.

    자신이 아무리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을 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태자가 소문처럼 정말 고자이거나 아니면 아예 여색에 관심이 없는 목석이거나, 그것도 아니고 은밀하게 떠도는 소문처럼 남색을 한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태자의 승은을 입을 수 있겠는가.

    승은에 대한 바람은 접었지만 태자에 대한 설렘은 접을 수가 없다.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없지만 마음은 그런 것이 없어도 설렐 수 있다는 것을 연우는 처음 알았다.

    스무 발자국보다 가까이 다가간 적도 없고, 그 얼굴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적도 없고, 그 눈과 시선을 마주쳐 본 적도 없지만 마음은 설렐 수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너무 추우면서도 마음은 또 설렌다.

    그때였다.

    “밖에 누가 있느냐?”

    ‘앗!’

    이건 태자의 목소리다.

    ‘어, 어떻게 하지?’

    갑작스런 태자의 목소리에 연우가 허둥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한 시간만 화롯불을 쬐고 온다던 나인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했다.

    아직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 벌써 돌아올 리가 없다.

    ‘나 혼자 어쩌지?’

    당황하던 연우가 겨우 대답했다.

    “네, 마마.”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추운 것도 전부 다 날아가 버렸다.

    “내가 입이 심심하여 그러니 별참이라도 가져오거라.”

    “다, 당장 그리하겠습니다.”

    대답하고 나니 말이 이상하다.

    당장 그리하겠다니, 당장? 당장? ‘서둘러’라고 말했어야 했나?

    연우는 생과방으로 뛰어가며 몇 번이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보 같은 말을 했다고 후회하며 생과방으로 뛰어온 연우가 당번을 서고 있던 생과방의 나인들에게 소명궁에 들일 야별참을 내어 달라 말한 후에야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 * *

    그러나 정작 진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내, 내가 가지고 들어가도 되는 걸까?’

    야별참을 가지고 태자의 처소 앞에서 연우가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자신 외에 다른 나인은 없다.

    그러니까 이걸 자신이 직접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데 심장이 떨리고 손과 다리가 떨려서 괜히 태자 앞에서 이 야별참을 엎어 버리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마, 마마. 별참을 들여가겠습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연우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태자는 촛불을 밝혀 놓은 책상 위에 올린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태자가 제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태자가 제게 시선을 줬다면 연우의 다리는 그대로 힘이 풀렸을 것이 틀림없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연우가 태자의 옆으로 별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거기 있다가 내가 다 먹으면 내어 가거라.”

    “네? 네, 네. 마마.”

    뜻밖의 말에 연우가 태자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은 여전히 떨림이 멎지 않고 심장도 숨이 가쁠 정도로 빨리 뛰고 있다.

    ‘내 숨소리가 너무 크지 않을까?’

    괜히 자신의 숨소리가 태자의 귀에 거슬리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처소 안은 고요했다.

    태자의 낮은 숨소리,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가끔 태자가 간식으로 들여온 생과를 씹는 소리가 처소 안에서 들리는 소리 전부였다.

    ‘이렇게 가깝게 있는 건 처음이야.’

    지금 이 공간 안에는 태자와 자신 단둘이다.

    이런 시간이 또 올 수 있을까.

    ‘손이 녹았어.’

    그리고 태자의 처소는 무척이나 따뜻해서 차가운 밖에서 얼었던 손과 발이 전부 녹았다.

    ‘간지러워.’

    얼었던 살이 녹으며 손과 발이 간질거렸다.

    뺨도 간질거렸지만 태자가 있는 곳에서 뺨을 긁을 수는 없다.

    “혼자 먹으려니 맛이 없구나.”

    “다른 것을 들여올까요?”

    별참이 맛이 없다는 말에 연우가 퍼뜩 대답했다.

    “혼자 먹으려니 맛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같이 먹어 줘야 맛이 나는 것 아니겠느냐.”

    “그, 그러하오면…….”

    누가 같이 먹어 줘야 한다고?

    그런데 누가 그럴 사람이 있을까?

    “네가 좀 먹거라.”

    “네? 하, 하지만…….”

    저더러 별참을 먹으라는 말에 연우가 놀라 기겁을 했다.

    태자의 야별참에 자신이 어떻게 손을 댄단 말인가.

    “가까이 와서 너도 먹거라.”

    연우가 조심스레 눈을 들었다.

    태자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야별참 쟁반 옆에 작은 종지에 덜어 놓은 별참이 보였다.

    태자가 일부러 작은 그릇에 별참을 덜어서 제 쪽으로 민 것이 분명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작은 종지 옆으로 무릎으로 기어서 간 연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지 안에 담긴 생과를 집었다.

    파삭.

    생과를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에서 파삭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쩌지? 소리가 너무 큰데…….’

    하지만 태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책을 읽었다.

    가끔 태자는 손을 뻗어 말린 곶감을 집어 씹고는 우물거렸다.

    태자가 제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연우는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조용한 것이……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이런 고요함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연우는 늘 파도가 치는 바다 근처에서 살았다.

    파도가 치거나 바람이 불거나, 항상 그랬었다.

    작은 집에서는 항상 동생들이 떠들어댔었다.

    조용했던 기억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조용하다.

    눈이 내려서 더 조용한 것일 수도 있다.

    고요하고, 그 고요한 가운데 책을 넘기는 소리와 태자의 낮은 숨소리, 그가 생과를 씹는 소리, 제가 생과를 씹는 소리, 제 심장이 뛰는 소리. 그것이 전부다.

    아삭, 아삭.

    연우의 입술에서 생과를 씹는 소리가 새었다.

    혹여 제가 생과를 씹는 소리가 태자의 책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태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목이 막히면 차라도 마시거라.”

    무심하게 태자가 던진 말에 연우의 뺨이 붉어졌다.

    화로에 얹어 놓은 주전자에서 따른 차를 태자의 책상 위에 올리고 여벌의 잔에 따른 차를 두 손으로 들고 호로록 마시자 입 안에 향긋한 차의 향기가 맴돌았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향기였다.

    그리고 이 향기가 태자의 처소에 가득 배어 있다는 것을 연우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좋은 향기, 기분이 아늑해지는 향기, 그리고 심장이 뜨거워지는 향기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연우가 살며시 태자를 훔쳐봤다.

    다시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태자를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 * *

    그날 이후로 연우가 다시 태자의 가까이 스무 발자국 안에 다가갈 기회는 없었다.

    그날의 일은 마치 꿈결과 같은 것이었다.

    때때로 연우는 자신이 꿈을 꿨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즈음에 소명궁의 나인 한 명이 황제의 승은을 입어 후궁의 첩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다들 그 나인을 부러워했지만, 연우는 그것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후궁의 첩지보다 더 소중한 기억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소명궁의 나인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제 곧 한 달 말미의 수습 기간이 끝난다.

    수습 기간이 끝나면 다른 궁으로 옮겨 가야 한다.

    그렇게 일 년여를 보내고 나면 나인들의 거처를 정하는 것은 봉직 상궁의 몫이다.

    어떤 이들은 봉직 상궁의 눈에 들기 위해서 뇌물을 주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연우는 봉직 상궁에게 줄 뇌물도 없다.

    뭐라도 있다면 뇌물을 줘서라도 소명궁으로 돌아오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연우가 눈을 들었다.

    가장 끝줄에 서서 행렬을 따라가는 연우의 눈에 태자의 등이 어른거렸다.

    꼭 스무 발자국이다.

    태자가 전각 위로 올라서자 그를 따르던 나인들의 행렬이 멈췄다.

    그리고 차가운 돌바닥에 나인들이 엎드렸다.

    전각 위에는 황제와 태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전각 바로 아래의 돌바닥 우편에는 황제를 보필하는 나인들이, 좌편에는 태자를 보필하는 나인들이 두 줄로 엎드려 차가운 곳에 이마를 댔다.

    황제와 태자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연우도 안다.

    연우도 귀가 있어서 나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있다.

    지금 태자의 모후, 그러니까 황후가 깊은 병이 들어 병석에 누운 지 벌써 삼 년이나 지났다고 들었다.

    황후가 중병에 걸렸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후궁을 들이는 황제를 태자는 아마 미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후궁들이 태자를 폐하고 그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부디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기를 연우는 바랐다.

    비록 자신이 감히 태자의 시선조차 바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태자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전각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연우의 귀에는 정확한 대화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다.

    “아아아악!”

    연우가 비명을 지르며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슨 일이 제게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얼굴에 뜨거운 것이 쏟아지며 살갗이 타들어 갔다.

    “아아악! 아악!”

    뺨을 손으로 감싼 연우가 비명을 지르며 차가운 돌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연우야!”

    “이를 어쩌면 좋아!”

    다른 나인들과 생각시들이 지르는 비명 섞인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지만 제가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빨리 옮기거라!”

    상궁이 소리치는 소리를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연우가 혼절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하루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얼굴은 붕대에 칭칭 감긴 채였고, 연우는 상궁에게서 며칠 쉬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의님이 그러시는데…… 얼굴에 흉이 평생 갈 거래.’

    같은 방을 사용하는 동기 생각시가 울먹이며 하는 말은 꼭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태자마마께서 네게 화로의 숯을 던지셨어. 불 붙은 숯 말이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태자가 왜 자신에게 불 붙은 숯을 던졌을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냥 집어 던졌는데 하필이면 자신이 맞아 버린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재수가 없어서, 하필 그게 자신의 얼굴에 맞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자가 그럴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산산조각 났다.

    ‘너를 보면서 던지셨어. 상궁 마마님께서 보셨대.’

    태자는 자신이 미웠던 걸까?

    자신이 보기 싫었던 걸까?

    자신의 이름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까지 한 걸까.

    눈물이 났지만 울지 않았다.

    평생 얼굴에 화상의 흉터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어의의 말에도 울지 않았다.

    이제 그 얼굴로는 승은을 입을 일은 꿈에도 없을 거라며 뒤에서 수군거리는 생각시들과 나인들의 목소리도 못 들은 척했다.

    그 날 이후로 연우는 며칠 내내 악몽을 꿨다.

    태자가 제 얼굴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지져 대는 그런 악몽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면 전신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그 이후, 연우는 세답방으로 배치되었다.

    얼굴에 흉이 있는 나인을 배치할 곳은 세답방 밖에 없다며 봉직 상궁이 그녀를 그곳으로 보낸 것이다.

    다른 생각시들이 전부 대명궁과 소명궁, 그리고 다른 궁으로 배치되어 갈 때 연우는 흉이 진 얼굴로 하루 종일 찬물에 손을 담가야 하는 세답방으로 보내졌다.

    그 후로 태자를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마주친다면 분명 그 자리에 주저앉아 덜덜 떨 것이 분명해서, 너무 무서워서 울어 버릴 것이 분명해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열여섯 살, 연우의 겨울이 지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후로는 우연한 기회로도 태자와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먼발치에서도 태자를 보게 되는 일조차 없었다.

    연우에게 있어서 태자는 제 뺨의 흉터로만 기억이 되었다.

    겨울이 되어 유난히 뺨이 쓰리고 아플 때면 그때마다 태자가 생각이 났다.

    처음에는 무섭고 아픈 기억으로, 몇 년이 흐른 후에는 그것마저도 그리움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뺨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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