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6)
  • 11.

    곤이 찾은 건 다름 아닌 비루한 고글맨 켄이었다. 텐위의 소속 배우이자 유진의 첫 영상 상대였던 남자. 호출로 끌려온 켄은 취조 분위기 속에서 곤을 마주했다. 물론 켄은 유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존재감 없는 그는 프로덕션 내에서 제프 파쯤으로 일컬어지는 인간이었는데, 이유는 그가 사장의 약을 구하는 손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GV배우들은 촬영을 위해 불법적인 약에 손대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걸 맡은 게 텐위 프로덕션에서 제프였다.

    일에 있어 철저한 곤은 웹을 돌아다니며 회사 내부 정보를 발설하는 인간들을 주시했다. 이런 폐쇄적인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입이 근지러워서 참지 못한 족속들이니까 말이다. 포르노 포럼에서 켄이 어떤 아이디로 글을 쓰고 있는지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곤은 켄에게 몇 가지 심문할 게 있었다.

    “저, 전 아무것도 몰라요!”

    잡혀 오자마자 곤의 박력과 레이의 회유에 못 이긴 켄은 아는 바를 고해바쳤다. 그는 제프 일당의 모의에 동조한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약의 근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증거는 켄이 포르노 포럼에 썼던 글이었다. 최근 제프가 켄을 비롯한 구매자들에게 새로운 약을 소개하면서 떠벌렸던 이야기들을 켄은 겁도 없이 익명의 게시판에 줄줄 늘어놨다. 그것은 제프가 손에 넣은 수상한 약물에 대한 증거이자, 계획하고 있던 모종의 사건에 대한 실마리였다.

    흥분제보다 용도가 불순한 불법 약물. 배우에게 추근덕거리던 사장과 그의 애인, 그리고 실종된 포르노 스타. 조쉬의 증언과 함께 곤은 유진이 류와 함께 제프의 자택에 감금되어 있을 거란 사실을 확신했다. 그리고 촉박한 시간 내에 빠르게 움직였다. 그간의 죄를 빌미로 켄을 미끼로 삼은 곤은 그로 하여금 제프의 메신저에 약물 거래를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기도록 명령했다. 켄에겐 약물 구입 전과가 남아있었으므로 경찰이 제프의 집을 급습하기에는 충분한 물증이었다.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집 안에는 제프 일당들과 납치된 두 명의 포르노 배우들이 있었다. 카메라로 가득 찬 방을 보며 경찰들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곤죽이 된 피해자들의 몸에 남아있던 자국만으로 범죄의 정황은 충분했다. 경찰들은 납치범들을 당장 체포했고 그 와중에 곤은 제멋대로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른 누구보다도 곤은 먼저 유진을 찾아 그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곤은 마침내 유진을 되찾았다. 후에 이 일로 경찰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려야 했지만.

    유진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급성 중독으로 인한 쇼크가 그의 몸을 덮쳤고 유진은 열이 나는 채로 얼마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행히 응급처치를 받은 후 그는 안정을 취하는 중이었다. 곤이 악마 같은 공간에서 유진을 데리고 나왔을 때 레이는 당연히 류를 받아 안았다. 두 사람은 함께 병원으로 옮겨졌고 각자 다른 병실에 입원되었다. 레이는 경찰 조사가 끝날 때까지 곤을 만날 수 없었다. 류와, 구금돼 있을 제프를 생각하며 그가 긴긴 조사를 끝마쳤을 때는, 이미 꽤나 긴 시간이 흘러있었다.

    레이가 곤을 마주한 건 병원에서였다. 류의 병실 근처를 배회하던 그는 어슴푸레한 복도에 서 있는 곤을 만났다. 그때서야 레이는 곤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얼마 안 됐어.”

    곤은 유진이 잠들어 있는 병실 앞에서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제프가 저지른 짓에 충격을 받은 건 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 그 안에서 너절하게 누워 있던 류를 떠올리면 레이도 무척이나 괴로웠다. 류에 대한 감상을 갈무리하기 전에 레이는 우선 곤에게 확인해두어야 할 게 있었다.

    “두 분… 진짜 사귑니까?”

    그걸 듣고 곤은 병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

    레이는 그러면 그렇지, 하다가도 병실 문만을 바라보는 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만약에….”

    곤이 말끝을 흐리는 레이를 힐긋 쳐다봤다.

    “류도 사건에 가담한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류는 피해자인 한편 피의자이기도 하였다. 만약에 그의 죄가 드러난다면 곤이 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레이는 서글픈 말투로 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울적해 보이는 말투는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레이는 언제든지 류를 위해 연막을 칠 준비가 돼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걸 곤도 알고 있었다.

    “네가 알아서 해.”

    곤은 류에 대한 처분을 레이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그것이 곤이 마지막으로 레이에게 베푸는 배려이자 보상이었다.

    제프 일당은 현장 검거 후 조사를 받고 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약물 복용, 거래, 납치 후 강제추행과 불법 촬영까지. 혐의가 워낙 명백해서 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멍청하게 기록해두었던 촬영 데이터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회사는 난리가 났고 언론에도 사건이 꽤 크게 보도되었다. 텐위 프로덕션은 급속도로 하향세를 탈 것임을 모두가 예상했다. 뭐 그만한 가치도 없는 회사였지만.

    그리고 유진은 병원 안에서 무사히 깨어났다. 유진은 눈을 뜨고 어지러운 머리를 뒤흔들다가 팔에 꽂힌 링거를 보고 자기가 병원에 있다는 걸 알았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묻어두는 시간도 잠시,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조쉬가 유진을 찾아왔다. 사건 이후 각종 소문들에 시달리면서도 유진을 원망하지도 않았던 조쉬는 유진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조쉬가 울먹이며 그를 끌어안자, 유진도 자칫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나 조쉬가 무드 없게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유진은 북받치려던 감동을 침착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구, 으허어어어엉….”

    “…저 괜찮습니다, 조쉬.”

    둘뿐인 독실이었지만 유진은 괜히 부끄러웠다. 그래도 조쉬 덕분에 유진은 한참 안도했다. 혼자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그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우는 조쉬를 달래고, 그다음에 유진은 레이를 만났다. 하나둘씩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고 유진은 모든 것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마 퇴원하신 뒤에 많이 바쁘실 거예요. 준 씨는 사건의… 참고인이니까. 그래도 전부 잘 해결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는 최대한 유진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드문드문 깨어나는 기억들은 때때로 유진을 괴롭혔다. 하지만 생각보다 유진은 괜찮았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그는 건강한 상태였다. 기억이 모호한 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됐다. 유진은 레이에게 자신의 무사한 상태를 알리며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화제를 꺼냈다.

    “저 근데…,”

    말을 하다 말고 유진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그런 유진의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레이가 그의 뒷말을 대신 이어줬다.

    “이따가 곤 씨도 온다고 하셨어요.”

    “이, 이따가요?”

    유진은 무척 당황해서 숨기려던 본심이 튀어나왔다.

    “네. 잠깐 일 때문에 한국에 가셨거든요. 도착하자마자 오신다네요.”

    곤이 온다니. 유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진에게 있어 곤은 가장 미지의 인물이었다. 이 모든 소동 이후로 그가 어떤 시선으로 유진을 응시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한 채로 유진은 할 일도 없는 병실에서 곤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이나 돌렸다.

    그러나 곧 온다고 했던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오지 않았다. 설렘과 긴장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슬슬 옅어지기 시작했다. 레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두근대던 마음이 시무룩해질 때쯤이었다. 면회 시간이 아슬아슬해질 시각에 곤이 입원실에 도착했다.

    “어, 어….”

    “…….”

    유진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보고 당황했다. 긴장한 유진은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분명 곤을 보면 말하려고 준비해뒀던 게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유진은 전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유진이 애꿎은 이불만 구기고 있을 때 문가에 가만히 서 있던 곤이 천천히 다가왔다. 몸을 일으키려는 유진을 곤은 가만히 만류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책을….”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첫마디는 사소한 것이었다.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읽고 있던 책을 뒤집어주다가 부끄러워져서 그냥 숨겨버렸다.

    “읽… 고 있었는데.”

    “왜 숨겨요?”

    유진은 잘 읽지도 않는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게 괜히 부끄러웠다. 병상에 누워있으니까 정말이지 할 게 없었다. 곤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의자를 가져와 유진의 곁에 앉았다. 곤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유진은 긴장을 했다. 혹시 곤이 화를 내진 않을지, 유진이 했던 가장 공연한 걱정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순한 남자의 얼굴에서 답이 나왔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예?”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뜬금없는 유진의 사과에 곤이 헛웃음을 지어 한숨을 쉬었다.

    “아뇨, 유진 씨. 이건 제가 먼저 말하도록 하죠.”

    곤은 미미하게 구겨진 표정을 숨기고 최대한 화를 눌렀다. 그의 성질치고는 상당히 인내심 있게 참은 것이다. 깨어난 유진으로부터 처음 들은 말이 이런 것이니. 그러나 상처투성이가 된 유진이 껍질을 막 깨고 나온 새처럼 연약해져 있을 것임을 곤은 애초에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유진과 안부부터 물을 준비를 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다 나았습니다. 입원해 있는 게 조금 민망할 정도… 로요.”

    유진은 지금 누구보다 회복에 집중해야 할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신적인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는 유진을 위해 곤은 차근차근히 단계를 나아갔다.

    “몸 상태는 많이 회복됐지만 상담 치료도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내원하면서 치료받으시고 당분간은 푹 쉬세요.”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전 정말 괜찮은데.”

    “안 그래도 담당 의사 분께서는 빠른 시일 내로 퇴원이 가능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일정 잡히면 말해주세요. 데리러 올게요.”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곤은 고집부리는 유진을 진정시키다가 들추면 안 될 상처를 찔렀다. 기 싸움에 진 유진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곤은 아차 싶어서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가 얼른 유진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

    “…….”

    “…….”

    “저는 유진 씨에게 자꾸 이런 말만 하게 되네요, 안 그런가요.”

    곤은 결국 자조적으로 웃으며 씁쓸해했다. 유진은 조금 알 수가 없어진 기분으로 곤을 쳐다봤다. 유진이 보기에 곤은 예전보다 살이 내린 것 같았다. 확실히. 날카로웠던 얼굴이 더 예리해져, 칼날처럼 베일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언제나 무모한 성정으로 유진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오늘따라 나긋한 솜처럼 말을 건넨다.

    “유진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안 좋은 기억들은 모두 잊으세요. 원망할 상대가 필요하면 절 미워하셔도 좋습니다.”

    유진은 왜 곤이 자신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곤은 유진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걸 유진은 느꼈다. 유진은 감금당해 있는 동안 곤을 생각하면서도 그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환상통 같은 바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때 유진이 바란 건 곤을 만나는 것뿐이었다. 곤을 미워할 마음이 유진에겐 없다. 유진은 여전히 곤을 좋아했으므로.

    “…한국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대화는 다시 길을 틀어 유진은 가장 궁금했던 화제로 물꼬를 텄다. 그건 유진이 차마 무서워서 레이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혹시 곤이 언젠가 가버리는 게 아닐까. 어렴풋이 그가 계속 이곳에 있을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을 유진은 하긴 했던 것이다.

    “레이가 그러던가요?”

    “네.”

    “제 평생 동안 가장 하고 싶어 하던 일을 하러 간 거였어요.”

    “…….”

    유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이게 마지막인가 싶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가신 겁니까?”

    “네.”

    “그, 그럼 그 일은….”

    “…근데 그냥 왔어요.”

    곤은 눈을 반쯤 감았다.

    “그냥 와버렸어요.”

    곤이 숨을 골라 유진에게 말해주었다. 천천히 고르고 내뱉은 말은 그의 숨소리처럼 아주 고요하게 마음을 울렸다. 가습기에서 나온 증기가 내뿜는 소리 외에 병실 안은 아주 조용했다.

    유진은 젖은 눈을 깜빡이다가 생뚱맞게 물었다.

    “왜요?”

    그가 너무 희한한 걸 들었다는 표정이어서 곤은 김이 빠졌다.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다시 왔다고요?”

    유진은 곤이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감수한 게 있을까 봐 불안했다. 중요한 기회를 자기 때문에 놓친다든가 하는. 얼핏 생각해도 그건 유진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유진은 다급했으나 곤은 단호했다.

    “별로 제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유진은 충격과 불신이 담긴 눈초리를 그에게 보냈다. 믿지 않는 유진에게 곤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유진 씨, 전 정말 괜찮습니다.”

    문 밖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면회 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곤은 시계를 보며 남은 시간 동안 유진을 조금이라도 더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려왔습니다.”

    곤은 유진에게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걸 인정했다.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던 의지였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후회하는 건 따로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유진은 곤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재촉했다.

    “얼른 돌아가요.”

    “유진 씨.”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렇게 시간을 지체해선….”

    “저한텐 유진 씨가 더 중요합니다.”

    흥분으로 곤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숨길 수 없던 진심을 유진에게 고했다.

    “제게 소중한 걸 두고 도망칠 자격은 없어요.”

    그건 막 새로 피어나서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선언처럼 뱉어진 곤의 말을 듣고 유진은 단단히 얼이 빠졌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유진은 잠시 생각했다. 곧 그의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유진은 경악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곤이 하고 있는 말은 명백했다. 어렴풋이 느끼긴 했어도 애써 외면했던 신호를 직격탄으로 받아버린 유진은 기가 막혀서 곤에게 쏘아붙였다.

    “그렇지만 감독님 남자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랬… 죠.”

    “이쪽 취향 아니라고 선 딱 그었지 않습니까?!”

    “그런 말도 하긴 했었는데….”

    유진이 권총처럼 쏘아붙인 말에 곤은 할 말이 없어서 기세가 죽었다. 그렇다. 원래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무슨, 뭐 그런 거예요? 절 좋아하기라도 한다, 이겁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댕. 댕…. 뒷골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유진의 머릿속을 울렸다. 유진이 어이없어하든 말든 곤은 꿋꿋하게 일방적으로 고백을 했다.

    “저 유진 씨 좋아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왜 말이 안 됩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 쓰였습니다. 저도 바보 같은 거 알아요, 이렇게 늦게 깨달은 게….”

    “감독님 어디 아프세요?”

    “실례합니다, 면회 시간이 끝났는데요.”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언쟁 사이로 간호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곤은 씩씩거리며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한국말로 싸워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애먼 사람한테 게이들의 사랑싸움을 보여준 꼴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거칠게 의자를 끈 곤이 유진을 향해 말했다.

    “아무튼 다음에 데리러 올 테니까 반드시 전화 주셔야 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완고했다. 키가 큰 남자가 주는 박력감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곤이 떠나고 유진은 오들오들 떨며 천천히 침대에 누워야 했다. 몸에 남은 오싹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눈이 말똥말똥한 채로 밤을 새웠다. 잠을 자야 했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유진은 이불을 박찼다. 곤이 자신을 좋아한다니. 그 사람이!

    마음 정리를 끝낸 곤과 다르게 땅굴 파다가 혼자 실연까지 끝내놨던 유진에게 그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분명히 유진은 곤을 좋아했고 여전히 그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유진이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불신이었다. 오랜만의 재회는 두 마음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은 채로 끝이 났다.

    *

    퇴원을 하는 날 곤은 약속대로 유진을 데리러 왔다. 그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곤을 보고 유진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꼬박꼬박 연락은 했던 터라 곤을 보면 멀쩡한 척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곤의 정갈한 얼굴에 너무도 취약했다. 살이 내려 버린 얼굴을 보고 유진은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유진이 일방적으로 외면하는 덕분에 두 사람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레이의 집에 도착했다.

    레이의 집으로 갔던 이유는 일찍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퇴원 후에 곤과 함께 레이를 만나기로 했던 유진은 두 사람이 소속사를 약속장소로 잡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곤이 차를 끌고 도착한 어느 맨션을 유진은 신기한 기분으로 구경했다. 레이의 집은 주인의 성격대로 말끔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다. 유진과 곤을 맞이한 레이는 찬장에서 세련된 컵을 꺼내 차를 내왔다. 회사에서 손님을 접객하던 솜씨 그대로였다.

    “배상도 남아있고 아직 처리해야 할 절차가 한가득이에요. 그래도 변호사는 걱정하지 말라더군요. 조만간 또 뵐 거예요.”

    유진을 위해 꼼꼼히 준비해둔 레이가 갖가지 서류를 봉투에 넣어 유진에게 내밀었다. 유진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레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 회사 일은….”

    “뭐, 그런 건 차차 얘기합시다.”

    유진이 에둘러 물은 질문을 레이는 간단한 말로 넘겼다. 그로서는 웬일로 강경한 말투였다. 볼일을 마치고 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난 건 곤뿐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여전히 앉아있었다. 의아해진 곤이 레이에게 시선을 주자 레이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전 준 씨랑 더 할 말이 있어서요.”

    의외의 상황에 곤이 눈썹을 까닥이며 물었다.

    “나만 가라고?”

    “네. 저희 둘만 할 얘기가 있어요.”

    “…….”

    “뭐 하세요? 얼른 가 보세요.”

    레이의 얄미운 일갈에 곤이 당장 유진을 쳐다봤다. 유진은 쫄아서 눈을 슬그머니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하지만 레이의 말에 동의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기만 빼고 모의를 했다는 사실에 곤은 충격을 받았다. 이마에 핏줄까지 솟은 채로 유진을 바라보던 곤은 최대한 어른의 인내심을 끌어내 자리를 비켰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상처받은 사람만 퇴장하고 남은 두 사람은 참았던 숨을 토했다. 레이는 마시던 척하던 찻잔을 내려놓고 유진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저만 보자고 한 거예요?”

    유진은 레이를 만나기 하루 전 그에게 남몰래 메시지를 보냈다. 굉장히 깊은 고민에 빠진 유진은 레이에게 상담을 부탁했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유진이 그런 부탁을 해오자 레이도 다분히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레이의 물음에 유진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엄청난 사실을 실토했다.

    “감독님께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레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구가 멸망했다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경악했다. 얘길 듣고도 덤덤한 레이를 보고-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유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암요. 제가 곤 씨를 본 것도 꽤 오래됐거든요.”

    솔직히 레이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

    “고, 곤 감독님은 원래 그런 분이신가요? 마음도 없는 사람한테 고백을 한다거나….”

    “그럴 리가 있어요?”

    고백은커녕 누구한테 호감을 가져본 것 같지도 않던 사람이었다. 무성욕자인 줄 알았던 사람에게도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에 레이는 충격을 받았다. 한편으론 이 상황이 깨소금 먹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했다. 물론 쥐뿔도 모르는 자신이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을 들어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되긴 했지만.

    “마음이 있으니까 준 씨한테 그런 말을 했겠죠.”

    그렇게 말하고 레이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건 그래도 정확한 진단이었다.

    “하지만 감독님은 이성애자고, 절 좋아한다는 느낌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자신한테 여유가 없으면 그런 사고조차 마비될 때가 있긴 하죠.”

    나름대로 경험담이었다. 레이는 곤조차 말해주지 않았던 그의 속사정을 유진에게 말해주었다.

    “원래 곤 씨는 음악 일을 하고 싶어 했어요. 이쪽 일이 아니라.”

    레이는 자신이 아는 내에서 최대한 많은 걸 유진에게 알려주었다. 곤이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레이가 쉬운 단어를 골라 꽤 긴 시간을 설명한 끝에 유진이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뒷얘기를 알고 나자 유진은 더 마음이 착잡해졌다. 곤이 자신 때문에 소중한 기회를 뿌리치고 온 걸 알게 되었으니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이 동정심 때문에 제게 그런 말을 하신 거면 어떡하죠. 아뇨, 그런 게 확실합니다.”

    결국 그것이 유진의 결론이었다. 곤의 고백이 진심일 리가 없다는 것으로. 올곧지만 비뚤어진 곤의 성정이 이번에도 고장이 나서 이상한 판단을 해버렸을 거란 게 유진의 생각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레이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건 곤이 그만큼 유진에게 신뢰를 주지 않았다는 의미기도 하니, 레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더 진심인 거겠죠. 원하던 일도 포기하고 준 씨를 보러 왔으니까.”

    레이가 뭐 어쩌랴 싶은 마음으로 한 말은 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해주었다. 유진은 또 충격을 받고 어버버거렸다. 레이는 체증이 얹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유진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준 씨. 감독님 좋아해요?”

    그렇다. 가장 중요한 건 더도 아니고 유진의 진심이었으니. 그리고 유진은 작은 입을 벌리다가 홀연히 말했다.

    “…좋아합니다.”

    ‘…이 두 사람 어쩜 좋지?’

    유진을 배웅하고 혼자 남은 집 안에서 레이는 생각에 잠겼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게이들에게 둘러싸여 연애 세포가 죽어있던 고지식한 남자와 알고 보니 지독한 순정파였던 포르노 배우. 그리고 두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눈을 맞게 되는데…. 어쩐지 농락당한 기분이 적지 않게 든다. 아무래도 고생길에 놓인 건 레이뿐인 듯했다. 두 사람을 걱정하다가 레이는 자신의 연애나 걱정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

    유진은 이곳저곳 불려 다니며 처리해야 할 것들을 처리했다. 집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하루 이틀, 열흘이 지나자 유진은 슬슬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도 회사 측에서 아무런 연락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했다. 유진은 소속사와 계약한 바가 있었고 납치사건을 겪은 피해자라곤 해도 회사와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첸 준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활동 재개를 하는 건지, 계약서에 명시된 작품 편수를 채워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마저도 제프의 건으로 인해 파기가 되어버렸는지. 그 누구도 유진의 처우에 대해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레이에게 슬쩍 말을 흘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레이는 어물쩍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남은 작품을 의무적으로 찍은 뒤에 강제로 은퇴를 하게 될 것 같다며, 유진은 막연히 생각했다. 스캔들로 흠집이 난 배우를 프로덕션은 더 이상 써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 불쌍한 자기연민에 빠지면 유진은 가슴이 떨렸다. 그를 둘러싼 상황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일도 없고, 변변한 취미도 없는 상황에서 집에만 있던 유진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욕구불만이었다.

    ‘기분전환으로 괜찮지 않을까….’

    일찍이 알고 있듯이 유진은 성욕이 강한 사람이었고, 곤을 피해 잠적을 탔던 시간까지 합치면 상당히 오랜 기간 제대로 풀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자위를 할라치면 곧 진한 죄책감을 느껴 포기해야 했다. 그런 가엄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본능적인 욕구를 느낀다는 게 쓰레기 같았기 때문이다. 십수 년간의 버릇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지만 도저히 기분은 나아지질 않았다.

    그래서 유진은 기분을 전환할 겸 게이 바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낯선 남자들을 만나 현실과 동떨어진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유진에겐 아직 찰나의 위태로움이 남아있었고, 그 심적 여지가 그를 밤거리로 향하게 만들었다.

    기분전환으로 가는 거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수위가 높은 곳도 아니고 평범한 술집이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술만 마시고 오자. 불안한 심리와 타협하며 유진은 시끌벅적한 거리로 들어섰다.

    합석을 요청하는 바텐더에게 고개를 젓고 유진은 바의 아늑한 구석 자리에 착석했다. 공간에 걸맞은 공기가 가게 안을 채우고 있었다. 게이들과 올드 뮤직, 맛있는 술까지. 흥겨운 분위기가 유진의 적적한 기분을 달래기에 적당했다. 유진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게이 바 안에서 청승맞게 우울을 탔다. 하지만 무방비한 유진을 주시하는 남자들은 가게 곳곳에 있었다. 그들은 흥에 취하지 않고 홀로 유유자적한 유진을 힐끔거렸다.

    유진은 바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적당히 취기를 즐기다 바를 나섰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를 뒤따르는 남자들이 있었다. 유진이 거리로 나왔을 때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저기, 시간 있어?”

    옷 사이로 흉악한 타투가 엿보이는 남자 둘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 잡힌 팔을 빼내며 유진이 불쾌하게 대답했다.

    “없는데요.”

    유진은 그대로 그들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양아치들은 유진의 앞을 막아서며 어깨를 밀쳤다. 요상한 억양들은 알아먹기도 어려웠다. 유진은 그들이 하는 말을 무시했다. 추근덕대는 남자들을 씹으려다가 유진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듣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혹시 어딘가 나오는 사람인가?”

    남자들의 말을 알아듣고 유진은 얼굴이 푸릇푸릇해졌다. 다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유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킬킬거리는 그들을 보며 유진은 손을 꽉 쥐었다. 양아치들은 얼굴이 알려진 포르노 배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유진은 두 사람을 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때 누군가 나서 유진에게 뻗치려는 손길을 낚아챘다.

    “감독님?”

    유진이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뒤에서 불현듯 나타난 곤은 유진의 어깨를 잡으려던 남자의 팔을 거세게 뿌리쳤다. 곤의 잔뜩 기분 나쁜 흉악한 기세에 남자들은 주춤거렸다.

    “너, 너, 넌 뭐야?”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꺼져.”

    곤이 사나운 얼굴로 뇌까렸다. 거대한 남자가 갑자기 등장해 겁박하자 남자들이 당황해 소리쳤다.

    “우린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네놈은 뭐, 뭐 하는 놈이냐!”

    곤은 더 말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거침없이 화면을 누르는 그의 손가락을 보고 양아치들은 뒷걸음질 쳤다. 끝까지 허세를 부리던 그들은 거리가 벌어지자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상황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행인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다 곤의 차가운 눈길에 바로 겁을 먹고 눈을 돌렸다.

    유진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을까. 눈앞의 강직한 등을 보고 유진이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곤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전화했는데 안 받으시더군요.”

    “예?”

    방금 전의 기세는 어디 가고 곤의 목소리는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유진은 잊고 있던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제야 곤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왔다는 걸 알았다. 유진의 머리 위에서 낮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곤이 어떻게 이곳을 알고 왔는지 물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어떻게 알고 왔겠어요? 무작정 찾아다닌 거죠.”

    곤은 약간 분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유진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알려졌는지 잘 모른다. 특히 이런 같은 성향을 가진 남자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말이다. 인터넷과 거리가 영 먼 사람이었던 유진은 SNS를 통해 얼마나 빨리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지 알지 못했다.

    “차는 가지고 왔어요?”

    “아뇨….”

    괜히 남자들에게 시비나 걸리는 꼴을 보여주고 만 유진이 멋쩍어 대답했다. 유진에게 차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곤은 공연하게 질문을 했다.

    “태워다 줄게요.”

    “여기서 집까지 30분도 안 걸려요.”

    “진짜 거절하시려고요?”

    곤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의 상처받은 눈치에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몸을 돌려 앞으로 가는 등을 따라 유진은 곤을 졸래졸래 쫓아갔다. 주차된 차에 유진을 먼저 태운 곤이 뒤따라 운전석에 앉은 뒤에 한숨을 쉬었다. 시동을 걸기 전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조심하세요. 그런 폐쇄적인 장소는 별로 좋지 않아요.”

    왜인지 침울해 있는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유진은 마음이 언짢아졌다. 유진이라고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다. 왜 그는 항상 저런 식으로 나오는가. 어영부영하는 태도를 보인 건 회사 쪽이었으니 유진은 이참에 확실히 묻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저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곤이 고개를 돌려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운전대를 잡으려다가 그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유진은 곤이 자신의 행실을 탓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한 짓이 회사에 곤란한 뒷소문을 자초하게 됐을까 봐 유진은 우선 사과부터 했다.

    “일단 아까 일은 죄송합니다.”

    “하아.”

    곤이 운전석에 머리를 기댔다. 공기가 조금 답답해졌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곤을 향해 유진이 불평을 토했다.

    “근데 계약금도 그렇고, 찍기로 한 영상도 아직 남아 있잖아요.”

    “유진 씨는 앞으로 회사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예?”

    “계약 의무를 마칠 필요가 없으니까요.”

    곤의 말에 유진이 눈을 꿈뻑거렸다.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아 미간에 힘을 주자 곤이 재차 설명을 해줬다.

    “유진 씨가 겪은 일로 회사에 졌던 이행 의무는 무효가 된 겁니다. 굳이 촬영 같은 거 하지 않아도 회사 측에서 남은 계약금을 전부 부담하기로 했으니까요. 걱정하실 필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진은 점점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곤에게 되물었다.

    “계약이 파기됐단 소리인가요?”

    “파기가 아니죠. 책임 불이행으로 인한 배상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유진 씨한테 계속 포르노를 찍게 시킬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대체 누가요? 있더라도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남자의 고요한 눈에 불길이 일었다. 유진은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줄곧 단단한 목소리로 유진을 채근하던 곤은 결국에 차마 하기 싫었던 말을 읊조렸다.

    “그러니까 미국으로 돌아가셔도 좋아요.”

    유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곤을 바라봤다.

    “재판이 끝나기까지 하면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이 남을 겁니다. 유진 씨는 아직 어리니까 새 출발을 하는 데에도 어렵지 않겠죠. 주제넘는 소리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입니다.”

    “감독님은 여기에 있고요?”

    “저도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아요.”

    곤은 유진을 쳐다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어딘가 괴로워 보였다. 역시 부아가 치민 유진은 실망감을 삼켜야 했다. 곤은 남고 자신은 떠난다. 자기 때문에. 유진은 비록 그가 원인이 아닐지언정 스스로 곤을 괴롭혔단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저 촬영할 수 있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유진 씨.”

    유진을 바라보던 곤이 탄식했다. 유진은 악을 쓰며 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 때문에 안 되는 겁니까? 저 이제 쓸모없나요? 그, 그래도 아직 보려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감독님이 찍어주세요. 저 아직 괜찮아요. 늘 하던 일이었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무너지는 유진을 보고 곤은 사나운 감정이 일었다. 음정 낮은 목소리가 격앙되어 유진을 나무랐다.

    “유진 씨는 피해잡니다! 우선 제가 반대할 거고요. 그런 일을 겪고 대체 어쩐다는 거예요?”

    “그럼 감독님은요?”

    유진이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곧 터질 것 같은 음성에 물기가 차올랐다.

    “저만 도망치는 건가요?”

    유진은 자신만 내빼는 모양이 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에게 버려진다는 것도. 두 사람의 이해는 완전히 엇갈렸다.

    “이제 유진 씨를 이곳에 붙잡아 놓을 사람은 없어요.”

    곤은 착잡한 심정으로 그를 달랬다. 유진은 포르노 배우가 아니다. 그 스스로 당위성을 잃어버렸다. 곤은 그것이 유진에게 있어 해방이라고 생각했고 유진은 갈피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진은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다. 곤은 그런 그를 보며 단숨에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걱정돼요?”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유진을 보고 곤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건지. 그도 유진의 속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마음이 따끔거렸다. 유진은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마지막 남은 속내를 실토했다.

    “감독님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어둑한 차 안에서 나란히 앉아 유진은 곤에게 웅얼웅얼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저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남자 좋아하는 게이고, 발랑 까져서 어릴 때부터 포르노나 찍으며 살아왔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대체.”

    “그러니까 감독님은 제가 이런 사람이어도, 흑.”

    그건 다름 아닌 투정이었다. 날 떠나지 말아 달라는 호소였고, 곤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어리광이었다. 눈앞에서 칭얼대는 다 큰 남자를 보고 곤은 서서히 고조됐다. 유진을 게이 바에서 발견하고 추락했던 기분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말이 뭔가. 유진의 조심스러운 진심이 아직도 변치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곤은 유진을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니다. 사실은 미국 같은 먼 땅으로 보내기 싫었다. 그래도 그게 유진에게 좋다면 곤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여전했다. 그는 온전히 따뜻한 감정을 껴안고 있었다. 속마음을 고백하는 그는 여전히 곤에게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청년이었다. 곤은 참을 수 없어져서 유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넓은 품 안에 갇혀 순식간에 어리둥절해진 유진이 품 안에 구겨져 우물거렸다.

    “…뭐예요?”

    “유진 씨.”

    그 순간부터 곤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유진은 얼떨떨하게 있다가 맞닿아있는 심장박동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그러니까 그 말이….”

    “…….”

    “꼭 절 좋아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유진은 곤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고 있다가 점점 얼굴을 숙였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유진은 뜨거워진 젤리처럼 녹아내렸다. 그간 온갖 서러운 것들이 몰려왔다. 혼자 앓아 모질어져 있던 상처투성이 짝사랑을 이제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였다.

    “그걸 지금 아셨냐고요….”

    “…….”

    유진은 왕왕 울면서 더 이상 혼자 고민하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곤은 자신의 마음을 이미 전부 알려주었다. 곤은 유진의 등허리에 얹고 있던 손을 가만가만히 뒷목으로 오르다가 자신도 해야 할 말을 속삭였다.

    “저도요.”

    곤은 뿌듯하게 훌쩍이는 유진을 안아 체취를 들이켰다. 이제 완전히 유진에게 품을 내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감격했다. 유진이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몰라도 곤은 뿌듯한 마음을 엉겨내다가 서럽게 우는 유진을 또 귀엽다고 느껴버렸다. 다 컸어도 이 연약한 새 같은 것을 앞으로 어떻게 둥기둥기 해줄지 곤은 고민했다. 그는 유진보다 어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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