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3권) (9/16)
  • 3권

    09.

    텐위는 당분간 제프의 세상이었다. 온갖 잡다한 촬영들이 곤에게 몰렸다. 사내 여론을 얻은 틈에 제프는 소소한 복수를 했다. 유진이 몸 상태 때문에 집에서 쉬는 동안 곤은 굴려지고 있었다. 단적으로 곤은 마구간을 배경으로 하는 기괴한 기획물을 단신으로 촬영해야 했다.

    ‘젠장.’

    말들로 둘러싸인 축사 안에서 남자 둘이 교합하는 장면을 찍고 있던 곤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말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옷에 지푸라기가 묻어도 다른 스태프를 대동하고 올 수가 없었던 이유는 예산이 부족해서다. 상식적으로 찍을 수 있는 편수가 아니었다. 그래도 곤은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항의하지 않았다. 이를 갈며 제프를 물 먹일 기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서 곤은 복귀하자마자 바로 유진의 집을 찾아간다. 유진은 그날따라 컨디션 난조로 영 맥을 못 추고 있었다. 평소라면 감정을 숨겼을 유진이 희한한 몸 상태 때문에 속마음을 내보인 덕에 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를 착하게 맞이해주는 유진을 보며 곤은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만다. 그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제프는 유례없는 실적으로 기세가 등등했고 곤은 어떻게 세일즈를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열을 재주기 위해 손을 뻗은 건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손으로 볼을 감싸자 다정하게도 열이 오르는 배우를 보며 곤은 ST라는 남자가 벌거벗은 유진에게 저질렀던 짓을 떠올렸다. 감독이어야 할 작자가 그를 멋대로 만졌던 것을.

    ‘몇 살이에요?’

    ‘25살이요.’

    협소한 원룸 안에서 유진은 촬영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진을 구슬려 기획을 다시 따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곤은 산더미 같은 일을 처리하느라 첫 촬영을 펑크 냈다. 그래놓고 뒤늦게 초조해했다. 유진은 유명한 배우였고, 그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의심하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니.

    골치 아픈 상태로 촬영을 위해 약속장소로 간 곤은 거기서 오랜만에 유진을 보고 안도한다. 잔뜩 마뜩치 않아 보이는 어린 배우를 보고.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도 조금 뾰로통해져 있을 뿐인.

    ‘역시 당신은 날 좋아하잖아.’

    그렇게 힘든 촬영을 시켜도 제프 같은 변태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어?

    털을 세우고 경계하면서도 유진은 곤을 만나 귀를 갸웃갸웃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유진을 보고 왜인지 곤은 파리 날리던 마음을 위로받았다. 그게 꼭 주인에게 앙심 품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큰 실수는 곤이 반려견을 키워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상대를 보듬을 타이밍에 곤은 유진이 내어준 여지를 함부로 쓰고 말았다.

    ‘잘생기셨네요.’

    ‘준 씨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칭찬이겠죠?’

    곤은 맞은편 빈 의자에 앉아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을 찍었다. 팬 포르노에는 팬과 대화하는 장면이 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의 이곳 말은 많이 늘었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얼마간은 곤이 통역을 해주었는데, 나중에 유진은 곤 쪽으로는 시선도 안 주고 그 남자와의 대화에 열중했다. 곤은 둘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남자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유진의 태도가 더 물렁해졌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곤은 유진을 바라봤다. 같이 포르노 찍는 사이라고 그새 친근감이라도 느낀 건가? 아무리 대범하게 포르노를 찍는 스타래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의 팬이라는 무직남은 사진으로 본 것보다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간 취급 못할 추한 배우들과 다르게 인간답게 생겼었다.

    매트 위에 앉은 유진을 보고 곤은 묘한 기분을 느낀다. 이제 곧 저 기울여진 목울대에 자지를 처박을 것이다. 물론 그는 게이가 아니다. 여태까지 남자를 성적으로 본 적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다분히 일을 위해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스스로에 대한 도발과 도박. 집주인인 남자가 나가있는 동안 곤은 유진의 어깨를 누르고 빠르게 제 성기를 꺼냈다.

    ‘허억.’

    유진이 그의 자지를 입에 무는 순간 골을 올리는 폭죽이 곤의 후두부를 강타한다. 피가 거세게 돌다가 그의 중심부로 몰려들었다. 유진이 볼 수 없었던 전등 아래서 곤은 거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송곳니까지 꺼내 입술을 하얗게 물어 신음을 참던 그는 유진이 쪼는 듯 입술로 성기를 죄는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를 터뜨렸다. 한숨과도 같은, 곤 자신은 미처 인지 못 했던 기분 좋은 신음.

    곤은 유진의 부드러운 머리를 손 안 가득 잡아보았다. 요령껏 흔들림 없이 쥐고 있는 카메라 안으로 자신의 손과 자지 뿌리가 비쳤다. 입안 가득 오랄 해주는 감각은 기분이 좋다. 하지만 렌즈를 하나 거쳐 보고 있던 화면 속에서 시들어버린 유진의 얼굴을 본 순간 곤은 상처 입는다.

    곤이 기나긴 사정을 끝내고 오싹한 감각을 몸에 잔재시키는 동안에도 유진은 그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곤 시든 이파리같이 풀이 죽어서 혼자 입에서 정액을 와락 토해냈다. 그때까지도 멀쩡했던 남자의 자존심은 그때 조각조각 부서졌다. 가슴속의 유리창에 균열이 가서 마음이 패잔하고 말았다.

    ‘차라리 그때.’

    차라리 제프가 담당을 바꾸면 계열사와 협업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곤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 걸 기점으로 두 사람은 크게 갈라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왜 곤은 제프의 요구를 거절하고 입지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유진을 담당하려고 했는가. 그건 곤도 명백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아마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이라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곤은 유진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유진을 향한 집착이 감독으로서 역량을 발휘할 기회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실은 아니었으면서. 순탄하게 꼬이는 바람에 제프에게 욕을 보고서 곤은 유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선택에 있어 오로지 직진을 하고 결코 후회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남자는, 그제야 김유진이란 인간에 대해서 곰곰이 고민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그에게 가지고 있는 환상 같은 것.

    열심히 사는 것. 꿈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 하지만 그 꿈은 좌절될 수도 있는 거고, 거기에 어리석은 사람처럼 매달리진 않아야 한다는 게 완벽히 경쟁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곤이 가진 신조이며 인간상이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9살 어린 경력직 포르노 배우는 얼마나 기특한 사람인가. 다른 배우들처럼 허리하학적 본능과 콩고물을 위해 곤을 유혹하며 생떼를 쓰는 일도 없었다. 유진이 곤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명백했다.

    하지만 김유진은 다르다. 별것 아닌 접촉에도 순진하게 볼을 붉히는 생각보다 평범한 남자였다. 곤이 그를 잠깐 순진한 인물처럼 느끼게 될 정도였다. 몸 팔아 포르노를 찍는 배우였는데.

    첫인상은 단편의 감각만을 남기고 시간을 지나 돌이켜 봤을 때 아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곤은 밑천 없는 포르노 배우 유진을 처음에는 외면하려 했다. 그건 어쩌면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본 연민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지나치게 성실했으며 어떻게 보면 순진할 정도로 포르노에 헌신하고 있었다. 이 점은 우연찮게도 곤이 선택한 인생과 맞닿은 지점이 있었다.

    곤은 보다 어렸을 때 혈혈단신으로 이 나라에 왔다. 선망하는 예술가를 따라서였다. 이유는 매우 근사했다. 가수 데포르테의 아들이 소속된 레코드사가 공모전을 열었을 때 그는 자신이 닦아왔던 모든 걸 쏟아 부어 영상 하나를 제출한다. 불행히도 그 영상의 소재는 현재 알 수 없다. 곤이 공모전에 낙선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레코드사의 파일 더미 속으로 사라졌는지 어찌 되었는지는 그는 모른다. 조금 낙심해버린 곤에게 영입을 찔러 넣은 게 텐위의 제프였다.

    곤은 스스로에게 좌절할 여유를 주지 않은 바람에 여기까지 와 버렸다. 평범한 남성이었던 그가 처음부터 거부감 없이 포르노를 찍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텐위 프로덕션은 좋아하는 음악가가 속해있는 소속사의 계열이고… 어쩌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분명한 소망. 이런 낭만적인 이유를 들기엔 곤 스스로가 쪽팔려 해서 다들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가 텐위에서 일을 하게 된 데에는 경제적 사정이라든가 나이, 여러 이유가 섞여 있었다.

    스트레이트. 그것도 한국인 남자가 이를 갈고 포르노 업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건 성정 탓이 컸다. 곤도 단계를 극복해내면서 성취감을 느꼈다. 다만 일말의 성적 욕구를 떨어트려 놔야 제정신을 붙잡고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곤은 본래 성적인 관심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성교 씬에서도 그는 이입을 하지 않았다. 항문 성교를 하는 남자들은 그에게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일단 곤은 게이가 아니었고 도매 처리된 남자 포르노 배우들이란 그와 별개의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곤이 남자 취향은 아니면서 게이 포르노라는 장르를 찍을 수 있는 이유. 곤에게 게이들은 영상 속 소품에 불과했다. 곤은 소품을 주무르는 일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연출가였다. 원래라면 유진 역시 곤의 손아귀에 주물러진 인간만 못한 배우들 중 하나여야 할 텐데.

    곤은 유진을 그의 커리어를 위한 또 다른 소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릴 적 자신과 견주어 보는 일이 잦아지곤 했다.

    왜 포르노를 찍는 겁니까?

    그 아무리 포르노 감독으로 구른 곤이라 해도. 카메라를 드는 사람과 그 앞에서 고깃덩어리가 되는 사람의 입장이란 완벽하게 다른 것인데. 어떻게 퍼부어지는 능욕을 모두 감내하려고 할 수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심한 꼴을 당하는 걸 어떻게 유진이 묵묵히 받아들이는지 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 일이 소중한 건가?

    그에게 질척대지도 않으면서 유진은 곤의 손길 하나에 꼬리만 흔드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굴었다. 아니, 어떨 때 그는 겨우 솜털만 자란 산세베리아처럼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만큼 유진에게는 단단한 자존감이 있었다. 설령 그가 항의하지 못하는 산세베리아일지라도. 유진을 보는 곤에게 상대를 보호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곤은 꼰대 소리 들어가며 유진을 보고 이래라저래라 했다.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사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버린 굴레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말이다.

    그런 무의식을 깨닫지 못해 만들어버린 당위성으로 곤은 유진에게 심한 짓을 저질렀다. 촬영이 끝나고 곤은 유진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먼 주행길을 되돌아온다. 자택에 돌아온 곤은 지금 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유진을 만난 이후로 아주 처음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

    유진은 집에서 울화통이 터져 있었다. 곤에게 단단히 실망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분해서 혼자 씩씩거리다가 머리를 쥐어뜯으면 또 그 순간이 떠오르는 거다. 울컥 분이 터진 유진이 가만히 있던 이불에 애꿎은 하이 킥을 날렸다.

    ‘난 왜 그때 가만히 있었지?’

    자책해 봐도 결국엔 그걸 받아준 건 자신이었다. 애석해서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이 지금 왜 이런지 유진은 생각해봤다.

    ‘그게 곤이라서잖아.’

    카메라 앞에서 다른 포르노 배우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곤에게 그런 짓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까지 자신이 저질 포르노 배우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것 같았다. 자존심도 속도 상한 유진은 비참했다. 이래봤자 그가 자신에게 관심 한 톨 안 가질 거란 걸 알아서 그는 혼자 또 찔찔거렸다.

    “씨이….”

    훌쩍훌쩍. 내팽개친 이불을 다시 고이 가져와서 등껍질처럼 둘러멘 유진이 웅크린 자세로 베개에다 눈물 자국을 만들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잘생긴 얼굴을 주륵주륵 타고 내려갔다.

    떨쳐내려 해도 그 순간의 기억이 어쩔 수 없이 계속 떠돌았다. 코앞에 들이닥쳤던 거대한 남자의 성기. 모든 잔상들과 하물며 그때 맡았던 낡은 원룸의 퀴퀴한 공기까지. 아무리 촬영이라지만 곤에게 무릎 꿇려 페니스를 빨았던 기억들이 유진에겐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자리에 없는 상대를 향해 의미 없는 분노만 터뜨리다가 유진은 기어코 울었다. 화가 나다 못해 눈물이 났다.

    이뤄질 거란 기대는 안 했어도 잔인한 취급을 받음으로써 유진은 감정의 종착지를 보고 말았다.

    ‘어떻게 다시 보지?’

    이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려도 유진은 다음 촬영이 잡히면 곤을 또 봐야 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을 다스려 다시 그 잘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유진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고 창밖을 바라봤다. 곧 있으면 그는 회사를 가야 했다. 미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울해도 유진은 소속사로부터 많은 계약금을 받았고 계속 저질스러운 포르노들을 찍어야 했다. 발매가 되면 프로모션 이벤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간간이 사진 촬영도 있었고, 유진에겐 많은 책임이 있었다.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니까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언제나 가지고 있던 그런 막연한 책임감을 떠올리다가 유진은 불쑥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봤자 나는 일개 게이 동영상 찍는 사람일 뿐이잖아.’

    곤을 또 볼 자신이 없다. 수년을 바친 성실한 책임감보다 오히려 그 번지르르한 낯짝에 더 격한 감정을 느낀 유진은 충동적인 일을 저지른다.

    레이는 여느 때처럼 소속 배우 관리를 위해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언제 회사 어디어디서 만나자는 얘기였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늘 성실하던 배우가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지각일지 모르니 조금 기다리기 위해 5분을 기다렸을 때였다. 레이는 유진에게 메시지 하나를 더 보냈다. 물음표로 끝나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친절했지만 왜 오지 않느냐는 물음이 명확하게 담겨있었다.

    그래도 유진은 오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는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 메신저를 확인하며 레이는 휴대폰 전화번호 목록을 연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이는 준 씨가 웬일로 늦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수신 불가 안내 음성이 들리는 핸드폰을 보고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때부터 무언가가 이상했다.

    레이는 다시 한번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그러길 몇 번 지친 그가 미팅실을 나와 기다리는 동안 몇 시간이 흘렀다.

    “뭐?”

    전화 너머 레이가 전하는 말에 곤은 조금 까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산더미 같은 일을 잠깐 제쳐두고 전화를 받은 곤은 레이의 말을 천천히 받았다.

    -준 씨가 연락이 안 된다고요.

    “왜?”

    곤은 레이의 보고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전화 너머로 입바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필시 전화 상대가 답답한 한숨으로 앞머리를 날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레이는 그런 뒤에 곤에게 똑똑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주었다.

    -연락 두절이란 말입니다, 연락 두절!

    연락 두절이라니. 곤은 이마에 핏줄이 솟다가 침잠이 레이에게 물었다.

    “집은 가 봤고?”

    -아니요.

    “내가 가볼게.”

    곤은 핸드폰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는 조금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곤 씨랑 촬영했었잖아요. 혹시 뭐 알고 있나 해서 물어봤죠.

    “그래, 일단 알았어. 내가 가 볼 테니까 일 봐.”

    -안 바쁘세요?

    “당연히 바쁘지.”

    레이가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전화를 끊었다. 침착하게 전화를 받던 곤은 소리가 끊기자마자 바로 얼굴빛을 지웠다. 밖으로 나가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는 동안 그는 속이 복잡했다. 유진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다.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발이 저릿했다. 유진에게 지은 죄가 있던 곤은 당장에 유진의 집으로 달려간다.

    유진의 집 앞에 차를 세워둔 곤이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유진 씨? 이름을 부르던 곤은 문득 문 너머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유진 씨….”

    덜컥 불안한 생각이 잠식한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거라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틈에 그는 현관 손잡이를 잡고 흔들며 문을 두들겼다. 여전히 문 너머는 고요하기만 하다. 철문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불안감이 증폭돼 갔다. 조용한 주택가에 문을 두들기는 소음에 경비원이 나타났다.

    “무슨 일 있습니까?”

    “집 주인이 연락이 안 됩니다.”

    급하게 말하는 곤의 뉘앙스를 알아듣고 경비원은 어딘가로 서둘러 사라졌다. 그동안 곤은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경비 직원이 열쇠를 가지고 등장했다.

    “유진 씨!”

    경비원이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꽉 닫혀있던 문이 그제야 열렸다. 곤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런거리는 마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드디어 발을 들인 유진의 집에서 그러나 그가 보게 된 건 썰렁한 공기였다. 좁은 복도를 지나 침대가 있는 거실로 닥친 그는 아무도 없이 고요한 집 안을 보고 숨을 멈췄다. 유진이 사라졌다.

    *

    유진처럼 일반인 촬영작을 찍게 된 류는 그의 팬이라는 섹스 상대를 보고 속이 구겨져 있었다. 키도 작고, 못생기고, 류를 보며 히덕히덕 몸을 들썩이는 기분 나쁜 남자였다. 촬영 전부터 류와 섹스할 생각에 흥분한 건지 앞섶이 불룩했는데 그게 더 류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대와도 몸을 섞어야 하는 게 포르노 배우의 일이다.

    “하앙, 읏, 흐응! 우, 우욱.”

    “헤엑, 헥, 헉헉, 류 군.”

    남자는 류의 온몸에 침 범벅을 해 가며 배우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자지까지 작았다. 끔찍했다. 이딴 기획물은 최악이다. 류는 생각했다. 팬 포르노를 찍는 건 그로서는 두 번째였다. 만일 유진이 곤과 함께 이 촬영을 하지 않았다면 같은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섬세하게 출연자들을 골라냈을 곤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그가 지금 어떤 꼴을 당하게 되었을지 유진은 모른다. 촬영이 끝나고 가운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있던 류는 촬영장 내로 그를 찾아온 손님을 발견한다.

    “류 씨.”

    레이였다. 류는 그를 한 번 힐끔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무시하는 태도였다. 레이는 그런 류에게 움찔하다가 시선을 뒤로 보냈다. 촬영이 끝나고 씻으러 들어갔던 남성이 커튼 뒤에서 어기적 걸어 나오다가 레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눈을 마주치고 흘끔 놀란 남자는 얼른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리 팬이라지만 심각한 몰골인 남자의 꼴을 보고 레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남자를 한 번 째려본 레이가 류를 바라봤다. 류는 핸드폰만 하고 레이에게 관심이 없어보였다. 핸드폰을 깔짝이는 류의 앞에 레이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류 씨…. 촬영은 잘 끝내셨나요?”

    “뭐예요?”

    목소리를 떨며 물은 질문에 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류가 질문을 듣지 못한 것 같아, 레이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촬영은 잘 끝내셨나요?”

    “촬영이야 맨날 똑같죠.”

    류는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의 말에 대답은 한다. 평소보다 기분이 덜 나쁘다는 증거였다. 혹시 준과 연락이 닿는지 묻기 위해 류를 찾아왔던 그는 간만의 기회로 잠시 류와 대화하기로 마음먹는다.

    “힘들지는 않으시고요.”

    “괜찮아요.”

    류의 태도는 연신 퉁명스럽다. 그런데도 레이는 왜인지 류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어쩌면 레이는 준의 일을 빌미로 류를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몸은 괜찮으신 거죠?”

    “귀찮게 말 걸지 마요.”

    역시나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레이의 마음에 확 찬물이 들이 부어진다. 하지만 덕분에 류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눈이 올라간 예쁜 얼굴을 볼 수 있던 레이의 마음은 쿵쾅거렸다. 류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레이는 대수롭지 않은 척 찾아온 진짜 목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 게 아니라,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거예요.”

    “무슨 일인데요.”

    “준 씨가 지금 연락이 닿질 않거든요. 혹시 아시는 거 있으세요?”

    “아아, 준 군이요.”

    류가 태연하게 대답한다. 어쩐지 태평해 보이는 남자의 기색을 눈치채고 레이가 캐물었다.

    “뭐 아는 거라도 있어요?”

    “글쎄요. 대스타시니까 작정하고 잠수 탄 거 아닐까요?”

    류가 ‘풋’ 하고 킥킥거렸다. 얼토당토않은 말에 레이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중 류에게서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는 사람 집에 가 있다든가….”

    레이가 고개를 번쩍 들어 류를 바라봤다. 하지만 류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흥흥거리며 콧방귀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알량한 모양새가 얄미웠지만 레이는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다. 굳은 눈치로 류를 보고 있던 레이가 캐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얼른 말해주세요.”

    “미안한데 몰라요.”

    레이의 눈썹 뼈가 힘을 받고 두드러진다. 누구 놀리는 것처럼 잡아떼기만 하던 류는 결국 본색을 드러내 업무담당자 앞에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 없어지면 나야 좋지. 내가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류….”

    “하아. 정말 신경질 나. 다들 준, 준. 준만 신경 쓰고.”

    ‘다들’이라고 해봤자 곤 아니면 관심도 없으면서. 이제 레이는 안중에도 없이 투덜거리듯 한탄하는 거에 열중한 류를 보며 레이는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했다.

    ‘어떡하지. 나한텐 절대 안 알려줄 텐데. 곤 씨나 사장님한테 도움을 구해야 할까?’

    남자가 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류는 기세등등해서 악에 받쳐 혼잣말을 했다. 그의 열띤 집착은 어차피 곤에게 가 있는 걸 알고, 레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그가 슬슬 손목시계를 살피며 류에게 통보했다.

    “이 얘기 다른 사람한텐 하지 말아요.”

    류에게 마땅히 인사받을 생각도 없이 레이는 자리를 훌쩍 떠났다. 어차피 류가 자신이 한 말을 옮겨 전달하지도 않을 거란 걸 레이는 알고 있었다. 류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다가 레이가 사라지고 어째선지 심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유진은 정말로 어디로 간 것일까. 곤과 레이가 그를 애타게 찾고 있는 동안 유진은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사람 집에서 놀고 있었다.

    *

    방 안에서 혼자 청승을 떨던 유진은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당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진 씨?

    “조쉬, 잠깐 도와주실 수 있나요?”

    상대방은 유진과 같은 검은 머리 미국인 조쉬였다. 놀라서 긴가민가해하는 조쉬에게 유진은 급하게 부탁을 꺼냈다.

    “저 좀 숨겨주세요.”

    그 길로 달려간 조쉬의 집에서 유진은 자신을 반겨주는 동향인을 만났다. 조쉬는 놀란 눈치였으나 차분하게 유진을 집 안으로 들였다. 낯선 바닥재를 밟고 나서야 유진은 자신이 엄청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자기 대체 무슨 일이야.”

    조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유진은 조쉬를 빤히 바라보다가 또 눈물이 났다. 조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유진을 다독여주었다. 죄책감이 마음속에서 제동을 걸었으나 유진은 이번만큼은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그에게 위로를 받으며 유진은 마음의 안도를 느꼈다.

    그의 자상한 배려를 받고 유진은 조쉬로부터 잠시간 묵을 공간을 빌렸다. 조쉬에게는 그가 무안할 정도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조쉬는 오히려 유진에게 침대를 마련해주지 못해 미안한 눈치였다.

    “괜찮아. 자기 잘못이 아니잖아. 그치?”

    갑작스러운 유진의 방문에도 조쉬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는지 침착한 모습이었다. 혹시 이전과 같은 일이 일어난 건지, 조쉬의 질문에 유진은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조쉬는 법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조언했다. 그의 연륜이 묻어나는 대처에 유진은 부끄러워졌다. 자기가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이었단 것도 처음 알았다.

    유진은 오는 연락을 모두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부재중 전화를 외면하다 급기야는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그렇게 유진은 조쉬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곤을 비롯한 자신이 짊어진 짐들을 버려두고 잠수를 타버렸다. 모든 걸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유진은 밀려둔 피로를 한꺼번에 몰아 받았다. 참아뒀던 권태와 나태함이 청년의 몸을 쭉쭉 들이켰다.

    무료한 잠적 생활을 지내면서 유진은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문득문득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며칠만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곤이 생각날 때마다 유진은 누가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졌다. 죄책감이 피어날라치면 다시 독한 마음을 먹었다. 애 좀 먹어보라지. 곤은 좀 골탕을 맛봐야 했으므로.

    유진이 핸드폰 전원을 꺼버리기 전에 조쉬가 우연찮게 부재중 목록 속의 곤의 이름을 보게 된다. 가득 쌓인 남자의 이름을 보고 조쉬는 자기가 보고 있는 이름이 ‘그 사람’이 맞는지 고민하다가 불현듯 몸을 푸드득 떨었다.

    ‘사랑싸움인가?’

    포르노 배우가 잠적을 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는 법이다. 혹자는 사랑이나 치정 싸움에 얽혀 도망치기도 한다. 조쉬는 유진이 가끔 핸드폰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는 걸 보았다. 그럴수록 조쉬의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다.

    ‘고집 센 이성애자도 저런 남자한텐 못 당하는구나.’

    우울해하면서도 얼굴만큼은 반짝반짝한 유진을 보고 조쉬는 부러워했다. 이런 조쉬의 생각을 유진이 알았더라면 펄쩍 뛰었겠지만. 사실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친한 사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남이 멋대로 그런 오해를 하고 있으니 유진은 졸지에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하는 격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곤 그 자신도 모르는 마음을 유진이 알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둘만 모르고 다른 사람은 쉽게 낌새를 느낀다.

    유진은 가끔은 하루 종일 잠만 자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때때로 울기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했다.

    ‘왜 다들 날 그렇게 보는 걸까.’

    조쉬가 내어준 이불 위에서 유진은 또 자기연민에 빠졌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그가 고민하는 사이 곤은 며칠 동안에 걸쳐진 유진 찾기에 실패하고 레이에게로 돌아갔다. 당장 유진과 관련된 일정들이 수정되었고 레이는 그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다.

    “준 씨 찾았어요?”

    “아… 니.”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유진의 소재를 묻는 레이에게 곤은 말문이 막혔다. 다짜고짜 물을 줄은 몰랐기에 그는 헛기침만 한 번 하고 빈 의자에 앉았다. 레이는 곤을 슬쩍 한 번 보다가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의 얼굴에는 거뭇한 그늘이 내려와 있었다. 곤은 왜인지 마음이 굉장히 뜨끔했다. 레이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직 연락은 없죠?”

    “그래.”

    레이의 얼굴이 굳었다. 타자를 치는 그의 손끝에는 신경질적인 압력이 돋아있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곤은 압박감을 느꼈다. 그는 일단 레이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레이도 골치가 아팠다. 유진이 잠시 부재하는 건 큰일은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체될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가능하면 회사에 알리지 않기 위해 그의 선에서 둘러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촬영 때 무슨 일 있었어요?”

    레이는 키보드 위에서 손을 멈추고 곤에게 질문을 던졌다. 곤은 찔러본 질의에 움찔해 단박에 대답을 해버렸다.

    “아니.”

    제 발이 저린 곤의 삐걱삐걱 굳은 반응을 듣고 레이는 수상함을 느꼈다. 곤은 의자에 앉아서 딴청을 부렸다. 레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거죠?”

    “아니라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곤이 과민 반응하자 레이는 ‘그냥 해 본 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요?’ 하고 중얼거렸다. 곤은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좀체 볼 수 없는 모습에 레이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제야 레이는 좀 열이 받았다. 뒤처리를 하면서 고생한 사람은 자신인데, 그런데도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시치미를 잡아떼고 있었단 말인가?

    “준 씨가 촬영 직전에 감독을 지정해달라고 요청하더라고요.”

    “…….”

    곤이 점점 켕기는 사이 레이는 혼자 추론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자. 준은 굳건한 사람이다. 자기가 늘 말하는 것처럼 구를 대로 구른 포르노 배우였고 이런저런 하드코어 포르노를 찍었다고 핀이 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잠수를 타 버린다니. 그것도 원했던 곤과 작업을 한 뒤에. 그 지점에서 레이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의심스러운 점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면 유진이 레이한테 감독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던 것부터 수상했다. 곤이 유진에게 무언가 했을 거라고 레이가 의심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곤은 뻔뻔하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고집스레 입을 다문 남자를 보고 레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다시 제 할 일에 집중했다.

    “그래요. 기다려보죠 뭐.”

    레이는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났다. 곤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레이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외국인 남자는 곤의 동료가 된 지 5년째였다. 레이는 곤보다도 먼저 이 프로덕션에 있었다. 속을 감추는 사람 같으면서도 가끔은 솔직한 남자에 대해 곤은 모를 건 모르더라도 아는 것도 많았다. 가령 같은 회사 소속 배우인 류를 좋아하는 일이라든가. 레이가 발목 잡힌 약점에 대해 묘한 동질감을 느껴버린 곤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했다.

    “걱정되지 않으시나요.”

    레이가 곤을 쳐다보며 물었다. 곤이 눈을 깜빡거렸다.

    “별로.”

    “정말 큰일이라도 있으면 어떡해요?”

    그럴 리가 있겠어? 언제나와 같이 냉정을 유지해야 할 곤은 레이의 지적에 뒷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정말 유진이 사고라도 당한 거면 어떡하지? 무심코 생각한 가능성에 곤은 다른 걱정들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유진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그가 연락이 닿지 않은 곳에 있더라도 곤은 알 방도가 없었다. 어쩌면 유진은 지금 괴한에게 잡혀있을지도 모른다. 광적인 팬에게 테러를 당하는 것도 포르노 배우들에겐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무시무시한 가정들에 곤은 핏기가 빠졌다.

    “그럼 기다려보죠.”

    “뭐?”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레이가 태평한 소리를 했다. 구질구질한 불안으로 몸을 채우고 있던 곤이 레이를 향해 불쾌한 물음을 던졌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어쩌려고?”

    “방금 전에 괜찮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요.”

    곤은 할 말이 없어졌다. 레이는 눈동자만 움직여 입술만 질근질근 무는 곤을 훔쳐봤다. 이것 봐라. 온갖 게이들이 달라붙어도 철통같이 방어하던 사람이.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유진의 부재로 구차해져있는 곤을 보며 레이는 안쓰럽다가도 데자뷰를 느꼈다. 같이 일하게 된 포르노 배우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일련의 과정 같은 것 말이다.

    ‘당신도 별수 없구나.’

    레이는 그도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심심하게 놀라고 있었다. 지금이나 되어서야 호르몬 작용에 이끌리고 계시다니.

    이런 레이의 속마음도 모르고 곤은 유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이는 안달하는 곤의 모습을 보는 게 솔직히 조금 고소했다.

    *

    제프는 자택 소파에 앉아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전면에 최신 TV 모니터가 달려있는 거실은 볕이 잘 들고 게이 포르노를 즐기기 적합했다. 거실에서 이어지는 방 안에서 류가 잠에서 깬 채 나오는 게 보였다. 넓은 가죽에 육중한 몸을 맡기고 있던 제프가 류를 불렀다.

    “이리 와, 류.”

    비실비실한 몸이 기대어오는 걸 제프가 찰싹 끌어안았다.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풀어진 류가 제프에게 애교를 피웠다.

    “아직 기운이 있는 걸 보니 어제 더 힘을 낼걸 그랬어.”

    “아이 참.”

    제프의 추파 섞인 농담에 류가 칭얼거렸다. 어젯밤 나눈 정사에서 제프는 격렬하게 류를 다루었다. 길들여진 남자는 제프의 구미대로 다루기 편했다. 그는 어린 애인을 만족스럽게 어루만졌다.

    “더 이상 하다간 류 죽을지도 몰라.”

    “죽을 거까지야? 으하하.”

    류가 간드러지게 눈을 찡긋거렸다. 제프가 껄룩껄룩 웃었다. 멍청한 원조 상대와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제프는 순탄하게 회사 이야기도 꺼냈다.

    “준의 담당이 다시 곤이 되었는데.”

    “…….”

    제프가 꺼낸 반갑지 않은 주제에 류가 순식간에 성난 고양이처럼 눈을 치떴다.

    “곤 아니면 찍지 않겠다고 하더군.”

    “…건방져.”

    “동감이야.”

    입맛에 맞는 소속배우는 사장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류의 앙칼진 화풀이에 제프가 맞장구쳤다. 안 그래도 그 소식에 가장 공분해 있을 건 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제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류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쌍으로 짓밟아줘야 한다니까.”

    “설마 곤한테 무슨 짓을 할 건 아니죠?”

    “아차차.”

    류의 뾰족하게 솟은 항의에 제프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어린 애인 앞에서 곤을 흉봐선 안 됐다. 제프는 입을 다시면서도 류에게 변명하진 않았다. 안달이 난 류가 제프를 졸랐다.

    “곤은 됐으니까, 준만 어떻게 하면 되는 거잖아, 응?”

    “흐응….”

    제프는 손으로 턱을 비볐다. ‘어떻게 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자기 발밑에 두겠다는 의미도 있고, 아예 나락으로 떨어트리겠단 뜻일 수도 있다. 제프는 수지타산을 잘 따져 눈엣가시인 두 사람을 다져놓아야 했다.

    “폭력배들을 데려와서 집단 강간시키는 건 어때? 무서운 영상 찍어두고 영영 재기도 못 하게 만들어버려.”

    “무서운 소릴 하는군, 우리 귀염둥이는.”

    제프가 히죽 웃으며 류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류는 후자의 의미로 준을 어떻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질투에 눈이 먼 고양이를 보고 제프가 속으로 끌끌거렸다.

    ‘그 대상이 네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멍청한 녀석.’

    이미 제프에게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얽혀버린 류를 보며 그는 희번득하게 눈을 빛냈다.

    “방법이 없지. 두 사람을 갈라서게 하려면 곤이 물러서게 하는 수밖에.”

    “곤이 그만두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일이 수월하겠지.”

    곤이 순순히 물러서 준다면 재고는 해보겠다는 의미였다. 류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유진과 달리 류는 제프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류에게 제프란 각성제 같은 존재였다. 류로 하여금 포르노를 찍게 하고, 많은 돈을 벌게 해준 당사자였다. 인생을 움직일 동기를 쥐어준 거대한 마약과 같았던 남자에게 류는 꼼짝 못 했다. 고작 중년 아저씨였을 뿐인데 류 자신이 그에게 너무 오래 길들여졌다.

    “레코드 쪽에서 대가수님을 데리고 한국 프로모션을 계획하고 있어.”

    제프의 말에 류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레코드라면…. 제프가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곤이 그쪽으로 가준다고 하면 좋지.”

    “하지만, 전에는 거절했잖아.”

    “그러니까. 곤 녀석이 이 기회를 또 잡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기회를 주겠다는 걸 발로 차다니, 쯧. 거기서 바닥부터 시작하려니 자존심이 상하는 건지 뭔지.”

    “어쨌든 거기 간다고 하면 되는 거야?”

    류의 질문에 제프는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아아. 그러면 준도 내 손아귀에 들어올 테고.”

    류는 옷깃을 여민 상태로 제프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혹여나 제프가 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지 류는 노심초사했다. 불안 불안한 기분으로 저택을 나선 류는 그 앞에서 대기 중인 레이와 마주했다.

    “류 씨.”

    레이의 부름에 류가 익숙한 듯이 대기된 차에 올라탔다. 레이는 사장 집에서 나오는 류를 바래다주는 역할이다. 회사 사장과 내연관계인 소속 배우를 비서급 직원이 심부름하듯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게 흉한 일이긴 했어도 류는 자연스럽게 레이의 시중을 받는다. 부러 데리러 온 레이의 차에 올라타서 류는 유진의 이야기를 꺼냈다.

    “준은 찾았어요?”

    운전석에 앉은 레이가 흠칫하며 류의 기색을 살폈다.

    “아니요.”

    “그래요?”

    그 뒤로 류는 말없이 창밖만을 바라봤다. 레이는 기가 빨린 것 같은 류의 모습을 백미러로 훔쳐보면서 갑갑한 기분을 맛봤다.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요. 곤 씨도 찾아다니느라 힘들어 보였어요.”

    레이가 류의 화제를 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부러 곤의 이름을 언급했다. 류가 밖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곤 말이지….”

    류의 눈이 음습한 질투로 질척였다. 복잡한 사고가 그의 뇌를 어그러트렸다.

    “절대 못 찾을걸.”

    레이가 한숨을 쉬며 류에게 말했다.

    “정말… 말씀 안 해주실 겁니까?”

    “가출한 건방진 애 따위, 영영 사라져버리라지.”

    “류.”

    참다못한 레이가 류의 이름을 부르다가 입술을 물어 끝내 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이제… 이제 이런 건 그만두세요.”

    레이가 화제를 벗어난 마침표를 류에게 던졌다. 류는 충격과 혐오가 깃든 눈으로 레이를 바라봤다. 레이가 언급하고 있는 건 명백했다. 차내는 살벌한 듯이 조용했다.

    “건방지게 지금 나한테 뭐라는 거야.”

    류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는 기분 상태에 따라서 레이에게 반말을 썼다. 레이는 그의 기세에 진땀이 나면서도 할 말은 했다.

    “제프 사장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하.”

    레이가 류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류는 레이의 오지랖에 광기로 씨근덕거렸다. 불붙은 언쟁이 치정 싸움으로 번지고 있어도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무탈 없이 목적지까지 향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곤 씨가 쳐다보기나 할 것 같습니까?”

    “레… 이.”

    레이의 철퇴에 류가 충격을 먹고 부들거렸다. 달리던 차량은 신호에 걸려 멈췄다. 자기가 뱉어놓고도 레이는 바짝 굳어서 류를 거울로 응시했다. 레이 역시 애잔한 애간장을 몇 년씩이나 태우고 있던 터. 결핍된 류가 심적으로 곤을 의지하는 건 알아도 더 망가지기 전에 말리고 싶었다.

    류는 경악한 눈을 깜빡거리다가 곧 표정을 풀어 콧방귀를 뀌었다.

    “준 군을 찾고 싶다고 했지?”

    레이는 놀라서 운전대를 쥔 손에 땀이 났다. 그는 류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류의 반응은 거기서 끝이었다. 류는 굳은 얼굴로 바깥만 보고 있었다. 그는 준의 얘기를 할까 하다가 급격히 불쾌해져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제 눈치를 보는 레이를 보며 류는 풀리지 않은 분을 삭였다.

    류는 정말로 유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대충 짐작했던 사실을 업계 동료에게 추궁한 결과였다. 첸 준은 이곳에 연고라곤 없는 사람이다. 혈혈단신으로 온 외국인 포르노 배우가 혼자인 채로 타지생활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좁은 바닥에서 류는 미국에서 온 다른 한국계 배우를 알고 있었다. 도망간 첸 준이 달리 잠수 탈 곳이 어디겠는가. 십중팔구 거기에 있겠지. 포르노 배우들 간에는 달리 없는 유대감이 있다는 걸 레이와 곤, 두 미련한 남자는 모를 것이다. 류는 곤을 생각하며 말아 쥔 손톱을 손바닥에 파 넣었다.

    조용해진 류를 백미러로 바라보며 레이는 마음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찾고 싶냐고? 류는 정말 준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걸까? 자신의 모진 말에도 끝내는 입을 다무는 류를 보며 레이는 엉망으로 구겨진 속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준을 찾아야 하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류가 유진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를 구슬려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머리가 돌아버린 소속 배우가 어지간해선 입을 열지 않을 것을, 오래도록 그를 봐온 레이는 알고 있었다.

    류의 집에 도착한 자동차는 그를 붙잡을 빌미도 없어 순순히 보내고 다시 바퀴를 굴러 회사로 돌아갔다. 레이는 혼자 외롭게 도로 위를 지나며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류는 곤이 준에게서 멀어지길 원하고 있었다. 사실 류의 생각은 레이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이 역시 류가 곤을 향한 애정을 가장한 집착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에게는 이 사건이 기회처럼 여겨졌다. 첸 준의 잠수 사건이 곤과 준 사이의 치정 싸움이건 어쨌건 간에 레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유진이 제자리로 돌아와 주기만 하면 된다. 레이는 류가 입을 열어줄 거래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무거워진 차체를 끌고 회사에 도착한 레이는 늘상 보는 곤을 다시 마주했다. 곤은 레이를 회사 안에서 만나자마자 자신이 오전 내내 궁리했던 걸 떠들었다.

    “레이. 내가 생각해봤는데, 친구들을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내내 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던 곤은 레이를 보고 의미 없는 추리를 내놓았다. 마음이 어둑해져 있던 레이는 곤의 말에 냉정하게 대답했다.

    “준 씨한테 친구가 있던가요?”

    “…모르지만 혼자 이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거 아냐.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겠지.”

    곤은 답답하게 할 수 있는 말이라도 지껄였다. 그러나 그게 누군지 두 사람이 알 턱이 없었다. 레이는 곤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곤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유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걸 누굴 탓하랴. 최근 며칠 유진의 생각으로 바보가 된 곤을 보며 레이는 기어코 생각했던 얘기를 꺼냈다.

    “어쩌면 제가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

    곤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비록 곤의 친한 동료라고는 하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챙기는 이 계산적인 남자는 상당히 초조해하는 곤을 보며 입을 놀렸다.

    “준 씨가 있는 곳이요.”

    굳어 있는 레이를 향해 곤이 성큼 가까워졌다. 곤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험악하게 물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요.”

    레이의 말에 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레이는 곧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곤의 얼굴이 구겨졌다.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책상 앞으로 몸을 기울여 큰 키로 레이를 위협했다.

    “조건? 너 지금 조건을 따질 때야?”

    이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곤은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레이는 단호한 입장을 수그릴 기색이 아니었다. 각자의 소속 배우에 발목 잡혀 있는 두 사람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레이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은 곤이 아니었다. 곤은 레이의 눈동자 깊숙이 도사리는 꿍꿍이를 감지하고 긴장했다.

    “아직도 이적할 생각 없어요?”

    레이가 꺼낸 예상 밖의 이야기에 곤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 몸에 힘이 빠졌다. 그는 얼이 빠져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는 아랑곳 않고 자신이 할 이야기를 술술 꺼냈다.

    “사장님이 말하셨던 거 아시죠. 모회사 쪽에서 진행 중인 대가수의 신곡이요.”

    대가수? 곤은 혼란스럽게 레이를 바라봤다. 제프가 제안했다가 곤이 거절한 가수의 뮤직비디오 촬영 프로젝트는 바로 이번 주부터 진행된다. 그걸 지금 와서 왜.

    “그게 어쨌다는 거야.”

    “제프 사장 말대로 하세요.”

    곤의 눈이 놀라 크게 떠졌다. ‘사장 말대로’라는 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좀 지난 이야기다. 곤이 따지려는 걸 레이가 막으며 설명했다. 탁월한 중간관리자인 그는 류와 곤, 두 사람을 조율할 수 있는 조건들을 따져 제안을 한다.

    “사장님도 곤 씨가 부탁하면 받아들일 겁니다. 순서가 조금 우스워졌지만요. 사장은 아직 준 씨가 사라진 걸 모릅니다. 곤 씨랑 있는 줄 알 테니까 본인도 아쉬운 입장이겠죠.”

    곤이 동경하는 예술가는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레이는 당장에 조율할 일정들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곧장 한국으로 떠날 수 있겠어요?”

    *

    유진은 이불 위에서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게으름뱅이가 되어버린 유진은 하루 열 시간을 넘게 잠만 잤다. 다닥다닥한 벽으로 둘러싸인 조쉬의 좁은 집에 있으면 혼자 고립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래서였는지 문 쪽에서 나는 소음을 그는 듣지 못하고 있었다. 최신식이 아닌 구식 초인종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리고서야 유진은 귀가 쫑긋해졌다. 화장실 안에서 씻고 있던 조쉬가 문을 열고 유진을 불렀다.

    “자기-, 잠깐 나가줄 수 있어?”

    유진은 화장실에 있는 조쉬의 부탁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나태에 익숙해진 몸이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늘어진 티에 잠옷 바지만 입고 느릿하게 걸어가는 동안 방문객은 성급하게 초인종을 몇 번씩이고 누르고 있었다.

    참 급한 사람이네. 귀찮았지만 집에 올 사람이라곤 거의 택배였기 때문에 유진은 태연했다. 거의 문으로 다 와갈 즈음에 초인종 소리가 끊겨서 유진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끊긴 벨소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끈질긴 방문객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씨, 진 씨!

    택배가 아닌가? 유진은 의아해하며 신발장으로 다가섰다. 누굴 부르는 목소리가 배달부 같지 않았다. 불순한 음성은 흐릿하게 웅얼거리는 와중에도 익숙했다. 문을 열려던 순간 유진의 귀에 꽂히던 음성이 마침내 선명해졌다.

    “유진 씨?”

    “…….”

    유진은 그 자리에서 문고리에 올라가 있던 손을 멈췄다. 양팔로 소름이 올라왔다. 목소리 주인이 명확하게 떠올랐지만 현관 구멍으로 확인하기는 두려웠다. 대답이 없자 노크 소리가 멈췄다. 그새 유진은 사람 없는 척을 할까 말까 수만 번 고민했으나 상대방은 기척을 눈치챘는지 다시 끈질기게 유진을 불렀다.

    “유진 씨, 거기 있는 거 맞죠?”

    이곳에서 흔히 들릴 리 없는 한국말에 유진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놀랬다.

    ‘곤 씨가 어떻게 여기에?’

    설마 조쉬를 찾아왔을 리는 없고. 애초에 그는 유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곤의 등장에 유진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유진 씨, 유진 씨!”

    ‘날 잡으러 왔나 봐!’

    그것이 유진이 처음 한 생각이었다. 유진은 곤이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바들바들 떨었다. 스케줄도 펑크 내고 핸드폰도 꺼 놓은 채 며칠을 잠수 탔으니 잔뜩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안 그러면 어떻게 여기까지 알고 쫓아왔을까. 잡히면 끌려가는 거 아니야? 극적인 감상보다도 유진은 무서워서 오들거렸다.

    “…….”

    대답이 없자 문밖에서 들리던 소리가 줄어들었다. 쪼그라든 간을 부여잡고 유진은 손을 머뭇거렸다. 갈등에 사로잡힌 유진이 생각을 진전시키지 못하는 사이 문밖에서 곤이 말을 걸었다.

    “유진 씨, 할 말이 있어요.”

    열리지 않은 문을 두고 곤은 유진이 앞에 있는 것처럼 혼자 말하기 시작했다. 탁한 목소리가 고백하듯이 속삭였다. 탓할 기세 없어 보이는 지친 기색에 ‘어라?’ 하고 유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유진은 눈이 땡그래져서 멍하니 문을 쳐다봤다. 예상 밖의 고해에 깜짝 놀란 그가 토끼처럼 얼어붙었다. 당황한 유진이 목소리를 낮춰 다른 사람인 척했다.

    “자,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유진 씨 거기 있어요?”

    아차, 한국어로 말하고 말았다! 스스로 자기라는 걸 밝힌 꼴이 된 유진은 제 손으로 입을 때리다가 넘어졌다. 휘청거리던 다리가 슬리퍼를 밟고 신발장 위를 주욱 미끄러졌다. 신발이고 사람이고 우당탕 신발장에서 구르는 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곤이 다급하게 유진을 불렀다.

    “유진 씨, 유진 씨! 괜찮아요?”

    지끈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킨 유진은 누구한테 하는 건지도 모르고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이제 유진이 확실히 집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곤이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틈 사이로 흔들리는 문을 보며 유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진 씨한테 심한 짓 한 거 미안해요.”

    열릴 기미 없는 문 앞에서 곤은 문을 두드리길 포기하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단단한 목소리였다.

    “…상처 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좁은 현관 복도 앞에서 유진은 귀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남자의 진심을 이해하기에 지금 유진은 털이 선 고슴도치마냥 방어적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어.’

    애원 섞인 말들도 유진의 구멍 난 마음을 달래주기에는 무리였다. 대뜸 찾아온 것도 애써 회복하는 마음에는 폐였다. 유진은 다시 서글퍼져서 문을 노려봤다.

    “…안 열어주시겠죠.”

    “…….”

    “쉬고 싶으면 좀 더 쉬셔도 좋습니다. 연락만 받아주세요.”

    묵묵부답인 상대편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남자는 한 마디만을 남기고 떠났다.

    “…다녀와서 봐요.”

    “…….”

    문 앞에 존재하던 인기척이 터벅터벅 사라져갔다. 문 너머로 거나한 대화를 주고받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문득 유진은 곤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걸 말고 발길을 돌린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를 벌써 만나기에 유진은 준비가 안 됐다.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 않던 다리가 순식간에 힘이 풀렸다. 유진은 어쩐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남은 망설임이 발목을 질척하게 잡아챘다. 유진은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풀이 죽어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영문 모를 상황을 마주하고 충격을 받은 조쉬가 서 있었다.

    “조, 조쉬.”

    유진도 따라서 기겁했다. 여기가 남의 집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저 그게, 그게 아니라.”

    “남의 사랑싸움에 끼어드는 거 아니지만….”

    “아닙니다!”

    조쉬의 단단한 오해에 유진은 펄쩍 뛰었다. 사랑싸움이라니, 소름 끼친다. 유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맨눈으로 못 볼 꼴 본 조쉬는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난 웬만하면 용서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 자기.”

    “오해예요, 오해라고요!”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던 유진은 울고 싶어졌다.

    *

    제프는 뒷짐을 쥔 채 빙빙 돌다가 레이를 슬쩍 봤다. 레이는 자기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남의 개인실에 쳐들어와 일을 방해하던 제프가 레이에게 툭 말을 붙였다.

    “레이. 준 군의 새 스케줄 표는 아직인가?”

    “아직 준비 안 됐어요. 곧 나올 겁니다.”

    “그래, 그래.”

    단칼에 대답하는 레이에게 제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곤이 자리를 비운 지금 유진의 매니지먼트권은 제프가 쥐게 되었다. 차기작도 이제 곧 발매 예정이었고, 레이가 어련히 협력업체들과 제휴 이벤트들을 협의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온통 제프의 몫이었다. 그는 유진을 어떻게 굴려 먹을지 고민 중이었다. 염원하던 일이 생긴 제프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제프는 오늘 아침에 떨어졌던 곤의 발령 공문을 떠올렸다.

    ‘웬일일까. 그 자식이.’

    갑자기 나타나선 레코드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곤. 의아했지만 최근에 회사에서 영 힘을 못 썼으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제프는 생각했다. 본래 그쪽 지망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제프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기회를 받아들였다.

    ‘뭐, 생각이 바뀌었나 보지.’

    남 좋은 일이더라도 제프로선 아쉬울 게 없었다. 제프는 뒷짐을 지고 레이의 업무실에서 파일 따위를 뒤적거렸다. 레이는 서류를 보는 척하며 제프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다.

    “흐음.”

    레이가 혼자 초조해하든 말든 제프는 레이가 정리해놓은 스케줄 표나 다음 예정 촬영계획들을 하릴없이 살폈다. 어쨌든 그의 가장 주요 관심사는 첸 준의 향후 플랜이었다. 유진의 고집으로 제프가 선뜻 손대지 못했던 그간의 일정이 사장은 궁금했다. 곤과 함께했던 촬영들 말이다. 또 쓸모없는 촬영이나 했겠군 싶은 뻔한 기획서들을 휙휙 넘기던 제프는 유진의 스케줄 표를 발견하였다. 일정들이 들어찬 캘린더를 보다가 제프는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데?’

    몇 주 전까지 꽉 차 있던 준의 일정이 어느 시점부터 비어 있었다. 레이는 제프를 몰래 보고 있다가 그가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깜짝 놀랐다. 레이의 개인실을 빠져나온 제프는 공용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침 밖으로 나오는 현장 직원이 있어 그를 붙잡고 제프가 물었다.

    “이봐, 최근에 준 만난 적 있나?”

    “예? 아뇨. 최근에 못 본 것 같은데요?”

    “지난주에 한 번도 본 적 없어?”

    “네. 곤 감독님이랑 같이 계신 거 아닐까요?”

    회사에서도 본 적 없으니 아마 그럴 것 같다는 직원의 말에 제프는 눈을 어둡게 떴다.

    “…그래?”

    제프는 그러고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직원들이 떠드는 소음들을 귀담아 듣던 그는 묘연히 지워진 자리를 깨닫고 어디론가 향했다.

    제프가 찾아간 곳은 류의 집이었다. 알 만한 회사 근처 숙사로 간 제프가 닫힌 문 앞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 구멍에 키를 꽂고 남의 집 출입문을 덥석 연 제프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가자 영문 모르고 잠들어 있는 류가 보였다. 제프는 숨을 한 번 내쉬고 가면 같은 표정을 지어 잠든 류를 불렀다.

    “류.”

    자고 있던 류가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제프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류, 일어나 봐.”

    “으응, 제프 씨…?”

    류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제프를 보았다. 머리를 한 번 흔든 그가 제프를 보고 놀라서 황급히 몸을 이불로 가렸다. 제프가 혀를 찼다.

    “칠칠치 못하군.”

    “무슨 일이에요?”

    류가 껄끄럽게 물었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 있는 건 제프였다. 그를 보고도 놀라지도 않는 류에게 제프는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너, 요새 준이 뭐 하는지 알아?”

    “준…?”

    “그래.”

    류가 미간을 찡그려 달갑지 않게 대꾸했다.

    “몰라….”

    “뭐 촬영한단 얘기 없어?”

    “모른다니까.”

    이것 봐라. 그야 류가 준에 대해선 모를 수 있어도 그가 곤의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하는 걸 제프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제프는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었다. 어딘가 까다롭게 날이 서 있는 제프를 보고 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일정표를 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준 군의 스케줄이 전부 비워져 있어.”

    제프는 류를 살피며 일부러 그를 떠보았다.

    “뭐 아는 거 있나?”

    “아, 아니. 난 몰라.”

    “생각해 보면 곤이 갑자기 한국으로 간다고 한 것부터 이상했어. 준도 뭘 하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혼잣말로 추궁을 펼쳐가던 그가 애먼 류를 향해 큰소리를 쳤다.

    “너 준의 전화번호 알지. 전화 한번 걸어 봐.”

    그 말을 들은 류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선뜻 표정을 짓지 못하는 류를 보고 제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래?”

    “잠깐만….”

    류는 허둥거리며 침대 밖으로 나가 핸드폰을 찾았다. 제프는 그가 잡아떼고 있는 걸 알았다. 류는 제프에게 등을 돌려 전화를 걸었다. 한참 핸드폰을 들고 있던 그가 망설이며 제프를 쳐다봤다.

    “안 받는데….”

    “내놔.”

    제프가 류에게서 사납게 핸드폰을 채갔다. 남자의 손이 화면을 눌러 통화목록을 살핀다. 취조하는 듯 강압적인 분위기에 류는 굳어버렸다. 분위기는 단숨에 제프의 성질대로 변했다. 류는 확실히 제프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제프는 부재중 전화를 다시 한번 걸었다. 이번엔 제프가 류의 핸드폰을 귀에 댄다. 류는 굳은 얼굴로 제프를 보고 있다가 그가 핸드폰을 끄자 조용히 안도했다.

    “전원이 꺼져 있잖아.”

    “그, 그렇다니까.”

    제프가 류의 핸드폰을 거칠게 침대 위로 던졌다. 류가 놀라서 움찔했다.

    ‘이래서야 뭘 알 수가 없군.’

    감이 좋은 나이 든 남자는 우선 류의 불안감을 건드릴 생각으로 웃어 보였다.

    “나중에 다시 걸어보지 뭐.”

    “…….”

    “류는 자고 있었어?”

    방금까지 자고 있던 걸 보았으면서 제프가 갑자기 화제를 바꿔 살갑게 굴었다. 류도 침을 꿀꺽 삼키고 제프의 곁에 앉았다.

    “으응, 오늘 일이 없어서….”

    “피곤해?”

    제프가 슬금슬금 류의 잠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에 닿는 살결을 뿌듯하게 만지자 류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지금? 여, 여기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제프는 류의 옷을 잡아당기며 거사를 강행하려 들었다. 류는 그의 추파를 사절하며 애원했다. 의심스럽게 구는 제프와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 나 몸도 안 좋고.”

    “류.”

    류가 저항하자 제프는 귀신같은 안광을 번득이며 류의 앞에 들이댔다.

    “네가 좋아하는 거 해 주겠다는데 왜 그래?”

    “우, 으….”

    주박 같은 협박에 옴짝달싹못하는 류를 보며 제프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 감춰두었던 약봉지를 꺼내 멧돼지 같은 남자는 흰털 같은 가루를 손 위에 털어냈다.

    “착하지. 이리 와볼까.”

    약을 보고 겁에 질린 류의 동공이 떨렸다.

    *

    공항에 도착한 곤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체크인을 하고 간단한 끼니를 챙긴 그는 탑승 게이트로 들어가 수속을 기다렸다. 오랜만의 한국행이었다. 신기한 감상은 없었다. 결국 곤은 레코드사 소속 가수의 비디오 촬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존심을 세웠는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거라 생각한 일에 뜻하지 않게 돌아오게 되다니. 하지만 이제 와 제자리를 기웃거려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비행기 좌석에 앉아 부유하는 상공을 바라보며 곤은 눈을 감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레이의 성화로 티켓을 끊고 나서 마지막으로 곤은 유진을 찾아가 구질구질한 할 말들을 했다. 그러고 나서도 풀어지지 않은 응어리 때문에 곤은 속이 찼다. 오랜만에 들은 유진의 목소리는 남자의 뒷목에 잔열을 심어주었다. 문 너머로 유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곤은 알 수 없었다. 유진은 당황했던 것 같다. 그것 또한 곤의 가정이었다. 자존심 버리고 했던 구구절절한 말들에도 유진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곤은 그것이 닫혀있는 마음처럼 여겨졌다. 상대의 얼굴이라곤 볼 수 없었던 유진의 집도 아닌 낯선 주택의 철문.

    ‘설마 애인 집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곤은 기운이 빠졌다. 뭐랄까 이건, 아쉬움? 그리고 끓는 걱정이 모닥불처럼 마음 한구석에서 타닥타닥 피어오른다. 그럼 이제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가. 곤은 마음이 갑갑해졌다. 자신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나를 아직…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뻔뻔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그는 실망했다. 미안했단 사과는 진심이었다. 견고하게 세워둔 허물을 헤치고 남자는 솔직해졌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할퀴었을 스스로의 모난 부분들을 조각조각 깎아냈다. 해프닝을 통해 곤은 나지막하게 깨달은 게 있었다. 유진이 가 버리면 그대로 끝이다. 곤 자신은 구멍 난 자리를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날아오른 비행기 뒤로 곤은 많은 걸 남겨두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그는 회사 일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유진을 찾아낸 것도 곤이 아니고, 그는 레이가 잘 해결하리라 믿었다. 레이는 유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곤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원치 않는 일이 진행되지 않도록 잘 조율할 것이다.

    ‘빨리 돌아가자.’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자. 그렇게 다짐하며 곤은 익숙한 땅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한 곤은 바쁘게 서둘렀다. 그쪽 팀과는 바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 활동은 가수 측에서 원한 것이라고 했다. 작년에 한국에서 공연을 한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이번 프로모션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직원들로 이루어진 팀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건 가수를 제외하면 곤뿐이었다. 양쪽 언어가 가능한 그는 프로젝트를 이끄는 데 유용한 일원이 될 것이다.

    차에 몸을 싣고 이동하면서 곤은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사람을 드디어 보게 된다는 게. 착륙했을 때만 해도 태연했던 심장이 컨벤션 홀로 향하는 동안 점점 박동 수를 늘렸다.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순간 곤은 시끌벅적한 스테이지의 주인공을 마주했다.

    누가 봐도 외국인 스태프들로 보이는 낯선 사람들과 익숙한 경치의 촬영 스튜디오. 삼각대와 반사판, 음향 기기들을 장착한 시끌벅적한 공간 사이로 곤은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훤칠한 남자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레코드사 직원들은 곤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곤은 단박에 자리의 대가수를 찾아냈다. 실제로 본 가수는 더 그의 어머니와 닮아 있었다. 곤의 유년 시절부터의 우상이자 꿈의 종착지. 신선한 날씨에 더운 정장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그는 중후한 신사였다.

    “공석현 씨?”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에 곤은 감동과 같은 전율을 느꼈다. 곤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남자를 보게 되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 중 한 분이십니다.”

    곤은 먼저 인사를 하고 문득 든 의문에 눈썹을 꺾어 질문을 했다.

    “그런데,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그럼 알죠. 아주 인상 깊게 봤는걸요.”

    상대 쪽이 먼저 악수를 건넸다. 곤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과거를 가져와 대가수는 곤의 오래된 상념에 큰 폭탄을 떨어트렸다.

    “제 공모전에 참여한 적이 있죠? 약 5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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