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유진의 괴상스러운 수모가 비디오 본편에 삽입된다고 했을 때 곤은 불려갔다. 삭막한 제프의 옆에서 그는 소문의 신인 감독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ST라는 활동명을 가진 남자는 처음 곤을 보자마자 그에게 대놓고 라이벌 의식을 드러냈다.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구 영상이 더 나은지를 판가름해 봅시다.”
곤은 ST의 말을 그냥 흘려듣고 말았는데, 그건 그가 상대가 누구건 간에 독설을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곤의 습성을 알고 있는 제프는 우선 두 사람을 화면 앞에 앉혔다.
“자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준의 세 번째 작품을 모니터링해 달라는 것뿐이야.”
새로 온 감독을 위한 코칭을 해달라는 목적으로 곤을 소환했지만 사실상 목적은 따로 있었다. 곤의 것과 ST의 작품을 비교해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제프의 생각은 그랬다. 유진에게 노장 배우인 토비를 붙여 포르노를 찍겠다는 그의 야망은 달성되었다. 첸 준이 계속 곤의 밑에 있었다면 요원한 일이 되었을 테지만 하늘은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우연찮은 흐름으로 성공시킨 그의 야망을 곤에게 직접 선보이겠다는 계획이었다.
세 사람의 앞에 커다란 모니터가 있다. 곤은 유진의 이번 촬영 기획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없었다. 유진의 촬영 영상이었으니 당연히 화면 안엔 그가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의 상대역인 남자배우일 것이라는 아주 마땅한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뿐.
그런 그가 영상을 보다가 드물게 생소한 의문을 눈에 담았다. 유진의 옆에 있는 게 회사의 거물인 토비였기 때문이다. 그도 토비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다. 과장되게 추켜세워지는 변태 늙은이라는 것 정도만. 근래 촬영도 잘 안 하는 은퇴한 배우가 유진과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는 이유가 뭐일까. 토비와 첸 준의 조합에 대해 곤은 추리했다.
“그 토비 선생이라고. 재밌지 않은가?”
제프가 턱을 문지르며 영상을 설명했다. 곤은 생각에 잠겼다. 유진의 세 번째 포르노 비디오는 어찌 됐든 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 테였고, 회사에서 가장 네임 밸류가 있을 만한 남자를 동시에 출연시켜 시너지 효과를 내려고 했다는 기획은 대단치도 않았다. 타이틀도 마케팅도 요란하게 뽑아낼 명분을 가진 조합이다. 왜 이런 건 생각하지 못했지? 뒷방에 있던 나이 든 노장 배우를 꺼낼 만한 입김이 있는 건 이 회사에서 제프뿐이다.
곤은 일찍이 유진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데에 반대했었다. 제프에게 반발한 적이 있다. 설령 그게 토비일지라도 곤은 유진의 포르노에 이런 남자를 끼우는 걸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토비 선생은 유진에 비해 한참 나이가 많았고, 생김새로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그냥 젊은 남자를 늙은 육신으로 희롱하고 싶다는 욕망을 투영한 결과일 뿐이다. 제프는 무작정 메인 배우를 상대하는 탑들은 못생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여전히 곤의 생각과는 맞지 않았다.
“괜찮은 카드라고 생각하셨겠군요.”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니까! 정말.”
제프의 호들갑에 곤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이 복잡한 사고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때 제프는 혼자서 자신의 천재적인 기획에 대해 감탄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신이 선생 토비와 무슨 관계이며 기획 의도라든가 그만의 철학과 같은.
“조용히 봅시다.”
제프가 시끄럽게 떠드는 걸 곤이 꼽을 줬다. 제프는 멋쩍어 기침을 한 번 했다.
“큼.”
ST가 총괄했다는 촬영은 아주 높은 시야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천장에 달린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류는 클로즈업 캠이 없는 관찰형 포르노다. 움직이지 않는 고정카메라로 두 남자의 은밀한 행각을 엿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다소 초점이 흐릿해서 보기가 불편하지만 아예 채택하지 않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정된 앵글이 왜 유진을 찍고 있느냐. 곤은 또 의미 없는 추론을 해야 했다.
“저거 저거. 촬영할 때 상대하느라 힘들었겠어.”
화면 안에선 널찍한 중년남의 등짝과 얌전하게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유진이 비춰지고 있다. 유진의 옷을 벗겨 그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는 토비. 그때까지 다소 무표정해 보이기까지 하던 유진이 토비가 손을 꿈지럭거리는 동시에 격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시작되는 정사의 도입을 보며 제프가 거드름스레 중얼거렸다. 못 견뎌 하는 유진의 신음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편집실 안을 울렸다. 곤이 눈꺼풀을 내리자 집중하던 눈매가 어두워졌다.
토비가 마치 드잡이질을 하는 것처럼 젊은 애의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혀를 털었다. 과연, 그는 거장답게 생전 본 적도 없는 현란한 체위를 유진에게 취하고 있었다. 덩치 커다란 토비 선생이 스모 선수처럼 유진에게 엉덩이를 맞붙일 때 결국 제프와 ST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왜 웃으십니까?”
곤은 중요한 모니터링 시간에 진지하지 못한 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토비 선생의 몰골이 추하기 그지없잖아.”
“물론 선생님은 다 의도하신 거겠지요? 역시 희롱의 대가다우십니다.”
스피커로부터 여전히 열락에 파묻힌 울부짖는 교성이 들렸다. 토비는 자지를 넣다 뺐다 하면서 유진의 음부를 막 다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곤이 바란 적도 없는데 시큰둥한 그에게 합심해서 수다를 떨어댔다.
“네가 몰라서 그래. 선생의 몸짓에 담긴 유머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그래요, 그래. 게이가 아니면 이해를 못하죠.”
“커다란 몸으로 깔아뭉개주면 좋아하는 남자들이 있다니까.”
큰 덩치의 흉성을 울리며 두 덩치가 껄껄거렸다. 징그러운 벌레의 날갯짓처럼 듣기 싫은 소리였다. 제프는 또 예의 ‘곤은 게이가 아니다’라는 논조를 꺼내들어 곤의 심기를 건드렸다. 죽이 맞아 편을 먹은 두 사람은 곤의 옆에서 그가 모를 만한 게이 페티시 얘기를 꺼냈다.
“사장님은 해보셨습니까? 저는 일전에 만난 애의 얼굴 위에 엉덩이를 갖다 댄 적이 있었습니다.”
“헤에. 어땠어?”
“무려 영계였답니다.”
“호오!”
곤이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유리와 손이 부딪히는 파열음이 났다. 그의 강경한 기색에 딴짓을 하던 두 사람이 슬쩍 눈치를 봤다.
“이런 건 소비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곤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으며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줬다. 여전히 화면에선 과격한 섹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실컷 떠들던 대화가 끊겨, 제프가 뚱하니 대답했다.
“팬들도 좋아할걸.”
“팬들은 관능적인 걸 좋아하죠.”
“그러니까 네 말은 추남은 안 된다?”
곤은 여느 때처럼 분석을 한다. 제프는 곤이 고까웠다.
“이건 첸 준을 좋아하는 팬들이 좋아하지 않는, 뭣도 아닌 기획입니다.”
“그럼 그건 네가 감독 맡을 때 하라구.”
제프는 뚝 말을 멈춰 모르쇠 하는 표정으로 곤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지금 저게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 알고 있어? 저 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토비 선생이 아주 큰 고생을….”
곤은 이윽고 제프를 무시하고 저 혼자 영상을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화면 속에서 유진은 얼굴을 가린 채로 토비에게 삽입을 당하고 있었다. 잘생겨서 인기 많은 배우를 이런 조악한 픽셀 속에 가두다니. 색감도 살지 않는 카메라로는 그의 건강한 피부색이 나타나지 않는다.
흐릿한 화면 속에서 곤은 어쩌다 유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농염하고 저질스러운 욕망에 갇힌 음성은 잘 들리는 와중에 배우가 어떤 상태인지를 다들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곤조차 신경 쓰고 있지 않던 그의 얼굴에.
유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거대한 상대에게 능욕을 당하며 눈을 질끈 감고, 평소보다 미간 사이가 좁혀져 있다. 낯빛도 좋지 않았고. 그 속에 담겨있을 일반적인 인간의 감정. 게이니 성욕이니 떠들어대는 제프의 지론이 아닌 곤과 상통했을 유진의 세세한 느낌이다. 웬만하면 식별하기 어려운 표정을 곤은 알아버린 것이다. 섹스할 때의 그의 표정을 초 단위로 판독했던 그로서는.
“이거, 배우의 동의를 구하고 찍은 게 아니군요?”
고개를 돌린 곤이 그들에게 경멸을 채워 물었다. 모니터 안에서는 혹사당해 실신한 배우를 토비가 들쳐 업고 가고 있었다.
*
유진은 유리창 너머로 햇볕을 받는 걸 좋아했다. 그는 조쉬에게 이런 장소를 찾는 요령을 묻고 싶었으나 그러기 전에 조쉬가 먼저 차를 가져다줬다. 무더위가 가시고 날씨는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어째서 그는 더 차가운 구렁텅이로만 빠져 들어가는 느낌인 걸까. 조쉬와 유진은 종종 텍스트 메시지를 나누었다. 조쉬는 최근 유진의 행보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럴 줄 알았어. 다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았다니까.”
조쉬가 말한 만큼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유진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에게 이 직업을 통한 별다른 꿈은 없었다. 앞으로 좋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다만 환경이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그런데 말이죠, 조쉬.”
유진은 조언자인 조쉬에게 겪은 이야기를 말할 필요가 있었다. 말을 하다가 유진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당했던 처사가 꽤나 억울했던 것이다. 화나고, 찜찜하고, 억울해서 울분이 치민 목소리로 유진이 불평을 토로했다.
“협의되지도 않은 촬영이라뇨, 말이나 됩니까?”
“계약서를 잘 살펴봐.”
“계약서요?”
유진이 흥분해서 주절댄 말에 조쉬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마 어려운 단어를 쓴 조항이 있을 거야. 돌발 촬영에 대한 동의 간주와 같은.”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여기선 가능하지.”
조쉬의 무덤덤한 인정에 유진은 맥이 빠졌다. 조쉬의 어조도 약간 가라앉아 있었지만 유진의 이야기 자체에는 크게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유진이 외려 가라앉아서 조쉬에게 물었다.
“흔한 건가요?”
“흔하진 않지만 걸리면 빠져나오기도 힘들어.”
유진은 어쩌면 조쉬도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게 아니었나, 하고 그제야 깨달음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조쉬에게 이야기를 들으려 만났던 첫 만남을 기억해냈다. 그때 그는 이곳의 세계가 늪이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내가 요즘 그쪽 사정을 여기저기서 듣는데 말이야….”
조쉬는 비밀 얘기를 하듯이 유진에게 은밀히 몸을 숙였다.
“텐위는 원래 자회사거든. 그 위에 영상 찍는 프로덕션이 모회사로 있는데 사실은 레코드사야.”
“레코드? 음반?”
유진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엔 레코드숍들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앨범 판매점이나 가수들의 물품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유진은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희한한 대중가요들을 많이 들었다.
“레코드사가 게이 포르노 회사를 밑에 두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유진은 갈피를 잡지 못한 투명한 얼굴로 조쉬를 바라봤다. 조쉬가 간단하게 답을 알려주었다.
“돈세탁용이지.”
유진은 의자에서 아주 약간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그제야 회사의 비밀을 알아챘다.
*
제프는 최근에 꽤나 바빴다. 회사 발매작들의 판매량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첸 준의 세 번째 비디오가 나갔을 때 그는 강박적으로 세일즈 내역 페이지를 클릭했다. 실시간으로 카운트되는 판매지수를 새로 고침하기 위해 매초 세 번째 손가락을 굴렸다. 그의 업무상 버릇이었다. 사장실 안에서 담배를 물고 태블릿PC 위를 손가락으로 쿡쿡쿡 찍어대는 것이.
첫 스타트가 아주 좋았다. ST가 감독한 첸 준의 비디오가 무려 전작의 첫날 판매량의 두 배를 찍었기 때문이다. 건방진 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제프는 앞으로의 꽃밭을 머릿속으로 그려나가며 ‘포르노 포럼’에도 접속했다. 포르노 포럼이란 게이 비디오를 보는 유저들의 웹사이트였다. 이미 거기선 사람들이 첸 준의 새 비디오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이번에 첸 준 신작 어떤 것 같아?>
-왜 첸 준 신작이라고 하는 거야? 이건 토비 선생 신작이기도 하다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벌써 끝까지 다 본 녀석이 여기 있는 거냐?
-영상 안 넘기고 끝까지 딸쳤다. 준 꼴림
-토비 선생이랑 하는 거 장난 아니야!
게시판에 구매자들의 감상평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프가 원하는 반응들이었다. 그는 흐뭇하게 유저 댓글을 읽었다. 제프는 죽죽 스크롤을 넘겨 내렸다.
-그런데 컨셉이 좀…. 프로덕션이 배우를 잘못 굴리고 있단 느낌이 들어.
-준은 좋은데 기획이 너무 올드하지 않아?
-사실 토비 선생도 한물간 인간이잖아. 왜 준이 그런 아저씨랑 섹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
슬슬 나타나는 악평들에 제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준은 오랜만에 메이저급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 배우였어. 그런데 이렇게 험악한 영상들만 찍어대면 기껏 붙은 팬들도 떨어져 나갈걸.
-준 군 취급 너무해~~!
-예전부터 느끼는 건데 텐위 영상들은 죄다 쉰내 진동하지 않아? 사장 누구야? 배우가 프로덕션을 더 잘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제프는 다리를 떨며 거기에 제 손으로 직접 코멘트를 달았다.
메이저니 프로덕션이니. 이 녀석들은 한낱 포르노 배우에게 지나치게 큰 걸 바라고 있다. 포르노는 꼴리면 장땡이다. 팬이라는 친위대 녀석들이 걸레 게이 따위에게 이입을 하고 있는 게 제프는 꼴사나웠다.
-텐위 직원 어서 오시고.
-늙은 남 페티시 지지자인가
-중고 배우인 거랑 컨셉 잘 잡아달라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거기에 또 빈정대는 댓글들이 주르륵 달리자 제프는 선을 못 지키고 그 판의 분탕질 종자가 되고 말았다.
-늙은 할아버지를 왜 부러워하냐?
-아저씨 추태예요
-꼭 저런 말은 나이 먹은 아저씨들이 하더라.
뭣이 어쩌고 어째? 제프는 분노의 키보드질을 계속했다.
<그러는 너네도 구닥다리 아저씨일 거 아냐? 아닌 척하지 마라!>
-무슨 소리야 난 대학교 다녀
-이 새끼 정곡 찔렸네ㅋㅋㅋㅋㅋ
-작성자가 분명 구닥다리다. 장담한다
탓, 타타타타닥, 타닥. 제프의 힘겨운 반박은 단련된 넷 유저들의 조롱에 밀려 나갔다.
-말투부터 아저씨 같아
-그렇다고 해주자 불쌍한데
-아저씨라 좋겠네
-대머리이신가요?
화르륵. 마지막 대목에서 제프는 참다 못 해서 ‘난 네들이 좋아하는 준을 따먹은 몸이다!’ 하고 엄청난 사실을 밝힐 뻔했다. 그때 K라는 아이디를 가진 회원이 댓글을 달았다.
그러자 다른 회원들이 웅성거렸다.
-이쪽은 진짜 같은데?
-뭐야뭐야. 썰 좀 풀어줘.
-너네는 이런 걸 믿냐?
제프는 입을 벌려 K의 글을 계속 보았다. 그건, 원래 내가 하려던 말이었는데….
-말만 들어도 꼴린다.
-너도 말투에서 아저씨 티가 난다
-어떻게 꼬셨어?
제프는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흔히 인터넷에 출몰하는 관심종자라고. 그러다 종국엔 펄쩍 뛰었다.
-준 님. 빗치였구나. 대실망!
-포르노 찍는 놈들은 원래 다 걸레야. 뭐가 불만이야?
제프는 왜인지 열등감이 폭발했다. 속으로는 준을 따먹은 일을 전리품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웬 놈이 포럼에서 그와의 원나잇 썰을 풀자 알 수 없는 우중충한 기분과 독점욕이 치밀었다. 어디까지 뒤를 대준 거야, 이 걸레가? 촬영 외에도 얼마나 다른 남자들에게 구멍을 대주고 다녔냐는 이 말이다!
그때 회원 아이디 K가 제프를 저격하듯이 글을 남겼다.
“아니라니까!”
제프가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태블릿PC를 던졌다.
*
자택의 먼지가 쌓인 서재에서 곤은 LP판을 꺼내 들었다. 레코드는 빛이 바래 누레졌다. 곤은 종종 수집용의 LP판을 사지만 그걸 특별히 보관하거나 고이 모셔 두진 않았다. 전부 다 그의 갈색 수납장에 대충 꽂혀 있을 뿐이다.
곤은 축음기의 바늘을 LP판의 홈에 꽂았다. 90년대 알앤비 가수의 농후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전율이 흐른다.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게 안타깝다. 가수는 교포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역시 음악가로 자랐다. 곤은 한때 자신이 어릴 적 내내 듣곤 했던 가수의 흔적을 그의 아들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음악을 듣고는 예술적 열망에 사로잡혀 버렸다.
곤은 태양이 지는 불 꺼진 방 안의 고즈넉함을 좋아한다. 그는 의외로 감성적이었다. 감수성이 무조건 부드러움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감성에는 불타오르는 거친 심성이 포함될 수도 있는 거다.
곤은 어린 시절 커다랗고 멋없는 기계에 카세트테이프 혹은 CD를 넣고 다니며 끈질길 정도로 들었다. 전축이란 건 학교를 다닐 때쯤엔 사라졌다. 그래도 곤은 기억을 더듬으면 그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불분명한 음질만이 내는 포근한 음악 소리가 있었다. 곤의 취향이었다.
‘데포르테’라는 예명을 쓰는 알앤비 가수의 아들은 이웃나라로 건너가 활동지를 바꿔 음악 활동을 했다. 곤에게는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좋아하긴 했어도 카메라를 드는 것에 더 취미가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몸과 정신을 불사 지르며 각종 대회나 공모전 같은 걸 다녔다. 카메라를 들고서. 냉철할 것 같은 남자는 담은 영상에 뜨거운 열정 같은 걸 불어넣었다. 이제 와 게이 포르노를 찍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젊은 시절의 꿈은 덧없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포르노 역시 서사의 한 종류다. 지난 수년의 경험을 통해 그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든 꼴릴 만한 걸 생각해내서 기획하다 보면 판매량이 좋았다. 다른 현지 감독들은 못했다. 그걸 직접 이뤄냈을 때의 쾌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곤은 낯선 땅을 밟았던 목적을 잊고 닥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게이란 작자들은 왜인지 곤을 좋아했다. 덕분에 곤은 일을 수월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좀만 잘 대해줘도 가장 중요한 영상 요소들은 그의 뜻대로 휘둘려주었다. 정말 편했다. 일도 작업도.
제프가 모회사 쪽 촬영팀으로 넣어준다느니 했을 때 곤의 머릿속에는 극렬한 감정이 차올랐다.
‘뭐? 꿈을 이룰 기회?’
곤은 잡동사니가 엉망진창으로 놓인 다락에 긴 다리를 뻗어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느긋하고 평온한 자세로 속에선 포효를 하는 게 그의 특기였다. 역시나 속에선 시리도록 조용한 그날의 기억을 분노로 터뜨리는 중이었다.
‘그딴 식으로 말할 줄이야.’
방 안엔 여전히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격렬하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며, 온전히 곤의 취향에 들어맞는 음악이었다. 들리는 노랫소리에 맞춰 곤은 엷게 이를 간다. 제프가 곤이 ‘데포르테’라는 음악가에게 빠져 있다는 걸 아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원부서가 그쪽이었기 때문이다.
곤은 자신의 거처가 고작 제프 같은 사람의 손에 달린 걸 인정하는 게 싫었다. 어쨌든 그는 지금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성적도 좋았고, 실제로 지금 하는 일을 나름 좋아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5년간의 노력을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
텐위가 꺼내든 토비 카드는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판매량이 좋았으며 발매 몇 주 만에 전작 판매량을 넘어섰다. 전작을 맡았던 건 곤이었고, 그 말인즉 그가 감독했던 편이 상대적으로 밀렸다는 의미였다. 제프는 공연히 성적을 들고 와서 거드름을 피웠는데 그게 곤의 스트레스가 되었다. 자신의 실적이 아니니 제프가 대놓고 핀잔을 주지는 못해도 은근히 비교질을 했던 것이다.
노장 배우와 뜨거운 신인의 조합은 수요층의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팬들의 기대치와 무관하게 판매량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준의 뒷구멍에 깔때기를 꽂는 걸로도 모자라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실신하듯 교합당하는 영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새로 유입된 팬들은 대체로 질색했다. 얼굴이 무기인 배우의 미모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도 그렇고, 토비의 덩치도 함께 음미하기엔 다소 비위 상했다. 심미안이 높은 그들이 노인네의 얼굴을 3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다니 당연히 취향엔 안 맞았다.
그런 걸 제쳐두고라도 화제작이 되다 못해 포르노 포럼을 폭발시키는 이 문제작으로 제프는 곤을 트집 잡을 건수를 물었다. 토비라는 거물이 붙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유진에게 붙어야 하는 건 보다 젊은 남성이어야 한다고 곤이 제프의 면전에다 말한 게 있으니 이제 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당장에 제프가 휘두르는 사내정치는 그동안 곤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다.
“그 곤이 저렇게 밀려날 줄은 몰랐는데.”
“이제 곤도 끝나고 팽당하는 건가?”
“준 군 케어에서 밀렸으니 이제 의기양양하게 잘난 척하는 것도 무리지.”
애초에 그다지 솔직한 생각들도 아니었다. 적들에게 곤을 비웃을 명분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물론 적을 만들어둔 건 곤의 잘못이긴 했어도, 곤에게 반격의 기회가 없었다는 건 불합리했다. 문제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점이었다.
*
팬 포르노란 배우들이 팬들과 협동해 촬영을 하는 기획물을 뜻한다. 팬서비스의 일환으로 포르노 배우와 일반인을 붙여 촬영하는 컨셉이다. 상대는 배우들의 열혈 팬인 남성들이며 미리 협의를 한 뒤에 배우가 팬의 자택에 깜짝 방문해서 섹스를 한다. 훈련된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인, 그것도 열렬한 변태들에게 몸을 내맡겨야 해서 배우들은 이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반대로 매니아들의 가장 큰 호응을 받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이 피할 수 없는 기획이기도 했다. 유진의 계약서에도 해당 기획 촬영에 대한 동의가 명시되어 있었다. 회사는 한창 주가가 오른 배우를 또다시 크게 터뜨릴 생각으로 당장 계획에 들어갔다.
한편 그간의 독한 촬영에 지친 유진은 얼마간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 유진이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그는 집에서 쉬는 동안 어디를 나가지도 않고 쭉 잠에만 빠져 있었다. 누군가 몸을 옭아매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포까지 핥아지는 지긋한 성행위들에 녹초가 된 유진은 그 좋은 자위나 섹스도 잊어버리고 얌전히 숙소에 쓰러져있었다.
진절머리 나게 몰아붙였던 토비와의 촬영 때문에 유진은 고장이 났다. 몸 안이 마그마의 용암이 기포를 터뜨리는 것처럼 뜨겁게 퐁퐁 솟았다. 마치 신체가 더 민감해지기라도 한 듯이 유진은 차가운 시트에 몸을 비비적댔다. 그러면 여느 때처럼 남자를 찾아 침대 위에서 구르고 있어야 할 텐데 힘 좋은 늙은이와의 섹스가 몸에 박혀 유진은 등골이 선연해지고 마는 것이다. 고장 난 정욕은 아직 할딱거리고 있지만 마지막 섹스가 무지막지했던 탓에 어느 누구와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비와의 촬영작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괴이쩍은 그들의 취향에 유진은 몸서리를 쳤다. 아직도 저릿저릿한 몸을 그는 열심히 아늑한 공간 속에서 뒹굴거렸다. 그때 집의 초인종이 울렸다.
무미건조한 눈동자를 한 번 굴려 천장을 쳐다본 유진은 낯선 벨소리를 무시해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성격에 맞는 짓이 아니었으므로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초가을의 날씨는 다소 쌀쌀했지만 집 안은 온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팔 차림에도 딱히 춥지 않았다. 방 안에 홀로 형형한 인터폰 화면에서 손님을 확인한 유진은 솜털이 쭈뼛 섰다.
곤이었다.
“어, 어어?”
띵동.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렸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얼굴에 유진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잠시 정신을 뺏겨 있다가 유진은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지 궁금해서 뺨을 때렸다.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유진은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감독님?”
“유진 씨.”
문을 열자 역시 곤이 있었다. 그는 유진이 맞이해주자마자 얼른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장은 두 사람의 몸으로 꽉 차버릴 만큼 좁았다. 아직 아침 바람이 쌀쌀한 시간이어서인지 곤은 여태 보지 못했던 남방을 걸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세요?”
“연락도 안 하고 와서 미안합니다.”
유진의 응당한 질문에 곤은 다소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유진이 길을 내어주어 거실로 들어온 그는 가지고 온 노트북을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아마 바쁘게 이곳으로 온 듯했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몸에 맞게 입었던 옷도 오늘따라 느슨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곤과 나란히 집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유진은 멍하니 정신이 풀려 있었다.
“유진 씨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급히…, 열이 납니까?”
혼자 용무를 말하던 곤이 그런 유진을 발견했다. 유진은 지적을 받고 움찔했다. 얼굴에 제 손을 대기 위해 팔을 들었으나 상대 쪽이 빨랐다. 곤의 거친 팔목이 두 사람의 거리를 가로질러 왔다.
“열이 있군요.”
유진은 피할 틈도 없이 곤의 손에 작은 뺨을 붙잡혔다. 동시에 시선도. 곤의 말쑥한 얼굴이 유진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유진은 무방비하게 곤이 열을 잴 수 있도록 가까운 거리를 내주고 말았다. 바깥 온도와 달리 뜨끈한 손바닥이었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뜨거운 열에 유진은 화들짝 놀랐다.
“감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곤은 유진의 빨간 얼굴을 살폈다. 곤의 눈동자를 마주 보던 유진은 배꼽 아래, 몸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열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유진은 목 끝을 울리며 탄식했다. 얼마나 답이 없는 몸뚱아리인가. 유진은 눈가를 찡그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흐려진 줄 알았던 욕구는 남자가 만지자마자 야금야금 불이 붙었다. 곤은 무미건조하게 유진을 한 번 바라보다가 손과 함께 시선을 떨어트렸다.
“다음 작품 기획 때문에 찾아온 건데, 아직 컨디션 회복이 안 되신 거라면 회사엔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아뇨! 전 괜찮습니다.”
유진이 서둘러 곤을 붙잡았다. 곤이 그런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유진은 곤이 자기 때문에 괜한 수고를 하지 않길 바랐다. 그는 곤의 어깨쯤을 보면서 쑥스러운 속내를 삼켰다.
“하지만 얼굴이 빨간데. 뜨겁고.”
“원래… 원래 열이 좀 있습니다. 저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습니다.”
유진의 얼굴이 새빨간 건 곤을 보고 오른 열 때문이었다. 열을 재기 위할 뿐인 무감정한 터치에 우습게도 속이 홧홧해져 버렸다. 천박하게 짓눌렸던 유진의 몸은 어쩐지 곤을 보고 더 발정하게 된 듯하다. 몸 주인은 낯이 뜨거웠다. 유진은 눈치껏 한발을 떼서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두 뼘도 되지 않았다가 멀어졌다.
“할 수 있을 때 빨리 찍는 게 좋죠.”
“그러고도 또 촬영을 하시겠다고요?”
반면 곤은 유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제프가 주도한 저열한 촬영물들을 모두 보고 곤은 그 앞에서 그의 강압적인 취급을 비난했다. 곤으로서는 유진이 무심코 한 대답을 쉽게 넘어가기 힘들었다.
“유진 씨는 그런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게 좋습니까?”
곤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모난 말에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곤에겐 오늘 유진을 달리 찾아온 이유가 있었으므로 재빨리 속내를 감추기로 한다. 유진을 구슬리기 위해 그는 필요한 언행들을 생각한다.
“제가 오늘 온 건 유진 씨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섭니다. 다음에 유진 씨가 무엇을 찍게 될 건지 말이죠.”
그러면서 곤은 탁상 위에 놓아둔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회사에선 유진 씨의 팬 포르노 기획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밝게 키운 그가 유진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선 유진을 곤이 의자를 끌고 와 앉혔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였다. 유진이 구부정하게 앉아있을 때 곤이 그 뒤로 섰다. 화면을 조작하기 위해 곤이 상체를 숙이면서 자연스럽게 유진은 그의 팔 사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유진은 곤의 품 안에서 등줄기를 긴장시켰다.
“포르노를 보면서 배우들에게 환상을 가지는 사람들 중에는 위험한 족속들이 많습니다.”
유진의 눈앞에 곧바로 노골적인 포르노가 나타난다. 남자들을 상대하며 쾌락에 찬 신음을 내뱉는 배우들이 화면 속에 떠오른다. 유진의 눈이 커졌다. 상대들이 죄다 심했다. 배우들은 하찮은 남자들의 작은 성기에 봉사하며 억지로 기뻐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남자를 본 배우는 두려움에 떨었다. 심지어 남자가 그의 팬이었는데도. 촬영장으로 쓴 실제 일반인 남성의 원룸에는 배우의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번에도 제프 사장과 작업하다간 험한 꼴을 보게 될 겁니다.”
배우가 일반인과 몸을 섞어야 하는 포르노의 소비 심리는 정복감이다. 제프는 육체적 우위가 없는 하급 인간들이 반반한 남자를 능욕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라면 느글느글한 변태들 중에서도 유독 질 낮은 인간을 골라 유진과 굴리도록 시킬 것임을 곤은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최근 들어 그에게 반발하는 중이에요. 자기 취향을 투영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니까요.”
곤이 노트북을 덮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일던 공간이 조용해졌다. 위를 덮었던 곤의 그림자가 사라져 유진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불쑥, 곤의 손바닥이 유진의 뺨을 덮었다.
“그러기엔 유진 씨가 너무 가여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유진이 놀라 곤을 쳐다봤다. 곤은 유진의 볼에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갖다 댔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시선으로 다독이듯이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눈매와 눈에 담긴 새까만 색깔. 유진은 입안을 깨물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간신히 달랜, 이상 반응을 보이던 몸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온몸으로 풍겨오는 상대의 신호를 곤 역시 눈치챈다. 포르노에 헌신하는 얌전한 배우는 처음 겪는 제스처에 속절없이 들뜨고 말았다. 잔뜩 부풀어서 털을 뿜는 강아지처럼.
“유진 씨가 원하는 걸 회사에 요구하세요.”
곤은 손을 움직여 유진의 시선을 들었다. 유진은 결국 곤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유진의 시야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다. 투명한 유리알 같은 동공이 유진의 마음을 조작한다. 유진은 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순종적인 눈동자를 마주한 곤은 모양 좋은 입술을 살짝 비틀며 유진을 들여다봤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권리와 회사에서의 위치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