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95)화 (95/96)
  • 95. 모든 것이 끝나고….

    자한은 듣지 못하였으나, 두화는 사림의 중얼거림을 듣고 말았다.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릴 터이니 들어오라고 하세요, 저하. 추울 텐데.”

    벗어나려 꼼지락거리니,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간다.

    “되었다. 저놈은 저래도 싸. 하니, 가만 좀 있거라.”

    “저하.”

    “어허, 자꾸 그리 움직이면 예서 더한 것도 한다.”

    낮게 겁박하는 차가운 모습에 겁이 난 것이 아니라, 예서 더한 것도 한다는 그의 말에 부끄러움이 확 몰렸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 말이다.

    붉어진 얼굴을 제 가슴팍에 묻은 그녀를 보고 나서야 만족한 자한이 근엄한 목소리로 밖을 향해 물었다.

    “무엇인지 고하거라.”

    “저하, 정말 예서 고합니까?”

    금세 시무룩해진 사림이 재차 여쭈었다.

    “어허, 내가 허튼소리 하더냐?”

    “예, 알겠사옵니다. 내일 극형에 처할 죄인들을 한 시진 후에, 궁 앞에서 벌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나이다.”

    듣던 자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알았다. 곧 나가마.”

    물러갔는지 밖이 고요해졌다.

    “가 봐야겠구나.”

    “저, 저하?”

    “응?”

    “청 하나만 들어주세요.”

    “뭔지 들어보고.”

    “꼭 들어주셔야 해요.”

    “뭔지 말도 하지 않고 들어달라니.”

    살포시 그의 품에 기대었다.

    “세자빈을 한번 보고 싶어서요.”

    “죄인을 봐서 뭣하게?”

    “그냥… 한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

    “음….”

    회임한 몸으로 죄인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두화에게 좋지 못할 것 같았기에, 쉽게 허락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죄인이 두화에게 불경한 말이라도 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그것이 걱정되었다.

    “저하.”

    제게 뭔가를 부탁하는 것이 처음인 것 같다. 결국 간청하는 그 눈빛에 자한은 지고 말았다.

    “1각뿐이야. 그보다 더 일찍 밖으로 나오면 좋고.”

    “예.”

    ***

    맹지와 함께 두화는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옥사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무척 기괴하여 놀랐지만 차분하게 걸었다.

    “어딜 감히!”

    갑자기 나무 창살에 매달려 손을 뻗어 의복을 잡으려는 죄인의 손을 맹지가 냉큼 쳐냈다.

    “마마, 저기….”

    옥사 끝 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앞에 선 두화는 처참한 여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살려 주시어요, 마마.”

    두화를 먼저 알아본 초아가 나무 창살에 매달려 울며 애원하였다. 하지만 두화는 초아의 뒤로 산발을 한 채 허공을 보고 중얼대다 웃는 세자빈을 바라봤다.

    “왜 저런 것이냐?”

    “실성했습니다. 완전히 미쳐서 자신이 아직도 세자빈인 줄 압니다. 세자 저하께서 지금 예, 계신다고 벌써 한 시진째 저리 중얼댑니다. 전, 저리 미치기 싫습니다. 부디 살려주시어요, 마마. ”

    울먹거리며 애원하던 초아의 뒤로 련하가 꺄르르 웃어댄다.

    “저하도 참. 저도 그렇사옵니다. 예? 정말이지요?”

    련하를 돌아본 초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저리를 쳤다.

    연신 허공을 바라보며 웃다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까지 영락없이 앞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모습이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실성한 게로구나.’

    련하의 허망한 끝을 본 두화는 무거운 기분으로 몸을 돌이켰다.

    “멈추거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두화는 멈칫 발을 멈추었다.

    몸을 돌이켰다.

    좀 전과는 다른 눈빛의 련하가 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두화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빤히 응시했다. 그것이 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이 분한 것인지, 난데없이 나무 창살로 달려들어 악다구니를 부린다.

    “네년이!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다!”

    카랑카랑함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귀가 아플 지경이다. 보다 못한 맹지가 한 소리 하려고 앞으로 나서지만, 두화가 손으로 저지하였다.

    “왜 그리 생각하는지 난 모르겠는데?”

    “…뭐라? 모르겠는데? 감히 뉘에게 하대를!”

    눈을 희번덕대며, 련하가 나무 창살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그대는 지금 죄인이고, 난 저하의 후궁인 양원이니까.”

    “네년이!”

    욕설하는 련하 앞에서, 두화는 기품있게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한발 가까이 다가갔다.

    “억울해?”

    “그래, 너만 아니었다면 다 내 것들이었어. 저하도, 세자빈궁도 중전마마도 전부 다!”

    “아니. 그대는 넘지 말아야 할 욕심 때문에 이리된 거야.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전부 그대 탓이지.”

    “웃기지 말거라. 어디 천한 것이.”

    천하다!

    그 소리에 욱하고 뭔가가 가슴 속에서 불쑥 올라왔다.

    “난 천한 사람이 아니다.”

    “…!”

    근엄한 목소리에 순간 움찔한 련하가 창살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우리 집안은 본디 화월국의 기둥이라 일컫던 천씨 가문으로, 대대로 충신을 지낸 가문이지. 역심을 품고 반란을 도모해 역적이 된 설 가문과는 다른 가문이니라.”

    더없이 차분하게 조곤조곤 상대를 질책했다.

    “너!”

    “잠시라도 제정신이 돌아왔으니 다행이야. 그러잖아도 하나 묻고 싶었거든.”

    “…!”

    “난 아무것도 원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그리도 악독하게 나와 아이를 죽이려 했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던 련하는 돌연, 나무 창살을 흔들며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아무것도 원한 것이 없어? 웃기지 마. 네가 궁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넌 내 것을 하나씩, 하나씩 훔쳐 갔느니!”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이를 가는 모습은 더없이 흉측스러워 보였다.

    “비록 내게 차갑게 굴던 저하지만, 그래도 우린 부부였느니라. 너만 아니었다면 계속 그리 살 수 있었을 게야.”

    “그리했다면 과연 그대가 행복했을까?”

    “뭐라?”

    “지아비의 정애도 받지 못하고, 소소한 대화도 함께하는 식사까지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들조차 함께 하지 않는 삶이 과연 행복했을 거냔 말이다.”

    처음부터 꿈꿔왔던 것들이 두화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련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자의 가진 것 없는 평범한 백성도, 서로 마음 맞아 살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지. 그대는 백성도 갖는 그 소소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 것이다.”

    “…악독한 것. 내게 지금 훈계하는 것이냐?”

    “아니, 궁금했을 뿐이다. 대관절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난, 무엇도 하지 않았건만 왜 그리 날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는지 말이다.”

    “저하의 모든 것을 가져갔으니까!”

    여인의 투기, 이해는 간다.

    여인으로서 지아비가 다른 여인을 품는다면 어찌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 하나, 그것이 타인을 죽이고 용서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대의 흉측한 그 마음 때문에, 이제 사가로 내쳐 평생 고독하고 쓸쓸하게 보내야 할 것이다.”

    련하가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싫어. 난 궁에서 안 나간다. 당장 저하를 불러와! 불러오란 말이다!”

    악쓰는 소리가 옥사에 울려 퍼졌다.

    하나, 두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옥사에서 걸어 나갔다.

    ***

    둥! 둥! 둥!

    난데없는 북소리에 저자에 거닐던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곧이어 죄인들이 끌려 나오자 멀찍이서 보고만 있던 이들은 어느새 조금 더 가까이 보려고, 형이 집행되는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거, 좀 물러나시오. 거기, 물러서라니까.”

    병사의 호통에 그제야 조금씩 질서가 잡힌 사람들은 죄인들을 유심히 보았다.

    “허이고, 이게 웬일이래.”

    “그러게 말이여.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좌의정에 병판 대감에 호판 대감까지!”

    “반란군들이 수결한 치부책하고 충신을 죽일 살생부가 좌의정 집에서 발견됐다는데?”

    “허이고, 배때기가 부르니까 별짓을 다 하는구먼. 쯧쯧쯧!”

    백성들의 수런거림 속에 호명된 죄인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조용!”

    누군가 큰 소리로 호령하자 이어 세자가 단상에 올랐다.

    “나라의 녹을 먹는 요직에 있으면서도 제 배 불리기에 급급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고, 나아가 나라를 팔아버리고, 감히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에 가담한 죄인을 극형에 처한다. 실행하라!”

    세자의 명에 북소리가 또 한 번 요란하게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망나니가 보기에도 살벌한 칼을 들고 올라왔다.

    “저, 저하 살려주시옵소서.”

    살려달라 청하는 병판의 애원에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망나니가 칼을 들고 죄인의 주위를 빙빙 돌며 금방이라도 내려칠 기세다.

    “난 지은 죄가 없다. 악귀 같은 놈들! 내 죽어도 이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설변도의 외침에, 군중 속에서 누군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은 죄가 없긴.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내 여식이 성라국에 팔려 갔어. 돈이라면 사람 장사까지 마다치 않는 당신이야말로 악귀야!”

    “맞소!”

    이내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들기 시작하였고, 설변도는 피할 길이 없었다. 날아오는 족족 머리며 얼굴에 맞아 금세 피 칠갑이 되었다.

    겨우 병사에 의해 사태가 진정되자 형은 다시 집행되었다.

    웅장하게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죄인들이 쓰러지자 그제야 설변도는 몸을 떨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왜 죽어야 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망나니를 피해 엉덩이를 옆으로 밀며 피해 보려 한들, 포승줄에 묶인 죄인이 어디까지 피할 수 있을까.

    “안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 으윽!”

    억울한 표정으로 눈도 감지 못한 설변도는 그대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결국 그의 끝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다음날, 전날 행하지 못했던 죄인들의 형벌이 진행되었다.

    전날 대부분 극형을 치렀다면, 오늘은 유배형이었다.

    동이 트자마자, 련하는 엉망이 된 몰골로 끌려가 작고 초라한 초가집에 위리안치되었다.

    “네 이놈들, 내가 이 나라 세자빈이니라! 당장 이 문을 열지 못할까?”

    가시울타리로 둘러싸인 초가집에 갇힌 련하는 한동안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발악하였다. 하나, 손 닿자마자, 두껍고 뾰족한 가시에 몇 번 찔리자, 금세 포기해 버리고 만다.

    “여봐라, 가시라도 좀 치우거라. 너무 아프구나.”

    “거참, 좀 조용히 못 하겠소! 아직도 자기가 세자빈인 줄 아나? 죄인이면서 뭘 그리 바라?”

    병사의 호통에 련하는 움찔하며 낡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저분하고 차디찬 방바닥에 앉은 련하는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댔다.

    “아무도 없느냐? 초아야?”

    대꾸가 없다.

    “아버지….”

    이리 부르면 껄껄 웃으며 반색하던 부친도 이젠 없다.

    “저하.”

    늘 그랬듯 그분은 차갑구나. 이리 애타게 부르는데 여전히 대꾸 한번 해주지 않는구나.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공기는 제 얼굴과 손발뿐 아니라, 제 주위의 모든 것까지 얼려 버린 모양이다. 아무리 불러도 누구 하나 오는 이가 없다.

    폐세자빈이 위리안치되어 떠나고, 얼마 뒤 유배형에 처해진 자들이 궁 문을 나섰다.

    마음에 걸린 것이 있어 두화는 서둘러 궁 앞으로 향하였다. 막 궁 문이 닫히는 찰나 그 앞에서 유배형을 떠나려는 죄인들을 보게 되었다.

    “잠시 멈추시게.”

    두화의 명에 죄인을 호송하던 병사와 죄인들은 자리에 서서 명을 기다렸다.

    두화는 도헌에게 다가갔다.

    “…어찌 나오셨나이까? 죄 많은 죄인의 떠나는 길까지 배웅하려 하시옵니까?”

    “설마요.”

    “그렇지요. 농이옵니다.”

    도헌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매번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이 말을 꼭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도헌은 마지막이 될 두화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새겼다.

    확실히 전보다는 기품있는 모습으로 변하였지만, 여전히 그 아래 깔린 본 모습이 보인다.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웃으시는지요?”

    “그냥 부질없는 생각에… 하면.”

    고개를 숙인 도헌이 몸을 돌리려 하였다.

    그런 그를 불러세웠다.

    “전날, 장군님댁 담을 넘은 복면인이요. 뉘었는지 알면서도 어찌 살려주셨나요?”

    어디서부터 제 마음이 시작된 것인지 도헌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복면을 쓰고 제집 담을 넘은 그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에 사내인 줄 알았건만, 여인의 의복을 입고 제 눈에 띄었을 때부터 신경이 쓰이고, 자꾸만 생각났다.

    “…그때부터였을 것입니다. 제 눈과 마음이 향하는 곳이 말입니다.”

    그의 말에 두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여, 아니 그리 여지를 준 것이 미안했다.

    “이제 다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낫습니다.”

    천한 제가 뭐라고, 그리 마음을 주셨습니까?

    두화의 작은 미간이 좁혀졌다.

    “…고맙고, 미안해요.”

    고개를 살짝 숙여 고마운 마음을 대신했다.

    “…마마.”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옅은 미소를 지은 도헌이 그윽하게 바라봤다.

    “말씀하세요.”

    “지금은… 행복하십니까?”

    “예.”

    확실히 전보다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두화의 표정에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습니다.”

    환하게 미소 지은 도헌은 예를 갖추고는 이내 몸을 돌려 병사에게 돌아갔다.

    출발하며 도헌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입에서 김이 나올 만큼 추운 날씨지만 참 맑은 날이다.

    드문드문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그녀와 함께했던 짧았던 시간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행복 하거라, 두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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