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예서 같이 살려고.
두화와 중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로 맞이하였다.
“어마마마, 오셨나이까?”
“대비마마.”
대비는 곧장 두화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좀 전, 중전과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두화에게 아직은 편하지만은 않은 분이지만, 저를 염려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사옵니다. 이리 먼 걸음 하시게 하여 송구하옵니다.”
“먼 걸음이라도 와야지. 암 와야죠. 우리 양원… 허이고, 숨차니 이 사람, 잠시 앉겠습니다.”
“…좌정하시지요.”
중전이 상석을 내주자, 대비는 상궁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나이 많은 이 사람은 동백궁이 너무 멀구려.”
“맞사옵니다, 거리가 좀 있지요. 저도 힘이 드는데 어마마마께서는 더 하시겠지요. 부르시면 될 것을 어찌 직접 행차하셨나이까?”
미소 띤 얼굴로 중전이 말하자 대비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미스러운 일에 양원이 납치되었다고 하니, 이 늙은이가 걱정되어 잠을 통 이루지 못했어요. 잘못되면 모두 이 늙은이의 업보 때문에 그리된 것 같아서….”
눈물을 훔치는 대비의 모습은 중전도 처음 보는지라 실로 당황했다.
“그리 생각지, 마시옵소서. 대비마마.”
두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침 맹지가 어의와 함께 돌아왔다.
어의는 궁 안 실세라 하는 대비와 중전 사이에서 두화를 진맥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크게 상한 곳이 없어 몸을 보하는 탕약을 올린다며 물러갔다.
잠시 어수선한 틈에, 맹지는 조금 전 알게 된 사실을 조용히 두화의 귀에 고한다. 한데 이 모습을 본 대비가 호통을 쳤다.
“어디 웃전을 앞에 두고 귓속말이더냐?”
“…”
냉큼 바닥에 엎드린 맹지는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무얼 말하려고 한 것인지 어디 다 같이 들어보자꾸나.”
“예?”
“무엇이라도 들어 네 웃전에게 고하려 한 것 아니더냐? 분명 편전에서 나온 말일 터. 당장 말해 보아라. 이런 것은 같이 들어야 맛이니라.”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대비의 모습에 맹지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번도 인자한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터라, 조금 전 호령한 모습과 겹쳐 보여 이상해 보였다.
‘어휴, 꼭 노성(老成) 호랑이 같으시네.’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맹지는 들은 것을 천천히 고하였다.
“예. 어의를 모시고 오는 길에 우연히 들은 것이옵니다. 좀 전 전하께서 이르시길….”
바로 대비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말의 흐름을 끊고 물었다.
“오, 그래. 주상이 뭘 공표하였더냐?”
이내 중전도 몹시도 궁금한 표정으로 말을 거침없이 하였다.
“혹, 놈들의 모가지를 댕강… 흠… 말하거라.”
중전의 말에 대비가 흠칫 놀라 쳐다보니, 중전은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맹지가 말을 이어갔다.
“반란에 관한 모든 증좌가 설변도를 가리키니, 극형에 처한다고 하옵니다. 또한 반란에 가담한 자들의 수결이 적힌 문서와 살생부가 발견되어, 그에 연루된 병판과 호판도 극형에 처하고, 이 일과 관련된 이들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구족을 멸한다고 하시옵고…”
“음.”
대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또한 아비와 뜻을 같이하여 회임한 양원을 해하려 했던 세자빈을 폐하겠다는 교서를 내리고, 죽을 때까지 사가에 위리안치한다.”
평생 집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세자빈의 마지막이, 두화는 뭔가 좀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옵고, 양원 마마를 구한 백 장군의 공은 크게 사나, 위급한 상황에 바로 환궁시키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마음을 담아 감금한 죄 또한 중죄이니 유배를 보낸다. 라고 하셨나이다.”
“하면 언제 실행한다고 하더냐?”
대비의 하문에 맹지는 고하였다.
“이틀 뒤,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죄인들을 벌할 것이라 들었나이다.”
이로써 불미스러운 모든 것에 대한 것들이 끝이 났다. 후련해야 하건만 두화는 가슴이 좀 답답했다.
중전은 두화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양원, 안색이 좋지 못하구나.”
“그냥… 마마, 욕심 때문에 가지고 있던 것들조차 내려놓고, 목숨까지 잃어야 할 정도로… 권력은 그런 것인지요?”
두화의 말에 중전 대신 대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처음엔 그저 내 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오니 신나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손안에 쥔 것들이 나를 좀먹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서슴없이 하는 것이 권세입니다.”
“저들이 없어지면… 비로소 끝이 날까요?”
“본디 산의 주인인 범이 사라지면 영악한 여우가 권좌의 주인이 되려 한다지요. 똑같습니다. 하물며 사람인데 더한 것들이 나타날 수도 있지요.”
두화는 대비의 말에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 제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
창 사이로 교교히 떨어지는 달빛을 보던 두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마음이 무겁다.
만약 제가 궁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세자빈이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야?”
창 너머에서 자한이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어마, 깜짝이야. 언제 오셨어요, 저하?”
“좀 전에. 그리 있으니 한 폭의 그림이로구나.”
그의 말에 자신을 훑어 내려본 두화가 작게 웃었다.
“그림으로 사는 건 싫은데… 저하를 이리 만지고.”
창 너머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감히 국본의 존체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아주 맹랑하고 겁이 없어.”
“예. 벌써 몇 번이나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눈에 뵈는 게 없네요, 제가.”
“뭐라?”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그의 뺨을 조금 더 어루만졌다.
“하여 이제부터는 만지고 싶으면 이렇게 만지고, 또 이리하고 싶으면 할 거예요.”
그대로 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하였다.
두 눈이 동그래져 끔뻑거린 자한은 서서히 멀어지는 두화의 뒷머리를 잡아 눌렀다.
“이리 감질나게 해 놓고 도망가느냐?”
가늘게 접히는 그의 눈에 피어나는 웃음이 어딘가 음흉하다.
“그럼, 예서 뭘 더 어찌하라고 그러셔요?”
“어쩌긴… 이리해야지.”
그대로 두화의 입술을 탐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은은한 달빛이 쏟아졌다.
잠시 뒤 찻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찻잔을 들어 올린 두화가 찻물을 물끄러미 본다.
“들었어요.”
찻잔을 들던 자한은 두화를 바라봤다.
“뭘?”
“장군님, 유배 가신다면서요.”
“음. 죄를 지었으니까.”
“영의정 대감은 화를 피하셔서 다행이에요.”
“본인도 몰랐던 자식이 저지른 죄니까. 조정에 중요 요직의 인물들이 죄 불온한 자들이라 텅텅 비었으니, 앞으로 정신없이 바빠지겠어.”
낮은 한숨과 함께 찻잔을 가져가는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영의정 대감은 불온한 무리에 엮이지 않아 다행이지요?”
“자식이 죄인인데 어찌 아비가 조정의 녹을 먹고, 부왕께 충신으로 남을 수 있겠냐며 오늘 사직하셨다.”
“아….”
안타깝다.
충신인 영의정마저 조정을 떠나면 나랏일은 어쩌나.
“그간 쉴 틈 없이 일하였으니 잠시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지.”
“하면….”
“시간이 좀 흐르면 조정으로 불러야지. 충신을 그리 둘 수는 없잖아.”
“다행이에요.”
“혹 밤이 두렵더냐?”
회임한 몸으로 그런 일을 겪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을까?
더구나 좀 전 창밖으로 흘러나온 가녀린 한숨이 신경 쓰였다.
“예?”
찻잔을 내려놓으며 두화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를 보는 그의 눈빛에 두화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조금….”
“알겠다. 오늘은 일단 같이 침수 들자.”
그의 단단한 품이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안전하게 느껴졌다. 보호받는 느낌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양원 마마, 소셋물이옵니다.”
맹지가 소셋물을 가지고 들어와 손부터 닦아주었다.
“언제 가셨어?”
“반 시진 정도 되셨나이다.”
“바쁘신가 보구나.”
빠른 손놀림으로 소세를 마치고 머리까지 해주고 났을 때, 웬일인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누가 왔나 보옵니다.”
“이리 이른 시각부터?”
“소인이 나가보겠나이다.”
맹지가 나가자 두화는 서둘러 의복을 갖춰 입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는데 맹지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왜 또 그리 서둘러?”
“그, 그게….”
“뭔데?”
“세자궁에서 사람들이 왔나이다.”
“세자궁에서?”
“예. 어서 나가보시옵소서.”
밖으로 나가니 정말 세자궁 사람들이다.
궁인 몇을 빼면 좌익위를 포함하여 낯익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반가웠다.
“무슨 일인가?”
“저하의 명이시옵니다. 간단한 짐만 추려 세자궁으로 옮기시랍니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두화가 머뭇거리자, 눈치 빠른 맹지가 냉큼 대답하고는 방으로 가 짐을 싸서 나왔다.
“다 쌌습니다.”
의복 몇 벌과 그간 윗전에게서 받은 패물이 든 함을 소중히 안아 든 맹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잠시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는가?”
“소인은 그저 저하의 명을 받들 뿐이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세자궁으로 향하였다. 아침도 거른 상태라 뱃속에서 아우성을 쳤다.
세자궁에 도착하자, 궁인이 침소 문을 열었다.
잘 차려진 상 앞에 그가 앉아있었다.
“어서 오거라.”
“이게 다 무엇인지요, 저하?”
“같이 조반이나 들까 해서… 흠.”
상 앞으로 가 그와 마주 앉았다.
“하면 동백궁에서 자셔도 될 것을요. 전 또 바쁘셔서 가신 줄 알았네요.”
“바쁘다. 내가 또 몹시 바쁜 사람이지만, 널 위해 준비한 것이니 먹자꾸나.”
소복하게 쌓인 흰 쌀밥 위로 손수 찬까지 올려준다.
어째 안 하던 행동을 하니 수상해 보인단 말이지.
“어찌 이러셔요, 갑자기?”
“뭘 말이냐?”
“그냥 다요. 아, 맞다. 짐은 왜 싸서 오라 하셨어요?”
“예서 같이 살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밥을 떠먹는다.
그런 그를 멀뚱히 바라봤다.
“예?”
상에 수저를 놓은 자한이 상을 한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두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두화의 두 손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이제부터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예서 같이 지내자꾸나.”
“예?”
당황스러움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무에 그리 놀라?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은 게냐?”
“아니, 싫은 것이 아니라… 좀 그렇잖아요.”
“뭐가?”
“제가 세자빈도 아니고, 아니 그걸 떠나 후궁이 어찌 세자궁에 기거한답니까?”
“내가 허락하였다.”
피식 웃은 자한이 이마를 콩 박는다.
인상을 찌푸린 두화가 작게 대꾸했다.
“그렇다 해도 웃전에서 가만 보고 계시진 않을 거예요. 엄연히 내명부에 법도가 있고, 또 왕실의 체통….”
“이미 아바마마께 윤허를 받았다.”
“…!”
“하니,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곳이 우리의 침소니라. 흠.”
헛기침하면서 귓불은 왜 붉어지는지요?
붉어진 귀를 빤히 바라보던 두화도 왠지 그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두화야.”
“어찌 그리 부르세요?”
두화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가까이 와 보거라.”
잡은 팔을 끌어당기니 맥없이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저, 저하. 지금은 날이 밝아요.”
얼굴로 열이 몰린 두화가 괜히 머쓱하여 창밖을 가리키며 웃었다.
“안다. 하나, 전날 누가 그랬지 아마. 이제부터는 하고픈 일은 다 하고 살 거라고.”
“예?”
“하여 나도 이제부터는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하려고 한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쑥 내려온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닿았다.
아침부터 무척이나 심장에 좋지 못하다.
훤한 얼굴이 그것도 또 입술만 보이니 환장하겠다. 가슴이 콩닥도 아니고 쿵쿵 널을 뛰니, 그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두화는 걱정되었다.
“요 입술을 훔칠까? 아니면….”
자한이 슬쩍 그녀의 옷고름에 손가락을 끼우며 당긴다. 장난꾸러기처럼 입술이 늘어지게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였다.
“저하, 소인 사림이옵니다.”
좀 전까지와는 달리 차갑게 변한 자한의 눈이 홱 문 쪽으로 향했다.
‘또! 또!’
“무슨 일이냐?”
“급히 고해야 할 일이 있사옵니다. 들어가겠나이다.”
들어온다는 소리에 놀란 두화가 당황하여, 그를 밀쳐 내려 하였다.
하지만 짐짓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자한이 팔을 잡아당겨, 오히려 찰나 무릎에 앉아버렸다.
‘엄마야, 어쩜 좋아.’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일어나려고 해도, 허리를 꽉 쥐고 놔주질 않는다.
“무엇인지 거기서 고하라.”
당황한 사림은 못마땅한 듯 말끝을 올렸다.
“예? 여기서요?”
“그래.”
대답한 자한은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두화를 보며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피부가 잘 익은 홍시처럼 붉다.
“볼수록 어여쁘구나.”
자한의 속삭임에 두화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하, 여기서 고하긴 날이 좀… 춥사옵니다.”
“안다. 어서 고하거라.”
안쪽에서 들리는 세자의 말에 사림은 작게 구시렁댔다.
“바람도 불고, 추운데 갔다 왔는데,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