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93)화 (93/96)
  • 93. 살려주십시오.

    차디찬 바닥에 영의정과 도헌이 묶여 꿇려 앉혀졌다.

    “감히 세자의 후궁을 납치하고도 살길 바라였더냐?”

    세자의 격노한 고함에 영의정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니라고, 오해라고 백번의 해명을 한다 한들 제집에서 버젓이 세자의 후궁이 나왔으니, 할 말이 없다.

    ‘이제 우리 가문은 끝났구나.’

    “왜 말이 없느냐, 백도헌?”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이까?”

    제 품에 날아든 두화를 도로 빼앗겼다.

    그리고 세자의 품에서 안도하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도헌은 절망하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저 삶이 허무하고, 허무할 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지금 웃은 것이냐? 하아! 무엇을 위해 야밤을 틈타 감히 궁에 잠입한 것이냐?”

    “…”

    “그 어떤 이유도… 야밤을 틈타 궁에 몰래 잠입했다는 것은 불온한 마음이 있어서였을 터! 이는 역모와 무에 다를까?”

    당치도 않은 말에 놀란 백기세가 고개를 들고 사정하였다.

    “저하, 아니옵니다. 자식이 그릇된 행동을 하였다면 응당 벌을 받아 마땅하오나, 맹세코 불온한 마음을 품지 않았사옵니다.”

    자식을 대변하여 말하는 영의정의 애원에 자한은 차디찬 눈빛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불온한 마음을 품었는지 품지 않았는지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오, 대감.”

    “저, 저하.”

    “그대는 자식이니 믿을지 몰라도 난 아니라오. 이미 배신의 칼날을 몇 번이고 맞을 뻔한 전적이 있어서 말이오. 아니 그런가, 백도헌?”

    자한은 싸늘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도헌을 바라봤다.

    하나, 도헌은 삶을 포기한 것인지, 만사를 내려놓은 것인지 멍하니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도헌아, 아니라고, 오해라고 얼른 말씀을 올려.”

    백기세는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도헌은 들리지 않는 듯 그저 앞만 바라봤다.

    ‘그래, 네놈이 해 보자 이거로구나. 좋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한은 병사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이놈을 의금부로!”

    “저하.”

    두화가 팔을 잡으며 조심스레 불렀다.

    가만히 바라보던 자한은 말하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하의 말씀 중에 오해가 있으세요.”

    “오해?”

    “예. 저를 납치한 자는 분명 복면을 쓴 괴인 둘이었어요.”

    “…”

    “어딘지도 모를 산속에서 죽을 뻔한 저를 구해주신 분이 장군님이시고요.”

    “구해주었다?”

    실소가 터진다.

    “예.”

    “해서 네가 말하고픈 것이 무엇이냐?”

    차가운 눈빛.

    예전 같았으면 그 눈빛에 괜히 서럽고 겁을 먹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의 본심을 알고 저를 어찌 여기는지 아니까. 그래서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장군님을 살려주세요, 저하.”

    도헌을 감싸는 두화의 말에 자한의 미간이 꿈틀 좁혀졌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장군님이 없었더라면 전 진즉 괴인의 손에 죽었을 거예요. 저를 죽이려 한 진짜 배후도 알아내지 못하고 억울하게 구천을 떠돌고 있었겠지요.”

    “…”

    제 앞에서 지금 저놈을 감싸다니!

    자한은 화가 치솟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저를 구해주셨으나, 제가 그간 병약하여 약을 먹느라 이곳에 부득이하게 있었을 뿐이에요. 하오니 저하… 절 봐서라도 살려주세요, 네?”

    “두화야… 음, 양원은 물러나 있거라.”

    보고 듣는이가 많기에, 자한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저하.”

    “어허.”

    “저를 죽이려던 진짜 배후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배후는 설변도니라.”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하나, 두화도 지지 않고 대꾸하였다.

    “하면 설변도와 접촉해서 자객을 부린 자는요? 누군지 알아내셨어요?”

    “뭐, 뭐라?”

    “거, 보세요. 자객을 부린 자, 그자도 추포하셔야 하지 않는지요? 추후 그자가 또 저를 노릴지 어찌 압니까?”

    티격태격 언쟁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림과 수많은 관군은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호조판서입니다.”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양원 마마를 납치하여 죽이라 명했던 자가 호조판서라고 들었나이다.”

    “호판 대감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한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하아, 아주 나라가 개판이질 않더냐?”

    세자의 막말에 놀란 사림이 당황하여 관군들의 눈치를 살폈다.

    꿇어 앉아있던 영상도 곁에 있는 두화도 눈이 동그래져 자한을 바라봤다.

    “조정에 도적들만 있으니 나라가 개판인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어디 말 좀 해 보거라.”

    주위의 병사들을 향해 기가 막힌다는 듯 자한이 헛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보다 못한 사림이 다가와 작게 중얼댔다.

    “저하, 듣는 귀가 많사옵니다.”

    “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저하….”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림은 그제야 세자의 깊은 의중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세자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한 몇몇 관군들은, 거침없이 말을 하는 세자의 모습이 그저 우스운 광경일 뿐이라 생각했다.

    “나라의 기둥과 같은 요직에 있던 좌상은 온갖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모자라 나라를 팔려던 작자고, 그런 작자를 따라 호의호식하던 자들 역시 요직에 있던 자들이고, 예로 병판이 있었지. 한데 호판까지 불미스러운 일에 가담되어 있으니, 조정이 도둑 소굴이구나. 하니 내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하겠느냐?”

    열변을 쏟아낸 자한은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누구도 그가 우스운 행동을 일삼거나 막말하는 세자라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어느새 동이 트려는지 사위가 어스름해졌다. 가만히 하늘색이 변하는 것을 본 자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영의정과 백도헌을 의금부로 압송하라.”

    “예, 저하.”

    금군이 죄인들을 끌고 나가자, 두화가 자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를 살려주신 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여 살려주려고 한다.”

    “예?”

    “예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아바마마께 사실만을 고하고, 살리려고 한다. 적어도 조정에 충신 하나는 남아 있어야 하니까….”

    두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금부로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수 없고, 나온다 한들 산송장이 되어 나온다고 알고 있다. 하물며 저를 감금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받을 터인데, 충신이라 남기려 한다는 말은 저들을 살린다는 것인지 풀어준다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

    “궁금한 얼굴이로구나. 말해주랴?”

    “예.”

    “싫다. 감히 내 앞에서 죄인의 편을 들고….”

    “아… 저라고 그러고 싶었겠어요? 하오나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더 많았잖아요?”

    처음엔 제 실수로 장군의 주머니를 털고, 그걸 빌미로 쫓아다니며 구박도 하였지만, 같이 풍속범도 잡았다.

    또 뭣도 모르고 아비를 따라 밤이슬을 맞으며 넘은 담이 하필 이 집이었다. 장군은 분명 그날 복면인이 저라는 것을 알고도 살려주었다.

    ‘벌써 몇 차례나 살려주셨으니 저도 꼭 살려드리겠습니다.’

    저를 궁에 보내지 않고 불온한 마음으로 감금하였지만, 목숨을 구명 받은 것이 더 크기에 그 은혜는 갚을 것이다. 제 마음은 딱 거기까지이다.

    “나는 저자와 좋은 기억이 없다.”

    “…하나 있지 않습니까?”

    “없다.”

    “있어요, 저하.”

    “없대도 그런다.”

    “우리 함께 물고기 잡아먹었잖아요. 그때 두 분 티격태격하셔도 보기 좋았습니다, 저는.”

    “…!”

    부정하지 않는 세자의 표정에 두화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버렸다.

    “장군님 아니었다면 전 이미 죽은 몸으로 저하를 뵙지도 못하고….”

    정말 그렇게 될까 봐 복면인에게 납치되어 산에서 그들을 대적할 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어, 어찌 우느냐?”

    “무서웠어요. 영영 다시는 저하를 뵙지 못할까 봐, 하여 이 아이도….”

    “울지 말아라. 이리 무사하였으니 되었다. 응?”

    가만히 두화를 안아 주었다.

    “하니 이리 무사하게 해준 장군님 살려주세요. 네?”

    “너!”

    “저하….”

    자한의 허리에 매달려 올려다봤다.

    “고집은 누굴 닮아 이리 센 것인지 원.”

    “누구겠어요? 아버지 닮았지요.”

    “우리 아이는 날 닮았으면 좋겠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하.”

    헤벌쭉 웃는다.

    그녀의 콧방울을 톡 치고는 말에 올라탔다.

    “내 앞에 같이 타고 가자꾸나.”

    “하면 천천히 가 주세요.”

    “그래.”

    말을 타고 천천히 궁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사림은 멍하니 바라보며 한마디 하였다.

    “티격태격할 땐 언제고, 또 저리 인절미처럼 딱 붙어서는 어휴, 매번 헷갈리는 모습뿐인데 저걸 보고 장가를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홀로 터덜터덜 먼지만 날린 길을 따라갔다.

    ***

    궁으로 돌아온 자한은 왕부터 알현하였다.

    영의정의 가택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상세하게 고하였다.

    추국장에 끌려 나온 영의정 백기세와 백도헌은 사실만을 왕에게 고하였다.

    “양원을 구한 것과 별개로 위중한 상황임에도 궁으로 보내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가택에 감금한 것은 불온한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벌일 수 없는 일! 이는 중죄에 해당한다. 하나, 괴한으로부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양원을 구한 점을 높이 사, 백도헌을 유배형에 처한다.”

    도헌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물이 눈에 들어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처량하다.

    아무리 들꽃이라 하나, 이미 궁 안으로 들어간 꽃을 탐한다는 것이 이토록 위험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인 것을… 결국 내 욕심이 화를 불렀구나.’

    ***

    동백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맹지의 잔소리를 듣느라 귀가 짓무를 정도다. 하나, 그 잔소리가 싫지 않다.

    “이제부터는 소인이 요쪽에서 딱 붙어 지킬 것이옵니다.”

    “이제 괜찮대도 그런다.”

    “아니요. 절대 아니 되옵니다. 소인이 얼마나 놀라고 걱정하고 막… 그랬는지 아시옵니까?”

    훌쩍거리던 것이 어느새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미안. 한데 정말 이젠 괜찮아. 동백궁 호위도 배로 늘어났고….”

    “정말 이만하시길 다행이지, 큰일 날 뻔하셨사옵니다.”

    같은 말을 벌써 몇 번이나 서로 주고받았는지 모른다. 죄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 즐겁게 받아주고 있다.

    “마마, 정말… 진짜 괜찮으시옵니까?”

    “그렇대도.”

    또 같은 말이 반복될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마루를 밟으며 우당탕 소리가 크게 났다. 이내 방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양원!”

    “중전마마.”

    “일어나지 말아라.”

    어느새 다가온 중전은 반쯤 몸을 일으켰던 두화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도로 앉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손을 꼭 잡아 얼굴 하나하나 세세히 살펴본 중전의 눈이 붉어진다.

    “괜찮사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양원이 송구할 게 무엇이야. 아, 어의의 진맥은 받았더냐?”

    “아직….”

    중전은 고개를 돌려 맹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는 어찌 윗전을 모시매 이리 허술한 게냐? 당장 어의부터 불러오거라!”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눈치를 보며 나가는 맹지의 모습을 보니, 두화는 괜히 미안해진다.

    “많이 놀랐지?”

    “조금… 그랬나이다.”

    “이제 괜찮을 것이다. 전하께서 모두 싹 잡아들여 모가지를 확! 아, 방금 들은 것은 못 들은 것으로 하고.”

    가끔 흥분하면 구수한 입담이 툭 튀어나오는 것을 알기에, 두화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흠, 흠. 아무튼 불손한 자들은 모두 잡아들인다고 하였으니, 이젠 마음을 편히 가져도 될 것이니라.”

    “예.”

    한참 그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또 방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양원은 괜찮더냐?”

    숨을 헐떡거리며, 방으로 들어서는 대비를 본 두 사람은 당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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