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92)화 (92/96)
  • 92. 포박하라!

    “예. 고뿔이 그 정도로 심하다면 분명 의원을 찾았겠지요. 하여 근방 크고 작은 의원은 모두 뒤졌습니다.”

    “…!”

    “두 군데!”

    씩 입꼬리를 늘린 사림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설명했다.

    “도성에서 내로라하는 의원에서 백 장군을 진맥하긴 했다고 하옵니다. 본인 말로는 크게 이상이 없는 듯싶은데, 아프다고 증상을 말하니 워낙 유명한 분이라 그냥 약을 처방해줬다고 합니다.”

    “이상이 없는데 증상을 말하더라?”

    “예. 그리고 다른 작은 의원에서는….”

    고개를 내린 사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백 장군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수상하였사옵니다.”

    “무엇이냐?”

    “며칠 전 자는데, 갑자기 얼굴을 가린 귀족 차림새의 사내가 검으로 겁박하며 어디론가 끌고 가더랍니다. 오가는 도중 눈을 가려 어느 댁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고요.”

    “음.”

    “도착하여 본 곳은 보통 기와집 구조의 방이라 하는데, 그곳에서 회임한 여인을 봤답니다.”

    “…!”

    벌떡 일어선 자한의 호흡이 빨라졌다.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본인이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해주어 무사할 거랍니다.”

    “양원인 것 같더냐?”

    “하여 소신이 여인에 관해 물었더니, 얼굴이 가려져 있어, 보진 못하였다 합니다.”

    “하아!”

    “한데 집에 비해, 걸친 속치마 천이 예사 천이 아닌 듯 보였답니다. 자신이 본 귀족 여인들의 의복과는 좀 다른 천이라 하였나이다. 고운 비단이긴 한데, 왕족이나 쓸법한 봉황의 수가 놓여져 있다고 하였나이다.”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자한이 머리를 짚으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찾았다!’

    분명 두화다. 틀림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의원 말로는 그렇게 처방해주고 도로 의원댁으로 갔다는데, 눈을 가린 천을 푸니, 금덩이가 든 주머니를 놓고 사라졌답니다. 하옵고 그자가 경고하길, 절대 오늘의 일을 발설치 말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답니다.”

    “…금덩이를 주고 겁박을 했다. 한데 죽이진 않았고?”

    “소인은 아마도 그자가 백장군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하.”

    “사림아!”

    두 눈 감고 있던 자한의 목소리가 어딘지 차갑게 내리깔렸다.

    “예, 저하.”

    “백 장군의 가택으로 가야겠구나.”

    “소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자한이 서서히 눈을 떴다.

    냉철함으로 번뜩이는 눈빛으로 일어섰다.

    “당장 아바마마부터 뵈어야겠다.”

    ***

    꼼짝없이 갇혀 지내던 두화는 야밤엔 도헌의 감시가 소홀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트기 전엔 절대 다시 오지 않기에, 오늘 밤 이곳을 탈출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문고리를 열어본들 역시나 밖에서 잠겨 있다.

    “오늘은 반드시 나갈 거야.”

    소매를 반쯤 걷어붙이고는 창으로 다가갔다.

    수수한 집과 달리 아름다운 완자 살 무늬의 창은 드문드문 장식된 꽃살이 달빛에 아름답게 그 무늬가 도드라져 보였다.

    이것 역시 밖에서 잠겼지만, 어쩔 수 없다. 천으로 감싼 손으로 그 중앙을 냅다 쳤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부서진 창살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보통은 안쪽에 잠금장치를 해 놓는데, 전날 도헌이 창밖에 잠금장치를 설치하고 잠가버렸다.

    ‘아무리 가둬 보세요. 그럴수록 난 더 이곳에서 나가야겠으니!’

    고정된 작은 쇠못 조각을 손으로 톡톡 쳐 밀어냈다.

    드디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자, 장군님!”

    열린 창문 사이로 달빛과 함께 도헌이 서 있었다.

    “이젠 답답하여도 할 수 없구나. 내일은 창을 온전히 다 막아야겠구나.”

    그가 왜 저기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경악했다.

    분명히 이 시간엔 오지 않기에, 실행한 것인데!

    제가 이리 행동할 때까지 밖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무서운 분이구나.’

    저에 대한 도헌의 집착에 두화는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창 너머에서 여전히 저를 빤히 바라보던 도헌이 창을 닫았다. 이내 단단한 뭔가를 창에 고정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장군님. 이러지 마세요, 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에 고정하는 것을 마무리 한 그가 움직인다. 그림자가 창을 벗어났다. 그리고 점점 발걸음 소리가 방문에 가까워진다.

    두화는 왠지 두려웠다.

    순간 저도 모르게 문 쪽으로 다가가 고리를 꼭 잡아 쥐었다.

    ‘… 아닐 거야. 들어오지 마!’

    생각은 그리하여도 불안한 마음에 몸은 달리 움직였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적막만 흐르는데, 마루를 딛고 올라오는 소리에 두화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내 덜컹대며 잠긴 문고리가 풀렸다.

    두화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세요!”

    “열거라.”

    “가라고요!”

    “이제 더는 못 견디겠구나. 어찌하여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느냐? 아껴주면 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여겼다. 한데도 넌 여전히 빌어먹을 세자만… 고집 그만 부리고 열거라.”

    이 문이 열리면 어찌 될지 모르기에, 두화는 문고리를 꽉 잡고 버텼다. 새하얗게 된 손이 부들거린다.

    하나, 사내의 힘을 어찌 감당할까.

    이내 활짝 열리는 반동에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다쳤더냐?”

    도헌은 문을 닫고 천천히 다가왔다.

    ***

    한편 그 시각 자한은 부왕의 윤허를 받아, 관군을 이끌고 영의정의 가택으로 향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집 주위를 포위하라!”

    “예, 저하!”

    관군이 신속하게 빠르게 영의정의 가택을 에워싸는 동안 사림이 담을 넘어, 육중한 대문을 열었다. 자한과 관군이 순식간에 내부로 들이닥쳤다.

    한밤중 난데없는 소란스러움에, 영의정 백기세가 인상을 쓰고 밖으로 나와 호통을 쳤다.

    “무슨 일이냐?”

    “야밤에 이리 뵙게 되어 나도 썩 기분은 좋지 못하오, 영상 대감.”

    “아, 아니. 세자 저하께서 이 시간에 소신의 집엔 어인 일이시옵니까? 또 저 병사들은 무엇입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백기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 귀한 사람이 예 있다고 하여 찾으러 왔소이다. 대감.”

    “예? 귀한 사람이라니요?”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한은 손을 들어 명하였다.

    “샅샅이 뒤져라.”

    “예!”

    관군이 집 안을 수색하자 백기세는 당혹스러워 소리쳤다.

    “저하! 무슨 일인지는 말씀을 해주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어찌 소신의 집을 이리 함부로!”

    “나도 바라고 있소이다. 이 집에 내 여인이 없길 말이오.”

    “예? 하면 동백궁… 양원 마마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말이옵니까?”

    놀라는 영의정의 표정에 자한은 냉소를 지었다.

    “만약 양원이 이곳에 있다면 아바마마께서는 충신인 가문을 잃게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 아니겠소. 아니 그렇소이까?”

    “아, 아니 세자 저하. 소신은 당최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수색을 마친 관군들이 고하였다.

    “안채까지 싹 보았지만 없사옵니다.”

    그 소리에 자한의 미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좁혀들었다.

    “대감, 저택의 구조가 어찌 됩니까?”

    차가운 세자의 눈빛에 백기세는 움찔하였다.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곳간과 아랫것들이 쓰는 방과 뒤로 돌아가면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자한은 병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찾아본 곳입니다, 저하.”

    “그곳 말고는 없소이까?”

    오래전 부친이 즐겨 찾던 별채 같은 곳이 있긴 한데, 본채와 꽤 동떨어져 있는 곳이다. 한데 세자가 왜 제집에서 후궁을 찾는 것이지?

    백기세는 빠르게 생각했다.

    ‘설마… 도헌, 이놈이!’

    이번에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아들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술이 는 것 빼고는 크게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영상 대감, 또 없느냐 물었소이다.”

    “아, 예… 없습니다.”

    뭔가 좀 전보다 숨기는 듯한 느낌을 받은 자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림아, 네가 가 보거라.”

    “예.”

    말을 탄 사림이 가택 안을 휘젓고 다녔다.

    “저하, 어찌 제집에서 양원 마마를 찾는지 소신이 감히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저도 궁금합니다. 목숨을 몇 개나 가지고 있으면, 감히 세자의 후궁을 납치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세자의 어이없는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격양되어 소리쳤다.

    “나, 납치라니요!”

    “그것뿐입니까? 이건 아직 아바마마께도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지만, 전쟁을 핑계로 감히 내 등에 칼을 몇 번이나 들이댄 불온한 놈이 이 댁의 아드님이십니다, 영상 대감.”

    백기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세자의 후궁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세자의 목을 노렸다니!

    ‘도헌아… 네 어쩌자고….’

    망연자실하며 바닥에서 일어날 줄 모르던 백기세 뒤로 사림이 매우 빠르게 다가왔다.

    “워, 워.”

    “어찌 되었느냐? 숨겨둘 공간은 더 없더냐?”

    “있습니다.”

    자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예. 사당 뒤로 자그마한 대숲이 있는데 그 너머에 작은 기와집이 있습니다. 불빛이 있는 걸 보고 바로 달려온 것이옵니다.”

    “가자!”

    그대로 내달리는 세자의 뒷모습을 본 백기세는 절망감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

    쓰러진 두화를 일으키려 하자, 두화는 그 손을 매몰차게 쳐내며 일어섰다.

    “이제 널 마냥 바라볼 자신이 없다. 더는 세자가 널 탐하지 못하게 내 여인이 되어 줘. 두화야.”

    점점 가까워지는 도헌을 피하고 싶어도 좁은 방에서는 더는 피할 곳도 없다.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두화는 보통의 여인과는 달랐다.

    도헌의 몸짓을 가볍게 뿌리치곤 그의 팔을 꺾어버렸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모습에 당황했고, 그의 찌푸린 표정에 미안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를 내버려 둔 채 나가려는 두화를 향해, 도헌이 절규하듯 외쳤다.

    “내게 와 제발….”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다 해줄 것이다. 비록 앞으로 숨어 살아야겠지만, 세자와는 다르게 내 곁엔 너만 두고 세상 귀하게 여기며 살 것이다. 하니 두화야! 나와 떠나자 제발, 응?”

    차라리 그가 호색한이어서 유희나 즐기려 그랬다면 미안한 마음이 덜 들 터인데. 저를 향한 그의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미안함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나간다면 이제부턴!”

    “…!”

    “너의 모든 것을 강제로라도 빼앗을 것이다. 마음이 우선이라 생각하였지만, 이젠 널 빼앗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할 것이란 말이다.”

    원망과 집착의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가 다가오던 그 순간, 작은 문이 활짝 열리며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세자, 자한이 검을 들고 서슬 퍼런 눈빛으로 들어섰다.

    “내 여인을 갖기 위해 지금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고 했나, 백도헌?”

    “저하!”

    그를 보자 두화는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좀 전까지 느꼈던 두려움과 막막함을 어찌 견뎌냈다 싶을 정도로, 그를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하였다.

    “괜찮은 것이냐?”

    잡아 품에 안아,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내렸다.

    “…저하가 오셨으니 괜찮아요, 이제.”

    두화의 말에 자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내 시선을 돌린 냉철하고 살기가 감도는 눈빛이 도헌을 응시했다.

    “내가 본 모든 것에 해명해야 할 것이네.”

    “…”

    “여봐라, 이자를 포박하라.”

    명을 내린 자한은 두화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털옷을 벗어 두화의 등에 걸쳐 주었다.

    “정녕 괜찮은 것이냐?”

    “예.”

    “정말?”

    “안 괜찮아도 저하가 오셨으니 이제 안심이에요.”

    그대로 두화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내가 너 때문에 10년은 늙은 것 같다.”

    “저하.”

    “무탈하여 고맙다.”

    두화를 안고 있는 세자를 보며 끌려가는 도헌은 분하여 이를 갈았다.

    철저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다.

    제 얼굴을 본 복면인조차 죽였으니, 찾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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