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90)화 (90/96)
  • 90. 설마!

    조소를 짓는 세자의 모습은 더없이 소름 끼쳤다.

    “…!”

    “네놈은 내 묻는 말에 얌전히 고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몸이 조금은 덜 고되었을 텐데 말이다.”

    말을 하면서도 자한은 고신 기구를 고르듯 기구 위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게 마음에 드는군.”

    검과 비슷하지만, 좀 더 짧은 날의 양면은 삐죽삐죽 튀어나와 기괴했다.

    “이, 이봐. 아니, 저하! 이러면 후궁이 죽는다니까? 배 속 아이는 생각 안 하는가, 사위?”

    설변도의 얼굴까지 바짝 다가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속삭였다.

    “거참. 아까부터 거슬리네.”

    “…!”

    “죄인의 몸으로 누구보고 자꾸 사위래?”

    “…저, 저하!”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귀족 체면이 있지. 품위는 끝까지 지켜야지, 안 그래?”

    세자의 표정으로 봐서는 거래는커녕 뭣도 안 먹힐 얼굴이다.

    상대를 압도하는 세자의 눈빛은, 지독하고 냉철했다. 그 눈빛에 내내 꼿꼿하던 설변도의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하면 제 여식과 성라국이든 어디든 숨어 살겠습니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고, 네놈이 저지른 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난 지금 네놈이 저지른 일 중, 나의 여인이 어디 있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모, 모릅니다.”

    “그래?”

    꿈쩍하지 않는 세자의 표정에 설변도는 자포자기한 듯 마지막 수를 썼다.

    “나와 내 여식이 풀려야만 저하의 후궁도 풀려날 것입니다. 하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죽어 나가면 그때는 저하의 후궁도 죽는 것만 아십시오.”

    “…!”

    언짢은 듯 눈썹을 씰룩대던 자한은 이내 피식 조소를 지었다.

    “그럼, 죽이지만 않으면 되겠군.”

    “그게 무슨….”

    “이미 수색은 시작되었다. 인방이든, 개방이든 나아가 중전의 사가에서까지 사람을 풀어 나의 여인을 찾고 있지. 시간과의 싸움이기에 혹 네놈이 연루되었을까 싶어 왔더니 역시였어.”

    “하아.”

    역시 저를 떠본 것이다.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만으로도 그 사람을 다 안다 생각했다. 하여 그걸 이용해 제 사람으로 끌어들이고 부를 축적했건만, 세자에게만큼은 통하지 않는다니!

    자한은 들고 있던 고신 기구를 병사에게 넘겼다.

    “모든 것을 실토할 때까지 고신을 멈추지 말아라.”

    “예.”

    “아, 어의를 보내줄 터이니, 죽이지는 말고.”

    “명 받잡겠나이다.”

    그대로 세자가 나가자 설변도는 낙심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

    “맥은 이상이 없사온데… 몸이 많이 불편하시옵니까?”

    “좀 그렇네. 어지럽고 두통이 일기도하고… 또, 으슬으슬하고….”

    없는 증상을 거짓으로 말하려니 쉬운 일이 아니다.

    살인귀라 하는 장군을 직접 진맥하는 의원은 그저 도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지어 드릴 터이니 며칠 푹 쉬시면 괜찮으실 것입니다.”

    “고맙네.”

    고뿔에 걸려 입궐하지 못한다고 대장군에게 서신까지 보내고, 실제 의원까지 불러와 진맥을 받았다. 제가 집 안에만 있었다는 사실을 만들기 위해, 간간이 본채에도 모습을 비추며 만일의 사태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렇게 시간을 번 도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두화의 곁에서 이틀 밤낮을 꼬박 새웠다. 미지근한 물을 떠다 손수 얼굴과 손을 닦아 주고, 수시로 식은땀에 젖은 이불과 베갯잇을 제 방의 것과 바꿔 주었다.

    그럴 때마다 하인들은 정말 도헌이 몸살이라도 앓는 것으로 오인하였다.

    혹여 낮에 별채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하인이든 누구든 찾아올까 싶어, 낮 시간대에는 화로에 숯을 담아 방안에 놓고, 커다란 돌을 불에 달궈 방 구석구석에 놓아 따뜻한 기온을 유지했다.

    “정신을 차려야 약도 제대로 먹을 터인데 말이다.”

    이틀 동안 도헌은 두화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별수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저로 떠, 입에 넣으면 도로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하여 자신이 직접 약을 입에 물어 입으로 전해주었다. 아주 조금씩 두화가 삼키게끔 건네주어 약을 다 먹을 때까지 반복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식은땀도 나지 않고, 안색도 복숭앗빛으로 돌아왔다.

    한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저하.”

    “두화야? 정신이 드느냐?”

    작은 손을 잡아 두화를 애처롭게 불렀다. 하지만 온전히 의식을 찾지 못한 그녀는 세자만 찾는다.

    “…저하.”

    “네 곁엔 내가 있는데, 넌 누굴 찾는 것이냐?”

    앓는 듯 신음을 흘리던 두화는 이내 또 정신을 잃은 것인지, 조용해졌다.

    도헌은 잡고 있던 손을 입가로 가져와 조심스레 입맞춤했다. 한참을 그리 입술을 떼어내기 힘들던 도헌은 자칫 바스러질까 조심하여 두화를 안았다.

    “눈만 떠보거라, 제발. 네 원하는 건 뭐든 들어 줄 테니.”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도헌의 마음은 애끓는 마음에 덧입혀져 두화를 더욱 소중하게 안았다.

    그런 도헌의 간절한 마음에도 두화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궁으로 보내야 하나?’

    제 욕심에 이러다 두화가 잘못될까 봐 걱정하면서도, 그리하면 두 번 다시 두화와 이리 있지 못할 것이란 걱정에 고개를 내저은 도헌은 입에 약을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틀 동안 그래왔듯 다문 입술을 조심스레 벌리고 입술을 맞물었다.

    조금씩 흘려보내는데….

    “으음.”

    이번엔 정말 의식이 돌아오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두화가 탁한 신음을 흘렸다.

    입술을 맞댄 채 두 눈이 동그래진 도헌이 가만히 두화를 내려다봤다.

    천천히 두화가 눈을 떴다.

    얼굴을 가리는 갑갑함과 입술에 닿은 감촉에, 막 깨어났어도 불편함 감에 몇 번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 흐릿하게 보이던 것이 점점 선명해짐에 두화는 흠칫 놀라 두 팔로 밀어냈다.

    “저, 저리 가세요!”

    약이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훑은 도헌이 씁쓸한 얼굴로 몸을 떨어뜨렸다.

    “정신이 드느냐?”

    묻는 말에도 두화는 자신의 앞섶을 꼭 쥔 채 벽 쪽으로 기어가 도헌을 경계했다.

    “두화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긴 어디고요?”

    “자객으로부터 널 구해냈다. 이제 안심하거라.”

    “…!”

    그제야 드문드문 위험했던 순간이 떠오르는지 두화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래, 죽을 뻔했었어. 한데 여긴?’

    “어찌하여 궁이 아닙니까?”

    낯선 공간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린 두화가 쌀쌀맞게 물었다.

    “무척 위험한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누구도 더는 널 해하지 못해. 내가 그리 안 둘 것이니, 안심하거라.”

    그런 그의 말에도 두화는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궁으로 갈 상황이 아니었다. 의원이 그러더구나. 조금만 늦었더라면 배 속 아이도 너도 둘 다 무사치 못했을 거라고 말이다.”

    “예?”

    천천히 고개를 내린 두화는 볼록 나온 배를 손으로 감쌌다. 하마터면 소중한 아이를 잃을 뻔하였다.

    ‘한데 좀 전의 일은….’

    경계하며 도헌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도헌이 조금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두화가 손을 내밀어 더는 오지 못하게 저지했다.

    “오지 마셔요!”

    “알았다. 그리 흥분하지 말아라. 몸에 좋지 않으니.”

    “…그냥 그곳에서 말씀하셔요.”

    “그래. 좀 전의 일은 오해니라.”

    “…!”

    분명 도헌의 입술이 제 입술 위로 꼭 붙어 있는 것을 느꼈다.

    아니 확실히 닿아 있었다.

    한데 뭐가 오해가 아니라는 거야!

    ‘장군님이 이런 파렴치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부들거리는 몸을 드러내지 않으려, 호흡마저 흩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정말 오해니라. 아이와 널 살리려면 약을 먹여야 했는데, 넌 정신을 잃고 깨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점점 얼굴은 파리해지니 나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수저 있잖아요, 그걸로 먹이면 되지!”

    “해 봤다. 입술에 넣는 족족 삼키지 못하고 흘리더구나.”

    “…”

    “하다못해 천에 약을 묻혀 입안에 조금씩 흘려 넣어도 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널 살리기 위해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도헌의 말이 사실이라면 크나큰 오해를 한 것이다. 하나, 엄연히 입술을 맞대고 있었으니 이 또한 입맞춤이 아닐까? 자한이 아닌 다른 사내와의 입맞춤이라 생각하니, 지아비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라. 난 오로지 널 살리기 위해 한 행동인지라 당당하다.”

    “…고맙습니다.”

    가만 생각하니 어찌 되었든 제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셈이다.

    이젠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혹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요?”

    “이틀 만에 깨어난 것이다.”

    “예? 이틀이요? 하아.”

    두화는 서둘러 일어나려다 침의 차림의 치마 끝자락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의복 상태를 확인했다. 부끄러움에 당황하여 도로 주저앉아 발끝에 닿은 이불을 겨우 잡아 끌어당겨 목까지 감쌌다.

    “아! 여인네 의복 좀 구해주셔요.”

    “아, 그… 그래. 내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 잠시만 있거라.”

    도헌이 작은 문을 나가고 나서야 두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구해주었다고는 하나 부끄러운 차림새로 민망한 상황까지 겪어야 했으니, 그가 편하게 만은 보이지 않았다.

    ‘저하가 걱정하시겠지? 빨리 돌아가야 해.’

    반 시진쯤 지나 양손에 보따리를 들고 도헌이 돌아왔다.

    “급하게 구한 것이라 변변찮다. 추후 너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맞춰주마.”

    갈아입으라며 도헌은 밖으로 나갔다.

    “…?”

    ‘방금 무슨 말이야?’

    어찌하여 나중에 제게 의복을 더 구해준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보따리를 풀었다. 색색의 저고리며 치마가 족히 20벌은 더 되어 보였다.

    “시전의 옷이란 옷은 다 쓸어오신 것 같네.”

    마치 폭신거리는 눈과 같은 목련 빛깔 저고리와 옅은 담묵색 치마를 몸에 걸쳤다. 머리도 매만지려니 꽂고 있었던 비녀가 사라졌다.

    ‘그곳에서 빠졌나 보네.’

    하는 수 없이 저고리 중 하나의 고름을 떼어냈다. 대충이라도 땋아야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하나로 질끈 묶어버렸다.

    문을 열고 나서니 등 돌리고 있던 도헌이 몸을 돌려 쳐다본다.

    “장군님.”

    후궁으로서의 화려한 모습이 아닌 단아한 모습에 도헌은 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만 같았다.

    “…!”

    “장군님?”

    “아, 그래. 그런대로 괜찮구나.”

    “저….”

    마루 아래를 아무리 보아도 신을만한 신이 보이지 않는다. 난처한 눈빛으로 도헌을 바라봤다.

    “신이 없네요.”

    “신은 왜?”

    “예?”

    “신은 왜 찾느냐 말이다.”

    “그거야 당연히 신을 신어야 궁으로 돌아가죠. 짚신이라도 좋으니 하나만 빌려주시어요.”

    “…!”

    ‘나는 너와 함께 할 생각에 부풀어 있건만, 넌 돌아갈 생각만 하는구나.’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이 자못 매섭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여, 두화는 두 눈을 껌뻑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당장 구하기 힘들까요?”

    “…그래, 없다.”

    의복은 금세 구해왔으면서, 짚신 하나 구하기가 힘들다는 그의 말이 이상했다. 찰나 미간을 좁혔던 두화는 애써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숨도 구해주고 의복도 구해다 줬는데, 신 하나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장군을 탓할 수는 없다.

    “…괜찮아요. 예전 생각하며 그냥 가도 되니까요.”

    바닥으로 한발 내디디려 하자, 찰나 도헌이 자신의 발을 가져다 댔다.

    가까스로 그의 발등 위에서 발을 멈추었다.

    “바닥에 발이 닿을 뻔하였다.”

    어딘지 화가 난 목소리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하마터면 장군님의 발을 밟을 뻔했잖아요!”

    두화는 당혹스러워 냉큼 마루로 발을 끌어올렸다.

    “네 발이 더러운 바닥에 닿는 것을 어찌 보겠느냐?”

    그의 말에 왠지 거북함이 느껴져 두화는 저도 모르게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제가 괜찮아요, 장군님.”

    “나는 괜찮지 않다.”

    “장군님! 저는 속히 궁으로 돌아가야 해요.”

    도헌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두화를 바라봤다.

    복잡미묘한 그의 눈빛에 두화는 어딘지 이상함을 느꼈다. 화가 난듯하기도 하고, 뭔가 쓸쓸함이 감도는 이상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느린 듯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헌이 방문을 열었다.

    “날이 차구나. 들어가거라.”

    “…장군님, 전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우선 네 몸이 나아야 한다.”

    마치 벽창호랑 대화를 하는 기분이 이러할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함에 한숨만 터져 나왔다.

    “거동할 만하니, 이제 정말 괜찮아요.”

    “내가!”

    “…!”

    “…내가 괜찮지 않다.”

    윽박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 도헌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장군님!”

    더는 참지 못해 버럭 소리를 쳤다.

    “그리 흥분하면 배 속 아이에게 좋지 못해.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점점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

    두화는 순간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설마! 에이, 아니야. 내가 저하의 여인이고 회임한 것을 아는데… 아닐 거야.’

    눈빛이 바뀐 두화가 도헌을 향해 근엄하게 말하였다.

    “가만 보니, 내내 내게 하대를 하는구려. 백 장군!”

    “…!”

    “난 세자 저하의 후궁, 양원이네. 더는 무례를 범하지 말게.”

    차갑게 쏘아붙이는 두화의 낯선 모습에 도헌은 잠시 놀라지만,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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