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9)화 (89/96)
  • 89. 찾아라!

    기어들어 가는 랑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랑을 바라봤다.

    “무어냐? 말하라.”

    “저하, 소인을 벌하시옵소서.”

    바닥에 엎드려 고하는 랑의 뒷머리를 매섭게 내려다보는 자한이 낮게 윽박질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것이 인정 전에, 소피가 마려워 뒷간에 갔다가 마침 변도….”

    곁에 있던 성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랑을 내려다봤다.

    ‘미친놈, 제 똥 눈 걸 왜 하필 지금… 가만!’

    느낌이 싸한 성무가 버럭 소리쳤다.

    “야, 그럼, 얼마나 자리를 비웠던 거야?”

    “그게… 1각(약 15분) 정도?”

    화가 끓어오른 성무가 아랫입술을 꽉 물더니, 이내 랑의 엉덩이를 발로 차 버렸다.

    “급하면 날 깨우고 갔어야지!”

    “나도 그럴 줄 몰랐지. 소피만 마려웠는데… 하필 며칠 묵혔던 게 같이 나오는데, 어떻게 중간에 끊고 나오냐?”

    “미친!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두 사람의 옥신각신을 보던 자한이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둘 다 그만! 하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은 채 물었다.

    “그럼, 자리를 비운 시간은 그때뿐이더냐?”

    “…소신은 자리를 비운 적이 없고, 랑은.”

    랑은 눈치를 보며 중얼댔다.

    “정말 그때 외엔 비운 적이 없습니다, 저하. 정말이옵니다.”

    좀 전까지도 당혹스럽고 불안하던 자한의 눈빛은 점점 또렷해져, 분노와 냉기를 뿜어냈다.

    “좌익위는 들어라.”

    “예, 저하.”

    “당장 세자익위사를 동원해 양원의 흔적을 쫓아라. 분명 궁에 침입했던 자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니, 작은 실마리라도 놓치지 말아라. 부족하다면 인방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반드시 찾아라.”

    “예!”

    새벽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부왕께 듣고 반란군의 잔당이구나, 생각했다. 겨우 문지기만 죽여놓고 도망가려고, 궁에 잠입했을 리 없다고 생각은 했다.

    한데, 감히 두화를 납치하다니!

    “너희 둘은 지금 개방에 알리거라. 염치없지만 도움을 청해. 아무런 단서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개방과 인방의 도움뿐이다.”

    “명 받잡겠나이다, 저하!”

    랑과 성무는 즉시 궁을 나섰다.

    ***

    ‘이른 아침의 소동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웃는 네가 이 문 너머에 있었으면 좋겠구나. 두화야.’

    자한은 동백궁 문을 천천히 밀었다.

    끼이익.

    뻑뻑한 나무가 내는 소리가 무척 거슬린다.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툇마루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는 맹지가 보였다.

    문 열리는 소리에 맹지가 고개를 돌렸다.

    세자와 눈이 마주치자 멍하던 맹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뛰어와 바닥에 엎드려 읍소했다.

    “저하, 마마를… 우리 양원 마마를 찾아주시옵소서.”

    “…”

    “근자에 잘 드시지도 못했는데, 이 추운 날 겨우 침의 차림으로 어딜 가신 건지 모르겠나이다. 하늘로 솟으신 건지….”

    엉엉 울면서 애원한다.

    “양원이 근자에 먹는 것이 부실했더냐?”

    “예. 이제나저제나 저하 오실 때만 기다리시며, 많이 힘들어하셨나이다.”

    순간 가슴이 꽉 막혀온다.

    “…!”

    “전날에도 저하께서 늦은 밤이라도 오시지 않을까, 내내 기다리시다 주무신 줄만 알았는데….”

    하아!

    묵직한 탄식을 흘린 자한은 자신을 책망했다.

    자신도 동백궁에 하루라도 더 빨리 오고 싶었다. 하여 반란군을 문초하고 그들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잠도 줄여가며 애썼다.

    ‘잠시라도 들를 것을… 신경 쓰지 못한 내 잘못이로구나.’

    ‘내, 어쩌자고 익위사들을 물렸을까?’

    자신이 돌아왔다고, 반란군을 진압했다고 너무 안일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입안이 텁텁해진다.

    ‘이대로 널 찾지 못할까 봐 두렵구나.’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부산하게 누군가 뛰어 들어온다. 인기척에 자한도 맹지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원은 찾았더냐?”

    호통과 염려의 그 중간쯤 되는 격양된 목소리가 동백궁 앞뜰로 퍼졌다.

    “중전마마.”

    “세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니지요. 이 사람이 잘못 들은 게지요?”

    얼마나 빨리 왔는지 흐트러진 숨소리 하며, 다급하게 다가오는 한번 본 적 없는 중전의 모습에 자한은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반란군의 잔당과 관련이 있는 듯싶사옵니다.”

    “설변도 그자 짓입니까?”

    역정이 담긴 그 목소리에 자한은 고개를 숙여 답을 대신했다.

    “아직은 명확한 것은 없사옵니다. 다만, 양원을 찾기 위해 세자익위사를 보냈나이다.”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까?”

    “그것도… 모르옵니다.”

    “허허, 이를 어찌합니까? 회임한 몸으로 얼마나 놀라고 두려울꼬. 이대로는 아니 됩니다.”

    다급하게 몸을 돌리는 중전이다.

    “어찌하려고 하시옵니까?”

    “어찌하긴요! 전하께 아뢰어 금군을 동원해서라도 속히 찾아야지요. 그래도 부족하다면 내 사가에 알려 궁 밖을, 아니 화월국을 이를 잡듯 뒤지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염려하는 표정에 자한은 문득 궁금했다.

    중전이 막 중문을 나가려는데 자한이 물었다.

    “중전마마.”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중전이 멈칫 그 자리에 섰다.

    “…!”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세자.”

    “제 여인을 어찌 그리 위하십니까?”

    늘 제게 날이 섰던 세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세자의 여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예?”

    “두화라서… 그 아이니까요.”

    말끝을 흐리던 중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왕실의 일원이고, 무엇보다… 우린 마음을 나눈 가족이니까요.”

    “…!”

    아무 말도 못 하는 자한을 뒤로하고 중전은 마음이 급한 듯 서둘러 걸음을 옮기었다.

    뭔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자한은 정신이 멍했다.

    ‘내가 그간 오해를 한 것인가?’

    중전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던 자한도 이내 동백궁을 벗어났다.

    “옥사로 갈 것이니 따르라.”

    ***

    축축함과 퀴퀴한 냄새가 뒤섞인 역겨움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고스란히 느껴졌다. 벌써 이레는 족히 지난 듯싶다.

    “이대로 나만 죽을 수는 없어. 그년도 가질 수 있는 저하의 마음을 난 왜 못 갖는 건데? 그것만 없었더라면 내가 이런 시궁창 같은 곳에 있을 리 없잖아.”

    기품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핼쑥해진 낯빛에 푹 꺼진 두 눈, 거기에 너저분하게 뒤엉킨 머리카락은 도저히 세자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가 모신 웃전이라고, 곁으로 다가간 초아가 아침나절에 병사가 주고 간 차디찬 주먹밥을 내밀었다.

    “그만하셔요, 마노라. 자, 이거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

    “네 이년!”

    돌덩이처럼 굳은 주먹밥을 내던진 련하가 초아의 뺨을 올려붙였다.

    “으읏, 왜 이러시옵니까? 마노라.”

    제 먹을 것까지 나눠주었건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억울하여 눈물이 절로 난다.

    “내가 저딴 더러운 것이나 먹을 사람이더냐? 어디 감히 쥐새끼도 먹지 않을 저딴 것을 내게 올리느냐?”

    억울하고 분해서 초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마노라, 이제 찬밥, 더운밥 가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저것이라도 드셔야 버틸 수 있사옵니다.”

    “시끄럽다. 이제 곧 저하께서 날 풀어주실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어디 신분도 천한 그딴 것 때문에 날 버리실 분이 아니다.”

    흐리멍덩한 눈빛이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다.

    초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련하의 곁으로 기어갔다.

    “마노라, 소인이 누구입니까?”

    “네년이 지금 내가 너도 못 알아볼까 싶어 묻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다만….”

    “시끄럽다.”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련하에게서 물러나 벽 쪽으로 가 기대앉았다.

    그때 옥사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한두 명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이내 불안한 듯 눈을 굴리던 초아가 몸을 움찔 옹송그렸다.

    ‘또 시작하나 봐. 무서워, 살고 싶어.’

    혹독한 고신을 겪어봤던지라 옥사로 내려오는 발소리가 반가운 것이 아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어지럽게 들리던 발걸음은 순간 멈추었다.

    “오늘은 내 직접 고신할 것이다. 죄인을 끌어내거라!”

    “예, 저하.”

    혼자 중얼대던 련하는 세자의 목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는 나무 창살에 매달렸다.

    “세자 저하? 저하시옵니까?”

    외쳐본들 제 말에 대꾸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부친의 고함과 옥사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전부였다.

    “저하, 거기 계시옵니까? 저, 여기 있사옵니다.”

    초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런 세자빈을 바라봤다. 정말 뻔뻔한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점점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 둘 다인지 모르겠다.

    이내 들려오는 부친의 비명에 나무 창살에 매달려있던 련하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저하가 아닌가 봐. 초아야, 아버지가 많이 아프신가, 왜 저리 소리를 지르시지?”

    덜덜 떨면서 뒷걸음질 치던 련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초아는 그런 윗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미쳐가시는구나. 하아.’

    한편 언제인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끈적한 피가 뒤엉긴 의자에 앉은 설변도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내게 이럴 수는 없다!”

    “다시 한번 묻지. 잔당이 있더냐?”

    퉤!

    눈을 부라린 설변도가 자한을 향해 피와 가래가 섞인 것을 뱉어냈다. 하나 자한은 그것을 피하며, 설변도의 가슴을 발로 차 버렸다.

    “감히 되먹지 못하게 뉘에게 더러운 것을 또 뱉더냐?”

    자한은 고신 기구를 하나 들어, 설변도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으악!”

    옥사에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말할 때까지 오늘은 나와 보낼 것이니라. 잔당이 있느냐?”

    “없다. 다 이곳에 있지 않더냐?”

    “그래? 하면 궁에 잠입했던 자객은 누굴까?”

    “자객이라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설변도의 표정을 유심히 보던 자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잡았군. 네놈이 자객의 배후더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자객이 병사 하나를 죽이고, 나의 후궁을 납치했다.”

    “뭐라, 동백궁을….”

    ‘호판이 일은 제대로 했군. 하면 이제 살 수 있어.’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에 조금 전까지도 고통스럽던 고신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내 생각엔 네놈이 배후 같단 말이지.”

    “생사람 잡지 마시게, 사위.”

    “그럼, 누가 배후더냐?”

    “그건 나도 알 길이 없지 않겠는가? 이곳에 있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아니 그래?”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더없이 차갑게 바뀐 자한의 눈빛에 설변도는 순간 움찔했다.

    “좋아. 그럼, 어디 버텨봐. 여봐라, 이놈의 손발톱을 모조리 뽑고, 그래도 실토하지 않는다면 이까지 모조리 뽑아내 거라.”

    “예, 저하.”

    그대로 자한이 몸을 일으키자 설변도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반병신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이까지 뽑힐 수는 없다. 본디 상대가 애가 탈 때, 거래해야 성공하는 것을.

    ‘할 수 없지. 한 번 시도는 해봐야 알 일이다.’

    “자, 잠깐!”

    돌아서 나가려던 자한이 고개를 돌이켰다.

    “후궁을 살리고 싶지 않은가, 사위?”

    “…!”

    그냥 한번 떠본 것이건만, 정녕 배후가 너였더냐. 설변도!

    분노가 치미는 것을 애써 누른 자한의 표정은 그저 담담해 보일 정도다.

    그런 자한의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음에,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회임까지 하였는데 살려야지, 더 늦으면 죽을 수도… 윽!”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 자한은 순간 설변도의 목을 움켜잡았다.

    “어디 있느냐?”

    목을 쥔 손아귀 힘이 점점 세어진다.

    “억, 내가 쉬이 말할 것 같으냐? 나도 손해 보는 장사는 할 수 없지 않으냐?”

    “…!”

    한참을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풀렸다.

    그제야 설변도는 내심 안도했다.

    ‘그래, 그리 아끼는 후궁이니 반응을 보일 줄, 내 알았지. 암.’

    하나, 그것은 설변도의 착각이었다.

    손을 뗀 자한이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누가 네놈보고 흥정하자고 하였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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