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8)화 (88/96)
  • 88. 사라진 두화

    “장군님?”

    “…마마!”

    예상치 못한 얇은 속곳 차림의 두화를 본 도헌은 놀라 검을 내던지고 다가갔다.

    “괜찮으시옵니까?”

    두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왜 제가 이곳에 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후원에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은 터라….”

    “이 추위에 이러고 계셨습니까?”

    속상하고 화가 난 도헌의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좀 전까진 꽤 추웠는데, 지금은 좀 덜… 으읏.”

    배를 움켜쥔 두화가 식은땀을 흘린다.

    “어찌 이러십니까? 어디가 미령하신 겁니까?”

    “배가… 배가… 아파.”

    두화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마마, 양원 마마.”

    도헌이 그녀의 볼을 가볍게 두드려 보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도헌은 냉큼 자신의 겉옷을 벗어 두화를 감쌌다.

    “두화야, 정신 차려보아라. 두화야!”

    두화를 내려다보며 도헌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잠시만 버텨라, 잠시만.’

    황급히 두화를 안아 들었다.

    다급하게 산에서 내려가면서도 두화의 상태를 확인했다.

    서둘러 궁으로 향하던 도헌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려놓으려 하던 마음에 두화가 날아들었다.

    그것도 우연히.

    ‘어차피 궁에선 지금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꼭꼭 숨겨놔도 되지 않을까?’

    만약 궁에서 두화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면 벌써 발칵 뒤집혔겠지. 하나, 거리는 너무도 조용했다.

    도헌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내 눈에 띈 이상… 더는 못 보내겠구나.’

    이내 발길을 돌려 가택으로 향했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온 도헌은 별채 뒤편에 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초가집으로 빠르게 향했다. 본채와 제법 떨어져 아랫것들 눈에도 띄지 않는 곳이다.

    예전, 증조부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냉기가 도는 방이지만 두화를 숨기기엔 이만한 곳도 없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두화를 내려놓은 도헌은 제 방으로 가 두툼한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리를 펴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온돌은 금세 뜨뜻해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두화의 안색이 좋지 않다.

    “어찌 이리 땀을 흘리느냐? 안색은 또 왜 이리 파리하고….”

    심상치 않은 두화의 상태에, 고민하던 도헌은 조용히 마을로 나갔다.

    캄캄한 초가집의 문을 조용히 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사내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아이, 참. 뭐야?”

    “일어나라.”

    눈을 뜬 의원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사내 때문에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랐다.

    “뉘, 뉘시오?”

    “그건 알 필요 없고, 환자를 치료해 줘야겠다.”

    “지금 말이요?”

    “환자는 회임한 여인이다. 빨리 준비하거라.”

    하지만 의원은 무턱대고 따라갈 수가 없었다. 눈앞의 사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은밀하게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어딘지 제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았다.

    마치 의원의 생각을 읽은 듯 도헌은 검을 겨누었다.

    “아, 알겠습니다. 갑니다, 가요.”

    침과 회임한 여인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약재를 챙겼다.

    도헌은 초가집을 나서려는 의원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어찌 이러십니까, 나리? 앞이 보여야 서둘러 갈 것 아닙니까?”

    “길은 내가 인도할 테니 자넨 따르기만 하면 되네. 모든 것이 자넬 살리려는 것이니 조금 불편해도 따르게.”

    “…알겠습니다.”

    의원을 이끌어 겨우 집에 도착한 도헌은 눈을 가렸던 천을 풀어주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도 사내의 얼굴처럼 가리개로 가려져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구먼. 내, 이곳을 벗어나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원으로서 환자를 앞에 두고 모른 척할 순 없지.’

    깔끔한 작은 기와집이긴 하나, 대감댁 기와집도 아닌 이런 곳에 봉황무늬가 놓인 소매를 본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두화의 맥을 짚었다.

    잠시 후 의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그러는가?”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 맥이 혼탁하고 어지럽습니까요?”

    “…안 좋은 것인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배 속 아이는 물론 임부도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일단 소인이 맥을 안정시키는 침을 놔 드릴 것이고, 약재도 놓고 갈 터이니 꼬박꼬박 닷새는 먹어야 괜찮아질 겁니다.”

    괜찮다는 말에 비로소 안심된다.

    “그럼, 아이와 임부 다 괜찮은 것이냐?”

    “예, 예. 비록 이놈이 마을 의원이긴 하나 더한 환자도 살렸습니다. 하니, 믿으십시오. 아, 방은 이리 뜨거우면 아니 되고, 적당히 따뜻하고, 방 안 공기가 좀 촉촉해야 합니다. 음, 천에 물을 적셔 놓으시든지, 아니면 물그릇이라도 놓아두십시오.”

    “…고맙네.”

    의원은 닷새 치 약을 분류해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이내 눈을 가리고 한참을 도헌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이동했다. 이대로 자칫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다.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게. 그래야 자네가 살 것이야, 명심하게.”

    툭!

    묵직한 뭔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금세 주변이 고요해졌다.

    슬그머니 천을 끌어 내린 의원이 주위를 힐끗대며 경계했다.

    “갔나? 어휴, 죽다 살았구먼.”

    돈은 둘째치고 목숨이라도 살았으니 그것으로 위안 삼자, 싶어 방으로 발을 돌렸다. 한데 발끝에 뭔가가 채었다.

    “뭐야 이건?”

    주워 열어보니 작은 금덩이 몇 개가 떡하니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꿈이라도 꾼 것은 아닐까, 제 뺨을 꼬집고 때려봤다.

    “허허, 이게 무슨 일인지…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네! 그려.”

    ***

    멀리서 파루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하자, 밤새 궁 안팎을 지키던 병사들이 교대하러 오는 병사를 기다렸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병사들은 그날의 군호를 대고 교대하여 자리를 지켰다.

    번을 선 병사와 교대하기 위해, 서북쪽 중문 앞에 선 병사는 다른 날과 다른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여식 혼례 치르는 날이라고 빨리 와달라고 사정한 사람이 어째 문도 열어놓지도 않았어?”

    말을 건넸는데도 문 너머는 잠잠했다.

    “어이, 이봐? 이제 교대하자고.”

    이 정도 소리쳤으면 졸다가도, 깨어날 법도 하건만, 아무런 대꾸가 없다.

    문을 두들겨 보고 열라고 밀어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낮은 담에 매달려 몸을 반쯤 타고 올라선 병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악, 사… 사람이 죽었다!”

    병사의 비명에 순식간에 교대하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일로 날이 밝자마자, 수궁 대장이 편전으로 불려갔다.

    “어찌 된 일인지 소상히 말하거라.”

    왕의 하명에 수궁 대장은 진땀을 흘리며 고하였다.

    “마지막으로 서북쪽 중문 쪽을 확인하고 돌아갔던 병사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축시(새벽 1시~3시)엔 서로 군호까지 주고받았다 하옵니다.”

    “하면 그 이후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예, 그러한 것 같사옵니다. 교묘하게 병사들의 순찰하는 시간과 이동통로를 파악하고 궁에 잠입한 것 같사옵니다.”

    “대관절 궁 경비를 어찌했기에!”

    왕의 한숨에도 수궁 대장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최근 불미스러운 사태가 일어나 궁 안팎의 순찰을 강화하였었나이다. 다른 병사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면, 군호를 대고 의심을 사지 않았을 수도 있사옵니다.”

    “흠.”

    왕의 근심이 더해진다.

    수궁 대장은 입 안이 말랐다. 사실대로 고하되, 제발 그 불똥이 제게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칫 먼젓번 수궁 대장처럼 자신도 그리 벌을 받고 파직될 수도 있기에 불안했다.

    “이는 궁 내부의 사정을 잘 아는 자의 소행이 확실하옵니다. 그렇지 않고서 매일 바뀌는 군호와 순찰 도는 통로까지 알 수는 없사옵니다.”

    아직 잡히지 않은 반란군의 마지막 발악인가 싶다.

    왕은 더없이 근엄하게 명을 내렸다.

    “병조에 일러 세자와 함께 이번 일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하라 전하라. 분명 반란군의 잔당일 것이니, 옥에 갇힌 자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병조판서의 자리가 비었으니, 병조참판이 맡아 수궁 대장과 놈들을 반드시 잡으라 명하라.”

    “명 받잡겠나이다. 전하.”

    ***

    “마마, 기침하셨사옵니까?”

    부쩍 입이 짧아진 웃전이 걱정되어, 맹지는 일찍 일어나 고깃국과 간단한 찬을 만들어 기다렸다. 한데 일어났어도 벌써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안에서 기척이 없다.

    맹지는 방문을 조심스레 열며, 작은 소리로 여쭈었다.

    “마마, 뭐라도 자셔야지요? 어?”

    허리를 굽히던 맹지는 휑한 이부자리를 멀뚱히 바라봤다.

    “뭐야, 벌써 기침하신 거야? 기척도 없이 어딜 가신 거지?”

    침소에서 나온 맹지가 큰 소리로 두화를 찾기 시작했다.

    “마마, 양원 마마 어디 계시옵니까?”

    욕탕의 문을 열어봐도 없다.

    조금 전까지도 제가 있었던 부엌에도 다시 가봤다.

    역시나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꼍으로 갔다.

    “설마, 이리 날씨가 추운데 저길 들어가신 건 아니시겠지.”

    동백궁을 벌써 두 바퀴나 돌았지만, 두화를 찾지 못했다. 남은 곳이라고는 이곳 토굴과 후원뿐이다.

    결국 맹지는 몸을 낮춰 토굴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잠시 후 토굴에서 나온 맹지는 울먹거리며, 후원으로 달려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날도 찬데, 어디 가신 게야?”

    불안한 마음에 동백궁 입구로 달려갔다.

    문을 연 맹지는 성무의 팔에 매달려 흐느꼈다.

    “저기요, 흐흡.”

    “아, 아니. 어찌 우십니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며 안절부절못하는 손에 성무는 당황했다.

    “울지 마시고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셔야 저희가 알지 않겠습니까?”

    “…사라지셨습니다.”

    “예?”

    랑과 성무는 사라졌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 몰라 되물었다.

    “마마가… 사라지셨다고요! 어찌하면 좋습니까?”

    성무는 제 팔에 매달려 우는 맹지의 작은 어깨를 부자연스럽게 토닥거렸다.

    “욕탕은 보셨습니까?”

    “예. 그곳뿐 아니라 부엌도 전부 다… 동백궁을 두 바퀴나 돌았는데 아니 계십니다.”

    랑과 성무는 그제야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고 동시에 동백궁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봐, 랑!”

    침소 옆, 작은 후원에 선 성무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랑과 맹지가 달려왔다.

    “혹시 이거….”

    전에, 회임하였다고 중궁전에서 연 상궁이 직접 가져온 비단이다. 의복 만들기엔 너무 수수한 백색이지만, 봉황의 수가 은사로 짜여 있어, 빛을 받으면 더없이 기품이 느껴지는 비단이라 맹지는 단숨에 알아봤다.

    “이건… 우리 마마, 침의 조각입니다.”

    천 쪼가리를 든 맹지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아이고, 우리 마마….”

    랑과 성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동백궁 밖으로 전력 질주해 나갔다.

    ***

    세자궁까지 단숨에 달려온 랑과 성무는 가쁜 숨을 갈무리 할 틈도 없이, 보이는 궁인 하나를 잡고 물었다.

    “저하께 고해 주시오.”

    “무슨 일인지 모르오나, 저하께서는 반 시진 전에 편전에 가셨사옵니다.”

    “이리 이른 시각에 편전엔 무슨 일로?”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오나, 저하의 안색이 무척이나 어두우셨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랑과 성무는 방향을 바꿔 편전으로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숨이 차 턱까지 막힐 때쯤, 멀지 않은 곳에서 세자가 옥사로 빠르게 가고 있었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기에, 랑은 주변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뛰어가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저하, 세자 저하!”

    그리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무에 그리 바쁜지 세자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거기 서십시오, 세자 저하!”

    보다 못한 성무가 감히 소리쳤다. 마치 사자후와 같은 엄청난 성량을 뽑아냈다.

    그제야 서둘던 세자의 발걸음이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랑과 성무는 이제 됐다 싶어 냉큼 달려갔다.

    “가뜩이나 궁이 뒤숭숭하건만, 무슨 일들이기에 아침부터 소란이냐?”

    세자의 곁을 지키던 좌익위의 꾸지람도 두 사람 귀엔 들리지 않았다. 먼저 숨을 고른 성무가 예를 갖추고는 입을 뗐다.

    “세자 저하,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이냐? 별일 아니라면 추후 고하거라. 지금은 궁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그것부터 처리해야 한다.”

    “그 어떤 일보다도 시급한 일이옵니다.”

    입이 가볍고 촐싹대던 랑이 아닌 묵묵한 성무가 이리 말하니,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한은 고개를 끄덕여 성무의 발언을 허했다.

    “저하, 양원 마마께옵서 사라지셨나이다.”

    “…뭐라 하였느냐? 누가 사라져?”

    분명 들었는데도 잘못 들은 것 같아 재차 물었다.

    “송구하옵게도 동백궁 어디에도 아니 계시옵니다.”

    “찾아는 보고 하는 말이더냐?”

    회임한 몸으로 어딜 갔다고 이러는 건지….

    “예. 동백궁 어디에도 아니 계셨나이다. 하온데, 후원에서 양원 마마의 침의 조각이 발견되었나이다.”

    조금 전까지도 궁에 잠입했던 자객의 배후가 누군지 알아낼 생각에 자한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한데 두화는 사라졌고 그녀의 침의 조각만이 발견되었다는 말에 복잡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뭐라!”

    “저희가 동백궁을 호위하며 자리를 비운 적은 없었나이다.”

    성무의 말에 랑이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중얼댔다.

    “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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