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7)화 (87/96)
  • 87.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

    술잔 위에 그려진 두화의 웃는 얼굴이 순간 파동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

    고개를 돌린 도헌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사람을 벨 것처럼 살기가 가득했다.

    그의 팔에 매달리던 기생은 그 기세에 눌려 움직이지 못했다.

    “…지거라.”

    “예? 나리, 뭐라 하셨는지요? 이년 못 들었습니다.”

    조금 전 매섭게 보던 눈빛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기생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떨어지라 하였다!”

    버럭 호통과 함께 매몰차게 팔을 뿌리쳤다.

    그 반동에 기생은 벽으로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난폭한 그의 모습에 두려워, 기생은 앞섶을 움켜쥐며 겨우 말하였다.

    “어찌 이러십니까?”

    귀찮다.

    진한 분 냄새와 옥구슬 굴러가듯 사내를 홀리는 목소리, 전부 다 성가시다.

    “나가거라.”

    “하오나 이년은 오늘 밤, 나리의 시중을….”

    “필요 없다.”

    기생은 포기하지 않고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해사하게 웃으며 전 하나를 짚어 그에게 권하였다.

    “안주도 드시면서… 아악!”

    거나하게 차려진 술상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나가라 하였다!”

    하나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던 그는 또 채워진,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두려움에 떨던 기생은 그대로 기어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제야 고요해졌다.

    “허상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더 보여다오, 두화야.”

    애달픈 마음으로 술잔을 바라보건만, 그녀가 아닌 세자의 얼굴이 보인다. 그 얼굴은 마치 제게 이죽거리는 모양새다.

    “대체 왜!”

    벽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술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 가지신 분이 왜 하필… 그 아이입니까? 왜….”

    이미 두 병이나 마셔 취기가 오른 도헌은 쉬이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을 술 핑계로 드러냈다.

    “이러면 안 되지. 겨우 여인 하나에 살인귀라 불리는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꼴사납게.”

    쿡쿡거리는 그 웃음소리는 방문 너머로 새어 나갔다.

    오가는 이들 중 몇몇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이한 웃음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다.

    한참을 그리 미친 자처럼 웃던 도헌은 술병 하나를 들고 일어섰다. 얼근하게 취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냉랭한 표정이다.

    “나리, 이제 가시옵니까?”

    “…여기 있네. 이것 포함해서.”

    술병을 들어 흔들고는 행수의 가슴에 묵직한 돈주머니를 통째로 안겨 주었다. 속을 열어 확인한 행수가 방글방글 웃는다.

    “또 오십시오, 나리.”

    대꾸도 귀찮은지 도헌은 그대로 기생집을 나갔다.

    그가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한 행수가 혀를 짧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살인귀 아니랄까 봐, 표정 한번 살벌하네. 한데 무에 그리 화가 나 술상을 뒤엎었을까나?”

    그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다.

    ***

    술도 매일 먹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취기의 한계를 조금씩 견뎌낸다. 이상하게도 주량을 넘었건만, 걸으면 걸을수록 정신이 말짱해진다.

    도헌은 손에 든 술병을 거침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채 넘기지 못한 술이 입가를 타고 목으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하아, 먹어도 먹어도 취하질 않는군.”

    한데 분명 집으로 향한다고 생각했거늘….

    “내가 왜….”

    어느새 궁의 정문 앞임에 비척대고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던 도헌은 몸을 틀어 궁의 외곽으로 향했다. 서북쪽 중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반란이 일어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창을 든 채 앉아서 졸고 있는지 움직임이 없는 병사가 보인다.

    도헌은 허술하게 경비를 서는 병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저 궁 너머 어딘가를 바라봤다.

    ‘… 두화야.’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두화를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을 참느라 애꿎은 술병만 꽉 쥐어 잡았다.

    ‘젠장, 내일이라도 당장 변방으로 가야겠군.’

    접겠다고, 그 마음 내려놓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러다가는 정말 한순간 이성을 잃고 미친놈처럼 굴겠다 싶다.

    제 마음이건만,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터져 나온 한숨이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처량하게 몸을 돌리는데, 인기척이 들린다.

    도헌이 고개를 홱 돌렸다.

    어둠 속 궁 담을 타고 넘는 검은 형체, 그리고 앞서가는 복면인의 어깨에 둘린 자루.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던 도헌의 눈빛이 순간 또렷하게 빛났다.

    ‘잘 걸렸다, 이놈들! 그러잖아도 답답한 속을 어찌 풀어야 하나 싶었는데.’

    복면인들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가며, 외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취기가 올랐으나, 그렇다고 좀도둑 같은 놈들을 상대 못 할 자신이 아니다. 재빠르게 그들을 뒤쫓았다.

    복면인들은 궁과 다소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갔다.

    뛰었더니 취기 때문인지 심한 갈증이 몰려왔다.

    잠시 옆으로 샌 도헌은 개울가로 내려갔다. 머지않아 동지이기에 꽤 쌀쌀한 날씨인데도,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갔다. 볼이 어는 것만 같다.

    여태 가지고 뛰었던 술병에 물을 담아 벌컥 들이켰다. 뚝뚝 떨어지는 물을 손등으로 훑은 도헌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제야 술이 깨는군. 그럼, 어디 놈들이 궁에서 뭘 훔쳤는지 볼까?”

    좀 전과는 다른 빠른 몸놀림으로 복면인의 흔적을 추적하며 쫓았다.

    ***

    쿵!

    자루를 내려놓은 복면인이 숨을 헐떡거렸다.

    “그냥 죽이면 될 것을, 여기까지 끌고 오느라 힘들어 죽겠네.”

    “그래도 어쩌겠어. 호판 대감이 시키신 일인데.”

    “정말 더럽게 먹고 살기 어려워 죽겠네.”

    짜증과 한숨으로 불만을 토로하던 복면인이 자루의 입구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복면인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낮춰 앉아 두화를 바라봤다.

    “궁에 살아 그런 건지, 세자의 후궁이라 그런 건지 이년 살결 한번 뽀얀 거 봐라.”

    “내버려 둬. 듣자 하니 애까지 가졌던데.”

    혼절해 있는 두화의 턱을 잡은 복면인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빛냈다. 함께 있던 복면인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인의 명으로 험한 일을 하지만, 애 가진 여인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구. 그만둬. 그러다 천벌 받아, 이 사람아.”

    “쳇, 이 손에 죽은 사람이 얼만데. 천벌 받았을 거면 진즉에 받았지. 그리고 내가 뭘 어떻게 쳐다봤다고 그래!"

    “그래도!”

    “제길. 알았어, 알았다고!”

    “나, 잠시 소피 좀 보고 올 테니까 허튼짓하지 마.”

    “거참 알았대도.”

    다시 한번 다짐을 받고 복면인은 눈빛을 번뜩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밖으로 나온 복면인은 흐릿하니 보이는 달을 올려다보고는, 초가집을 뒤로 하고 근처를 돌았다.

    “하여간 색이나 밝히는 놈. 돌아가면 어른께 말씀을 드리든지 해야지 원.”

    혀를 찬 복면인은 다소 떨어진 곳에서 소피를 보려 바지 끈을 풀었다.

    한데 서늘한 것이 목덜미에 닿는다.

    “뭐, 뭐야 이건?”

    “뭐긴, 네놈 휘갈길 물건이지.”

    그대로 물이 든 술병을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를 맞은 복면인은 바지가 내려간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억, 뭐 하는 놈인데 나한테 이래?”

    “그건 알 거 없고, 네놈들이 궁에서 훔친 것이 무엇이냐?”

    “모, 모른다.”

    “몰라? 그럼, 뭐 이제부터 토설할 때까지 부디 잘 견뎌주길 바란다.”

    들고 있던 술병을 냅다 놈의 중심부를 향해 내려치려 하니, 복면인의 눈이 화들짝 놀라며 소피를 지리고 만다.

    “그, 그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 쫄면 쓰나?”

    히죽 웃는 그의 모습이 섬뜩하여 복면인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살려주시오.”

    “무얼 말이냐?”

    “그건….”

    망설이는 복면인의 태도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도헌이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매타작하기 시작했다.

    “으… 읍!”

    재빨리 복면인의 입에 부러진 나무토막을 물렸다.

    “이런, 비명을 지르면 안 되지 않겠느냐? 네 동료가 나오면 곤란하니 조용하거라.”

    도헌이 손을 들자 복면인은 고개를 절레거리며 울면서 중얼댔다.

    “토설할 테냐?”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복면인의 입에서 나무토막을 빼주었다.

    “호조판서 대감입니다.”

    “호판 대감 말이냐?”

    “예, 예 맞습니다.”

    반란군의 잔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간 큰 도적도 아니었다. 호조판서가 시켰다면 초가집으로 들어간 자루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궁에서 가져온 것은 무엇이냐?”

    “그건… 하아, 말할 테니 살려주십시오.”

    도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복면인은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세자의 후궁입니다. 저곳에 두고 감시하다가 일이 잘 처리되면 그때 죽이라고 했습니다.”

    “뭐라? 누굴 죽이라고?”

    “세자의 후궁이요.”

    순간 살기를 띤 도헌의 눈빛에 복면인은 움찔했다.

    복면인의 검을 들고 일어난 도헌이 천천히 검 자루에서 검을 빼 들었다.

    “사, 살려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랬는데 말이다. 네놈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느니라.”

    ‘감히 누굴! 배후가 호판 대감이라니!’

    으득 이가 갈린다.

    당장이라도 호조판서의 집에 쳐들어가 그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전, 시키는 대로 한 죄 밖에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나리!”

    “원망은 호판 대감에게 하여라.”

    살기 띤 눈빛과 함께 찰나, 빠르게 허공에서 사선으로 검이 내리그어졌다. 검 끝에서 핏물이 또르르 흐르고 나서야 복면인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고 말았다.

    초가집으로 향하는 도헌의 마음이 다급했다.

    ***

    묵직한 문 닫히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두화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옷고름에 닿은 손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언제 정신을 차린… 억!”

    순식간에 눈을 찔린 복면인이 뒤로 나자빠졌다.

    두화는 냉큼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부서진 창가로 어렴풋이 들이차는 달빛에 주위를 둘러봤다. 짚으로 얼기설기 엮인 낡은 집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허공으로 퍼졌다. 추위에 얇은 속곳 차림이라 몸이 으슬으슬하다.

    몸이 떨리지만, 당장은 눈앞에서 저를 죽일 듯 벼르고 있는 사내부터 해결해야 했다.

    ‘아까 저들이 날 납치하게 사주한 것이 호판이라고 했어.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가는 것이 먼저야.’

    검이라도 있다면 제 몸 하나 지키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을. 무방비한 자신과 달리 복면인은 이미 시퍼런 검을 뽑아 제게 겨냥하고 있다.

    “얌전히 있었으면 극락이라도 경험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을, 젠장 눈깔 아파 뒤지겠네.”

    욕지거리한 복면인이 눈을 부라리고 다가온다.

    “감히 누굴 해하려고 하는지 아는 것이냐? 지금이라도 보내준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하, 별 시답지 않은 소리 하고 자빠졌군. 네 눈엔 내가 머저리로 보이냐? 널 살려주면 당장 날 추포하려 들 텐데?”

    “아니다. 약조하마. 난 약조를 잘 지키는 사람이다.”

    “됐고, 그냥 죽어. 눈깔 아파서 그 짓 할 마음도 사라졌으니까.”

    복면인이 검을 치켜들고 덤벼든다.

    두화는 겨우 바닥을 굴러 반대쪽으로 피했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복면인에게 던졌다.

    “어휴, 그만하고 그냥 좀 죽어! 에이, 밖에 뭐 하는 거야? 이봐, 이년 깨어났어. 얼른 들어와.”

    소리쳐 동료를 불렀지만, 너무도 조용하다.

    “젠장, 똥이라도 싸나? 왜 안 와. 할 수 없네.”

    날아오는 작고 큰 물건을 피하며 두화에게 점점 다가갔다.

    두렵지만, 열심히 바닥을 더듬거리던 그때 부러진 막대기가 두화의 손에 잡혔다.

    안도의 숨을 내쉰 두화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맞설 자세를 취한 그 모습이 가소로웠던 복면인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이거, 뭐야?”

    본격적으로 막대기를 검처럼 휘두르기 시작한 두화에게 복면인은 꼼짝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왜? 당황했어?”

    복면인을 향해 막대기를 겨냥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 그런들 한낱 막대기가 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냐? 죽기 전에 재롱이라도 부리려고 안달이군.”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이내 두화는 복면인의 복부와 옆구리를 찌르고 쳤다.

    “윽!”

    “아프지? 당연히 아플 거야. 급소만 쳤으니까.”

    맞은 자리가 퍽 아팠는지 인상을 쓰며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이내 몸으로 달려든 복면인이 두화의 배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안돼!”

    다행히 손으로 막았지만, 두화는 사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복면인은 이내 두화의 목을 움켜쥐었다. 두화가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사내의 힘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죽어!”

    앞이 희미해진다.

    ‘저하….’

    그대로 정신을 놓을 찰나, 웬일인지 숨이 한꺼번에 몰아쉬어졌다. 겨우 눈을 뜨니 언제 저리로 날아간 것인지, 쓰러진 복면인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것이 보인다. 이어 복면인의 가슴이 날카로운 검 끝에 꿰뚫렸다.

    “헉!”

    놀란 두화가 찰나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검은 든 사내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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