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6)화 (86/96)
  • 86. 오매불망

    “…양원 마마를 뵙사옵니다.”

    ‘두화야.’

    자유분방한 의복 차림의 도헌이 조금은 핼쑥해진 모습으로 앞에 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워 한발 다가서는데, 도헌은 뒤로 한 발 물러선다. 전처럼 반기는 기색이 아닌 불편함을 얼굴에 드러낸다.

    어딘지 자신을 피하는 느낌에 두화도 머쓱한 표정으로 간단하게 예를 차렸다.

    “오랜만이네요, 장군님.”

    “예. 그날 이후 뵙지 못했으니까요.”

    아!

    삭일의 날이 되기 전, 궁에서 벗어나려고 그의 도움을 받기로 했었다. 하나, 계획이 틀어진 삭일의 날, 자한과 겨우 마음이 통하였거늘 청천벽력과도 같은 전쟁 소식에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

    ‘장군님 성정이라면 그날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을 텐데….’

    “혹, 그날 많이 기다리셨는지요?”

    “…글쎄요.”

    “죄송해요. 나가려고 했는데, 그날 하필 후궁 첩지를 받고, 웃전에 인사를 드리러 다니느라 경황이 없었어요.”

    갈 수도 있었지만, 사림이 찾으러 왔었다. 만약 그대로 나가려고 강행했더라면 저는 물론 장군까지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모를 일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자한은 무척 예민해진 상태라, 어쩌면 사림에게 발목 잡혀 동백궁으로 돌아가길 잘한 일이다.

    “개의치 마십시오. 이미… 지난 일이옵니다.”

    “예. 참, 전쟁에서 승리하셨다고 들었어요. 상한 곳 없이 무탈하신 거죠?”

    저를 염려하는 두화의 말투와 표정 하나, 하나가 제 허락 없이 눈에 모조리 새겨지고 있다.

    ‘빌어먹을….’

    나대는 심장 소리가 겉으로 드러날까 봐 도헌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그날 약조를 지키지 않아, 실망하신 거구나. 단단히 오해하셨으니 어쩌나….’

    하나, 이젠 궁을 나가고 싶지 않다. 그와 배 속의 아이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아, 우리 저하 보고 싶네. 빨리 가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를 생각하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그에게 향하는 제 마음은 도헌을 보니 오늘 더 확고해진다.

    만약 도헌을 따라 궁을 나갔다면, 전쟁 때문에 잠시 떨어져 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을 것이다.

    ‘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잠시 못 보는 것도 이리 힘든데 어휴.’

    당시엔 무슨 자신감으로 그를 위해 궁을 나가려 했는지 모르겠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예? 그게 무슨.”

    “웃고 계셔서….”

    “아, 제가 그랬나요?”

    머쓱해져 표정을 담담하게 바꾸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시옵니까?”

    “추국장에 가려고요.”

    “험한 곳을 어찌 가려 하시옵니까?”

    순간 서늘하게 바뀌는 그의 인상에 두화는 움찔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걱정 가득한 눈빛도 보았다.

    ‘어딘지 좀 더 차갑게 변하신 듯싶네.’

    자꾸 제게서 멀찍하니 서서 말하려 하는 그의 행동에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궁금해서요.”

    차마, 다른 사내 앞에서 저하가 보고 싶어서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가지 마십시오.”

    내면 깊숙한 곳에 숨긴 제 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가지 말아라. 그곳에 세자 저하가 있으니, 가지 말아라. 또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아라. 두화야.’

    낮게 떨어지는 그 목소리가 어딘지 쓸쓸하게 들렸다.

    두화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오늘은 가지 않을게요. 음, 하면 전 침소로 돌아가야겠어요.”

    가지 않을게요….

    가슴속을 뜨겁게 휘젓고 사라진 그 말이 못내 아쉽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눈과 마음이 이토록 괴로울 줄이야.

    그대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차라리 눈에서 먼저 차단하면 이 마음이 좀 덜 할까?

    “언제 괜찮으시면 그간 고생하시었는데, 저하와 함께 셋이서 차라도 하시지요.”

    “…세자 저하께서 허하시면 불러주시옵소서.”

    “예, 하면 살펴 가세요, 장군님.”

    눈에서 먼저 그녀의 흔적을 잠시 지우려 한들, 귓속을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내 가슴을 찌르르 아프게 한다.

    주변 인기척이 겨우 사라지고 나서야 도헌은 고개를 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허상인 듯 그녀는 어느새 사라졌다.

    좀 전까지 저만 바라보고 웃고, 말하던 그녀의 잔상이 작은 못 위에 남은 듯싶다. 멍하니 바라보던 도헌은 결국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젠장. 힘들구나.’

    ***

    결국 동백궁으로 돌아온 두화는 입술을 삐죽이며 괜히 중문만 바라봤다. 그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데 한숨만 나온다.

    “밤에는 오시겠지요. 하니, 한숨 그만 쉬시옵소서. 아기씨에게 좋지 못하십니다, 마마.”

    “맹지야?”

    “예?”

    “오늘도 안 오실 게야.”

    “어찌 확신하시옵니까?”

    “저 소리… 근자에 매일 듣는 저 소리가 길어질수록 못 오셨거든.”

    “아….”

    별걸 다 세세히 관찰하고 계셨네.

    맹지는 우울해하는 웃전의 기분을 어떻게 하면 풀어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마마, 제가 맛난 거 해드릴 터이니, 일단 따뜻한 물에 목욕이라도 하시면 어떠시옵니까?”

    “맹지 너도 알지?”

    “무엇을 말이옵니까?”

    “너, 음식 진짜 못 만드는 거.”

    다른 때와 달리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웃전 때문에 마음이 조금 상한다. 입술을 삐죽거린 맹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목욕은 해 볼까? 다른 건 필요 없고, 네가 제일 잘하는 차 한 잔만 타 줘.”

    “예. 하오나 음식 진짜 못 만드는 소인이 만든 차가 맛이 있을지 모르겠나이다.”

    금세 토라진 맹지의 공격에 그제야 정신을 조금 차린 두화다.

    “아, 미안. 내가 좀 예민했나 봐. 네가 만든 차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난 네가 타준 차만 마시잖아.”

    두화가 눈웃음을 보이자, 그제야 맹지는 기분이 풀어져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간다.

    그 모습에 두화는 자신을 질책했다.

    ‘아주 그냥 배부르고, 등 따시니 별짓을 다 하는구나 내가. 맹지가 무슨 잘못이라고, 저 애한테 그러니 그러길! 정신 좀 차리자.’

    볼을 가볍게 두들기고는 옷가지를 가지러 침소로 들어가려 하는데, 중문이 열리는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저하가 왔나 싶어, 기쁜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리는데….

    “양원 마마, 소인 대비궁의 한 상궁이옵니다.”

    “…아, 어쩐 일이신가?”

    내심 실망했다.

    당연히 제 이름을 부르며 저하가 들어올 줄 알았건만, 생각도 못 한 손님에 조금 당황하였다.

    “대비마마께서 그간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하시다며, 이것들을 보내셨나이다.”

    큼지막한 함과 비단을 든 궁인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와 내려놓았다.

    그사이 소란스러움에 부엌에서 맹지가 나왔다. 한 상궁이 훨씬 윗사람이기에, 냉큼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슬그머니 두화의 곁으로 다가온 맹지도 그들이 내려놓은 것을 눈으로 훑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소인도 잘 모르겠나이다. 그저 대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부디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면 좋겠다 하셨나이다.”

    “…!”

    어리둥절하면서도 난처한 표정의 두화를 본 한 상궁은 말을 덧붙였다.

    “평생을 뉘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으셨던 분이십니다. 이번 불미스러운 일로 많은 것을 깨달으시고는 살아온 인생이 허무하시다고 하셨나이다.”

    “…”

    “감히 소인이 한 말씀 드려도 될는지요?”

    “…말하게.”

    금세 눈물을 글썽이던 한 상궁은 울컥 치미는 것을 애써 참고 입을 열었다.

    “지난 시간은 흘려보내시고, 부디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대비마마와 함께하시면 아니 되겠나이까?”

    다 이해하지 못 할 말이지만, 분명한 것은 제게 화해를 청한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나 말이다. 아까 못에서 제 손을 잡고 이미 한번 사과를 하셨기에 이것은 생각도 못 했다.

    “지난 과거가 있기에 지금이 존재하는 것이네. 특히 지난 시간 상처를 받은 자라면 그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기는 쉽지 않지.”

    “…마마.”

    안타까운 듯 애절하게 부르는 한 상궁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하나, 난 이미 왕실의 사람이네. 또한 왕실의 어른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으니, 응당 잡아 드릴 것이네. 내 아이는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왕실의 후손으로 키우고 싶네.”

    ‘쉽게 용서하고 쉬이 잊지 못해도, 아이에게만큼은 왕실 어른의 모든 사랑을 받게 하고 싶네. 나 또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들이 무뎌지지 않겠는가?’

    그제야 한 상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갖추고 그들이 돌아가자 중문은 다시금 닫히었다.

    “마마, 대비마마께서 왜 이러실까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

    두화는 냉큼 맹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쉿.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텐데, 한 상궁이 들으면 어쩌려고 이래?”

    “읍, 으읍!”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며? 나보고 조심하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맹지가 눈웃음을 치며 손을 싹싹 빌어댄다.

    그제야 맹지를 밉지 않게 흘겨본 두화가 손을 뗐다.

    “죄송하옵니다. 갑자기 변하신 대비마마께서 이상하셔서… 한데 이것들은 다 뭘까요?”

    “난들 알겠느냐? 어른이 화해하자고 보내신 물건이니 일단 보자꾸나.”

    “예.”

    맹지는 그것들을 전부 방으로 옮기었다.

    “마마, 이건 최고급 비단이옵니다. 두툼한 것이 곧 추워지니 새로 지어 입으라고 보내신 듯하옵니다.”

    “그래?”

    함 뚜껑을 연 맹지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는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와. 이게 다 뭐야?”

    반짝반짝한 것이 세상 보석은 다 모여놓은 것 같았다. 금두꺼비에 금 거북이, 은으로 세공된 세련된 장신구 하며, 수십 개는 족히 넘는 패물까지 눈이 현란하다.

    두화는 개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보석을 집어 들었다.

    맑고 투명하여 보고 있으면 반대쪽이 훤히 보이는 신기한 보석이다.

    “마마, 그 보석은!”

    “이게 뭐야? 금도 은도 아닌 것이 참 예쁘다. 맑아. 한여름 개울가의 물 같아.”

    들어서 요리조리 속을 봐도 반대쪽 사물이 고스란히 보이니 신기하다.

    “유리라고 하는 굉장히 귀한 보석이옵니다.”

    “아, 그래?”

    “예. 대비마마께서 가지고 계신 거 전부 주신 모양이옵니다.”

    “…좀 부담스러운데.”

    혹 돌려드린다고 할까 싶어, 맹지가 먼저 함 뚜껑을 단단히 닫아 장 위에 올려두었다.

    “이젠 좀 받으셔도 되옵니다. 매번 뭘 받으실 적마다 다른 곳에 보내시지 마시고요. 마마께서도 패물 좀 모여두고 계셔야 하옵니다.”

    “다 있는데 뭘 더 모아.”

    “그래도 모으셔야 하옵니다. 웃전 탄신 때, 혹은 웃전의 기분을 살피러 가실 때 언제까지 음식만 가지고 가실 것이옵니까?”

    듣다 보니 그것도 그런 것 같다. 맹지의 말에 어느 정도 넘어간 두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맹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넌 네가 가질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아?”

    “좋지요. 우리 마마께서 점점 높게 그리고 모두에게 인정받으시니 얼마나 좋사옵니까?”

    “후궁이 높아서 뭐 하게?”

    “아휴. 경쟁하는 후궁이 없어서 망정이지. 소인은 너무 맑으신 마마 때문에 속이 늙사옵니다.”

    답답하여 제 가슴을 퍽퍽 치는 맹지를 웃으며 눈을 흘겼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차나 가져다줘. 난 목욕하고 올게.”

    “예.”

    ***

    아니 오실 줄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기다린다.

    목욕을 마치고 차도 마셨는데, 자한은 오지 않았다.

    괜히 답답한 마음에 두화는 잠도 오지 않아, 조용히 후원으로 나왔다.

    나오는 인기척에도 맹지가 반응하지 않는 걸 보니, 곤하였는지 자는 모양이다.

    여물지 못한 달의 한 모서리가 쓸쓸한 제 마음 같기도 하여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흰 속 저고리 위로 달빛이 유유히 내려앉는다.

    가만히 손 내밀어 잡히지 않는 빛을 느끼려 눈을 감았다. 서늘한 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밤공기 사이를 울렸다.

    청아하게 떨리는 나뭇잎 소리 사이로 인기척이 느껴진 두화가 물었다.

    “게 누구… 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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