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3)화 (83/96)
  • 83. 거리두기

    “세자빈의 악독한 짓거리에, 어디 상한 곳은 없느냐?”

    걱정 가득한 그 눈빛에 두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전마마께서 보살펴 주셔서 무탈할 수 있었어요.”

    “음.”

    굳어진 입매에 두화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하, 저하께서 중전마마와 거리를 두시는 것을 알아요. 하오나 제게 정을 한껏 주신 분이세요. 덕분에 세자빈의 간계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요.”

    “그럴 분이 아닌데, 이상하구나.”

    “성품이 급하셔서 그렇지, 정이 많고 따뜻한 분이에요.”

    “뭐, 그렇긴 하다만….”

    애먼 벽만 바라본다.

    “저하.”

    “응?”

    “저는 저하께서 중전마마와 불편함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쉽지 않다.”

    “언짢게만 생각 마시고, 좋은 날 잡아서 가볍게 차 한잔하시면서 대화를 하시면 어떨까요?”

    두화의 제안에 자한은 벌써 불편하기만 하다. 하지만, 중전이 무슨 꿍꿍이인지 한번 살펴볼 필요는 있었기에 알아보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중전마마도 날 불편해할 거다. 여태 우린 그리 지내왔으니까.”

    “그러셨구나… 흠.”

    실망한 듯한 그녀의 한숨 소리에 자한이 고개를 돌렸다.

    “어찌 한숨이야?”

    “그냥….”

    “어허, 또 그냥이란다.”

    “그렇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두 분이 서로 데면데면하신데, 중간에 낀 제가 어찌 편하겠어요? 벌써 앞날이 괜히 피곤해지는 기분이네요.”

    “뭐라?”

    “그렇다고 저하께서 먼저 중전마마께 손 내밀어주십사, 강요하는 건 결코 아니에요.”

    아니긴!

    딱 그리 말하며 강요하고 있으면서.

    자한의 눈썹이 언짢다는 듯 꿈틀댔다.

    그런 자한의 표정을 흉내 낸 두화가 웃으며, 삐딱해진 그의 눈썹을 손으로 가만히 만졌다.

    “인상 쓰지 마셔요. 잘난 얼굴 다 구겨집니다.”

    “이리 방자하지.”

    “해서 싫으셔요? 그래도 이젠 소용없거든요.”

    입꼬리를 늘린 두화가 그의 손을 잡아 제 배 위로 가져왔다.

    “…!”

    “저하와 저의 아이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돌아와 동백궁에 그녀가 없음에 흥분하여, 보고 싶은 조급한 마음 때문에 회임했다는 사실도 잠시 잊었다.

    두화가 자신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화가 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심장이 발딱거리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배 위로 옮겨진 손을 어찌해야 할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내가 이리 만지고 있으면 아프더냐?”

    “예?”

    “아니, 혹, 배를 누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풉, 웃음을 터뜨린 두화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일순 그의 얼굴이 딱딱한 석상이 된 듯 굳어버렸다.

    점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귓불까지 벌게진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하는 것이냐?”

    “아, 제가 함부로 입 맞추면 안 되는 거예요?”

    “…”

    “품계가 오르고 회임하면 이런 것도 하면 안 되고, 더 조신하게 행동해야 해요?”

    말간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묻는다.

    말투 하나하나, 이렇게 제 가슴을 녹인다.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그녀를 방자하게 군다고 하여 어찌 벌을 내릴까?

    자한은 두화의 배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밀착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둘이 있을 땐,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여라.”

    “예?”

    “흠. 그러니까 조금 전처럼 말이다.”

    “조금 전이라면….”

    “감히 내 입술에 박치기해도.”

    정말 멋없어.

    용기 내어 입맞춤했건만, 박치기가 웬 말이야!

    그의 말에 발끈하여 작게 소리쳤다.

    “그게 무슨... 박치기라니요?”

    “흠. 말이 그렇다는 게다.”

    “아… 그래요? 하면 이제부터 저하와 저의 거리는!”

    두화는 냉큼 그의 품에서 나와 벽 쪽으로 굴러가 떨어졌다.

    천천히 돌멩이 굴러가듯 굴러가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저리 엉뚱하지.’

    “이정도. 딱, 이정도 거리를 둬야겠사옵니다. 다신 제가 감히 저하의 입술에 박치기하지 못하게, 엄마야!”

    순간 두화는 데구루루 빠르게 옆으로 굴러온 그와 벽 사이에 온전히 갇혔다. 분명 아직 날이 환하거늘 그의 너른 품과 어깨에 가려 시야가 어두워졌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비켜 주시옵소서, 저하. 이제부터 거리를 둔다고 하지 않았는지요?”

    토라져 툴툴대면서도 부러 경어를 또박또박 썼다.

    화답 대신 입술에 입맞춤한 그가 장난스레 웃는다.

    “박치기라면서요?”

    “농이니라.”

    “그런 농, 재미없거든요!”

    “아직도 나와 거리를 둘 것이냐? 이제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아비가 안쓰럽지도 않으냐?”

    “…”

    그의 눈길을 피하자, 그가 끙 앓는 소리를 낸다.

    “왜요? 어디가 아프세요, 저하?”

    걱정이 되어 그를 훑어봤다.

    “음, 네가 봐주지 않으니 상처가 다 아프구나.”

    “…어디요? 여기?”

    조금 전에 봤던 팔뚝을 살살 잡아 물었다.

    “응. 그리고 옆에도….”

    “여기요?”

    두화가 그의 심장 부근을 살짝 만졌다.

    그를 염려하는 작은 얼굴이 점점 근심으로 가득 찼다.

    “그래, 긴장이 풀리니 다 아프구나.”

    “그럼, 어의라도 부를까요?”

    “되었다. 너만 이리 봐주면 참을 수 있느니라.”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로 그리 말하니, 두화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승천하기 시작한다.

    ‘뭐야. 적들은 안 물리치고 여인네 가슴만 녹이는 말만 배우셨나. 왜 이러시는 거야 대체.’

    “너야말로 얼굴에 열이 있는 것 같구나.”

    “그, 그야… 이리 붙어 있으니까 그렇죠.”

    “그럼, 떨어지랴?”

    떨어지려 행동하자, 두화는 그의 허리를 꼭 잡았다.

    “싫어요.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붙어 있을 거예요.”

    피식 웃은 자한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바쁘지만, 네가 정 그리 원하니 할 수 없구나. 오늘은 이러고 있자꾸나.”

    “…내일은요?”

    “음, 내일부터는 바쁠 것이다. 곧 추국이 열릴 것이야. 아바마마 곁에서 놈들의 궤변을 들어봐야지.”

    “…하면, 세자빈은 어찌 됩니까?”

    긴 손가락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유유히 움직인다.

    “아마도 죄질에 따라 극형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폐위당하겠지.”

    “…”

    “마음 쓰이느냐?”

    “전혀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요.”

    “신경 쓸 것 없다.”

    “…저하.”

    “응?”

    “세자빈도 처음부터 저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겠지요?”

    머릿속을 천천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두화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모르겠구나.”

    “그냥 좀 기분이 그래요. 만약 내가 세자빈이었다면 나도 저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에, 근래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쉿. 그런 말은 말아라. 철저히 가면으로 내면을 감추고, 위선적으로 살던 사람과 널 비교하지 말아라. 내가 다 기분이 언짢구나.”

    “그럼 전 어떤데요?”

    “글쎄다. 처음엔 무슨 저런 여인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여리여리한 외모와는 달리 괄괄한 입담과 발차기에 놀랐고!”

    “아, 그건!”

    처음 만남을 떠올리자, 두화는 부끄러움에 말을 더듬거렸다.

    “감히 이 나라 국본의 뺨을 때리는 간 큰 여인이라서 계속 생각이 났고!”

    그때를 떠올리며 자한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반면 듣고 있는 두화는 부끄러워 죽을 맛이다.

    그런 제 귓가에 그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감히 내 것을 몽땅 털어가는 그 배포에 반했느니라.”

    잘 달궈진 숯불에 던져진 고구마가 된 기분이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절굿공이 질 하 듯 쿵쿵 요동을 쳤다.

    -반했느니라.

    유독 그 말만 귓가에 맴도니, 심장이 쉬이 진정되질 않는다.

    “넌 감추려 하지도, 겉만 꾸미려 하지도 않지. 지금처럼 매사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솔직한, 그런 사람이니라.”

    “해서 품위가 떨어지는데도요?”

    “품위가 달리 품위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도를 넘지 않고, 평소 본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그 사람의 품위니라.”

    “…”

    가만히 저만 바라만 보는 그 표정에 자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마를 맞대었다.

    “바로 너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니라.”

    “과분한 칭찬이신데요.”

    “모두 널 칭찬하더구나.”

    “그야 저하가 하문하시니 아랫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리 답을 올렸겠지요.”

    “두화야?”

    다감한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예?”

    “앞으로도 지금 이 모습으로 있어 다오.”

    “나이 먹으면 주름지고, 얼굴에 검버섯 나는 건 순리인데, 어찌 같은 모습이겠어요?”

    ‘저도 알아요, 저하. 이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지금처럼 살게요. 하니, 저하도 변하시면 안 돼요.’

    자한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콧방울을 가볍게 톡 쳤다.

    “겉은 변할지언정 내면은 변치 말라 이 말이다. 언제까지고 너는 너로 있었으면 좋겠구나.”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손에 넣으면, 사람은 없던 욕심도 생겨 더 많은 것을 가지려 극성을 부린다. 결국 욕심이 화를 불러 그 끝이 불행할 것이다. 지금의 설변도와 세자빈처럼 말이다. 두화만은 그리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밖이 어두워졌을 때까지도 두 사람은 침소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침소 밖, 이제나저제나 윗전께서 부를까 기다리던 맹지만 속이 타들어 간다.

    “아휴, 우리 마마 뭐라도 드셔야 하는데….”

    오래간만에 재회를 하였으니, 내내 함께 있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회임한 웃전을 생각하면 세자에게 불만이 튀어나온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흠.”

    혹여 중얼대던 것을 누가 들었을까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냉큼 부엌으로 들어갔다.

    ***

    도헌은 가택까지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그립던 두화의 목소리 뒤로 세자의 웃음소리가 덧입혀져 제 귀를, 그리고 가슴을 짓밟는다.

    방안에 들어선 도헌은 치밀어 오르는 화와 욱신거리는 심장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서안을 내려쳤다. 단단한 서안의 중앙에 금이 가며 우지끈 소리를 냈다.

    “하아! 하하하!”

    반쯤 주저앉아, 서안을 내려친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그리 미친 듯이 웃던 도헌이 돌연 웃음을 뚝 멈추었다.

    “잊는다고 했으면서 왜!”

    절망에 가까운 한숨이 터져 나오고 나서야 도헌은 온전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고개를 숙인 채 중얼댔다.

    “왜… 난 널 잊지 못하는 게냐, 두화야?”

    격자무늬 창살로 석양의 마지막 빛이 길게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대로 뒤로 벌렁 누워 팔로 눈가를 가렸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도헌의 얼굴을 찰나 훑고 사라질 때, 반짝하는 것이 볼을 따라 흘러 바닥으로 떨어진다. 말간 눈물은 적막만이 가득한 침소 안에서 한참 동안 바닥을 적시었다.

    그토록 원하건만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이리 무서운지 몰랐다. 전쟁터에서 베이고 찔리는 고통보다도 지금, 심장을 옥죄는 이 고통이 훨씬 더 아프고 고통스러워 참기 힘들다.

    한동안은 등청하여 전쟁 후, 전후 처리에 관한 것들에 관해 정리하고 병사들을 살펴야 한다. 부러 보지 않는 이상 두화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궁이다. 저도 모르게 오늘처럼 두화를 찾을까 봐 그것이 문제다.

    “여봐라, 술상을 들여라.”

    맨정신으로는 고통을 참을 수 없던 도헌은 즐기지도 않는 술을 입에 댔다.

    다음 날 아침 깨질 것 같은 두통에 깨어난 도헌은 물 한 잔 마시고는 의복을 정제했다. 짙은 묵색 도포를 두르고, 은사로 엮은 끈목 띠를 묶는데 방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예를 갖추었다.

    영의정 백기세가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발에 채는 술병에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아들 방 같지 않게, 술병들이 지저분하게 바닥에 널려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늘 그렇듯 핼쑥해진 얼굴이나, 이번엔 뭔가 다른 모습에 염려가 되어 물었다.

    “너답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아니옵니다.”

    “그래? 한데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어찌 마셨느냐?”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마셨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그뿐인 게냐?”

    “예.”

    뭔가 아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있지만, 본인이 말하길 거부하니 더는 묻지 않는다.

    “한데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는 것이냐?”

    “등청하려 준비 중이었습니다.”

    백기세는 아들의 의복 차림을 훑어내렸다.

    “그 차림으로 말이냐?”

    “아, 당분간은 해야 할 것이 많기에 편한 복장으로 등청해도 된다고 대장군이 허락하였습니다.”

    “그래? 시급하지 않으면 반 식경쯤 뒤, 아비랑 함께 가자꾸나.”

    “…포로 건도 있고 바빠서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아버지.”

    “음, 알았다. 하면 저녁에 보자꾸나.”

    “예.”

    부친이 나가자 이내 무표정으로 바뀐 도헌은 갓끈을 동여맸다.

    말을 타고 궁으로 향하면서도 마음이 싱숭생숭하였다.

    ‘차라리 바로 변방으로 갈까?’

    몸이 멀어지면, 터질 것 같고 이 미칠 것 같은 마음이 좀 수그러들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낮은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어느새 도착한 도헌은 궁의 정문을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