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2)화 (82/96)
  • 82. 날이 아직 밝습니다.

    두화는 등 뒤로 자한의 온기를 느꼈다.

    분명 시전엔 오가는 사람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땅을 밟는 말발굽 소리만 들린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처럼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고장 난 것 같다.

    정말 돌아온 게 맞는지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어찌 그리 봐?”

    “그냥요.”

    “그래, 그냥 봐도 잘난 얼굴이지 내가?”

    그가 미소를 짓는다.

    두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요?”

    “내가 누구한테 맞거나 지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하는 말에 두화가 눈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어?”

    “그 표정은 믿지 못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풉.”

    웃음을 터뜨리는 두화의 모습에 자한은 말고삐를 잡아 한적한 길가에 멈춰 섰다.

    “뭐지?”

    “뭘요?”

    “어찌 웃는 게야?”

    “조금 전 하신 말씀이 그분이 한 말과 똑같아서요.”

    “뭐라? 누구?”

    미간을 좁히자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이런 표정 하나하나, 도도한 어투까지 역시 그가 맞다.

    자꾸만 얼굴을 보고 확인해도 여전히 돌아온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온기를 느끼며 여기까지 함께 말을 타고 왔지만, 이 순간마저 꿈일까 봐 두려웠다.

    ‘저하 맞네요. 이리 보고 있는데도 자꾸만 보고 싶습니다.’

    돌아오셨구나.

    이제야 안심이 된다.

    배시시 웃고 있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자, 자한의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

    “어찌 우는 게야?”

    “그냥요.”

    “어허, 무슨 말만 하면 그냥이라는구나.”

    “좋아서… 저하가 돌아오셔서 너무 좋아서 그런가 봐요.”

    그녀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저만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눈에 담자, 주위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자한은 고개를 내려 그녀의 얼굴에 닿으려 했다.

    붉은 입술에 가까워지는 찰나!

    “저하, 저하!”

    “어디 계시옵니까, 양원 마마?”

    맞닿아 있던 두 사람은 난데없이 들려오는, 애타게 자신들을 찾는 궁인의 소리에 놀라 몸을 바로 했다. 두화의 얼굴이 벌게졌다.

    “흠, 저리 눈치가 없구나.”

    “저리 찾는데, 예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놔둬. 조금만 유심히 보면 찾을 수 있는 것을 어찌 저리 방정을 떠는 건지. 흠.”

    “혹, 화나셨어요?”

    “아니니라.”

    아니라고 하기엔 선명하게 굳은 얼굴이 정확하게 화가 났다고 말해주고 있다.

    ‘혹, 입맞춤을 못 해 화나신 것일까?’

    빤히 올려다보자 자한이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내렸다.

    “어찌 그리 봐? 혹, 조금 전 못한 것을 마저 하길 원하는 게냐?”

    엉큼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예, 하니 어서 궁으로 돌아가요, 우리.”

    “…흠. 그, 그래?”

    두화가 이리 적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기에 자한은 일순 당황하였다. 사례가 걸렸는지, 잔기침하며 말머리를 돌려 대로로 나갔다.

    그제야 궁인과 호위무사들이 뛰어왔다.

    “서둘러 환궁하자.”

    “…예? 아… 예, 저하.”

    숨이 찬 궁인은 가마꾼을 향해 빨리빨리 움직이라 손짓했다.

    그사이 성질 급한 세자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

    도헌은 성라국 포로와 자국의 병사 그리고 무기의 상황을 적어, 대장군에게 보고하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제각각 무기를 정리하는 그 사이로 지나가자, 아군 병사들이 일제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되었다. 그간 고생들 했으니, 그것들만 정리하고 모두 쉬어라.”

    “예, 장군.”

    분명 궁 정문으로 향하고 있거늘, 어느새 몸은 동백궁 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멀리 동백궁을 지키는 익위사들을 보고 나서야, 도헌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로 숨었다.

    ‘… 미쳤군.’

    씁쓸한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보지만, 이내 나무를 짚어 동백궁을 응시한다.

    ‘그래도 한 번만… 한 번만 보고 싶구나.’

    멀리서라도 두화를 보고 싶어, 한참을 그리 서 있었다.

    발아래 그림자가 해의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옆으로 움직인다. 벌써 반 식경이 지났다.

    ‘하긴, 둘이 같이 있겠군.’

    뺨을 훑는 차가워진 바람처럼 마음 한구석이 휑하니 썰렁해진다. 두화를 보지 못한 아쉬움과 먹먹한 심정을 안고 몸을 돌이키는데,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린다.

    ‘뭐지?’

    가만 보니 가마 옆, 나란히 걷고 있는 자가 세자다.

    ‘…!’

    모퉁이를 돌아 조금 더 가까워지자, 도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마의 열린 작은 창으로 두화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넌 여전하구나, 두화야.’

    해사하게 웃는 두화의 곁에서 걸음을 맞춰 걷던 세자가 손짓하자, 가마가 멈추었다.

    혹 자신의 존재가 걸린 것인가 싶어, 도헌은 냉큼 몸을 더 움츠리며 숨겼다. 하나, 이내 몸을 숨긴 나무를 지나쳐 간다.

    “회임까지 했다면서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더냐?”

    “이정도는 걸어도 괜찮아요.”

    “침소까지 타고 가라니까, 말도 안 듣지.”

    “저하와 함께 걷고 싶은걸요.”

    배시시 웃는 해맑은 소리가 도헌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 나가고 싶다고 하질 않았더냐? 한데 어째서!’

    “흠. 정 그리도 소원하니 들어주는 게다.”

    “예? 그건 아니지요. 그냥, 저하와 걷고 싶은 것뿐이지, 이게 무슨 소원이랍니까?”

    “또, 또. 꼬박꼬박 따지고 드는구나.”

    “치이, 그리 억지 부리시니 혼자 가겠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세자의 웃음소리 끝에 두화의 웃는 소리가 아픈 가슴을 더 헤집는다. 제 가슴을 움켜쥔 도헌은 스륵 나무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빌어먹을, 날씨 한번 좋구나.’

    ***

    드디어 동백궁 안으로 들어온 자한은 두화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저하.”

    “내, 잠시만 이러고 있자.”

    가만히 그의 온기를 느꼈다.

    정말 돌아왔다.

    ‘신령님,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감사해요. 우리 저하 무탈하게 돌아오시게 해 주셔서….’

    두화는 뒤꼍의 토굴을 생각했다.

    “침소에 먼저 들어가 있거라. 난 잠시….”

    그의 시선이 뒤꼍을 향하고 있다.

    두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잠시만요, 저하.”

    부엌으로 간 두화가 한참을 나오지 않자, 자한이 그쪽으로 향했다. 문 너머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뭔가를 분주하게 만들고 있었다.

    “뭐 하는 게냐?”

    “잠시만요, 잠시면 돼요!”

    등지고 섰던 두화가 몸을 돌렸다.

    “…?”

    치마 앞자락에 손을 닦고는 배시시 웃으며, 준비한 작은 상을 들었다. 상 위엔 적은 가짓수지만 세 개의 전과 밥과 말간 국이 놓여 있다.

    “토굴에 가시려는 거지요?”

    “…그래. 살아 돌아왔으니, 어마마마께 인사라도 드리려고.”

    “같이 가요, 저하.”

    상을 들고나오는 두화의 손에서 상을 빼앗아 들었다.

    “주셔요, 제가 들어요.”

    “되었다. 회임도 하였으면서 이런 것을 어찌 들어?”

    그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검도 들었던 전데요.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내가 있을 땐 꽃조차 들지 말아라.”

    “예?”

    그의 어이없는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음식 식겠습니다. 얼른 가서 우리 인사드려요.”

    “그래.”

    뒤꼍 토굴 앞에 준비한 상을 놓았다.

    가만히 토굴만 바라보는 그를 보며 두화가 두 손 모아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중전마마, 저하께서 승리하시고 이렇게 무탈하게 돌아오셨어요. 굽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화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한은 입을 떼지 못했다.

    ‘어마마마, 소자 돌아왔나이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의 모습에, 혼자 두어야 할 것 같아 두화는 슬며시 그곳을 나와 침소에 들어갔다.

    두화가 가고 푸드덕 하늘로 날아가는 새소리에 자한은 결국 목에 메어 울음을 터뜨렸다. 입을 손으로 막은들 흐르는 눈물과 새어 나오는 북받친 감정은 막을 수 없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 돌아와 안도하여 눈물이 나는 것일까?

    그래서 더, 한번 본 적 없는 모친이 그리워 이토록 가슴이 북받치는 걸까?

    모친을 모신 능으로 가야 하는 것이 맞는데, 왜 이곳이 먼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출병하기 전 이곳에서 비록 꿈속이지만 모친을 봐서 그랬을까?

    “어마마마, 이제 걱정 마시옵소서. 소자, 무사히 돌아왔고, 앞으로도 국본으로 어마마마의 아들로 열심히 살겠사옵니다.”

    이날 이때까지 타인으로부터 약해 보일까 봐, 눈물은커녕 웃음조차 잃고 살았는데, 오늘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아낸 것 같다.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토굴을 바라보는 자한의 입가엔 어느새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

    문 앞을 서성이기를 한참, 두화는 문고리를 잡았다.

    ‘저하는 지금 승하하신 중전마마가 그리우신 거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나도 그랬잖아. 늘 어머니 기일만 되면….’

    문득 모친이 그리운 두화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문고리를 잡은 손이 스륵 풀리고 만다.

    ‘괜찮아. 어머니 얼굴은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날 많이 생각하셨다고 했어. 아버지가 그러셨다고 그랬으니까… 나도 어머니 보고 싶다.’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훌쩍 코를 들이마시며 몸을 돌리는데, 문이 열렸다.

    고개를 홱 돌이킨 두화가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단단한 품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저… 저하!”

    “…어머니를 뵙고 온 기분이야.”

    “…”

    “웃기지 않더냐? 어머니를 뵈려면 능으로 가야 하는 건 당연한데, 난 왜 이곳으로 왔을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 우셨어요, 저하?’

    두화는 가만히 그의 등을 감싸 안아 주었다. 그가 어떤 마음일까 감히 짐작은 하지 못하지만, 가슴이 뭉클한 것이 자꾸만 눈가가 촉촉해진다.

    “고맙다, 두화야.”

    “뭐가 고맙다고 그러세요?”

    “네가 이곳에 있어 줘서.”

    “…”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저하.”

    “아이를 품고도 무탈해서… 고맙다.”

    결국 그의 마지막 말에 두화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내 참고 있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터져 버렸다.

    “저하도 무탈하게 돌아오셔서 감사해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저를 바라보는 물기 젖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말로는 표현 못 할 이상한 기분을 저뿐만 아니라, 그도 느끼고 있나 보다.

    순간 입술 위로 빠르게 닿았다가 떼어지는 따뜻한 감촉에 두화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저하, 아직 날이 밝은데….”

    “쉿. 가만 있거라. 온전히 우리 두 사람뿐이니, 이리 해도 괜찮다.”

    “하지만.”

    순간 제 얼굴을 잡은 그가 인상을 무섭게 찡그리며 얼굴을 내렸다.

    “이제 하지만이란 없느니. 아니 됩니다도 불허한다.”

    “예?”

    “보고 싶고, 이리 안고 싶어서 매일 힘들었다. 네가 준 정표를 보며 꼭 살아 돌아와 널 봐야 하니까, 매 순간 아비규환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쳤느니라.”

    “저하….”

    제 얼굴을 잡은 커다란 손을 가만히 잡았다.

    “몇 번을 말해도 같은 말이지만,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느니라.”

    “저도 보고 싶었어요.”

    울먹이며 입술을 옆으로 늘리는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던 시간만큼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얼마 후 의복을 걸치던 자한의 팔을 보던 두화의 눈이 커다래졌다. 팔뚝을 가로지르는 긴 상처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심각한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았다.

    “상처잖아요!”

    “괜찮다.”

    “…저는 괜찮지 않거든요. 얼마나 아팠어요? 지금도 아프지요?”

    방울져 흐르는 눈물을 쓸어주며, 그대로 두화를 안아주었다.

    “정말 괜찮다. 네 눈에 눈물이 나는 것이 더 아프구나. 하니, 울지 마라, 두화야.”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것이 무에 있어?”

    “저하는 목숨을 걸고 싸우시는 동안 저는 평안하게 지냈으니까… 그게 미안하고, 죄송해서….”

    “내가 없는 동안 너 또한 힘들게 보낸 것을 안다. 하니, 그런 말은 말아라.”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두화의 머리카락을 다감한 손길로 쓸어주었다.

    “저하, 지난밤 반란이 일어났었어요.”

    “그래, 들었느니라.”

    “하면, 세자빈의 소식도….”

    “안다. 네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지?”

    두화는 가만히 그의 눈만 바라봤다.

    겪었던 모든 일을 말한들 지난 일이고, 어차피 세자빈은 옥에 갇혀 있다.

    그거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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