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장인, 절 받으십시오!
막돌이 삼촌이 봤다면 무탈하게 돌아오신 거다.
한순간 기운이 탁 풀린 듯, 두화는 잡고 있던 부친의 옷자락을 맥없이 놓고 말았다.
“응. 내가 봤다.”
“참말? 참말이지요?”
“봤다니까, 그러네.”
일랑은 여식의 멍한 모습에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돌아오셨어, 드디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그토록 기다리던 저하가 돌아왔다.
“그래, 그러니 어서 궁으로 돌아가 너도.”
부친의 말에 이내 정신을 차린 두화는 다시금 부친의 옷자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나, 순간 바뀐 여식의 눈빛에 당황한 일랑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네 서방 왔다잖아, 빨리 가라니까 그러네.”
“싫어요. 아직 아버지하고 담판 못 지었거든요!”
“어허, 고집하고는.”
“예, 그 고집 아버지랑 똑같잖아요. 안 그래요, 막돌 삼촌?”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막돌이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일랑이 죽일 듯 막돌이를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려 하는 여식이 쫓아오자, 일랑은 여식을 피해 난데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이구, 내가 이 나이에 저것이랑 뭐 하는 것인지.’
“아버지, 잠깐만… 거기 서시라고요!”
“너 같으면, 서겠느냐? 귀찮으니까 빨리 가라고 제발!”
“싫다니까요, 저도!”
“에잇!”
일랑은 언덕을 올라갔다.
하나, 눈앞에 선 사내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때마침 뒤쫓아오던 두화가 일랑의 허리를 잡고 부친의 등에 얼굴을 박으며 소리쳤다.
“잡았다, 이제 연 끊겠다는 말씀 취소할 때까지 이 손 안 놓을 거여요.”
하지만 부친은 잠시 말없이 정면만 보고 있다가, 점잖게 목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저하.”
저하라고!
두화는 부친의 등에서 얼굴을 뗐다.
당장이라도 세자의 품에 안겨서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살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꼼짝을 못하겠다. 그저 심장만 요란스레 뛴다.
그런 여식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일랑은 제 등에서 여식의 얼굴이 멀어지자, 천천히 허리에 감겨있던 여식의 손을 풀어주며 손등을 다독였다.
‘지금은 이 아비보다도 저하를 먼저 봐야지 않겠느냐?’
다독이던 여식의 손을 놓으며, 한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제야 두화의 두 눈 가득 그의 모습이 온전히 들어온다.
금세 눈물이 한가득 고인다.
“흡!”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막으려 두 손으로 입을 가려도, 그동안 억눌러왔던 그리움과 힘들었던 시간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결국 서럽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금세 다시 차오른 눈물 때문에 일렁대던 그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진다.
꿈이 아니다.
정말 그가 돌아왔다.
“두화야.”
두 팔 벌려 다가온 그의 품에 단번에 안겼다.
“저하!”
자한이 두화를 품에 안자 주위에 있던 가마꾼과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일랑도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렸다.
품에 안긴 두화의 심장 울림이 느껴지자, 자한은 그제야 제가 전쟁터에서 살아왔음을 느꼈다.
“이제야 살 것 같구나.”
“저하.”
여전히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저를 보게 했다.
“보고 싶었느니라.”
“저도 그랬어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네가 그리워서 못 견디겠더구나.”
“예, 저도 저하가 그리웠어요.”
작은 이마에 이마를 맞댄 자한이 피식 웃었다.
“지아비 말을 잘도 따라 하는구나.”
“아닌데, 다 제가 먼저 하고픈 말이었거든요!”
“그러하냐?”
“으응, 참말… 저하가 보고 싶어서….”
고개를 주억대며 또 울음이 터진 그녀를 그대로 안았다.
“그래, 잘 버텨 주어 고맙다.”
“저하.”
두 사람의 절절 끓는 해후에, 등 돌리고 있던 주변인들은 모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특히 일랑은 남사스러운 대화에 괜히 자신의 얼굴이 벌게져 손부채질로 열을 식혔다.
“흠, 흠.”
듣다 못 한 일랑이 결국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두 사람이 떨어졌다.
자한은 머쓱한 미소를 짓고는 일랑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오는 세자를 보고 일랑은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그러자 그 순간 자한이 몸을 낮추고 절을 올렸다.
“어, 왜… 왜 이러시옵니까, 저하!”
갑작스러운 세자의 행동에 놀라고 당황하여, 감히 세자의 존체에 손을 대며 일으키려 했다.
“아직 두 번의 절을 더 받으셔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왜 제가 저하의 절을 받습니까?”
이젠 누가 볼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대던 일랑은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하여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위로서 장인에게 절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 아니 그건.”
“또한 성라국을 물리치는 데 있어 개방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하, 그것은 당연히….”
“하옵고, 반란군을 제압하여,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그리고 제 여인을 구하셨습니다.”
“…!”
마지막 세자의 말에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전날의 혼란스럽기만 하던 그 상황에 없었으니 제게 이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왕을 죽였더라면, 지금 절을 올리는 게 아니라 칼을 겨누었을 것을.
“사위로서, 화월국 국본으로 장인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를 구하셨습니다, 장인께서는.”
“…하아. 제가 두화의 아비라는 것은 어찌 아신겝니까?”
“그때 술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듣던 장인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눈치를 챘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예.”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두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흐른다.
‘뭐야, 아버지랑 저하랑 언제 저리 친해졌대.’
“누추한 곳에서 이러지 마시고, 두화 데리고 그만 가시옵소서. 저하께서 오래 계실 곳이 못 되옵니다.”
“하면 이른 시일 안에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오지 마십시오.”
“아니, 왜….”
부친의 말에 서운한 두화가 씩씩대며 걸어와 부친의 허리에 도로 매달렸다. 세자 때문에 잠시 두화에 대한 경계를 잊었던 일랑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또 시작인 게냐?”
“아직 안 끝났잖아요.”
“저하 앞에서 이러고 싶으냐?”
“몰라요, 몰라. 오늘 일 때문에 저 쫓겨나면 전부 아버지 때문이지 뭐.”
“뭐야?”
“그러니까 빨리 아까 그 말씀 취소해요. 그럼 손 놓을게요.”
아이고, 두야!
일랑은 고개를 절레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자한은 나중에 묻기로 생각하고, 부녀를 지켜봤다.
“고집만 세서는!”
“아버지 닮아서 그렇죠, 뭐.”
“하여간… 알았으니까 그만 가.”
“뭘 알았대 자꾸. 그래 놓고, 또 딴말하려고 그러죠?”
“아니래도 그러네. 네 아비 여기 있다. 됐지, 그럼.”
슬쩍 손을 푼 두화가 부친을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하면 너도 나중에 이 아비 원망하지 말아라. 아비 때문에 궁에서 쫓겨났느니, 어쨌느니 하기만 해 봐 아주. 그땐, 정말 연 끊어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숨어버릴 테니까.”
부친의 말에 두화는 활짝 웃으며 그 목에 매달려 안겼다.
“진작 이러시지. 아버지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했잖아요. 내 아버지인데… 연 끊으면 누가 아버지라고 불러드려. 혈육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양반이….”
“철딱서니 없기는. 저하도 계시거늘, 아비를 이리 끌어안고 싶으냐?”
“뭐, 딴 사내도 아니고, 아버지인데 어때요?”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 좀 떨어지고….”
히죽 웃은 두화가 목에서 팔을 풀려다가 맹지에게 들은 것을 작게 말하였다.
“아버지, 전하께서 우리 가문을 복권해주신다고 하셨대요.”
아무런 반응이 없어 고개를 든 두화는 담담해 보이는 부친의 표정에 팔을 풀었다.
“아버지….”
“그만 돌아가거라.”
조금은 기뻐하실 줄 알았다. 한데 부친의 목소리엔 기쁨보다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두화가 일랑의 팔을 붙잡으려 하자, 자한이 다가와 두화를 만류했다.
“장인어른, 조만간 제대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하,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한 소인이 뭐라고 예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하시옵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장인어른. 우리가 어디 보통 사이입니까?”
“예?”
뭐 얼마나 더 봤다고 보통 사이가 아니래.
일랑의 미간이 슬쩍 꿈틀댔다.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함께한 사이입니다. 더구나 술까지 나눠 마신 사이가 아닙니까? 하니, 부디 다음번에 찾아봬도 내치지 마시고 이 사위에게 술 한 잔 내어주십시오.”
“…”
“오늘은 서운하셔도 두화 좀 양보해 주십시오. 하도 보고 싶어서 눈이 진물 날 정도라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넉살 좋게 웃으며 두화의 손을 잡는다.
“허, 참.”
여식의 손을 잡은 세자를 보니, 기분이 참으로 오묘하다.
가문을 풍비박산 내고, 죽이려 했던 시절이 무색하게 이젠 신원을 복권해준다는 왕이나, 제가 거지임을 알면서도 익살스럽게 구는 세자나 부자가 아주 쌍으로 제 속을 긁는다.
‘전하도 그렇지만, 아드님이신 저하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려.’
“하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장인어른.”
자한이 두화를 말 위에 앉히자, 따라온 중궁전 궁인이 울상이 되어 만류하였다.
“저하, 마마께서는 가마를 타고 가셔야 하옵니다.”
미간을 찌푸린 자한이 방금 말한 궁인을 향해 몸을 돌이켰다.
“뭐라?”
“저하, 중전마마께서 회임하신 마마를 극진히 모시고 갔다 오라 명하셨나이다.”
“중전마마께서 그리 명하셨다고?”
“예. 전날 반란군 때문에 놀라셨을까 염려되신다며, 조금이라도 몸에 해가 가지 않도록 꼭 가마로 움직이라고 신신당부하셨나이다.”
자한은 가만히 가마 뒤쪽으로 호위무사와 궁인 몇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시옵니까, 중전마마.’
평생 소름이라고는 돋지도 않던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중전이 이상하다.
세자빈보다도 두화를 더 챙겼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이렇게 신경 써 사람을 보내준 것도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는다.
‘음. 뭔지 몰라도 한번은 찾아뵈어야겠구나. 무슨 꿍꿍이십니까, 마마.’
“저, 저하?”
말 위에서 두화가 조심스레 불렀다.
“으응?”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 맞겠어요. 괜히 중전마마께 염려를 안겨드리면….”
“혹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픈 것은 아니지?”
“그럼요, 제가 또 몸은 건강하잖아요.”
“그럼, 되었다.”
그대로 훌쩍 말 위로 뛰어올라 두화의 뒤에 앉아 말고삐를 잡았다. 한 번에 올라타는 멋들어진 모습에 궁인들은 넋이 나갔다.
“양원은 나와 함께 갈 것이니, 너희는 천천히 뒤따라오거라.”
“저, 저하! 이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만류하던 궁인은 울상이 되어 쫓으려 하지만, 네발 달린 짐승은 먼지만 남긴 채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이고, 어쩌나.”
“어쩌긴 뭘 어찌합니까? 얼른 쫓아가십시오. 그래야 궁에 들어가 가마에 옮겨 타시지 않습니까?”
성무의 말에 궁인의 눈빛이 반짝했다.
“그래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인 궁인은 가마꾼과 호위무사들에게 어서 서두르라 소리쳤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랑이 피식 웃는다.
“어찌 웃는 게야?”
“성무야, 우리 저하께서 참 많이 변하신 것 같지 않아?”
“뭔 소리야?”
“그렇잖아. 동백궁 마마가 안 계셨을 땐 얼음처럼 차갑게 늘 이렇게 인상 쓰고, 목소리 쫙 까셨잖아.”
눈가에 손을 대고 눈을 치켜올리는 시늉을 하자, 가만히 보던 성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많이 부드러워지시긴 했지.”
“근데 말이야. 우리 저하 체력도 좋으시지!”
“그건 또 뭔 소리야?”
성무는 슬슬 짜증이 났다.
랑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앞, 뒤 중요한 말은 빼놓고, 저 편한 대로만 이야기한다.
“좀 전에 전쟁터에서 돌아오신 거잖아.”
“근데 그게 왜?”
“많이 곤하실 텐데도 저리 기운이 넘치시니, 사내로서 부럽다.”
그러자 해랑이 랑의 뒤통수를 퍽하고 내리쳤다.
“부럽긴 뭐가 부러워! 마마를 호위하라는 녀석들이 이러고 있으면 돼? 허튼소리 그만하고, 얼른 뒤따르기나 해.”
“예, 대장.”
대답하면서도 랑은 먼지를 날리며 먼저 출발한 좌익위를 노려봤다. 맞은 뒤통수가 퍽 아파서 툴툴거림이 멈추지 않는다.